변두리생활

봄꽃들의 하품 소리

변두리1 2019. 3. 18. 19:19

봄꽃들의 하품 소리

 

  한동안 한두 송이 꽃 사진이 올라오다가 무리 지어 핀 모습이 여기저기서 들어오더니 며칠 전부터는 아예 한 마을에 꽃 사태가 난 것 같은 광경이 올라온다. 손 전화 속 흐드러진 꽃의 유혹에 내 사는 곳 꽃들은 어떤지 찾아 나섰다. 가경 천 둑에도 차이가 커서 완연한 봄인 곳이 있는가 하면 겨울의 잔류병들이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곳도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학교 담 아래를 지나다 좁쌀 크기 흰 꽃을 달고 있는 한 포기 풀을 보았다. 허리를 굽혀 살펴보니 작고 흰 꽃들이 주변에 조로록 피어있다. 멀고 먼 남녘부터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온 꽃의 정령이 힘이 다해 이들에게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듯하다. 드문드문 산책하는 이들은 겨울의 매서운 손길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따사로운 바람과 햇살을 만나려 한다. 기특한 그 꽃 이름을 알 수가 없다. 땅에 붙은 줄기는 눈에 익숙한데 꽃은 낯설기만 하다. 별꽃 같기도 하고 냉이를 닮은 듯도 하다. 작고 연약한 모습으로 쌀쌀한 바람을 맞고 온 몸의 힘을 다해 꽃봉오리를 터뜨렸건만 쓸쓸할 뿐이다. 주변의 친구들과 때를 같이하지 않고 먼저 피어난 아픔인지 모른다. 한 주만 더 지나면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어설픈 내가 힘겹지, 해마다 겪는 그 꽃들은 주변의 반응에 익숙할 것도 같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와 몇 안 되는 이들의 놀라는 모습이 이 꽃들의 즐거움이려나. 개나리 진달래가 산과 들을 수놓을 때에는 이들은 자리를 거두며 선구자 같은 스스로의 역할에 만족할 수도 있겠다. 여러 생각이 인간의 어설픈 우려일 뿐, 정작 그들은 모든 것을 초월했지 않을까. 사는 곳 어디든 겨울을 뚫고 달려와 지난해의 추억이 남은 누런 풀들 가운데 눈에 띌 듯 말 듯 푸른 점 되어 하늘 향해 하얀 풀꽃 한 송이 피우고 큰 일 하나 했다고 만족해 할 것만 같다. 지난해 떨어진 낙엽 다소곳이 옆에 자리하고 겨우 눈 닿는 곳에 조급한 풀들이 추위에 퍼렇다. 홀로 봄을 알리는 자부심으로 약한 향기 살랑바람에 날려 보내며 꽃술을 으쓱하는 듯하다. 허리를 펴고 흰 꽃들에게 잘 있으라는 눈인사를 건넨다. 이내 자세를 바로하곤 아쉬움을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흔든다.

  냇가를 따라 시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발밑을 살핀다. 며칠 전 큰개불알풀이라는 이름과 달리 작고 연약한 모습으로 두세 송이 꽃이 외롭게 피어난 걸 보았다. 오늘은 더 많은 친구들과 청초하고 파란 모습으로 무리지어 피어나 산책하는 이들 걸음을 멈추게 하려나. 어떤 이들은 그저 씩씩하게 자신들의 길을 가고, 다른 이들은 느적느적 다가오는 봄을 몸으로 맞이할 뿐이다. 의기소침한 그들 앞에 선다. 포장된 둑길과 개울로 향한 경사면 사이에 듬성듬성 쌀알만 한 꽃들이 내 눈에 들어온다. 파란색을 따라가다 보니 꽤나 많은 별모양의 꽃들이 웃는 듯 나를 보고 있다.

  기특하고 고맙다. 하루라도 일찍 내 앞에 나타나 봄이 뒤따라온다고 알려주려는 마음을 안다. 방송화면과 손 전화 속 꽃들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마주하는 여리고 작은 꽃들은 감격을 준다. 화원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꽃들이 아니라 냇가와 노변에서 만나는 이들이라서 더욱 푸근하고 친숙하다. 서둘러 오느라 화려하게 치장까지는 못한 듯하다. 한발이라도먼저가 급했을 게다. 꽃의 정령은 숨이 넘어가도록 달려와 둑길에 자리 잡고 봄을 풀어놓아도, 마음 쓸 일이 무에 그리 많은지 지나는 이들은 무덤덤할 뿐이다. 그래도 자신을 찾아준 꽃들이 고마워 날나다 목청을 돋우는 냇물소리가 반갑고 위안이 되리라. 올 들어 유난히 늘어난 얼굴 가린 산책객들로 눈에 익은 반가운 이들 몰라보지는 않으려나. 꽃들의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다. 먼 길을 달려온 채로, 보아주는 이 적은 길가에서 무거운 꽃잎 떠받치는 일이 쉽지 않은 듯, 아직 한 낮인데 고개 숙인 꽃들이 적지 않다.

  눈에 들어오지 않던 여린 꽃들이 점점이 자리하고 있다. 내 발에 밟히지 않는지 조심스럽다. 망설임 끝에 쪼그려 앉으니 꽃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자신들이 피어난 날들을 앞 다퉈 재잘대며 눈에 띄게 줄어든 지나는 이들의 무관심에 서운해 하는 듯하다. 남쪽에서 겨울을 뚫고 달려온 봄꽃의 정령들이 우리 형편을 알 수는 없었을 게다.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어깨 움츠러들고 힘 빠지고 한숨 새나오는 일들이 여럿이었음을 이제 와서 말해 무엇 하랴.

  어느 해나 눈 내린 칙칙하고 희부연 겨울을 지나, 꽃피고 새들 지저귀는 봄을 맞으며 가슴 속 깊이 상쾌한 바람 들이 쉬며 새 힘을 얻었지. 노란 개나리 분홍 진달래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면 또 한 번 신나는 날들이 올 걸 기대했었네. 마음 급한 이들은 흐릿한 하늘아래 봄 찾으러 개울둑 산 속을 헤매고, 그들처럼 성미 급한 풀꽃 한두 송이 만나면 찾아온 봄을 확인하고 안도했었지. 봄은 성격 급한 사람들을 만나려 먼 길을 달려왔네. 먼저 온 꽃들은 길어져 가는 봄날 따사로운 햇살을 이기지 못해 바람 탓인 양 꽃잎들을 숙이고 졸고 있었지. 채 풀지 못한 피곤에 꽃잎 조금 가리고 하품하는 소리가 집으로 돌아오는 내 귀에 끊일 듯 여리게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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