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Sal
소윤경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책의 속지에 한 여인이 음식점 광고를 보고 있다. 그 여인이 딸을 자가용에 태우고 거대한 레스토랑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레스토랑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체인점 같은 일상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규모가 크고 이용객이 많고 종사자도 많다. 품질과 맛이 좋은 음식이 나오리라. 딸이 화장실에 갔다가 어떻게 해서인지 그 식당의 조리를 위해 설비된 공간에 들어가게 된다.
거대한 설비와 시스템이 작동하는 요리를 위한 식재료 보관창고가 있다. 철저한 보안과 관리 시스템으로 완벽하게 보관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상상할 수 있는 또는 상상을 넘어서는 많은 동물들이 갇혀있다. 우리가 식용으로 하는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다양하다. 거북이 개 고양이 개구리 원숭이 쥐 종류를 알 수 없는 새들까지 마치 동물원을 연상케 하는 많은 살아있는 생명들이 자신들의 운명도 모른 채 좁은 공간에 갇혀있다.
그들은 고객들의 취향과 주문에 맞추어 선택되어져서 ‘침착한 순발력과 방심할 수 없는 전쟁 같은 순간과 조리사들의 악기를 조율하듯 섬세하고 완벽한’과정을 거칠 것이다. 조리사들은 그 일들을 능숙한 솜씨로 예술로 승화시키고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위해 오랜 세월 힘겨운 과정을 겪은 후에야 자격을 얻는다. 한 쪽은 생의 에너지를 얻고 식도락을 만족시키고 다른 한 쪽은 그 일을 위해 공포 속에 생명을 잃는다. 그들에게 맞는 삶의 공간에서 생명이 다하도록 희노애락을 겪다가 순리대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생명들이 인간에 의해 포획되고 갇혀 있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인간들의 먹이가 되어간다. 그것이 동물들의 운명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그 복잡한 과정을 거친 후에 접시위에 소녀마저 얹혀있다. 소녀 둘레에는 숱한 동물들이 죽어있다. “본 아뻬띠!…”포크와 나이프가 놓인 빈 접시 그림과 함께 “당신과 나 모두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라는 마지막 문구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맛있게 드세요 라는 혹은 맛있게 드셨지요 같은 인사말이 이중적이다. 동물들의 사연과 조리과정을 모르니 별다른 거리낌이나 거부감 없이 그런 음식들을 맛있게 즐겨 먹는다. 현대화와 함께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식생활이 달라졌다. 자가용의 증가와 함께 외식이 늘고 그 횟수와 종류가 다양해졌다. 집에서도 주문과 배달로 치킨 종류들을 아주 쉽게 대할 수 있다. 한 세대 전만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잔치 날이나, 사위 같은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벌어질 만한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집에서 기르던 한 가족 같은 짐승들을 잡는 것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게다. 또한 그 조리과정은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그야말로 큰마음을 먹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대 행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차를 타고 가족이 휭하니 식당을 찾아 주문만 하면 곧바로 먹을 수 있고 집에서도 전화만 하면 십 분이 멀다하고 먹기에 편하게 준비하여 가져다준다. 정이 없고 그 과정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 쓸 일이 없다는 거다.
책의 제목 “레스토랑 Sal”의 살(Sal)이 무엇일까? 표지와 속지에 식탁위에 종모양의 큰 물건이 놓여있고 그 표면에 흐릿하게 구원의 고통[PAIN OF SALVATION] 이란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그 썰베이션의 첫 부분일지 모르고 또는 그 음식을 먹고 우리가 살고, 뼈를 덮는 살이 이루어지니 우리의 고유어 ‘살[肉]’인지도 모르겠다. 글쓴이는 뭔가 제목을 통해 강조하려는 의미가 있을 텐데, 너무 어렵게, 수수께끼처럼 지나가는 것 같다.
저자는 익숙하겠지만 독자들에게는 낯선 것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책을 몇 번 가볍게 읽으면서 당황스러웠다. 이야기와 그림을 통하여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마치 작가 혼자 웅얼웅얼하는 듯한 불친절을 느꼈다고 할까, ‘어렵지 않으니 열심히 찾고 생각해봐’같은 약간의 숙제를 받은 듯했다. 글쓴이는 독자들이 이 책을 몇 번을 읽기를 원했던 것인가. 더구나 주 독자층이 어린이라고 하면 간단한 문제가 아닌듯하다.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런 이야기, 그런 의도였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독자들에게 전문가가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많은 독자들이 어쩌면 한 번 읽고 책을 밀어놓거나 다른 일을 할지도 모른다. 분야에 따라 책들이 어려워지고 있다. 관심이 많은 이들이야 지속적으로 보고 듣고 대하겠지만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둔다면 본래의 의미, 주제전달에 좀 더 친절할 수 없을까를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 목표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 독자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마음과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게 있을 터인데, 내가 몇 번을 읽고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면, 내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작가도 목표를 이루지 못한데 대해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다. 그것은 그의 책을 선택해 읽은 독자에게 미안할 일이 아닐까. 그림의 어느 한 곳에 슬쩍 집어넣고 꼭 보아주기를 원하고 일반화되지 않은 외국어를 기록해놓고 독자에게 사전을 찾아보라는 것은 스스로 이해받지 않으려는 행동이 아닐까. 작가나 주변 사람들은 쉽게 알 것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니까.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 어려움인 듯하다. 저자는 육식의 잔인성을 경고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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