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아침
조안 리의 작고도 큰 깨달음 -
한 유명대학 학생이 스물셋에, 그 학교 학장과 무려 스물여섯의 나이차를 뛰어 넘어 결혼을 한다. 그것도 상대는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가톨릭 신부(神父), 결코 예사롭지 않다. 저자 조안 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편 켄은 그녀가 마흔 되었을 때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고, 두 딸이 있다. 그네들은 국제적인 삶을 산다. 결혼도 국제적으로 하고 살기도 그렇게 살고 하는 일도 국제적이다. 글쓴이의 삶을 보면 만나는 이들도 대단하다. 어느 분야든지 최상층부에 속하는 이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며 산다.
자녀들이 일찍이 유학생활을 하면서 독립적으로 성장해 오히려 어머니로서 서운한 일이 많은 듯하다.
딸들의 결혼을 겪으며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다. 둘째는 스물여섯에 열여섯 연상의 예술평론가와, 첫째는 동갑내기 대학동창생 외국친구와 작은 결혼식을 한다. 자녀의 결혼에 무엇을 준비해줘야 하나하는 설렘도 결혼식 하객들 앞에서의 자랑스러움도 누리지 못한다. 첫째는 신혼여행으로 배낭여행을 가는데 네 달이다. 그 마지막을 히말라야트래킹으로 했는데 10kg이나 살을 빼서 더 멋있는 여인이 되었단다.
크고 작은 사고와 질병으로 순탄치 못한 세월을 겪으며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발목을 다쳐 깁스를 하고 갈비뼈를 다쳐 휠체어를 타고 홍콩행 직전에 발견한 뇌내 출혈로 뇌수술을 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혹은 지인들의 조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에 진정 중요한 것으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사업적 성공도 화려한 인맥도 아닌 사랑하는 이들과 보낸 시간이란다. 병상에서 한 목회자의 “아직 어딘가 쓰실 데가 있어 살려둔 것이니 잘 찾아보라”는 일갈을 듣는다.
‘천천히, 여유 있게, 느리게’를 말한다. 그런 것들은 ‘바쁘게, 정신없이, 빠르게’와 대를 이룰 게다. 현대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고속철도와 인터넷의 속도요, 효율중심의 삶의 태도다. 잘하고, 많이 하고, 부자가 된들 무엇을 하겠느냐는 거다. 행복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고 그것도 같이, 함께 행복하지 않은 건 별 게 아니라는 거다. 비용이 비싸고 승부를 따지는 골프를 친다는 것도 어딘가 개운하지 않고, 새벽마다 정신없이 조찬모임에 쫓아다녀 보아도 뭔가 허전했던 모양이다. 많은 걸 혼자 결정하지 않으면 불안했었지만 다른 이에게 맡겨도 그런대로 잘 해내더란다.
지은이는 산행을 예찬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꼭 정상을 밟지 않아도 좋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마음이 맞는 이들과 적당히 오르다가 돌아오면 족하다고 한다. 보스턴 가까이의 한마디로 이름 지을 수 없는 병원 겸 요양원, 요가원 같은 곳에서 이 원장이라는 분을 만난다. 뇌수술을 받고 나서 유명 목회자가 소개해준 곳, 그 곳으로부터 지은이는 많은 깨달음과 도움을 얻는다. 그곳은 현대의학이 고칠 수 없는 이들이 많이 모여 있지만 밝고 즐거운 삶을 산다. 근본적인 것들을 돌아보고 자연에 크게 어긋나게 살지 않는다. 이런 형태의 삶이다. 다른 장기에 비해 신장이 약하면 신장의 기능은 조금 향상시키고 다른 장기들은 오히려 약간 약화시킨다. 요리도 음식에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재료의 맛을 그대로 살려 덤덤하게 한다. 이 원장과 새벽골프를 친다는 건 어둠속에 골프공만한 공에 형광심지를 박고 그것을 툭툭 치며 새벽산책을 하는 거다.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유별나지 않게 사는 삶이다.
탈북자들의 실상을 알고 그들이 난민의 지위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을 하는 지인의 설명을 듣고 그 일이 자신이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자 25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제네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본부로 달려가 호소하고 천만의 서명을 받고서는 뉴욕의 유엔본부로 찾아가 진정을 한다. 하지만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 원칙이나 인권을 앞서는 강대국들의 눈치와 국제정치를 실감한다. 그래도 그러한 노력으로 탈북자 가운데 난민처럼 대우받는 이들이 생겨난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살아있는 양심을 따라 용기 있게 행동하며 삶을 나누고 산 저자 같은 이들 덕이다.
사고와 수술을 거쳐 글쓴이는 종교적인 경지에 가까워진다. 남들은 불행이라 여길 수 있는 것도 감사로 받을 수 있고 그 일로 더 중요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근원적인 갈망, 꼭 가보고 싶은 곳을 향한 열망을, 기독교인에게 예루살렘, 이슬람교도에게 메카와 같은 곳으로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히말라야라고 한다. 저자는 그 히말라야에 간다. 전문 산악인처럼 위험한 등정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히말라야 부근에서 지내보고 일출과 석양을 본다. 작은 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를 돌아본다. 그 과정에서 그 지역민들이 왜 히말라야를 경배하는지를 이해한다. 거대한 산은 누가 정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몇 분 그곳의 땅을 밟고 다녀왔다고 그것을 정복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억지다. 정복자의 여유도 아량도 그들에게는 없다. 산이 잠시 허락해주었을 뿐이다. 대자연에서 인간이 배워야 하는 건 겸손이다. 더 대단한 이들은 평상의 삶에서도 겸손을 배운다.
책을 관통해서 느끼는 건 지은이와 주변 사람들이 대단한, 국제적이고, 상층부의 삶을 산다는 거다. 그렇다고 전혀 기죽을 건 없다. 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게,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