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썼다. 40세 쯤 되던 1974년에 이 책을 쓰고 1977년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한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가 의미하는 사회는 어떤 곳인가. 국가가 형성되지 않은 권력이 집중되지 않은 공동체다. 현대에 이런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원시공동체에서 본보기를 찾는 것 아닐까. 추장은 있지만 통치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것을 구성원들에게 내어 놓는다. 끝없이 말은 하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다. 유일하게 갖는 권리는 다수의 부인을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인데 왜 그게 특권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추장에게 권한이 주어지는 때는 유일하게 전쟁을 수행할 때이다. 승리하고 평화로워지면 다시 권한은 사라진다. 말하는 사람이니 오늘날 같으면 계속 전쟁의 위험과 가능성을 부추겨 힘을 소유하려 할 것 같다. 작은 공동체에서 삶을 같이하니 그것이 곧 직업이다. 주거지가 일터고 주민이 동료요 모두가 공동체다. 삶을 늘 함께하니 안정이 되고 같이 있으니 불안할 게 없다. 살 집이 간단하고 주민이 함께 일하고 먹고 생활하니 사치할 것도 없고 혼자만 더 일할 것도 없다. 생존을 위한 경제요 잉여 생산이 없다고 낮은 경제단계로 보려 하지만 축제와 손님접대를 위한 준비가 있으니 족하다. 비축은 불안에서 온다. 공동체라는 안전망이 있고 다 비슷한 삶으로 경쟁의식이 없어 쌓아놓지 않는 것이다. 필요를 채우고 부족함이 없는데다 삶에 여유가 있으니 그들을 하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 통장에 비축을 하면서도 불안한데다 늘 피곤에 절어있는 현대인이 더 우월하다고 할 근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문제는 외부로부터 강자의 침입이 없어야하고 공동체 안에 다른 마음을 먹는 악인이 없어야 한다는 거다.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한 공동체가 염려 없이 살아 넓은 땅에서 평온하며 안전하고 부족한 것 없이 부를 누리며 외부와 거리가 멀었다. 외부에서 침입하여 칼날로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니 이웃도시와 거리가 멀고 왕래가 없어 구해줄 이들이 없었다.
그런 곳이 더없이 좋은데 현실성이 있는지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가이다. 인구가 증가하면 효율성을 계산하고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삶이 서서히 일이 되기 시작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이가 나타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일이 많아지며 불만이 싹트면 효율적인 관리와 통제의 필요성이 생기고 그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이가 등장하고 그에게 일이 맡겨진다. 권력이 나타나고 그것은 얼마가지 않아 집중되는 모습을 띠게 된다. 권력자 주변에 덕 보려는 이들이 모여들고 편당이 생기고 일처리가 공평치 못한 것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어느 사회나 통과의례가 있다. 공동체의 한 성인으로 인정하는 시험으로 그 핵심은 당사자에게 극심한 고통이 가해지고 그는 참아내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통과의례의 과정에서 신체에 상처가 생기고 후에 흔적으로 남는데 그것이 그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표시가 된다. 그것은 숙명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그 공동체에 출생하고 일정 나이가 되면 정상이라면 통과해야 하고 통과하면 그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통과의례는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의무교육이라 할 수도 있다. 교육이 신분상승의 인정된 사다리요 자기 계발과 실현을 위한 장(場)이랄 수도 있지만, 권력 혹은 국가에 의한 필요사항들을 교육 혹은 훈련하는 기관이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회화 기관이요 사회화기간이다. 그 교육의 내용 곧 교과과정을 결정하는 것도 권력을 소유한 국가요 그 위임기관이다.
현대사회에서 국가는 권력의 주체로 명령하고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옛날의 공동체에서 추장이 힘을 갖지 않은 반면에 오늘의 국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가능한 많은 권력을 소유하려 한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국민들은 국가기관과 그 권력을 감시하고 힘의 분산을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국방과 전쟁의 방지, 그리고 과학 기술의 발달을 내걸고 국가는 힘의 비축에 온갖 방법을 사용한다.
국가뿐 아니라 개인도 힘의 비축을 위해 쉼 없이 노력하는데 그 심리적 바탕에는 불안이 있다.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혼자 혹은 자기 가정만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불안을 조장한다. 신석기혁명과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것은 사유재산의 확보와 공동체에서의 이탈이다. 공동체라는 보호망이 없어지니 자신과 가정의 미래가 불안하고 그 불안에 대비하는 것이 비축이다. 이 비축은 끝이 없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게 없고 더 좀 더 비축하기를 요구한다. 이것을 부추기는 게 경쟁이다. 삶의 비용의 엄청난 증가이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현재를 희생하고 사는데 이것도 끝이 없다.
삶의 터전이 주거공간이요 활동이 곧 직업이었고 가정생활이었고 공동체의 삶이었고 문화이던 것이 하나씩 철저히 분리되었다. 주거공간과 일터가 다르고 가족의 삶이 다 다르다. 문화는 삶과 분리되고 가정에서도 가족은 철저히 공간으로 분리되어 함께 있어도 따로 있다. 이것이 또 다른 불안을 초래한다. 불안을 힘을 요청하고 국가는 강력한 힘을 소유하면 그 힘을 주겠다고 거짓으로 약속하고 국민은 공허한 안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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