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미 련

변두리1 2018. 3. 12. 16:15

미 련

 

 

   뿌연 하늘에서 눈발이 쏟아져 내린다. 임진년 부산 앞바다로 몰려오던 왜선들 아니면 한국전쟁에 개입하려 국경을 넘던 중공군이 저러했을까. 곧게 벋은 아침 출근길에 날벌레들처럼 설군(雪軍)이 진격해온다. 어린아이들 입학해 학교에 가고 개울가에 풀싹도 푸르러가는 삼월 초 후반이다. 며칠째 늦봄 같은 날들이 계속돼 겨울은 멀리 떠난 줄 알았다. 한 철 머물며 큰 위세를 부린 탓인가. 단기간에 자신을 망각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심술을 부려 출근하는 이들을 당황케 한다.

   늦은 밤부터 꾸준히 내린 눈은 아침이 되니 차량 앞 유리에 수북이 쌓였다. 눈에 대한 예우가 며칠 전과 다르다. 따듯한 봄날에 날리는 눈발이 무엇이 두려우랴. 망설임 없이 차창 밀개로 쌓인 눈을 내치고 축축한 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차들이 미웠나보다. 지역에 따라 대설주의보가 내린 곳도 있단다. 좋았던 자신의 한 철이 밀려나는 게 몹시도 아쉬웠나보다.

   얼마 전 휘날리는 눈발 속에 정들었던 책들을 처분하던 생각이 난다. 읽지도 않으면서 버리기는 아까워 이사 때마다 끌고 다니다 결심을 했다. 긴 긴 세월 사 모은 서적. 꽤 많은 단행본과 적잖은 전집들, 영어로 된 책들과 주석들. 한 때 내 초라한 자존심을 지켜주던 존재들이었다. 아내가 버리자 할 때마다 언젠가 볼 거라 했다. 결심은 한순간에 왔다. 집을 치우며 정리 하다 보니 거추장스럽고 수년간 안 본 책을 다시 볼 것 같지 않았다. 서가에서 책을 뽑아내니 후련했다. 며칠 쌓아놓았다 폐지로 팔았더니 수만 원을 받았다. 책들을 마당에 쏟아놓고 돌아서려니 미련이 날 따라왔다. 군대도 끌고 가고 결혼 후 30여 년 이상을 함께 하던 것들을 치우려니 감정이 묘하다. 아내도 내 눈치를 보면서 무슨 심정의 변화로 안하던 행동이나 하지 않을 지 걱정하는 표정이다.

   힘겨웠던 신학생 시절부터 근근이 책을 사 모은 일이 잘 한 걸까를 최근에 생각해 보았다. 내 나름의 결론은 아니라는 거다. 책을 사면 읽어야 하는데 많은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교수님들이나 선배들이 굶어도 책은 사라고 권했는데 어쩌면 그들이나 나나 열등감의 보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득한 서가가 넉넉한 지식을 보장할까. 또 지식과 지혜가 비례하는가. 성경의 지식만 있으면 균형 잡힌 해석이 가능할까.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 때로는 전문분야에 깊이 정통하는 것보다 그 주변 분야를 얕게 아는 게 더 도움이 될 듯도 하다. 이제는 내 분야의 서적보다 주변의 책들을 보기 원한다. 때로는 책을 덮고 사색에 잠기고도 싶다. 오랫동안의 동굴에서 빠져 나오고 있다. 미련이 많이 남지만 떨치려 한다.

   삶의 전환기를 맞을 때마다 머물기를 원하면서도 떠나려 한다. 계절의 경계인 환절기에 겨울과 봄의 공존을 보면서 떠나기 아쉬워하는 겨울과 자리 잡으려는 봄을 몸으로 겪는다. 상황은 변하는데 습관을 떨치지 못하고 예전의 행동을 지속하며 그 안에 머물려하는 아쉬움의 감정상태가 미련이다.

   아침에 세차게 내리던 눈도 봄에 저항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는 겨울의 안타까운 몸부림이 아닐까. 약간의 시차를 두고 그들은 세력을 잃는다. 그게 순리다. 한낮이 되어도 하늘은 흐리고 추위도 조금은 느껴진다. 거리의 가로수들이 눈 녹은 물에 젖어 촉촉하고 멀리 산봉우리와 언덕들은 흰 눈을 이고 있다. 아직은 자신의 세상이라는 듯 겨울이 마지막 위용을 보인다. 이 풍경이 사라지면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나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내일부터는 다시 기온이 오르고 완연한 봄 날씨를 보이겠다는 일기예보를 듣는다.

예년보다 눈이 많고 추웠던 이번 겨울도 심술 한 번 더 부리고 봄에 밀려가는가.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동료들은 생각도 비슷한가 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봄을 기다리는 심정이 유별하다. 장년의 때가 깊어 간다. 건강이 주요 화제가 되고, 병으로 고생한 이들의 소문을 심심찮게 듣는다. 마음은 푸르른 데 몸에서 젊음이 한 가닥씩 떠나고 있다. 청춘이 더욱 아쉽고 가는 세월에 미련이 남는다. 공간은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거다. 그래야 여유가 있다. 하지만 치워도 잘 비워지지 않는다. 서가는 어느 새 다시 차고 사색을 위해 공간은 미룰 수 없는 일들이 차지한다.

   눈발은 어느덧 멎고 도로는 다시 건조하다. 밀려감에 거부의 몸짓을 보이던 겨울도 자신의 하는 일이 부질없음을 모르지 않을 게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알지만 미련이 남는다는 감정풀이다. 한 달여 전 처분했던 내 책들은 어디쯤 가서 어떤 힘겨운 일을 당하고 있을까. 내 삶의 긴 세월을 함께 해 준 그들에게 못할 일을 한 건 아니었나. 그들도 내 서가에 갇혀서 숨 못 쉬고 죽은 듯이 지내느니 몇 번의 변신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의미 있게 살기를 바랐을 게다.

   미련은 되도록 짧게 그치고, 새로운 환경으로 목표를 향해 가는 거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 후엔 여름이 있다. 갈수록 좋은 때가 오고, 내 황금기는 아직 머리카락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 미련을 떨치고 새 희망을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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