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의 갈대
시린 찬바람을 밀치고 눈앞에 늘어선 큰 키에 마른 갈색의 무리들이 나를 압도한다. 일월 말 영하 십 몇 도를 오르내리고 칼바람마저 불어온다. 무슨 생각으로 이 을씨년스런 순천만에 왔던가.‘철새들의 천국’이라는 매력적인 소문에 살아있는 자연을 보려는 욕망이 더해졌다. 펼쳐진 광활한 규모와 옷 속을 파고드는 추위는 갈대밭을 한 바퀴 돌고 싶은 욕망을 주저앉힌다.
외투를 입고 털 깃으로 목을 감싸고 핫팩을 주머니에 넣었다. 춥지 않다고 마음에 최면을 걸며 걸음을 재촉했다. 교차하는 이들의 얼굴이 시퍼렇다. 간혹 동료들의 비행에 자극을 받는지 철새들이 날아오른다. 얼마가지 않아 도달한 무진교에서 바라보니 철새들이 수면위에 무리지어 떠있다. 날마다 대하는 인파에 무심한 듯 그들끼리 소란하다.
나무로 조성해 놓은 길을 따라 좌우에 자라난 갈대가 내 키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칼바람에 추워‘스스스’ 떨면서도 옆 친구들 의식하는지 움츠리지 않는다. 그 키에 비쩍 말라 얼마나 추울까. 추위에 언 사람들이 물결처럼 움직여도 무리의 위세인 듯 갈대들은 덤덤히 제 자리를 지킨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갈대와 같다 한다. 순천만 갈대밭에 와보니 대나무 나 벼처럼 속 비고 큰 키에 많은 씨앗들을 이고 있다. 그 심한 불균형에 쉴 새 없이 바람 불어도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고 굳세게 버티고 있다. 그들만큼 환경에 굴하지 않고 버티기도 힘들 것 같다. 갈대는 한 두 포기보다는 군집으로 모여 살아야 멋이 있다. 한 곳에 많이 모여 살수록 보러 오는 이들이 많고 신이 난다. 자기들끼리 주절주절 이야기도 하고 바람 따라‘사사삭 사사삭’ 장단도 맞춘다.
갈대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을 게다. 파릇하고 귀여운 어린 시절이 있고 점점 굳세어 지는 유년의 때도 지났으리라. 꽃이 피어 바람에 날리고 씨앗이 열리는 장년의 시기를 지나 몸에서 물기 빠져나가고 유연성을 잃어버린 노년의 시기를 겪고 있다. 연두에서 녹색을 지나 붉음과 갈색을 거쳐 흐린 백색에 이르는 긴 세월을 견뎌왔다. 이제는 생명의 물이 마르고 빈속에 겉까지 뻣뻣해도 땅으로 눕지 않는다. 동료이며 경쟁자인 옆자리 친구보다 앞서 누울 순 없다. 남들은 눈치와 자존심이라 하지만, 삶이 빠져나가고 남겨진 적은 힘으로 버티고 서있는 게다.
갈대는 여러 해살이 풀이다. 여기저기 따로 살면 죽고 살고 거듭하며 몇 배를 살겠지만 순천만 갈대들은 이곳에서 한 해를 수년처럼 산다. 바람도 많이 불고 새들도 실컷 보고 사람들도 질릴 만큼 맞고 보낸다. 그러니 어디서 여러 해 사는 풀과 나무들이 부럽지 않을게다. 순천만 갈대들은 온갖 게들과 짱뚱어와 철새들에게 놀이터가 되어준다. 발밑으로 펼쳐지는 세상이 있고 온 몸으론 바람이 지나고 머리 위론 새들이 난다. 일 년 열두 달 순천만 갈대를 보러 관광객이 밀려드니 그들은 심심할 여절이 없으리라.
갈대밭 위로 해가 기운다. 지나는 이들은 갈대무리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다. 바람이 흐르고 인파가 지나고 미지근하고 약한 햇살이 스친다. ‘끄르끄르’ 철새들은 소리 지르며 날아오르고 방문객들이 종종걸음으로 돌아가면 갈대들만 남아 하루를 마무리하며 어둠속에 밤을 보낸다.
자신들이 사라지고 텅 빈 갯벌이 될 순간이 다가오는 걸 갈대들은 모를 게다. 며칠 지나 2월이 오면 질겼던 그들의 한 살이, 부질없이 버티던 물기 빠진 가벼운 몸통도 인부들에게 잘려 나가리라. 3월이 남들에겐 새 출발이요 희망의 달이지만 갈대밭엔 고요와 휴식만이 깃든다. 겨울 끝에 봄이 묻어 있고 깊은 밤이 새벽으로 이어진다. 순천의 갈대밭도 4월과 함께 휴식이 출발로, 고요는 수런거림으로 바뀌어 새 생명의 잔치가 벌어진다.
떠나는 순간까지 하늘은 맑고 싸늘했다. 갈대들은 변함없이 가볍게 몸을 흔들며 부드러운 목례로 사람들을 배웅한다. 벌써 다음 행선지에 마음이 가있는 이들은 움츠린 자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떠난다. 갈대들도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인 양 자기들끼리 몸 비비며 수런댄다. 물위를 지키던 철새들이 무엇엔가 놀란 듯 하늘로 차오르며 여러 가지 모양들을 만든다.
순천만 갈대들은 자부심이 있다. 서로 하늘 향해 키 재지하며 자라나고 힘겨워도 땅에 먼저 눕지 않는다. 봄부터 겨울까지 한 세월 다 살고도 젊은 날 시원히 비 내리고 따사로운 햇빛 쏟아지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어쭙잖은 비바람에 꺾이지 않고 사람들의 환호와 감탄에 흔들리지 않는다. 비바람 햇빛에 영근 씨앗들을 주변에 퍼뜨리고 묵묵히 세월을 견디며 그들에게 기대는 이웃들과 함께 살 뿐이다.
담양의 대나무, 보성의 녹차나무처럼 한 곳에 함께 살아가는 게 순천만 갈대의 커다란 자부심이다. 나는 오늘 순천만의 갈대들을 보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