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전화에 대한 변명

변두리1 2018. 1. 2. 21:06

전화에 대한 변명

 

   저에게 전화를 주신 분 중에 제때에 통화하신 분이 거의 없을 겁니다.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 변명을 좀 할까 합니다. 사실은 제가 애들 몇 명의 공부를 도와줍니다. 그들에게 전화사용 자제를 당부하면서 제가 사용하기 민망해 전화소리를 죽이고 지냅니다. 그 시간만 그렇게 하면 되지만 일이 번거로워 평소에도 꺼놓고 살다보니 본의(本意)아니게 오는 전화를 그때그때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제때에 전화를 받지 못해 좋은 게 여럿 있습니다. 아직 겪어보진 않았지만 보이스휘싱(voice fishing)" 에서 자유로울 듯합니다. 모르는 번호에 한참 지난 후에 실례지만 누구시죠?“ 하면 다급함을 무기로 대들지는 못할 테니 말입니다. 또한 제가 거절을 잘 못하는데, 긴급하지 않은 여러 전화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어 마음 쓸 일이 많이 줄어듭니다. 전화 중 일부는 점심을 같이 하자는 건데, 한두 시간만 지나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연락을 하면 김이 빠졌다는 듯이 같이 식사를 하려 했는데 아쉽다고 하곤 합니다.

   휴대전화의 문자사용으로 편리한 면도 있습니다. 목소리를 나누고 싶지 않을 때, 감정의 동요를 막기에 적합합니다. 때로는 목소리로 통화하면 서로를 배려해 의례적으로 주고받을 이야기들을 생략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짤막하게 용건을 전할 수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좋은 점입니다.

   일반전화 대신 휴대전화를 사용해서 곤란한 일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집에 없어서 다른 일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하면 대충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휴대전화에 누가로부터 몇 시에 전화가 왔었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히 기록으로 남아 원하지 않는 전화에도 반응을 보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능이 화려하고 다양해서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내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저는 아직도 이모티콘을 쓰지 못하는데 앞서가는 이들은 오래전부터 움직임이 많은 실감나는 몸동작 그림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게 전화를 거는 이들을 만나면 자기들이 갑갑하니 전화 좀 받으라고 닦달을 합니다.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곧바로 호출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전화가 되지 않는 이가 있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년전에는 사정이 있어 전화번호를 바꾸고 지인들에게 알리지 않았더니 제가 하던 일 정리하고 모습을 감춘 걸로 소문이 났습니다. 같은 건물에서 사용하는 층을 옮긴 걸 예전의 층만 방문하니 없고, 전화도 받지 않으니 오해가 생겼던 겁니다.

   휴대전화의 기능이 확대되어 갑니다. 휴대용 컴퓨터를 손안에 들고 다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식을 주고받는 양이 무척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이런저런 모임을 같이 하는 이들이 밴드를 만듭니다. 처음 며칠은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들락거리고 시끌벅적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조용하고 한적해집니다. 얼마가 더 지나면 소수의 사람들만 반응을 보이고 운영자들은 의기소침해지고 지쳐 밴드폐쇄를 고민합니다.

   문명의 이기가 쏟아지고 기술이 진보해도 친한 이들과만 자주 소식을 주고받을 뿐, 많은 이들은 더 외로워져 갑니다. 휴대전화로 들어오는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보면서 왜 나 자신도 쓰지 않는 손 편지와 직접 그리고 쓴 카드가 그리워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기다림의 여유와 상상의 힘을 잃은 것 같습니다. 약속시간이 남았는데도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짧은 만남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서로의 전화소리를 수차례씩 듣곤 합니다. 이전 시절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저녁 때 쯤 만나세.”혹은 설 전후해서 보자고.”하는 약속이 귓가에 맴돕니다.

   제때에 전화통화를 못하는 친지들이여, 용렬한 이를 너그러이 보아주어서 그래, 우리가 참고 불편을 견뎌야지하고 넘어가 주면 좋겠습니다. 거듭 미안하고 죄송스러움을 전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제 고집도 있고 하니, 앞으로도 한동안은 제때에 통화하기 어려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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