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반도주(夜半逃走)처럼
따듯하던 날씨가 갑자기 춥고 눈이 내린다. 한겨울 대한 날 첫새벽에 긴장한 표정으로 한 가족이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눈 쌓인 길을 서둘러 떠난다. 미진한 듯, 기대에 부푼 듯, 침묵하는 듯, 불안을 털어내려 한두 마디 하는 듯 흩날리는 눈 속에 다가온 택시를 타고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시외버스 정류장. 덤덤히 차표를 끊고 승차를 기다린다.
반세기가 더 지난 유년의 기억이 아스라이 살아난다. 그날도 온 가족이 조촐한 봇짐을 챙겨 살던 곳 북리를 등지고 청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적지 않았을 눈길을 가족들은 타박타박 걸어서 가고 있었다. 아버지 등에 업혀있던 아이는 먼 길을 가는 이유도 모른 채 파고드는 찬바람을 느낄 뿐이었다. 아이는 제 살던 곳에 다시 가본 기억이 잘 없다. 살던 곳에 강한 애착이 없으니 상실감이나 그리움을 느끼기 어려웠다.
첫새벽 출발할 캐리어 하나를 챙기며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어떤 것들인지 자문해본다. 겨우 열흘 남짓 집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다 오기위해 챙길 것이 적지 않단다. 아예 짐을 챙기지 않기로 했다. 웬만한 것들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을 테니 단출하게 다니고 싶었다. 우리 앞 세대들이 갑작스레 징용(徵用) 가듯 입던 옷 그대로 어디든 가고 싶었다. 가방 두 개 가지고 선교지로 향하던 선교의 일꾼들을 생각한다. 언제쯤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길을 그곳에 대한 정보도 백지인 채로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르는 길을 갔던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라 안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나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생각이 많았다. 전혀 모르는 곳으로 아는 이 없고 생전 처음 보는 도시들을 간다는 느낌은 묘했다. 내 소심한 성격에 걱정과 두려움도 끼어들었다. 날이 밝기 전 서둘러 떠나는 모습이 야반도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니 서로 견주어 보고 싶다. 아주 소수에게만 떠난다는 것을 알렸다. 가까이 사는 이웃도 매일 보는 이들도 내 행적을 알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신문보급소에 출발 일부터 도착 일까지 넣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신문이 수북이 쌓이면 우리 집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 추측이나 짐작을 해 볼지도 모른다. 야반도주하는 이들도 며칠이 지나기 전에는 그들이 없어졌다는 것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이곳을 떠나면 곧바로 전화번호를 바꿀 것이다. 아이들은 유럽에서 쓸 수 있는 것으로 유심을 갈아 끼운다고 했다. 그것으로 익숙했던 이들과의 연결고리가 차단되는 것이다. 야반도주하는 이들도 가능하면 예전에 알던 이들과의 연락이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필요해서 연락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다른 이들은 연락할 수 없고 그들로부터는 사라진 것과 같다. 전화번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몇 해 전에 겪어 보았다. 사용하던 건물의 한 부분을 쓰지 않고 전화번호만 달라졌을 뿐인데 친구들 사이에 하던 일을 접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소문이 돌았다. 같은 지역에서 10분이면 확인할 수 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현대인들의 관계가 얼마나 허술하고 피상적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언제나 문자나 스마트폰으로 연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상대가 꺼놓기만 해도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앞날에 대한 기대와 각오가 있다. 10여일의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것을 경험하고 삶의 커다란 추억과 전환의 시기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익숙지 않음에서 오는 여러 가지 불편을 받아들이겠다는 각오가 있다. 집 떠나면 고생인 것을 알면서 선택하는 것이다. 야반도주하는 이들은 피치 못할 사정을 안고 있는 이들이다. 삶이 잘 풀려 가는데 그러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지난날을 잊고 어딘가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을 거쳐 빛나는 미래를 만들고 싶어 한다. 때로는 쓰던 이름도 바꾸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려 한다.
전혀 다른 삶이라는 게 가능한 것인가. 바꾸어 보아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예전과 비슷한 환경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시장인 마들렌이 죄수 장발장인데 그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개인의 인간성과 성품에 변화가 있긴 해도 환경 때문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기대하기 쉽지 않다. 열흘 가량 지나 다시 돌아온 내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알아보기 어려운 미미하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인천으로 달려가는 이른 새벽 공항버스 안에서 졸다 깨기를 되풀이하는 동안에도 어둠이 도망치는 만큼 아침이 밀려든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해외로 나가고 들어오는 눈 내리는 안개 낀 인천공항이다. 떠남을 아쉬워하는 듯 출발이 늦어진다는 자막이 연이어 뜬다. 다함께 하는 한 가족의 여행을 격려라도 하는 양 눈이 그치고 햇살이 나온다. 야반도주의 거사를 알아차린 빚쟁이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불안해하듯 미지의 세계를 향해 긴장한 채로 “에어프랑스”에 오른다. 마침내 일상에서의 탈출이 시작된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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