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많은 이들이 새 것을 갖고자 하는데 저자는 옛 것을 그리워한다. 달동네 골목길, 유가사 가는 돌길, 병산서원 만대루, 선암사 경내의 건물군, 폐허가 된 성주사지……. 왜 저자는 이런 것들을 새 것들보다 더 좋아하는 걸까.
건축의 생명은 공간에 있단다. 비워진 곳, 비움이 건축을 대하는 마음이다. 남들은 일본 교토의 “료안지(龍安寺) 마당”을 ‘불확정적 비움’이라 찬탄하지만 그곳은 늘 비어있는, 삶이 깃들지 않는, 확정적 비움으로 마치 경복궁의 연경당이나 다름이 없어, 오히려 효명세자가 독서와 사색을 즐겼던 단출한 기오헌(寄傲軒)과 더욱 작은 의두합(倚斗閤)만 못하다. 불확정적 비움은 때맞추어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지는 곳으로, 저자가 피난 내려와 살던 구덕산 아래 집의 마당과 대도시 달동네의 굽은 길에 있다. 높낮이와 폭이 다른 삐뚤빼뚤한 달동네의 길은 아이들의 놀이터요, 늙은이들의 경로당이요, 아낙네들의 작업장이며, 시장이요, 공회당으로 추억이 깃들어 멈춤과 돌아봄이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현대 도시의 도로는 목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곳일 뿐이다.
비움이 채움이 되는 곳이 있다. 멈추어 돌아보면 추억이 살아나고 사색이 일어나는 곳으로 독일의 전쟁기념관인 “노이에 바흐”의 내부가 그러하다. 죽은 병사를 안은 어머니의 조각상 하나밖에 없는 70여 평 공간에 내려앉은 고요의 크기는 무한대이고 길 건너 빈 광장에 사방 1미터 유리 속, 백색 텅 빈 서가가 전부인 베벨광장의 유대문학 분서기념관, 또한 파시즘의 아픈 과거를 기억하자는, 일상의 풍경에서 완전히 사라진 하르부르크의 기념탑, 이들은 그 어느 공간보다 더 넓고 크게 그 안을 채우는 작지만 거대한 비움의 공간이었다.
우리에게도 채움으로 이끄는 비움의 공간이 있다. 종묘의 월대와 성주사의 폐허지. 그곳의 비움은 존재의 무게와 사색의 깊이를 더해준다. 우주의 모든 생물은 궁극적으로 소멸하고 지상의 모든 건축물은 해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폐허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겸허함이다. 종교가 알려 주려는 것이‘자기성찰’이라면 폐사지(廢寺址)는 그 가르침을 충실히 전달하고 있다. 이 겸허에서 낮은 마음을 배우는데, 곧 남을 낫게 여기고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건축물이 서양건축의 역사에 전환점이 된 빌라 로툰다이다. 한적한 마을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진 집, 정방형 중앙에 둥근 홀을 두어 로툰다라 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듯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중앙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는 지배자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듯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을 대하면, 조선 중종 때 성리학의 거두였던 회재 이언적이 낙향하여 지은, 담장의 높이도 낮고 그 안의 집들도 땅으로 꺼진 듯 낮은 집, 그 낮은 곳에 은둔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고독을 즐기려한 독락당(獨樂堂)이 생각난다. 이 집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 계정(溪亭)인데 그것마저 독락당의 마당을 이루는 벽체일 뿐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자신을 가리고 다른 대상, 특히 자연을 드러내려 했다. 서양이 자연을 개발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다면 우리 선조들은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존경스런 벗 같은 존재로 자연을 대했다. 윤선도의 오우가와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만대루는 앞에 펼쳐지는 병산을 담는 병풍일 뿐, 더구나 입교당 뒷벽의 목재문을 열어놓으면 병산은 마당과 강당을 지나 뒷산으로 통한다. 건물은 자연 속에 최소한으로 자리해 함께 어울려 친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건축은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기보다 자연의 풍광에 꼭 맞는 곳에 자리하는 데 매력이 있었으니 그것을 보여주는 곳이 부석사요, 소쇄원이다.
낮은 마음으로 이웃과 어울려 살려는 이들이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이 저자가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탐색하면서 수없이 많은 역사들을 만나고, 일상의 미학을 만끽한 골목길 가득한 스페인의 남부도시 코르도바이며, 실핏줄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들이 때로는 시장, 아이들의 놀이터, 집회장도 되는 천년의 도시, 다원적 민주주의의 도시 모로코의 페즈이며, 아랫집 지붕이 윗집의 테라스가 되고 좁은 집들이 서로 벽을 공유하며 모여서 삶을 나누는, 백색의 대리석과 코발트빛 빛나는 하늘이 있는, 지중해의 산토리니 마을이다.
이런 곳을 우리에게서 찾는다면 예부터 살아온 도시화 이전의 농촌마을이며 대도시 변두리의 달동네이다. 주민들이 삶을 공유하며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굽어진 길, 걷다 담에 기대어 쉬기도 하고 이웃끼리 한담을 나눌 수 있는, 그 자체로 한 마을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는 곳들이니, 이런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전남 순천의 선암사다. 한때는 백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고 수백 명의 수행승들이 기거했던 대사찰. 경내 건물이 다 나름대로 고유한 공간을 만들고 뚜렷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한 건물군이 없어지거나 덧대어져도 전체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각각이 온전함을 지닌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하나의 도시, 몸을 닦고 영혼을 닦는 수도자들과 그 건물들로 이루어진 선암사는 그대로 하나의 도시였다.
산과 산,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것이 길로 동양권에서는 도(道)라 했다. 도(道)는 전체를 꿰뚫는 원리, 혹은 사람으로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원칙 같은 것이다. 이 길은 끝이 없다. 이제 됐다고 하면 그 자체가 교만이요, 미완성의 드러냄이다.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이제는 콘크리트로 포장되고 말았으니 결단코 가지 말라면서, 유가사(瑜伽寺) 가는 옛길을 소개한다.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져 대웅전을 비키고 나한전도 비켜, 용화전과 산신각마저 지나 멀리 비슬산으로 올라가 아스라이 사라지는 길. 그 길은 목적지가 없는, 끝을 알 수 없는 길이어서 도(道)와 닮았다. 오늘의 사람들은 길안내 계기판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그 길을 따라간다. 목적지가 없으면 아예 길을 나서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우리 의식 속에는 보이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며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해 존재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 길에 의해 도시의 구역과 동네의 우열이 나뉜다.
저자는 이러한 나눔이 없는 광활한 공간을 몽골의 초원에서 본다. 드넓은 초원위에 봄과 함께 찾아와 며칠간격으로 펼치는 천연색 꽃들의 생태적 드라마, 그 절대자의 정원에서 놀라운 섭리와 질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며 할 말을 잃고 건축의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몽골 초원 자체가 커다란 비움이며 때를 따라 채워지는 신의 낙원 같은 공간일지 모른다.
르토로네 수도원을 저자는 다섯 번 찾았다고 한다. 그곳에는 소박함과 충직함 그리고 완벽함이 있었다. 그 수도원을 보며 생각한 봉정사의 작은 암자 영산암. 그곳에서 그가 찾아낸 것은 침묵의 고요 그리고 비움이다. 완벽을 버림으로 얻는 육신의 편안함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그리며 저자는 부실한 영산암이 르토로네 수도원보다 크다고 한다. 완벽은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닌가 보다.
오래된 것들과 자신이 생각하는 건축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오래된 것들은 역사와 추억이 깃든, 세월을 통해 검증된 고전 같은 것들이다.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있고 그 자리에 딱 어울리는 것들이다. 저자는 그것을 책의 앞부분에다 한 시인의 시를 인용해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나온 것,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고 기린다. 자신을 돌아보아 겸허한 마음으로 서로 간에 우열을 짓지 말고, 수수한 모습으로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자연 그리고 이웃과 함께 어울려 살자는 것이 저자가 건축을 통해 되풀이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채움을 위한 비움, 빈자의 미학이라면 어떨까. 저자를 가리켜 ‘건축으로 수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던 동료의 평(評)처럼, 당신도 그런 자세로 살아가라는 나를 향한 나직한 속삭임을 이 책에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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