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길가의 은행나무

변두리1 2015. 12. 9. 08:08

길가의 은행나무

 

  스쳐가는 바람에 노란 은행잎이 팔랑팔랑 길 위로 내린다. 수북한 잎들이 비에 젖은 몸으로 도로를 덮었다. 그들은 우리 어린 날의 한때를 돌아보게 하며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만족스런 한살이를 마친 그들을 보내는 자랑스러운 은행나무도 서운함은 있어도 애통함까지는 아니리라. 여기저기 흩어진 은행 알들의 구리한 냄새도 전해져 온다. 오가는 차의 행렬에 밟히고 깔린 잎들은 여전히 꿋꿋하게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거리를 청소하는 이들에게는 은행잎들이 큰 일거리라고 한다. 쓰레기부대에 담아 한 곳에 모아 소각한다고 들은 듯하다. 그들은 이제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귀찮고 짐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예우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잎과 열매는 소중히 다루어져 추억이 되고 땔감과 약품의 원료로 쓰이고 부족한 양식을 보충하는 특별한 식량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맛과 영양이 좋은 간식거리로 대우받기도 했었다.

  길거리가 아니었다면 오랜 세월을 이어온 그들의 방식대로 잎들은 거룩한 희생과 봉사라는 찬사를 받으며 후손들을 위한 거름이 되어 흙과 한 몸으로 썩어 갈 것이다. 그들의 열매도 식량으로까지 격상되지 못한다 해도 산속의 작은 생명체들을 위한 겨울양식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건사하기 어려운 자신의 일부를 지상에 내어준 나무들도 얼마간 분신 같은 그들을 지켜보면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기를 바랄 수 있었으리라.

 

  그들 중 일부가 번화한 도시의 길가로 이사를 왔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특별한 애정이나 호감을 가져서가 아니라 대기오염을 잘 견디고 병충해에도 강한 그들을 가로수로 선택해 도시 한 가운데 옮겨 심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은행나무에게는 고통의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괜히 툭툭 치고 지나가고 차들은 매연을 뿜어대고 밤이 되면 술에 취한 이들은 역한 것들을 토해 내고 주먹질을 하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온갖 민망한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았다. 그런 일들은 어쩌면 그들의 심심함을 없애준 대가일지도 모른다. 산속의 나무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온갖 도시적인 것들을 보는 즐거움이 적지 않을 게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만큼 밤낮없이 밀려드는 인파들, 반짝거리는 차들과 늠름한 신사, 아름다운 숙녀들. 한동안 눈이 뻑뻑할 만큼 그 화려한 광경을 감상하며 살았을 게다. 연녹색 잎을 준비하는 초봄부터는 스스로를 챙기기도 간단치는 않았으리라. 때로는 시야를 가리는 가지도 쳐주고 숱한 이들이 보아주는 예상 밖의 호사도 겪었을 것이다. 그래도 수군수군 이야기하고 깔깔대고 웃고 서로 흉보고 칭찬하던 숲속의 날들이 그립기도 했을 것이다. 밝은 햇살과 고운 이슬방울을 함께 받으며 서로의 살갗을 느끼던 고향의 아련함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거친 비바람이 지나고 매미들이 찾아와 서럽게 울다가 가고 푸른 하늘이 날마다 높아져 가더니 저들의 잎들도 찬란한 황금빛으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갔다. 그들 스스로도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어떤 이들은 그들을 보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조심스레 한두 잎을 따서 보물처럼 챙겨가기도 했다. 잎들만 아니라 열매들도 나날이 황금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때는 그들처럼 행복한 나무가 지상에 다시없는 듯했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면 한두 잎이 떨어져 내렸다. 점차 바람만 불어도 우수수 잎들이 날리더니 어느 날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무수한 잎들이 땅으로 내리고 가지들이 앙상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샌가 귀했던 열매들도 땅을 뒹굴며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한해의 환희와 고통이 새겨진 잎들은 흙이 없어 그들과 하나 되지 못하고 포장된 도로 위를 겉돌고 한여름 빗물과 햇살로 맛들인 열매들은 자동차 바퀴에 밟혀 여기저기 짓이겨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짐이 되어버린 그들은 부끄러운 듯 당황스러운 듯 부스럭부스럭 알 수 없는 불만들을 뱉으며 온 몸이 구겨져 부대에 담긴다. 그들의 한해가, 그들의 꿈이 처참히 구겨져 담기고 있다.

  저들은 무용지물을 넘어 이제는 이 땅에 더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들로 불살라져 한줌의 재와 조각구름 같은 연기되어 사라지리라. 수억 년을 이어온 생명의 순환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으려나. 모습을 바꾼 또 다른 형태의 순환으로 접어들려나.

 

  아직도 나무를 떠나지 못하고 애처로이 흔들리는 잎들이 안쓰럽다. 여름의 푸르름을 그리워하며 스스로의 나신에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던 나무도 체념한 듯 초월한 듯 바람 부는 도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도시 길가에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서글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해가 또 저물어간다. 나는 다시 길가 은행나무에 연녹색 잎이 돋을 새 봄을 하루하루 기다리며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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