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지혜로운 모습들

변두리1 2015. 10. 5. 19:02

지혜로운 모습들

 

 

  꽃밭이 썰렁하다. 화려했던 꽃들이 시들어 뽑아냈더니 몇 몇 키 작은 꽃들이 바닥에서 반짝이고 있을 뿐 원색의 잔치는 끝이 났다. 한 해의 호시절이 가고 있는가. 이런저런 핑계로 몰아내고 또 계절이 바뀌면서 떠나버린 꽃들이 그립다. 봄여름 가을 철없이 피어나는 봉숭아와 꽃이 작고 끈질긴 채송화, 빛이 바래가는 백일홍과 함께 우리 꽃밭을 지키고 있는 거무스름하고 쭈글쭈글한 꽃이 과꽃이다.

 

  며칠 전 쓸쓸히 꽃밭을 바라보는데 시들어 색이 바래지고 모양이 뒤틀린 과꽃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살이가 끝나가고 있었다. 지난겨울에 아내가 이웃으로부터 씨를 받아와 심었는데 쉬이 싹이 트지 않았다. 이웃에게서 꽃씨를 선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잘 키워보고 싶은 것이 아내의 마음이었을 게다. 올해는 과꽃을 못 보는 것으로 체념하고 있을 때, 몇 포기의 과꽃이 눈에 띄었다. 꽃이 피기 전 과꽃을 본적이 없어서 어느 것이 그 꽃의 싹이고 잎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던 게다. 자라날 때의 이파리가 흔한 들풀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햇볕이 따가워지면서 하얀 꽃잎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봉우리를 뚫더니 마침내 눈부시게 피어났다. 그 자태를 보느라 며칠을 지내는 동안 다시 보라색으로 마술을 부려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내는 그 신비한 연보라색 꽃 몇 송이를 꽃씨를 선물한 이웃에게 다시 선물했다. 그 마음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준 씨앗이 꽃이 되어 다시 돌아왔을 때 이웃이 느꼈을 마음, 받은 씨앗을 심어 피운 꽃을 들고 찾아가는 아내의 들뜨고 상기된 표정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사연을 가진 과꽃도 뜨거운 햇살을 지나치게 맞은 탓인지 조금씩 생기를 잃어갔다. 햇볕은 강한 파괴력이 있다. 생생한 원색을 바래게 하고 탱탱한 피부에 주름을 안기고 흰 살결을 검게 만든다. 옆에서 다정하게 살아가던 백일홍을 추레하게 만들더니 과꽃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그들을 뽑아내려다 과꽃의 씨를 받아야겠다고 하던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씨를 챙겨두려면 완전히 여물 때까지 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 후줄근한 모습을 며칠 더 바라보니 친숙하고 대견했다. 싱싱한 젊음을 잃고 무거운 꽃씨와 잎과 꽃받침을 지탱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온힘을 다해 버티는 듯하다. 그 모습이 거룩한 과업을 수행하는 수도자처럼 보인다.

 

  그 후줄근함과 쭈글쭈글함 그리고 배배틀어진 거무스름함 속에 생명의 씨앗이 들어있다. 후대를 이어갈 성숙한 생명은 아름다움을 지나고 젊음을 넘어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야 도달하고 간직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그때가 되면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자신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깨달아 겸손한 색과 모양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풀과 나무, 동물이나 사람도 빳빳하게 자기가 살아서는 남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없다. 자아가 죽어야하고 풀이 죽어야 한다. 풀이 죽고 자아가 꺾이는 과정이 그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모든 일에 힘을 넣는 일보다 빼는 일이 더 어렵고 중요하다. 힘이 빠지고 풀이 죽고 겸손해진 모습이 남들이 보기에는 불쌍하고 처량해도 본인들에게는 오히려 여유롭고 편안하지 않을까.

 

  추레하고 말라서 거무스름한 모습은 지혜로운 이들만이 찾아낼 수 있는 생명을 간직한 형상이요 가득 담긴 지혜주머니 같은 모습이다. 살아있는 존재들은 어릴 때는 귀엽고 젊어서는 아름답다. 그러나 완숙기에 접어든 생명들은 평생에 터득한 지혜를 간직한 거룩한 모습이 된다. 그 지혜 속에 생명의 씨앗들이 감추어져 있다.

  인류는 오랜 경험을 통하여 나무와 풀의 열매를 가장 맛있는 때에 거두는 것을 익혔고 후대까지 지속적으로 생명을 전해줄 씨앗들에게는 그 후로도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날의 경험을 무로 돌리지 않으려면 힘을 뺀, 겸손의 모습을 한 이들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온전히 활용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싱싱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힘을 능가하는 한살이를 통해 쌓아온 숙성된 지혜가 있다.

 

  꽃밭에 깊어가는 가을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한해의 막바지 축복인양 부어지는 햇볕에 나지막이 자라는 풀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씨를 품은 거무스름한 과꽃과 백일홍들은 더욱 추레해져 간다. 바람과 햇볕을 견디는 그들의 인내가 숭고해 보인다. 생명과 지혜는 속성으로 얻어지지 않는가 보다. 하루하루 그들을 대하는 내 시선이 순해진다. 저들은 자신들의 분신인 후손들과 함께 하거나 볼 수 없어도 나는 그들의 귀엽고 아름다우며 지혜로운 모습들을 볼 것이다. 이제 쓸쓸한 꽃밭에서 행해지는 내년을 향한 지혜로운 마무리를 보면서 저들의 후손의 후손을 그리며 내게도 찾아올 지혜가 생겨나고 쌓일 날을 여유롭게 가다리리라.

'변두리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가의 은행나무  (0) 2015.12.09
“오(奧)”에 대한 공상(空想)  (0) 2015.10.22
바람에 흔들리는 나비  (0) 2015.09.17
창틀에서 오는 소리  (0) 2015.09.15
탁구교실의 인간관계  (0) 2015.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