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찬 물

변두리1 2015. 5. 22. 14:38

찬 물

 

 

  꿈에 배가 아파 깨어보니 진짜 배가 아프다. 이것저것 생각해 보아도 원인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만히 한참을 더듬으니 낮에 마신 찬물에 탈이 난 것 같다. 어쩜 그렇게 정확한지 내 몸은 찬물을 완강히 거부한다. 봄이 깊어가며 날씨가 더워져 스스로도 몸의 특성을 잊고 벌컥 마신 찬물이 배탈을 부른 것이다.

 

  한동안 내 마음을 놓아주지 않는 낱말이 찬물이다. 오래전 영어를 공부하던 모임에서 개개인 영어 이름을 정할 때 궁리 끝에 지은 것이 한스(hans)'.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내 이름에 가장 가까운 소리를 찾으려 한 것이다. 한스는 요한의 라틴식 이름인 조한네스(Johannes)의 줄임꼴 이라고도 하고 요한의 독일식 표기라고도 한다. 요한의 본래 뜻이 착한, 선한 이니 그야말로 좋은 이름이다. 그런데 별칭을 사용할 일이 늘면서 새것을 만들기 쉽지 않으니 한스를 활용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 음을 자연스레 한자(漢字)로 옮기려니 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가장 가깝다고 찾은 것이 였다. 결국 한수가 되었는데 또 그럴듯한 뜻을 더하고 싶었다. 한수(漢水 寒水 韓樹) 등과 한수[一手]가 떠올랐다. 한수(寒水)가 친근하고 마음에 든다. 오래 전 수업시간에 더러 우리의 주요 명절인 한식(寒食) 이야기가 나오면 친구들은 나를 찬밥[寒食]이라 불렀다. 어떤 악의나 미움도 없고 더없이 친숙한 것이어서 거부감이 없었다. 찬물은 찬밥과 서로 짝이 될 듯하다. 다른 것들은 지역의 대표성을 띠거나 대단한 기술 같은 무게감이 들어서 내게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부담스럽다.

 

  찬물은 순수하고 원초적이다. 그러면서도 물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드물 만큼 쓰임새도 많다. 공짜라 할 만큼 싸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한 존재, 그다지 대우받지 못해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물이다. 좋은 물은 무미(無味) 무취(無臭)라 하지만 그런 물을 맛이 없다고 하지 않고맛이 있다, 맛이 좋다고 한다. 그 본래가 무미 무취니 한 곳으로 심하게 치우침도 없다. 물 없는 곳이 드물어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도 찬물 한 그릇만 주세요.”하는 것이 별 흉이 아니고 상대도 아무 부담 없이 베푼다. 청량음료나 기능성음료 보다 순수한 찬물이 그냥 더 정감이 간다.

 

  한 여름 온몸으로 땀 흘리고 난 후 마주하는 한 그릇 찬물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꿀꺽 꿀꺽 목줄을 타고 넘어 뱃속까지 내려가며 타는 목마름을 일순간에 풀어주는 그 시원함을 무엇에 비할까.

  추운 겨울 덥혀진 방에서 하고 머리를 치듯 흐릿한 정신을 맑게 헹구어내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느슨하게 풀어진 우리의 삶에 가하는 일침(一針)처럼 찬물 한 사발은 신선하다. 흔히 냉수마시고 속 차리라는 속담처럼 나태한 일상에 대한 서늘한 경고가 한 그릇 찬물이다.

 

  내 자신이 남을 향하여 그만한 과단성(果斷性)을 보여줄 만큼 결연(決然)하지 못하고 자주 드러내면 효과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별칭으로 찬물을 대하면서 나남 없이 수시로 시원함과 강한 동기부여를 받을 수 는 없으려나. 생각만으로도 상쾌하다. 땀 흘리며 산에 오를 때, 숨은 차고 다리는 풀린 이들 앞에 홀연히 바위그늘 아래 차고 맑은 옹달샘과 정겨운 두레박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새 힘이 솟아날까. 그 두레박으로 차고 맑은 물 두세 번 마시고, 나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숨 고르면, 다시 길 떠나고 산에 오를 솟구치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

  남에게 새 힘을 주기보다 우선 내게 그 힘이 필요하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무사안일에 빠지려할 때 한 여름 목물로 온 몸이 깨어나듯, 찬물 한 사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쇄락함을 얻고 싶다.

 

  다시 생각하니 그것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몸이 찬물을 배탈로 거부하니 그 과정을 상상함으로 족할 일이다. 가끔 별칭을 대할 때마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이가 시린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몸서리를 치면서 한마디씩 외쳐대면 좋겠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찬물이란 낱말이 새로운 충격을 준다면 얼마나 좋은가.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한스를 한수(寒水)로 다시 찬물로 바꾸어 새로운 별칭으로 삼아 내게라도 신선한 자극을 주며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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