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물
꿈에 배가 아파 깨어보니 진짜 배가 아프다. 이것저것 생각해 보아도 원인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만히 한참을 더듬으니 낮에 마신 찬물에 탈이 난 것 같다. 어쩜 그렇게 정확한지 내 몸은 찬물을 완강히 거부한다. 봄이 깊어가며 날씨가 더워져 스스로도 몸의 특성을 잊고 벌컥 마신 찬물이 배탈을 부른 것이다.
한동안 내 마음을 놓아주지 않는 낱말이 찬물이다. 오래전 영어를 공부하던 모임에서 개개인 영어 이름을 정할 때 궁리 끝에 지은 것이 ‘한스(hans)'다.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내 이름에 가장 가까운 소리를 찾으려 한 것이다. 한스는 요한의 라틴식 이름인 조한네스(Johannes)의 줄임꼴 이라고도 하고 요한의 독일식 표기라고도 한다. 요한의 본래 뜻이 ‘ 착한, 선한 ’이니 그야말로 좋은 이름이다. 그런데 별칭을 사용할 일이 늘면서 새것을 만들기 쉽지 않으니 한스를 활용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 음을 자연스레 한자(漢字)로 옮기려니 ‘스’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가장 가깝다고 찾은 것이 ‘수’였다. 결국 ‘한수’가 되었는데 또 그럴듯한 뜻을 더하고 싶었다. 한수(漢水 ‧ 寒水 ․ 韓樹) 등과 한수[一手]가 떠올랐다. 한수(寒水)가 친근하고 마음에 든다. 오래 전 수업시간에 더러 우리의 주요 명절인 한식(寒食) 이야기가 나오면 친구들은 나를 찬밥[寒食]이라 불렀다. 어떤 악의나 미움도 없고 더없이 친숙한 것이어서 거부감이 없었다. 찬물은 찬밥과 서로 짝이 될 듯하다. 다른 것들은 지역의 대표성을 띠거나 대단한 기술 같은 무게감이 들어서 내게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부담스럽다.
찬물은 순수하고 원초적이다. 그러면서도 물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드물 만큼 쓰임새도 많다. 공짜라 할 만큼 싸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한 존재, 그다지 대우받지 못해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물이다. 좋은 물은 무미(無味) 무취(無臭)라 하지만 그런 물을 ‘맛이 없다’고 하지 않고‘맛이 있다, 맛이 좋다’고 한다. 그 본래가 무미 무취니 한 곳으로 심하게 치우침도 없다. 물 없는 곳이 드물어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도 “찬물 한 그릇만 주세요.”하는 것이 별 흉이 아니고 상대도 아무 부담 없이 베푼다. 청량음료나 기능성음료 보다 순수한 찬물이 그냥 더 정감이 간다.
한 여름 온몸으로 땀 흘리고 난 후 마주하는 한 그릇 찬물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꿀꺽 꿀꺽 목줄을 타고 넘어 뱃속까지 내려가며 타는 목마름을 일순간에 풀어주는 그 시원함을 무엇에 비할까.
추운 겨울 덥혀진 방에서 ‘땅’하고 머리를 치듯 흐릿한 정신을 맑게 헹구어내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느슨하게 풀어진 우리의 삶에 가하는 일침(一針)처럼 찬물 한 사발은 신선하다. 흔히 “냉수마시고 속 차리라”는 속담처럼 나태한 일상에 대한 서늘한 경고가 한 그릇 찬물이다.
내 자신이 남을 향하여 그만한 과단성(果斷性)을 보여줄 만큼 결연(決然)하지 못하고 자주 드러내면 효과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별칭으로 ‘찬물’을 대하면서 나남 없이 수시로 시원함과 강한 동기부여를 받을 수 는 없으려나. 생각만으로도 상쾌하다. 땀 흘리며 산에 오를 때, 숨은 차고 다리는 풀린 이들 앞에 홀연히 바위그늘 아래 차고 맑은 옹달샘과 정겨운 두레박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새 힘이 솟아날까. 그 두레박으로 차고 맑은 물 두세 번 마시고, 나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숨 고르면, 다시 길 떠나고 산에 오를 솟구치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
남에게 새 힘을 주기보다 우선 내게 그 힘이 필요하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무사안일에 빠지려할 때 한 여름 목물로 온 몸이 깨어나듯, 찬물 한 사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쇄락함을 얻고 싶다.
다시 생각하니 그것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몸이 찬물을 배탈로 거부하니 그 과정을 상상함으로 족할 일이다. 가끔 별칭을 대할 때마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이가 시린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몸서리를 치면서 한마디씩 외쳐대면 좋겠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찬물이란 낱말이 새로운 충격을 준다면 얼마나 좋은가.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한스를 한수(寒水)로 다시 찬물로 바꾸어 새로운 별칭으로 삼아 내게라도 신선한 자극을 주며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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