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마을

봄을 기다리며 그대 앞에 서서

변두리1 2015. 2. 6. 20:22

봄을 기다리며 그대 앞에 서서

 

  발길을 멈추어 그대 앞에 선다. 균형도 위엄도 없이 엉성한 듯 헝클어진 듯 풀인 듯 나무인 듯, 황토 빛 재색으로 쓸쓸히 서 있는 그대를 마주한다. 겨울추위를 핑계로 오랜만에 대하니 병을 앓고 난 듯 핼쑥하고 초췌하다. 가녀린 줄기 가지에 물기 하나 없이 손만 대도 툭하고 부러져 나갈 듯하다.

  반갑네, 그리고 미안하네. 한겨울 추위 탓하며 방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 한 몸 추스르기 바빴네. 햇살 따뜻한 봄 같은 날에 그대 앞에 서니 눈보라 매서운 바람, 살에는 추위를 그대는 한(寒) 데서 맨 몸으로 고스란히 견뎌온 것을 알겠네.

  용서하게. 미안한 말이지만 몰라볼 뻔 했네. 해마다 봄 한철 지나면 잊어버리곤 했었네. 그러니 노란 꽃에 초록 잎을 함께 보면 쉽지만 꽃 지고 난 후로는 어디에서 만나도 한눈에 알아보기가 간단치 않더군. 만나도 아는 척도 안하는 내가 야속했을 법하지만 내게도 말 못할 그런 사정이 있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하리라 생각하네.

  대단하네, 자네. 겨울을 맨 몸으로 났으면서 동상(凍傷)에 걸린 것 같지도 않으니. 어떤 풀과 나무들은 겨울을 춥게 지내지 않으면 꽃을 피울 수 없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듯한 데 혹시 자네도 그런가. 그렇다면 추위를 견딘 것은 꽃을 피울 힘과 자격을 얻은 것 아닌가. 자세히 보니 가지 여기저기에 눈들이 달려 있군. 겨울추위에도 자네는 그 눈들을 잘 지켜냈구만. 눈들은 곧 꽃이고 잎이고 가능성이고 희망이잖아. 그러고 보니 그대의 꽃말이 희망이더라고. 우리사회도 나도 올해 이루고픈 희망들이 있는데 역경 속에서도 잘 간직해서 꼭 이루고 싶네. 힘들 때마다 자네를 생각해야겠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이룰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다는 것이 떠오르네. 추운 겨울이 없다면 따뜻한 봄을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겠나.

  몸이 너무 수척해 보이네. 뼈만 남은 것처럼 보이고 윤기가 하나도 없어 보이네. 겨울을 나기 위해 체력소모를 최소화한 것이었다면, 이젠 건강에도 신경을 쓰길 바라네. 자넬 보니 완강하고 뻣뻣한 것은 힘들고 고달픈 시기의 모습이고 유연하고 물렁한 것이 힘이 있고 잘나가는 때라는 생각이 드네. 삶의 전성기에서 자네 몸이 구부러지는 이유도 알 것만 같네. 올 한 해를 다 같이 새처럼〔乙〕가볍게, 양처럼〔未〕순하게 살면 좋겠네.

  이제 자네 시대가 오겠군. 자네를 영춘화(迎春化)라고도 부른다고 하던데 그처럼 딱 어울리는 이름이 또 있을까. 그대와 흡사하게 생긴 이가 영춘화는 자신의 이름이라고 우긴다지만 봄맞이꽃이 어디 그 친구 하나만일까. 더구나 봄 하면 누구나 개나리 진달래를 먼저 연상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고 당연하지. 둘 중에도 진달래는 산의 꽃이고, 주변에서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는 것은 자네인 개나리지. 마치 수많은 이들이 출발선에서 기다리다가 일시에 달려 나가는 마라톤 선수들처럼 자네들도 누구의 신호를 보고 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연락이라도 하는가. 어쩌면 그렇게 동시다발(同時多發)로 피어나나. 마치 손에 손을 잡고 달려오듯 한꺼번에 피어나는 모습이 내게는 더 없이 멋있어 보이네. 자네들이 외따로 꽃피우는 모습을 본적이 없는 것 같네. 온 산하(山河)에 노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그 화려함을 어떻게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네의 영어 이름 뜻이 금종화(金鐘花)라는 것 같더군. 그러고 보니 정말로 그럴 듯하네. 온 땅 가득 은은히 금종소리가 울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환상적인가. 그거야 말로 모든 동식물을 깨우는 봄의 교향악이지. 눈으로는 금빛 나는 자네의 얼굴을 보고 코로는 따스한 대지위에 싱그러운 자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실감이 난다네.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이 있네. 내가 자네의 열매를 본 기억이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어디선가 길가에 사는 그대들이 대부분 남성들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자네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걱정이 돼. 내가 친구들을 잘 못 사귀는 편이라 그대 같은 친구를 잃기 싫어서 하는 말인데, 그냥 기우(杞憂)이길 바라네. 자네는 무난하고 털털해서 남들에게 별 부담을 주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내가 이렇게 말해도 굳이 부인(否認)도 변명(辨明)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이 더욱 좋게 느껴져.

  그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주로 듣고 있었다. 피곤했던지 눈을 껌벅거리더니 살랑 부는 바람에 가볍게 몸을 뒤틀고 하품을 한다. 나도 모르게 하품을 따라하다 설핏 감긴 눈에 천변과 아파트단지 울타리에 개나리가 가득 피어나는 환상이 보이는 듯하다. 냇물이 졸졸 흐르고 나비들 날며 살구꽃 떨어져 하르르 날고, 새들 지저귀고 유치원생들이 병아리들처럼 선생님을 따라 손잡고 이리저리 떠들며 다니는 모습이 눈앞에 어린다.

  길가를 지나는 이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눈 뜨니 개나리의 눈 위에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발아래 땅이 녹으며 질척해지고, 볕 좋은 양지쪽에는 벌써 푸릇푸릇 새싹들이 돋아 올랐다. 모처럼 만난 개나리와 헤어지기 못내 아쉽고 어색해 쭈뼛쭈뼛 할 말들을 찾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튀어 나온다. “봄이 거의 다 왔네.” 느릿느릿 멀어져 가는 겨울의 등이 저만치 보이고, 고개를 돌리자 사뿐사뿐 다가오는 봄의 날렵한 치맛자락에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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