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문화

주일을 지킨다는 것

변두리1 2014. 12. 26. 15:38

주일을 지킨다는 것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업하는 이들이 결단을 하고 주일을 철저히 지켰더니 순이익이 증가하고 사업이 더 번창했다는 간증을 자주 들어왔다.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사업이 번창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곧 바로 연결 짓는 것도 너무 세속적인 냄새가 진하다.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다가가 보자.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주일에 일하지 않아 고객을 놓치고 수입이 감소해 그만큼 경제적 손실을 입은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것이 경제의 법칙이다. 다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한 얘기들은 주로 간증의 형태로 하는데 그것은 신앙으로 살았더니 결국 잘 되었다는 것으로 듣는 이들도 신앙적인 삶을 살도록 권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살아서 손해 보았다거나, 망했다는 것은 근본 취지에 맞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십중팔구 결과가 잘못된 사례는 묻히고 한둘의 얘기들이 확대재생산 된다.

 

  이런 성숙하지 못한 일은 권장할만하지 못하다. 좀 더 솔직해지자. 더 가치 있고 복된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세속적 가치가 모든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빌 게이츠나 스티븐 잡스 혹은 록 펠러를 원한다면 그것은 배금주의며 돈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이지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고 했다. 주객이 바뀌면 위험하다. 주일에 일을 멈추면 손해가 될 줄을 알면서도 주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귀하니 일하지 않는 것이요, 세상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 주님의 날에 주의 일을 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하니 주의 일에 하루를 드리는 것이요, 일이 넘치고 과로가 일상화된 시대에 일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이 휴식하면서 주님 안에서의 쉼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인간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끝없는 세속적인 욕망을 자제하는 훈련이기도 하다. 돈과 명예에서 한 발짝 물러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이 칠일을 일하는데 엿새를 일하고 그들을 앞서기는 쉽지 않다. 주일을 쉬는 것은 돈과 명예가 그리스도인이 지향하는 최종점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가장 즐겁고 귀하다는 고백이다. 일반인들도 쉼의 가치를 알아 주 5일 근무를 한다. 그들은 남는 날을 자신과 가족들의 꿈을 위해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달려가서 생각할 여유조차 같기 어렵다. 세속적인 흐름을 좇다보면 어느 날 세상에 속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주일을 지내는 것도 그런 일 중에 하나다. 큰 교회 혹은 기독교 선진국으로부터 시작된 듯한 교회의 예배에 한번 참여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날과 차이 없이 혹은 일반인들의 휴일과 같이 자유롭게 지내는 것이 보편화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되돌리려 해도 너무 달콤하고 익숙해져 있어서 쉽지가 않다. 주일의 저녁시간은. 더 정확히는 대부분의 오후시간까지도 세상에 내어준 셈이 되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교회의 위기” 가 왔다. 교회에서 행하던 많은 것들을 이제는 세상이 자본주의 방식으로 더 전문적인 설비와 기술을 가지고 행하고 있다. 교육은 학교에, 의료는 병원과 약국에, 문화는 방송과 신문과 문화단체에, 예식은 결혼과 장례식장에 빼앗겼다. 더욱 심각하게 교회를 위협하는 것은 이제는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아니라 스마트폰이라는 초강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 대적을 역설적이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모두 가지고 고맙게 사용하고 있고 더구나 떼어놓고 생활하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더 나아가 그 강적이 기독인에게 유용하고 달콤한 것들도 공급하고 있어서 때에 따라 친구도 되고 적이 되기도 해 명확히 구분할 수 없어 물리치려 하다가도 가까이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회가 유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우리를 더욱 곤란하게 하는 것은 기독교문화가 앞서있는 나라들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니 놀랍게도 그들은 더 심각한 증상을 겪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별다른 해결책이 없고 오히려 그들이 해답을 찾고자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기독교문화가 강한 곳들이 절망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가 하면 기독교문화가 약한 곳에서는 살아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커다란 역설이자 혼란이다.

 

  이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서 주일 지키기라는 이름으로 오늘의 세계는 우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문제를 던지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회에게는 피하기 어려운 예리한 각도의 강속구가 되어 꽂히고 있다. 삼진을 당하든 홈런을 치든 그것은 온전히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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