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현의 조선총독부
난세를 사는 여러 모습들
활동량이 적을 수밖에 없는 겨울에 생각만 있었던 장편소설들을 읽고 싶었다. 토지,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 혼불, 임꺽정 등 대충 꼽아보아도 적지 않다. 대학도서관에 서고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아 준비운동 삼아 읽어보자고 빌린 것이 다섯 권짜리 유주현의 『조선총독부』이다. 유주현은 1921년에 태어나 1943년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를 수료했다. 1948년 단편 『번요의 거리』로 문단에 나와 1968년 『조선총독부』를 발표하여 제8회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다. 1982년 숙환으로 별세했다.
「조선총독부」는 국운이 기우는 구한말부터 광복이 되기까지의 50여 년의 일들을 권력의 중심부와 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소설이다. 방대한 양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많다. 조선과 중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힘쓰는 박충권이라는 인물과 그의 애인인 윤정덕을 축으로 해서 긴 이야기가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을 몇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조선에 나와서 각 부분에서 자신들의 일을 해나가는 일본인들, 그들에게 아부하며 시류(時流)따라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조선인들, 적극적으로 그들을 배척하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우는 독립운동가들, 초기에는 자신을 지키며 항거하다가 서서히 변절하는 사람들, 가장 많게는 고통과 수모를 오롯이 감당하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이다.
시대적 분위기가 전체주의와 식민지 확장의 말기에 세계 1,2차 대전이 포함되어 있으니 가히 힘을 중심으로 하는 광기의 시대라 할만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일제의 옆 나라로써 우리민족이 받는 피해와 고통은 너무도 컸다. 섬을 벗어나기 힘든 일본의 태생적 운명을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대륙으로 뻗어보려는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그 광기는 더 없이 기괴하다. 조선과 중국과 동남아를 차지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계산인가. 그것이 몇 년이나 갈 것이며 그 과정에서 누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인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 경험만 해도 얼마나 소모적이며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일본이 한심하고 경멸스럽다.
서민들의 처지에서는 같은 민족 안에서라고 하면 누가 통치자가 되든 큰 관심이 없다. 항상 힘에 겨웠고 고통스러웠다. 나라를 잃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달라지는 것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유례(類例)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간악(奸惡)한 족속들이어서 철저히 우리 것을 착취하고 유린했으니 그 여파가 수십 년이 지나도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나라의 모든 실권을 가로채고 땅을 빼앗고 양식을 수탈해 가고, 가치 있는 자원과 문화재를 반출하고 역사를 바꾸고 언어를 못 쓰게 해서 민족혼을 뽑아내려 했다. 자신들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 최소한의 기간시설을 하고도 그것을 발전이라고 말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함을 드러내고 있다.
향일성 식물처럼 언제나 따듯하고 안락한 곳만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는 선천적인 감각이 있다. 항상 힘이 있고 유리한 곳을 살피고 그곳에 붙는다. 친일, 친중, 친미, 친러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만 권력과 안일을 누릴 뿐 아니라 대물림까지도 능하다. 그들에게는 대의(大義)나 지조(志操)를 찾을 수는 없다. 생물로서는 유능하지만 인간적인 존중을 받을 수는 없다.
그들과는 반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헌신한 이들이 있다.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로 불리는 이들이다. 그분들의 피와 땀으로 이 나라가 오늘날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 대의와 스스로의 양심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이라고 후회 없는 한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근대사가 보여주는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과 같은 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들이 총이나 폭탄으로 제거하려 했던 이들은 얼마나 커다란 개인적 잘못과 책임들이 있었을까. 과연 그들의 생명을 희생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대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 상호간의 생명이 그렇게 희생되어도 좋은 것인가.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갈라지는 선과 악, 정의와 죄악의 절대적 기준은 없는 것인가 하는 사념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 시련의 시대에 여성들도 고난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때에 따라서는 약자로서 고통과 수치를 겪었고 그것을 역이용하기도 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배정자와 윤정덕 같은 이들의 생애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역사는 중단 없이 흐르고 일제의 패망과 함께 우리민족은 해방을 맞는다. 그들은 물러가고 우리민족이 주력으로 등장하지만 평화와 행복은 함께 오지 않았다. 반민족과 친일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고 목숨 바쳐 애국한 이들의 후손들은 당당함을 얻지 못했다. 50여 년 동안, 많은 이들의 행적에 대하여 대강의 판단은 내려졌지만 옳고 그름을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들 개개인의 몫이다. 조선총독부가 위세를 떨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조선총독부」를 통해서 위기의 순간에 나타날 수 있는 인간 군상들을 만나고 민족의 역사를 돌아보며 자신을 추스르는 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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