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해변의 사색
내게 바다는 두렵고 그리운 곳이다. 만남과 겹침이 희귀하니 애증이 쌓일 게 없었다. 다만 마음속에 누구나 간직한 원형질로서의 바다가 있을 뿐이다. 사는 곳에서 벗어나길 즐겨하지 않으니 데면데면하기만 했다. 자녀들이 성장하고 어린 시절 함께 하지 못한 추억여행을 나이 들어 하고픈 마음에 자주 나들이를 제안한다. 언제까지 그런 일들을 편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니 가능하면 함께 할 각오여서 최근 그런 기회가 적지 않다.
막내가 직장을 옮긴다. 삶의 매듭 하나를 짓는 일이니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로 1박2일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세계에 휘몰아친 질병의 여파로 여행을 할 수 없어 답답함이 많았나 보다. 가족들이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는 강원도를 다시 간다. 기간이 짧고, 쉬기 위함이니 일정이 단출하다. 대관령에 있는 목장을 돌아보고 오대산 한 사찰의 전나무 숲을 걷고 오는 것이 전부다.
숙소 앞이 바다고 휴가 성수기였지만 해변에 사람들은 셀 수 있을 정도였고 어두워지는 시각이 되자 담당자들인지 사람들을 해변에서 철수하게 했다. 문을 닫으니 소리마저 고요해 바닷가라는 걸 느끼기 어려웠다. 동해 일출을 기대했다. 새벽 다섯 시 쯤에는 해가 떠오르겠지 짐작하고 시계를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쉽게 잠들지 못하다 알람소리에 일어나 바닷가에 가 보았다.
전면이 부윰할 뿐 해는 보이지 않는다. 통제선이 있어 모래사장도 아닌 해변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가끔씩 수평선으로 눈길을 주었지만 조금 붉기만 할 뿐 아무 기척이 없다. 아쉬움을 안고 숙소에 돌아왔더니 어느새 유리창을 뚫고 찾아온 햇살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짙은 구름이 우리 기대를 막았나 보다.
아홉시가 넘은 시각에야 바다에 다가갈 수 있게 허락한다. 서로 서먹하다. 바다는 나를 거절하지 않으나 친하지 않고 겁 많은 나는 바다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한다. 바나나 보트를 타고 바다를 질주하는 이도 있고, 배들은 바다 위를 떠돌아 다녀도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파도가 밀려와 적시는 백사장 끝부분에 서서 오고 가는 흰 물결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다. 사람으로 치면 손발의 맨 끝부분도 서로 닿지 않게 몸을 사리고 있는 셈이다. 반가운 인사도 악수도 없이 밋밋하고 어색하게 눈을 내리깔고 땅만 보고 있는 격이다.
말단까지 피가 통하고 기운이 전달되어야 건강한 게다. 서로 무언가 교감이 되고 교류가 있어야 친해진다. 조금은 거칠고 호방한 이들이 쉽게 친구를 사귀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이루는 이치다. 바다가 내게 수시로 손을 내밀고 내 발을 잡으려 해도 뒷걸음질 치는 내 모습이 나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도 긴 세월 반복한 행동이어서 습관이 되고 성격이 되어 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해하고 말은 하면서도 행동은 못하는 게 내 형편이다.
바다는 누구에게나 많은 기회를 주는데 내가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은 거절하고 내 것이 아니라고,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다. 어느 편이 현명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어쩌면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하기를 두려워하는 게다. 도전에 따르는 힘듦과 번거로움, 포기하며 누리는 안전함과 익숙함을 비교하면서 한 발짝도 내딛지 않고 있는 게다.
가보지 않아 더 이상 접근하지 않는 금지된 영역이 내게는 많다. 어느 순간 돌이켜 보니 활기차게 살아가는 이들의 절반에도 내 영역이 미치지 못한다. 가서는 안 되는 곳들이 있고, 갈 수 있지만 가지 않는 혹은 못 가는 곳들이 있다. 시공간 뿐 만 아니라 행동도 다르지 않다. 이제 다시 한 번 아예 포기할 것과 늦었지만 시작해 볼 것들을 점검하고 판단할 때다. 한두 해만 세월이 흘러도 할 수 없는 것들로 묶이고 말게다.
바다는 여전히 다가왔다 멀어지고, 머뭇거리는 내게 쉼 없이 기회를 주었지만 이번에도 반바지를 입고도 한두 걸음 저벅저벅 걸어가지 못했다. 오전에 몇 안 되는 이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는 인간들의 형편에 휘둘리지 않고 여전히 너그러운 마음과 넉넉함으로 지난날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지나치게 다가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 놓고 무시하는 것도 아닌 늘 한결같이 맞이해 주는 조금은 무뚝뚝한 시골의 형을 닮았다. 그리워지고 필요한 때에만 찾아가 위로받고 마음을 다잡아 돌아오는 이들이 이기적이다. 세월이 어렵고 찾는 이 없어도 바다는 늘 푸근하고 들려줄 말들을 넉넉히 그 마음에 품고 있다.
“괜찮아, 어떻게 해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내 마음에 평온이 깃든다. 고맙고 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