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창문을 열고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를 보았다. 청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오페라단으로 보이는 “라 포르짜”의 공연이다.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생활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음악회나 전람회, 오페라 같은 것을 향유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베르디가 19세기를 살다간 이탈리아 작곡가이고 리골레토가 1851년에 처음 공연되었다고 하니 대략 우리 역사로는 헌종을 이어 철종이 왕이 되고 세도정치로 나라가 어지러워 대원군이 등장하고 동학이 생겨나는 때쯤이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의 어떤 나라도 오페라 같은 수준의 문화를 일차적인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힘겨운 서민들이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도시나 마을이든 지역의 힘 있는 상류층의 생활의 일부분이며 관심사였을 게다. 이런 문화행사가 열리면 그 지역의 유력한 인사들이 모여 교류하고 정보를 교환했으리라. 남들이 다 아는 것을 모르면 민망하고 그것을 안다고 해서 인정받기는 어려웠을 게다. 서로 뒤지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명예와 자녀들의 혼사와 앞날을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참여하지 않았을까.
오페라의 내용은 만토바라는 바람기 많은 공작과 그 수하의 어릿광대 리골레토, 그리고 리골레토의 예쁜 딸 질다가 중심이다. 공작 만토바는 백작의 부인에게 수작을 걸고 수치를 느낀 백작을 리골레토가 조롱한다. 백작은 당신도 아버지의 노여움을 알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예언 혹은 저주처럼 리골레토에게 실현된다. 만토바공작은 질다에게 눈독을 들이고 학생으로 위장한 공작을 질다도 좋아한다. 공작은 질다를 납치하고 공작의 음모를 알게 된 리골레토는 살인청부업자에게 공작을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청부업자의 여동생이 공작을 사랑하게 되어 죽이지 말 것을 간청하고 그들은 자기 집에 처음으로 찾아오는 이를 죽이기로 한다. 그 집을 방문한 질다가 죽임을 당하고 리골레토는 희생자가 공작이라 생각하고 뜻을 이루었다 여기나 그 순간 공작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의혹에 차서 시신을 확인하니 사랑하는 딸이었다는 비극적 이야기다.
오페라에 있어서 내용의 비중은 얼마나 되었을까. 무대에 오르는 이들의 노래솜씨를 들어내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을까 싶다. 내용이 심오하다든가 새롭거나 감동적이기는 어려웠을 게다. 배우 중 누가 연기가 좋았다느니 노래가 훌륭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을 게다.
오늘의 사람들은 왜 오페라를 즐길까. 극의 내용에 큰 관심이 있거나 감동을 받기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자주 대하지도 않는 배우들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대단한지를 보고자함도 아닐 게다. 자신의 일에 쫓기고 세류에 휩쓸리듯 흘러가는 삶에서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한숨을 돌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틈을 얻기를 원하리라. 마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즐기는 휴가나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막간에 휴식시간이 있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어의 노래를 들으며 동시에 눈으로는 자막을 보며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우리 것인 마당놀이나 판소리 공연은 한 번도 관람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그런 것들은 노래가사를 이해하기 위해 애쓸 것도 없고 자막을 볼 필요가 없고 정서가 익숙하니 감정변화를 얼마나 쉽게 따라가고 공감할까하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자기 것이 더 좋아진다는데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들의 문화수준이 높아야 선진국이라는데 우리 것, 내 것을 깊고 넓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오늘의 세계가 더욱 좁아져가고 있으니 네 것 내 것을 구별하는 게 쉽지 않고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 것이 아니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없고 자랑스레 내놓기도 어렵다. 남의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 내 것이 힘이 있고 감정이 살아있고 강한 설득력이 생긴다.
우리가 남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 끝이 보인다. 여러 분야에서 앞선 이들을 웬만큼 따라잡았다. 더 이상 다른 이들의 뒷모습만 보고 갈 수는 없다. 단순했던 때는 지나갔다.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방향을 고르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우리의 할 일이다. 창의적인 사고를 위해 머리를 비우고 틈을 내 주변을 돌아보고 지난날들과 앞날을 살펴야 한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유를 만들기 위해 내 갈 길을 정하기 위해 멈춰 서는 일이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는 것이고 전시회와 영화를 보는 것일 게다.
내 생각에 몰입해 있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한다. 힘찬 박수들이 이어지고 무대와 객석에 안도감과 만족감이 감돈다. 자리를 메웠던 이들이 분주히 일어나 밖으로 향한다. 내 생활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 저녁이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더듬어본다. 내 삶이 지금 어디쯤 도달해 있는 것일까. 가려는 궁극적 목적지는 어디인가. 방향도 모르고 세류에 휩쓸려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닌가. 목적지와도 세류와도 무관하게 현재의 장소에 머물러 나태함에 길들어 있지는 않는가. 바로 답이 찾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한동안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몸에 힘을 빼고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모아 보아야겠다. 한줄기 찬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