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
《책상은 책상이다》의 작가 페터 빅셀의 산문집 -
사유의 계기를 마련해주고 느림의 미학을 발견하게 한단다. 맞는 말이겠지. 저명한 상을 많이 받은 세계적인 칼럼니스트요 대단한 작가요 글들이란다. 이런 땐 읽어보니 정말 대단하다, 하나하나가 주옥같고 수많은 깨달음을 준다고 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잘 모르겠다. 그게 수준차요 실력의 차이인가보다. 원체 변화의 속도가 빠른 세상에 살다보니 정신을 가다듬을 여유가 없었다. 생각하는 사이에 남들은 저만큼 가고 있는 듯하다.
이 글들을 읽고 내가 해본 생각들이다. 기다림이 사라져간다. 기다림이 무의미한,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예전의 삶은 그 자체로 기다림이었는데, 기다림의 과정이 그리움이고 돌아봄이었는데 그것이 없어졌다.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하면 답장을 받기까지 존재했던 여유가 사라졌다. 메일은 순식간에 가고 스마프폰은 바로 응답이 온다. 기다림에 따른 기대와 불안과 설렘이 모두 어디론가 가버렸다. 상상과 추측이 껴들 공간이 없다. 라디오에서 TV로 옮겨가면서 목소리에 따른 얼굴모습을 상상할 여유 없이 화면을 보듯 순간에 확인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생활권이 확대되었다. 어릴 적에는 내 사는 곳에서 서울이 네 시간이 족히 걸렸는데 이제 빠른 열차를 타면 40분이면 도착한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역세권이 확장되어 문화와 경제의 수준이 높아지고 폭이 넓어진 것은 분명한데 더 강력한 경제와 문화에 흡수 되어버린다. 변두리까지 와서 물건을 사지 않고, 변두리 사람들이 도심에 가서 물건을 산다. 쏠림현상장이 커진 게다. 변두리에게 막강한 경쟁상대가 나타난 게다. 함께 했던 고객들이 더 나은 문화권을 찾아 떠나 버리는 게다.
공동의 것이 사라지고 내 것이 무한 확장되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공동우물이 있었다. 전화가 있는 집에 신세를 져야 할 일이 생기고 궁금증이 일면 TV가 있는 집에 가면 마을 사람들이 몇 명 있기도 했다. 시대가 급격히 달라졌다. 개개인이 전화를 소유할 뿐 아니라 언제 어디나 가지고 다닌다. 그 전화엔 사진기까지 내장되어 있고 모르는 것을 알려주기까지 한다. 길을 몰라도 그 녀석에게 물으면 친절히 가르쳐준다. 이제 그 기계는 더 이상 기계가 아니다. 가장 친한 친구요 비서요 스승이요 내 모든 걸 소유하고 있다. 친구는 없어도 되지만 이것이 없으면 무척 불안하고 어쩔 줄을 모른다. 내 것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내 침대와 책상은 기본이고 내 방도 사유화되어 있다. 내 것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한다. 누군가 내 전화를 본다면 굉장히 불편하다.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온전히 내 것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마을에 몇 가정에만 있던 TV는 각 가정을 넘어서 각 방에 한 대씩 놓여있고 그것도 부족해 작은 전화기에 들어가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TV의 세계와 내 현실의 차이가 더욱 커진 걸 자각하지 못하는 게다. TV로 축구중계를 본다. 통신과 기술의 발전으로 시시한 경기는 보여주지 않고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만 중계한다. 이제 분데스리그도 지나 프리미어리그나 챔피언스리그 혹은 월드컵을 보여준다. 관심이 있는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이름과 연봉과 기술과 전략을 꿰고 있다. 그러니 한국의 대표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눈이 높아지고 확대된 게다. 하지만 발은 그렇게 빨라지고 정교해지지 않는다. 정보습득과 기술의 진보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눈이 높아졌으니 모두가 감독이 되고 비평가가 된다.
점점 반려동물이 늘고 있다. 자신만의 취미에 몰두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내 사유가 늘어나고 공동의 것이 줄어드는 게 의미하는 건 무얼까. 집에 돌아와 가족과 함께 있음이 애매해졌다. 서로 귀가의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그면 만날 일이 없다. 함께 있어도 공간이 나누어지고 가까이 병존하고 있을 뿐이다. 내 어렸을 적에 아랫집에 은수 아버지가 계셨다.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나와 잘 놀아 주셨다. 아는 것과 생활이 다르고 가족도 아니었지만 서로에 대한 많은 걸 알았었다. 가족들은 웬만하면 한 방에서 한 이불속에 같이 잤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웃들은 서로 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고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담이라 해야 나무 몇 그루 경계가 되어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었고 여기저기 틈이 벌어져 있었고 서로 왕래도 적지 않았다. 이제 이웃들은 잘 왕래하지 않는다. 서로 마주보고 살아도 잘 알지 못하고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면 완벽한 사생활이 보장된다. 서로 겹칠 일들이 없다.
철저히 혼자가 되고 지식과 경제수준이 향상되었다. 함께 하는 일은 없어지고 개인의 책임이 늘어났다. 내 어린 시절처럼 반시간 넘게 함께 이야기하며 장난치며 친구들이 학교에 가고 집으로 오지 않는다. 동네에서 서로 어울려 놀지도 않고 다툼이 생기지도 않는다. 아이들을 학교 앞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학원과 과외를 거치면 친구들과 놀 시간도 놀 상대도 없다. 직접적인 만남은 줄어들고 스마트폰을 통한 연락만 주고받고 알지 못하는 상대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기계 속에서 놀고 있다.
자연을 떠나 기게 속에서, 만나서 몸으로 부딪치지 않고 문자를 통해 알지 못하는 이들과 소통 아닌 소통을 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모두가 이상한 시대에서 이상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