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만천홍(滿天紅)

변두리1 2017. 5. 18. 07:07

만천홍(滿天紅)

 

   해마다 찾아오는 어버이날, 이제 찾아뵐 어른이 장모님밖에 계시지 않는다. 집에서도 어린이날은 해당 사항이 없고 어버이날에는 아이들이 우리를 챙긴다. 그러니 우리는 장모님을 챙기고 아이들의 챙김을 받는 처지다. 아내가 장모님께 전화를 하는 모양이다. 댁에 계신지를 확인하는 것이리라. 서로 티격태격하는 터가 장모님은 무얼 오려 하느냐하고, 아내는 가까이 살면서 어버이날인데 당연히 가 뵈어야지 하는 것 같다.

 

   아내가 꽃을 사간다고 하니 필요 없단다. 왜 가까이 살면서 찾아뵈려 하는데 아니라 하시는지 모르겠다며 불평이다. 옆에서 분위기를 보는 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오지 말라는 장모님의 말씀은 마음과는 다른 반어법임이 분명하다. 꽃을 사지 말자더니 금방 다시 꽃집을 들르잔다. 꽃집은 언제 찾아도 기분이 좋다. 색색의 수많은 꽃들이 마음을 상쾌하게 해준다. ()을 고른다. 비싸지 않으면서 눈에 확 띄는 게, 푸른 잎사귀에 분홍꽃이 매혹적이다. 호접란에 속하는 만천홍. 화분에 세 그루를 심었다.

   마음이 풀어져 즐겁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다리고 계신다. 한두 마디 언쟁을 한 게 마음에 걸리시는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 분명하다. 만천홍을 자리에 놓으니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한 마디도 더 할 필요가 없다. 그 꽃의 꽃말이 행운을 가져다준다.’란다. 그 꽃이 적지 않은 연세이신 장모님께 정말로 건강과 기쁨의 행운을 가져다주면 좋겠다. 살펴보니 TV에서는 K리그 축구를 하고 있다. 3층은 두 세대가 사는데 이곳은 온전히 장모님 혼자 사용하신다. 그런데 팔십대 중반의 할머니가 생뚱맞게 왜 축구중계를 보고 계실까. 신기해서 축구 좋아하시냐고 물었더니 그냥 틀었더니 나와서 그대로 두었단다. 방안의 고요가, 적막함이 싫으셨던 게다. 어떤 것이라도 적막함보다는 나으신 게다.

   오지 말라고 하시더니 이것저것 먹을 것을 내 오신다. 매일 본다고 한들 싫으실까. 어버이날이라 온다는 것을 말리는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오지 말라고 하면서 먹을 걸 챙겨놓으시고 기다리는 마음을 헤아리는 나이가 되어가는 듯하다. 장모님은 어쩌면 딸과 함께 한 힘겨웠던 시절을 회상하시는 지도 모른다. 고달팠던 1960년대와 1970년대, 먹을 것 귀하고 할 일은 지극히 적었던 그 시절. 모든 것을 다 잊고 자녀들 굶기지 않고, 가르치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었을지도 모른다. 장모님 세대, 억척같던 그 분들의 피와 땀으로 학교를 다니고, 가정이 살고, 나라 형편이 나아졌다. 저녁을 여럿이 함께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지만 장모님 차려 내오신 것을 그냥 물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일어서는 딸에게 아쉬운 듯, 여러 먹을거리를 내놓으시며 갖다 먹을래?’하고 물으시고, 아내는 그럼 좋지요, 주세요.’를 되풀이 한다. 한 때는 언제 헤어져 사는 일이 있을까 생각했을 모녀관계, 이제는 만나도 이삼십 분이면 또 다시 헤어진다. 돌아서니 눈 닿는 곳에, 새로 자리한 만천홍이 활짝 개인 얼굴로 웃고 있다. 장모님은 못내 아쉬운 듯 거리 어귀까지 따라 나오신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기쁘고 홀가분한가 보다. 결혼생활 동안 여러 차례 들은, 장모님의 젊은 시절 고생담을 또 다시 이야기하면서, 동네 사람들은 장모님이 나이 들면 허리를 제대로 못쓸 거라고 말들을 했단다. 하지만 장모님은 연세보다 훨씬 건강하시다. 정기적으로 여행 다니시고 노인대학에도 가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자녀들 모두 건강히 맡은 일 잘 하고, 큰 걱정 없으니 좋으신 것이다. 젊어서 고생하며 가정을 돌보신 장모님 덕에 오늘의 형제들이 있다고 아내는 항상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찾아뵐 어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버이기도 하니, 아이들 생각을 하며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와 자기가 한 일을 비교하는 듯하다. 시대가 나아져 장모님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쉽지만은 않은 날들이었다. 누군들 만족하게 자식들에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으랴. 지난날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지만 아이들은 벌써 훌쩍 커 버린 걸 어쩌란 말인가.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는 역사에서 큰 은총을 받았다. 일제시대의 서글픔과 한국전쟁의 참혹함이 모두 빗겨 가고, 어렵다고 아우성을 치기는 해도 가장 풍요로운 시절을 살아간다.

   아내는 우리가 좀 더 여유가 있으면 더 잘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운 마음을 떨치기 힘든가 보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장모님 방에 새로 자리 잡은 진분홍 만천홍이 큰 힘을 발휘해 장모님께 많은 행운을 가져다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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