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외로움에 기대어

변두리1 2017. 4. 25. 07:50

외로움에 기대어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기차를 타고 강원도를 다녀왔다. 바다를 보고 싶어서였는데, 네 시간 반 기차를 타고 갔다가 이십분쯤 동해를 보고 또 네 시간 반쯤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멀미약을 붙인 아내는 졸면서 가고 나는 산과 들과 내를 보며 갔는데, 터널이 어찌나 많은지 자연을 보려하면 수시로 나타나 속이 울렁이기도 했다. 높은 산을 오르는지 마치 기차로 등산을 하는 기분이었다. 내 고장에서 제대로 보지 못한 봄꽃들과 연두 빛 신록들을 실컷 즐긴 하루였다.

 

   기차는 들판과 산 사이를 누비며 줄기차게 나아갔다. 분홍과 노랑 그리고 흰색의 꽃들과 연두색 이파리들은 지역에 따라 시작도 하고 절정으로 치닫고 이미 시들어가는 곳들이 있었다. 그들 곁을 지나노라니 뭇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나이 들어가는 미인들을 대하는 것 같았다. 철길 가에서 홀로 피고 지는 그들이 외로워 보였다. 그들만 아니라 저 산 속에는 홀로 피고 지는 꽃과 나무들이 얼마나 많으랴. 가을이 되면 그들의 열매도 홀로 맺고 홀로 익고 홀로 떨어져 거름이 될 것만 같다.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기차도 외롭긴 마찬가지다. 기차는 태생적으로 외롭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노랫말처럼 기찻길을 따라서는 사람들이 그다지 모여 살지 않는다. 승용차나 화물차가 다니는 도로 곁으로는 많은 가게들과 집들이 늘어서고 다수의 사람들이 산다. 어디서든 차들이 서고 사람들이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차는 다르다. 정해진 곳에서만 서고 사람들이 내린다. 약속되지 않은 곳에서 서거나 내리면 그건 사고다. 사람이 없는 곳에 가게가 생길 리 없다. 많은 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오히려 방음벽과 차단벽이 세워진다.

   기차는 전혀 사적인 여지가 없다. 승용차나 화물차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고 심지어 배와 비행기도 개인이나 회사가 가질 수 있지만 기차가 개인 소유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장난감 아닌 진짜 기차를 자기 집에 가지고 있는 이가 누가 있을까. 우리 집 주차장에 기차가 있다고 한다면 모두가 의아해 할 것이다. 약속 장소에 자기 기차를 끌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개인적인 것이 전혀 없이 공적인 일로만 운영될 때, 융통성이나 유연함을 기대할 수 없다. 계획한 대로, 원칙대로만 움직여 의외성이 없으니 흥미가 반감되고 커지지 않는다.

   더구나 기차는 오직 외줄기, 철길로만 다니니 외롭다. 외롭다는 것은 혼자뿐,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이지 싶다. 외아들, 외기러기, 외고집, 외나무다리, 외길 인생 등 얼마나 홀로, 쓸쓸한 느낌들이 강한가. 기차는 그 오가는 노선에 조금도 가변성이 없다. 처음 운행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정해진 노선을, 정해진 시간에 시계추처럼 오가야 하니 그 아니 외로운가. 상의를 하거나 조언을 듣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다. 오직 하나뿐,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홀로 그 외로운 길을 구도자처럼 가야만 한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산과 들, 냇물을 벗 삼아 한없이 오가며 기차는 무슨 생각을 할까.

   기차는 타고 내리는 승객들과라도 친해질 수 있을까. 기차때문에 기차를 타는 이들이 누가 있을까. 기차 안에서도 잠을 자거나 창밖을 바라보거나 자기들끼리 즐길 뿐, 아무도 기차를 쓰다듬지도 끌어안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탔다가 목적지에 도달하면 조금도 미련 없이 서둘러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끼리끼리 정담을 나누기 바쁘고 기차도 그것을 알기에 승객들이 내리고 타면 아무런 덧정없이 곧바로 떠나고 만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의도치 않게 주변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가족 친척이 아닌 이들이 서로의 외로움에 지쳐친구들을 사귀어 마음에 맞는 곳을 다녀오면서 자기 가정과 스스로를 자랑하고 있었다. 뒤집어보면 자신의 외로움을 상대를 향해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외로운 세상 서로 말벗이라도 하고 손이라도 잡고 살자는 게다. 그 바람이 얼마나 오래갈까. 예전에는 그런 이들이 없었을까. 나이가 들면서 병들어 서로 못 만나고, 먼저 하늘로 가서 헤어지고, 어쩔 수 없는 이사로 멀어지기도 했으리라. 인생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것인지 모른다. 혼자 오고 혼자 떠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지 싶다.

 

   봄날의 낮이 짧은지 청주 역에 내리니 사방에 어둠이 내렸다. 내 차를 세워 둔 곳에 오니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그곳에 개인의 소유, 개인의 영역이 있고 내가 사용하는 흔적들이 있다. 한낮의 기차 안보다 기온이 낮을 게 분명하건만 따듯함이 느껴진다. 집으로 향하며 어느 길로 갈까를 고민한다. 속도를 높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도로에 몰려든 주변의 차량 불빛들이 이 한순간 함께 가는 존재들이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늦은 봄날에 외로운 기차를 타고, 외줄기 철길을 따라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산과 들과 내를 지나며 붙박인 듯  홀로 피고 지는 꽃과 나무들을 보면서 오늘 내 외로움의 키를 한 뼘이나 더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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