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삶
1.나의 학생 시절( ~ 1980)
언제까지를 학생이라고 해야 하는가? 내 경우에 애매하기는 하지만 순수한 학생시절은 1980년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1959년 청주의 변두리에서 내세울 것 별로 없는 가정의 3남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마흔다섯, 어머니는 서른아홉이었다. 내 위로 누이와 형 둘이 있었는데, 나와는 각각 다섯, 열, 열네 살의 차이가 났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별로 없어서 부모님은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고 위로 형제자매들과는 나이차이가 적지 않아 함께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외톨이처럼 자라났다. 어린 시절 내 친구는 스피커였다. 그 때에는 라디오가 귀해서 대부분의 가정에는 한두 방송만 들을 수 있는 스피커가 설치되었고 그것은 거의 하루 종일 틀어져 있었다. 내 하는 일은 방송을 듣고 상상하기였다. 그 당시 길게 방송되어서 수없이 들었던 것이 아침의 “즐거운 우리 집”과 오후 한 시경의 “김 삿갓 북한방랑기”였다. 그러니 내 사상의 많은 부분은 그 시절에 들었던 한국방송공사에 영향일지도 모른다.
학교에 다니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분명해졌다. 예체능 분야에 대해서는 적성과 재능이 모두 없었다. 그 긴 학창시절 동안 제대로 익힌 노래 한 곡, 완성한 그림 한 점, 이렇다 하게 내세울 운동 한 가지가 없고 취미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러니 남들이 즐거워하는 음악 미술 체육 시간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노래 한 곡, 춤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니 논다는 것 자체도 흥미가 없었다. 그래도 얌전한 성격으로 말썽을 부리지 않으니 학교생활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는 착실하다는 것 하나로 인정받을 수도 있었고 성적도 어느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부터는 그것이 통용되지 않았다. 바라기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예체능에 재능이 없으니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사범대였다. 하지만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동료들은 경쟁 상대였고 그들은 내게 너무도 버거웠다.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윤활유가 되는 것이 운동과 노래였고 술이었는데 나는 그런 것들과는 관계가 멀었다. 중학교 시절에 조금,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서 남들이 유흥이라고 하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그런 면에는 재능 자체가 없었다.
사범대를 마칠 때가 되자 한 가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내 삶이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날마다 똑같은 것을 서너 반을 돌면서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그것을 해마다 되풀이 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집에서는 군대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해서 경제적으로 적어도 독립을 하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나는 나대로 그렇게 의미 없이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신앙을 전하며 사는 것이 나다운 삶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2.신앙을 전하며 살기로( ~ 1989)
이제까지와는 다른 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신앙을 정립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3년에 걸쳐서 익히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학비를 위해서 어머니는 아이들을 상대로 주전부리 장사를 하셨다. 내가 조금이라도 생활력과 유능함이 있었더라면 어머니를 그렇게 고생하도록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기는 빠르게 지나갔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교회의 대략적인 것을 소규모교회에서 익힐 수도 있었고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 청년들의 피할 수 없는 국방의무를 군종장교로 대신할 수 있었다. 한때는 그 일이 내게 잘 맞을지 모른다는 판단에 긴 세월을 군에서 보낼까도 고심했었다. 이런저런 사유로 5년 넘게 군 생활을 했다. 하지만 스스로 내린 결론은 군 생활도 내 삶을 온전히 바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군에서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를 본 것은 사실이지만 내 가치관과 재능에 온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 군대와 가장 가까운 최전선에서 그리고 한 발 물러난 곳에서 두 해를 보내고 군병원에서 삼년을 병사들을 대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며 고충을 듣고 영혼을 돌보며 살았다. 내 결정에 확신을 가지고 내가 있을 곳이라고 확신하며 새로운 곳에 삶의 거처를 잡았다.
3.생각처럼 되지 않던 시련기( ~ 1999)
많은 이들이 염려도 하고 기대도 걸어주었다. 실제 목회에 대한 철저한 대비 없이 뛰어든 현실은 결코 녹녹하지 않았다. 책을 통한 이론연구를 한다고 했지만 그것도 어설펐을 뿐 아니라 훈련 없이 임한 현장은 특혜도, 예외도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저극적인 도전이 없으니 어떤 결과가 주어질리 없었다. 찬바람 부는 치열한 경쟁 속의 목회 현장은 비닐하우스 같은 꽃나무들로 가득 찬 대학 캠퍼스나 병사들을 몰아다 앉혀주는 군부대가 아니었다. 자신이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던 나는 시작만 하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줄서서 내게로 올 것으로 생각했다. 현실은 상상과 달라서 세월이 가도 그냥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답답함이 깊어갈 때, 이웃교회로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교회가 달라지고 환경이 조금 달라진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교육과 훈련을 받아보고 시도해 보았지만 몸에 배지 않은 것이 효과를 낼 수는 없었다. 그때 내 스스로 찾아낸 돌파구가 성경읽기와 체력향상과 열등감 해소를 위한 운동이었다. 그 일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에도 교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때는 이미 결혼을 한지도 십여 년이 넘어 세 딸이 있었고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다니고 아내는 적지 않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내가 현실을 얼마나 힘겨워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해했을까를 지금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나 자신은 무언가를 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지만 교회성도들은 내 하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놀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설교에 많은 힘을 쏟았지만 성도들은 큰 관심이 없어보였고 오히려 자신들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해가 거듭되어도 변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으니 목회자도 교인들도 지쳐가고 있었다.
4.교육 목회의 길을 모색하다( 2000 ~ )
교회가 이전을 하고 성도들이 자주 모여 어떤 분야에 교회가 힘을 쏟아야 할 것인가를 상의했다. 오랜 논의 끝에 의견을 모은 것이 교육을 통한 지역봉사였다. 지역이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하고 자녀들을 돌보기에 열악한 상황이어서 교회가 그 한 부분을 감당해보자고 결심했다. 건물을 임차하고 공사를 거쳐 기독교 학원을 열었다. 그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한 가지 일이 이해당사자들에게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다 될 수 있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가르치는 일과 경영은 또 다른 영역이었다. 낮은 학습비로 적지 않은 인원을 교육하고 강사들에게 제대로 급여를 지급하는 것은 출발부터 쉬운 일일 수 없었다.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의욕적으로 도전했던 이들이 주저앉았다. 전체적인 책임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한 일을 내 자신은 너무도 간단히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것은 지역민에게도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들이 한 발 물러나 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 한 해의 격무는 견디기 어려웠다. 평일에는 수업이 빼곡하고 주말에는 교회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일 강의가 없을 때에는 시내 어디에서 학생의 요청이 오든지 운전을 해야 했다. 바쁘고 몸이 피곤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래도 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 고통이었다. 큰 규모로 시작했던 것을 대폭적으로 줄였다. 모든 일을 아내와 둘이 해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홀가분했다. 시설을 줄이고 여러 제약이 있는 공적인 사교육에서 탈퇴했다. 거주시설도 열악해졌다. 한 해만 고생을 하자고 한 것이 칠 년을 안쓰럽게 지냈다. 아이들은 해가 다르게 나이가 들고 상급학교로 진학하며 적지 않은 교육비가 들어갔다. 경제적 계산이 느리고 대책이 서지 않는 남편과 함께 생활해야 했던 아내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때 정부는 사교육을 억제하기 위해서 고발제도를 활성화한 적이 있었다. 지역에서는 인정을 받고 많은 이들에게 적은 비용에 양질의 교육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고발과 포상금을 노리는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경상도에 주소를 두고 있는 모르는 이에게 고발을 당하여 벌금을 물었다. 그 후로 합법적인 장치를 강구해 두었지만 마음으로부터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처음에 이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아내와 나를 특별히 훈련시켰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나를 하나님은 기독교 중학교를 다니게 해서 주님을 알게 하고 교회와 만나게 하셨다. 지역에서 가장 명망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게 하고 각각 국립교대와 국립사대를 나오게 하시고 아내에게 십여 년의 현장 경험을 하게 하셨다. 이 일을 하도록 그동안의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하고 내 일이 아님을 알게 하고 이 좁은 길로 이끌어 오셨다고 생각한다.
5.방송대 학생이 되어(2012 ~ )
2012년에 방송대 2학년으로 아내와 함께 편입을 했다. 우리 부부는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둘 다 흥미를 가지고 있는 영어를 배우면서 보다 깊은 지식을 얻고 에너지를 공급받고 싶다.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이지만 보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전념하며 지도하고 싶었다. 물론 여러 가지 제약과 적지 않은 나이를 고려하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영어와는 오랜 세월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왠지 모르게 영어가 낯익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중 고교 시절에 잘 하지 못했지만 긴 세월 동안 영어를 붙잡고 살았다. 내가 수십 년 끈질기게 한 일이 있다고 하면 영어와 한자와 성경 그리고 탁구였다. 대단한 재능이 없어서 이렇다 할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크게 후회는 없다. 그러한 것들을 묶어서 어떤 일이 생겨날지도 모를 일이다.
방송대를 통해서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게 되었다. 한자를 오랫동안 좋아하고 가까이했는데 동아리 중에 한자동아리가 있었다. 한 주에 한 번씩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한자에 더 깊이 몰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글쓰기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어서 어떤 과정이 글을 쓰는 바른 기준이 되는가 알고 싶어 듣게 되었는데, 그 일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문장을 쓰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이 벌써 4년차가 되어서 적지 않은 양의 글들이 쌓이게 되었다. 남들에 비하면 잘 쓴다고 하기는 쑥스럽지만 그 글들을 쓰는 동안에 많은 것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종합적으로 생각하는 힘도 기르게 되는 듯하다. 그 일에 그동안 익혀둔 한자와 영어도 적잖은 도움이 된다.
그 과정을 거치며 내가 오랫동안 해 온 성경읽기와 연관을 지어보았다. 내가 스스로 읽어온 성경의 행간을 읽고 내 나름으로 이해하여 글로 옮겨보는 것이다. 그 일이 어디에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남들의 관점에서만 아니라 내 스스로의 관점에서 보다 친숙하게 본다는 것에 큰 매력이 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성경 인물들을 표현한 바 있다. 운보는 문화의 턱을 낮추고 토착화하는 일을 해낸 것이다. 그 일이 꼭 그림에서만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각 분야에서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영역에서 실천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의도했던 일이 아니지만 나를 이끈 그분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이 길로 나를 데려왔는지 모른다. 출발할 때에는 어느 경로로 어디까지 갈지 알지 못하나 진행될수록 방향이 구체적으로 정해지고, 먼 길을 온 후 돌이켜보면 몇 번의 갈래 길을 지나며 자신을 위한 독특한 길을 걸어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내 걸어온 길이 먼 길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깝지도 않다. 우리 나이로 환갑을 맞고 있다. 이제 공적인 인정을 받아 이 길에 들어선지 삼십 년이 훌쩍 넘었다. 세월은 가고 이루어 놓은 것은 없지만 자리를 지켜온 것도 그분의 큰 은혜라는 생각을 한다. 세 아이도 다 자라 떳떳한 직장을 가지고 있다. 남들은 직장을 떠날 나이에 별 걱정 없이 내 일에 몰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은퇴를 하고 무엇을 할까 정하지 못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할 일은 많고 시간이 부족하니 얼마나 행복한 고민인가. 지나온 날들을 때로는 억울해 하며,‘세상은 왜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가’했는데, 문제는 내게 있었다. 이 후로는 내게 주어진 세월들을 밝은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내게 맡겨진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아끼며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갈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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