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나의 집
조선족 작가 금희(본명 김금희)는 1979년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난 옌지사범학교 졸업 후 2006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슈뢰딩거의 상자’(료녕민족출판사)를 출간하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는 그녀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창비)을 펴냈다. 책에는 ‘옥화’ 등 단편소설 일곱 편이 실렸다. 22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해 1여1남을 두고 있다. “엄마나 아내, 며느리로 살아온 경험이 제 글을 풍성하게 만든다”며 “아이를 일찍 낳지 않았다면 등단을 빨리할 수 있었겠지만 글의 깊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보편적 정서를 다룬 소설을 쓰고 싶고 그 이전에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이 소설입니다.” 앞으로 보편적인 소재로 글을 써 많은 나라 독자들과 함께 공감하고 싶다고 한다. - 서울신문에서(2015.11.18.)
1970년대의 한수산 작 “부초”는 약간은 시대에 뒤진 곡예단의 유랑과 서민의 삶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삶을 위해 한국이라는 제한된 국내를 떠도는 1970년대식 모습이라면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은 정보 통신 문화 경제 등 여러 면에서 국경의 의미가 무너져가는 21세기 초반의 국제적 유랑민의 삶을 보여준다. 이제 한국을 누구도 단일사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촌의 수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또 많은 한국인들이 세계로 진출한다. 문제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같은 등급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이 현재 지구촌의 인식이며 삶의 모습이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도 그러한 설움을 겪었고 또 이 땅에서 많은 이국인들을 그렇게 대하고 있다. 소설 속의 사람들이 한 여름 연못속의 물고기들처럼 이리저리로 이동하고 있다. 그 동기는 돈을 벌어 한 곳에 정착하려는 것이다. 정착하기위해 유랑을 한다. 그 유랑에서 오는 것이 불안정이고 정체성의 혼란이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에서 주인공은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니면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두 가지 언어에 익숙하면서도 한 가지 언어만 할 수 있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처음으로 자신들의 이름으로 집을 마련해서 중국식 외형에 조선식으로 내부구조를 꾸민다. 중국인 친구 닝은 주인공의 집들이에 또 이질적인 그림을 선물한다. 조화롭지 않은 듯한 조화 속에 현대인은 조화를 이루며 산다. 불편을 넘어서 자녀들을 조선족 유치원에 보낸다.
“봉인된 노래”에서도 외삼촌은 온 집안의 사랑과 기대를 받으며 특별한 취급을 받고 성장했으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평세력으로 남는다. 그에 비해 아버지의 형제들은 더 자본주의적이다. 그 외삼촌이 내 아버지와 노래를 매개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신성하고 장엄한 봉인되었던 노래, 그 안에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은 담겨 있으리라. 여러 구호들의 ‘혁명’이 ‘사랑’으로 치환되어진다. 결국 봉인된 노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체제의 논쟁은 이미 역사를 통하여 끝이 났지만 남북 간의 이념문제는 아직도 조심스럽다.
내가 가장 흥미 있게 읽은 작품은 “옥화”다. 조선족 사회에서의 탈북자문제, 그것도 신앙으로 포장해서 다루어진 베푸는 이와 베품을 받는 이의 상대적 위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 관계를 불편해하는 여인과 베풀면서도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기분의 화자, 그 뻔뻔해 보이는 여인과 겹쳐 보이는 한때 동생과 함께 살았던 옥화라는 여인. 옥화 아닌 도움을 받은 여인이 한국으로 간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그 여인의 삶도 쉽지 않지만 그 여인이 지나는 곳마다 날카로운 쇠붙이에 긁히듯이 상처 입는 주변사람들과 그들에게 또 고통을 당하는 탈북여인들을 생각할 때 과연 무슨 뾰족한 수(手)가 있을까 답답하다.
“쓰레기통 위의 생쥐”를 읽으며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부조리가 독버섯처럼 자라는 것을 본다. 하층 중에도 하층인 불쌍한 농민의 돈을 노리는 교사의 파렴치함에 차라리 실소가 새어나온다. 아버지와 아들의 서로 교감하고 믿어주는 듯한 몸짓이 그나마 위안이다.
“노마드”는 소설 전체의 흐름과 주제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박철이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에 공감이 간다. 조선족이라는 어려움이 없더라도 죽은 듯 살아야한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머리는 죽은 것 같은데 입이 살아있고 입까지 죽었다고 생각해도 표정이 안 죽고 표정까지 죽어도 손가락이 살고 그것까지 죽어도 발이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현실적인 슬픔인가. 박철이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중국으로, 미용실을 개업하는 사모님은 한국에서 중국으로 각자의 가능성을 좇아 부나비처럼 흘러가는 모습이 슬프다 못해 가상하다. 그렇게라도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고 시대의 흐름은 더 강한 도전을 요청하는지도 모른다.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는 수미와 선아처럼 돌고 돌며 만나고 헤어지며 속고 속이는 회전목마같은 것이 오늘의 삶인지 모른다.
피곤을 느낄 사이도 없이 저 멀리 보이는 신기루 같은 풀밭을 향해 쉼 없이 가고 또 가야 하는 현대인. 자신이 누군지 희미해지는 그가 내 모습은 아닌가, 작가 금희가 보여주는 서글픈 현대인의 자화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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