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의 작품이다. 그는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98년 작품이라는데 서른두 나라에 번역 출간되고 유명한 상을 여럿 받았다. 그렇지만 내게는 어렵게 느껴질 뿐이다. 터키라는 지역도 익숙하지 않고 역사나 문화를 모르는데 더하여 미술이야기이고 지명과 인명조차 생소하니 쉬울 리가 없다. 궁정화가의 죽음과 관련한 살인자를 찾는 추리물 같기도 하고 세큐레를 사이에 둔 사랑소설 같기도 하다. 하지만 노벨상 작가니 그 이상의 것이 있을 듯하다. 동서 문화의 충돌이라느니 신구의 갈등 혹은 신과 인간의 이야기 등의 거창한 표현을 해야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주인공은 카라다. 그는 조카 세큐레를 좋아한다. 그것을 눈치 챈 세큐레의 아버지 에니시테는 그들을 떼어놓고 딸을 결혼시킨다. 남편은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 4년 동안 소식이 없고 그 사이에 그 동생이 세큐레에게 눈독을 들인다. 세큐레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 머물고 아버지는 서기가 되어있는 카라를 술탄이 명한 그림책을 완성하기 위해 불러온다. 궁정화가 중 한 명인 엘레강스가 살해당해 우물에 묻히고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화가인 에니시테가 살해된다. 그림책의 완성과 아버지의 살해자를 찾기 위해 세큐레는 아버지의 죽음을 감춘 채 이혼과 결혼을 서둘러한다. 새 남편은 카라인데 세큐레는 아버지의 살해범을 찾는 것과 그림책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없다고 카라에게 선언한다. 갑작스런 결혼으로 당연히 전 남편의 동생 하산과 문제가 생긴다.
에니시테의 죽음은 세큐레의 결혼이후에 널리 알려지고 술탄은 범인의 색출을 화원장 오스만과 카라에게 맡긴다. 오스만은 첫 희생자에게서 나온 말 그림에서 찢어진 채 위로 향한 코를 발견한다. 그들은 숱한 그림들을 확인하나 같은 코를 가진 그림을 찾지 못하고 한밤에 의심이 가는 화가들에게 말을 그리라고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오스만은 술탄에게 국가의 보물급 그림과 책들로 가득한 국고(國庫)를 볼 것을 요청해 2박3일 동안 진귀한 그림들을 접한다. 오스만은 장인들의 마지막 단계인 장님이 되는 과정을 스스로 선택하여 그림의 대가(大家)가 자신의 눈을 찌른 바늘로 자신의 양쪽 눈을 찌른다. 그 많은 그림들을 대하면서 오스만은 카라에게 미술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해 준다. 마침내 카라가 찾아낸 찢어진 코를 가진 말 그림을 토대로 범인을 찾아낸다.
전편을 통하여 의미 있게 다가온 몇 몇 부분들을 회상해 보자. 원근법의 사용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세밀화 자체가 신을 위한 그림이요 술탄을 향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눈보다 저들의 시선이 중요하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원근법이나 베네치아적 화풍은 경건하지 못한 이교적인 것으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만큼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다. 대세가 원근법을 사용하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스타일 혹은 개성은 불완전함 혹은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신이 보는 것과 같은 온전한 그림은 숙련된 사람에게 차이가 없어서 누가 그렸는지를 모를 만큼 개성이나 스타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린 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은 그림이 온전치 못한 곧 부족과 결함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언젠가 글에서 우리가 다른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비대칭에서 비롯된다고 읽었다. 대칭은 기억에 남지 않고 특징적이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세큐레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사랑싸움을 보면서 매력이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로 소유하고픈 욕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서로를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치열한 다툼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역사나 주변에서 보아도 매력적인 이들이 평화로운 생애를 살기가 쉽지 않다. 뭇 사람의 눈길을 끄는 아름다운 꽃이 먼저 꺾이기 쉽다. 오늘날 아름다움에 모든 것을 거는 듯한, 성형이 손쉽게 행해지는 현실에서 한번쯤 기억해야 할 사실인 것 같다.
오스만은 그림에 있어서 그린 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눈과 코와 잎 같은 부분은 화가라면 누구나 마음을 쏟아 연마하기 때문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귀는 소홀히 여겨서 자신의 방법대로 쉽게 그리기 때문에 그것이 오래되면 그 사람만의 것이 되어서 많은 그림을 그려도 개인에 따른 고유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말에 있어서는 갈기나 발굽 발톱 같은 것들이었다. 우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것보다 사소한 것이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국고에 모아져 있는 수많은 보물급 물품들을 오스만과 카라가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서 살펴본다. 오랫동안 봉인된 채 자물쇠가 채워져 보관되어지는 귀한 물건들이 아쉬웠다. 왜 많은 이들에게 공개되어 그것들이 만들어진 근본적인 목적에 쓰이지 못하고 쌓여만 있는가.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 쏟았던 숱한 장인들의 노력과 땀이 허사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르네상스는 신에게서 인간을 해방시켰다고 말하고 중세를 암흑기라고 일컫는다. 근세에 접어들은 후로 인류는 가속도를 붙여 원하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그 결과의 하나가 자연의 파괴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전 세계적인 감시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의도적으로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거나 중세에 계속 머물렀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달려온 결과가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인간중심으로, 우리외의 존재들을 무시하며 지나치게 빠르게 달려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이 중심이라는 관점에서 한발 물러나서 우리의 유익만이 아니라 작고 약하고 말 못하는 것들에게도 함께 살아갈 여지를 확보해주는 삶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인간중심으로 긴 세월을 살아왔다면 이제 신의 마음을 헤아려 살아 보는 것도 해 볼만 하지 않을까. 오르한 파묵은 독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기를 바랐을까. 그의 작품을 읽고 느끼는 것은 독자들 각각의 몫이다.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사소한 것의 중요함인 것도 같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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