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밑에 선 봉선화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가곡이 있습니다. 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으로 되어 있는데 그 유명한 가사를 생각하면 작사가의 노래로 기억해도 될 것 같은데 대부분 홍난파 선생의 봉선화라고 합니다. 삼일 운동 직후 우리 민족의 울분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고 우리 가곡의 효시오 홍난파 선생의 첫 작품이라고 하니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일제의 총칼 아래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우리 민족의 서글픈 운명을 울밑에 선 한 송이 봉선화의 이미지로 표현한 노래입니다. 노래 가사에 네 모양이 처량하다고 해서 봉선화가 크기도 작고 모양도 초라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화단에서 자라는 것을 보니 아주 힘 있고 당당한 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마치 무궁화처럼 우리 민족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꽃 같습니다.
슬픈 사연을 간직한 꽃입니다. 결백한데도 누명을 쓰고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죽어서 봉선화가 되었다는 전설의 꽃. 슬픔과 한은 크고 깊을수록 강한 힘이 됩니다. 우리는 슬픔과 한의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근세사의 가장 큰 슬픔과 한이 일제통치기와 육이오 전쟁의 상처입니다. 민족의 온갖 한과 슬픔을 힘으로 삼아 활화산처럼 쏟아 내어 무에서 유를 창조 하듯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어 냈습니다. 봉선화의 꽃말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자존심에 상처 받지 않고 살면 좋겠는데 우리주변이 초강대국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 마음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도 뒤집어 보면 우리를 강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살아남으려면 강해지는 방법 밖에 없으니까요. 봉선화도 슬픈 전설과 함께 약한 것 같지만 수천 년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정이 흐르는 꽃입니다. 우리 민족이면 대부분 손톱 발톱에 봉선화 꽃잎 찧고 백반 섞어 붙이던 아련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은 정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시조 시인 김상옥도 장독간에 핀 봉선화를 보고는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고 읊으며 누님도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라고 확신하면서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회상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봉선화가 우리 민족의 가곡으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꽃이 우리의 민가와 산하에 널리 퍼져 쉽게 볼 수 있었던 꽃임을 말해 주는 것이며 더욱이 우리 몸의 일부로 받아들여 일체화를 이룬 너무도 친숙한 우리 정서의 꽃입니다. 우리 민족도 정으로 살아 온 이웃들입니다.
우리의 뿌리와 정서의 기반이 농경사회인데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함께 살 수 밖에 없고 지역 혈연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정으로 묶여짐이 당연한 일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각 가정의 혼례와 장례를 비롯한 대소사를 함께 하니 모두가 공동체 속에서 이리저리 엮여 있는 정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 정이 넘치는 민족이 우리였습니다.
봉선화는 생김새도 곱고 당당합니다. 네 모습이 처량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고난 속에 있는 민족의 정서를 가지고 봉선화를 보니 우리의 슬픔이 꽃 속에 투영되고 감정이 이입되어서 슬프고 처량한 것이지 그것이 본래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화단에서 크는 것을 보니 줄기가 굵고 튼튼한데 줄기는 어느 정도 자라나면 어린아이 손목 굵기가 되고 우뚝 일어선 모양이 봉황을 닮아서 꽃 이름도 봉선화(鳳仙花)입니다. 자라나는 모습이 한 해 살이 풀이라기보다는 강건한 나무처럼 당당하고 힘찹니다. 또한 꽃 색깔도 분홍 빨강 주홍 보라 백색으로 곱고 다양해서 관상용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생김새도 동양적인 아름다움과 내적인 단단함을 겸비한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마치 아름다운 숲과 정원처럼 우리 안에 다양성이 있어서 상서로운 봉황의 모습을 우리 안에 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으로 작은 꽃밭을 만들고 아내가 정성을 쏟아 부어 꽃과 나무를 가꾸는 것을 보았습니다. 꽃과 나무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큰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치유와 감동을 주었습니다. 꽃과 나무들이 자신들의 개성을 따라 그 밝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수놓는 빛나는 별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 꽃 중에 봉선화가 있었습니다. 봉선화는 유월부터 팔월까지 한 여름을 함께 하는 친숙하고 정이 가는 꽃으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민족정서에 깊숙이 자리 잡은 우리의 자랑스럽고 당당한 아름다운 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