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야곱

내 생각이 부족했다(세겜)

변두리1 2016. 3. 22. 15:11

내 생각이 부족했다(세겜)

 

   이제 늦었다. 그래도 너무 후회가 된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지나치게 내 중심으로만 모든 일을 처리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되고 말았다. 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가족들과 또 많은 우리 주민들이 내 실수 때문에 죽어가는 것은 더없이 죄스럽기만 하다. 한 여인에게 과도히 내 마음을 빼앗겨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들을 너무 쉽게 믿었고 과소평가했다. 한 번의 실수가 우리 족속을 멸절시키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여인이 본 것이 참극의 시작이었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겉잡을 수없는 동요가 내 마음에 일어났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던 길을 돌이켜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일행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족속의 수많은 여인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여인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를 잡았고 억제할 수 없는 충동으로 그녀를 소유했다. 일행이나 나 자신조차 스스로 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인을 납치하듯 집으로 데려가 안심을 시키고 알아보게 했다. 외모에서 짐작했듯이 외지에서 온 여인으로 이곳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었다. 잠시라도 그녀를 떠나보낼 수 없었고 그녀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난 아버지에게 내 사정을 얘기했고 부친은 내 성격을 아는 고로 곧바로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외지에서 옮겨와 산다고 해도 제법 규모가 있었고 재산과 하인들도 꽤 소유한 듯했다. 여인의 오빠들도 여럿이 있었다.

   어리둥절 하는 그들에게 내 식으로 원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평소의 내 자세 때문에 조금은 오만하게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그 여인을 좋아하니 내가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 일을 시작으로 서로 딸들을 취하며 한 족속처럼 살면서 땅도 매입해 농사도 짓고 이 땅에서 사업도 하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요 원하던 혜택들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오빠들은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할례라는 것을 받으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무척 어려운 일처럼 얘기했지만 내게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 조건을 수락하고 몸이 달았던 나는 우리 주민들에게 그들이 가축과 재산이 많은데 이곳에 눌러 살게 되면 다 우리 것이 될 것이고 매력적인 그 여인들을 부인으로 맞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우리 땅이 넓으니 함께 사는데 걸릴 것이 없다고 판단했고 주민들에게 반강제로 할례를 하게 해서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날로 모든 남자 성인들로 할례를 마치게 했다. 나는 내 강한 지배력과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통은 생각보다 커서 삼 일째는 견디기 어려웠다. 지역의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왔지만 잘라낸 곳의 아픔을 호소하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비명이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오더니 갑자기 내 집에 두 청년이 들이 닥쳤다. 그들은 놀랍게도 분노한 얼굴에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다. 그 여인의 집에서 보았던 그녀의 오빠들 중 두 명이었다.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려 해도 도움을 청하려 해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나와 아버지에게 칼을 휘둘렀다. 내 몸에서 피가 흘러나가고 의식이 점차 흐려져 갔다. 내 생애에 이렇게 독한 족속은 처음 보았다. 내 잘못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아버지까지 해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아까부터 들려오던 비명소리의 정체도 이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족속이 오늘 전멸을 당하는가 보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중에도 또 다른 청년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값나가는 물건들을 챙기고 아이들과 여인들을 데리고 가는 듯하다. 그들이 사라질 때에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내가 저들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의 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모든 어른 남성들의 할례를 요구했을 때 한 번은 의심해 보았어야 했다. 적어도 우리 족속을 셋으로라도 나누어 한 부분씩 할례를 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방어력의 절대 공백을 피했어야 했다. 이제 내가 한을 품고 죽는 것이다. 이 한을 이 땅에 사는 여러 부족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풀어주기를 바랄뿐이다. 저 포악한 이들을 살려두면 내 눈을 감을 수 없으리라. 내가 다스리던 이 땅에서 우리의 재물과 우리의 여인들을 데리고 저들이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으랴.

   몸의 모든 감각들이 아스라해지고 의식이 가물거린다.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선조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렇게 사람이 죽는 것인가 보다. 어찌된 일인지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단 한번만이라도 그 여인이 보고 싶다. 저승에 가서라도 다시 만나서 이 일의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내 많은 부족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오랫동안 세겜에서 삶을 이어온 이들이여, 내 한을 기억하고 우리 족속을 위하여 이 한을 풀어 달라. 내 죽어서도 그 고마움을 기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