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함께

《명랑철학》을 읽고

변두리1 2016. 3. 17. 21:05

명랑철학을 읽고

 

 

  1. 읽기 전에

  니체는 어렵다. 내가 철학에 관심은 있었지만 가까이 하는 것을 막은 몇 사람이 칸트 헤겔 플라톤 니체 같은 이들이었다. 책 제목이명랑철학이어서 조금 기대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 쉽지는 않았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친근감을 느꼈는데 그것마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니체를 이해하기에는 내 자신의 기존 지식이 없고 지적 파악력이 약한 것이 커다란 한계였다.

 

  2. 책속의 내용들

  니체가 알려주고자 했던 것은 현명해지고 영리해지고 운명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 건강한 음식을 잘 먹고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며 자신에게 맞는 휴식을 취하며 힘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비축한 힘으로 진정 중요한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이 배움에 이르는 것들을 아홉 가지로 정리했는데 대충 생각해 보려 한다.

  원한에서는약자와 강자를 다룬다. 그는 우리에게 부정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해서 온통 긍정에만 기반한 귀족적 판단양식을 가진 강자인가, 아니면 타인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을 가까스로 긍정하는 노예적 판단양식을 가진 약자인가를 묻는다. 그는 원한은 약자의 논리이지만 이 가치평가가 지배할 때는 금발의 야수들의 손발을 묶는 강력한 힘이 생긴다고 한다. 약자는 힘을 발휘하는 존재는 힘을 억제하는 존재보다 열등하다는 원한의 오류추리를 통해 우월해지고 싶어 한다. 곧 자신이 힘을 발휘하지 않고 아꼈다는 것에서 힘을 조절하지 못한 존재보다 우월한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힘을 쓸 수 없는 무능력이 오히려 도덕적 찬사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에서는 그 원인과 해결책을 들고 있다. 유일신과 더불어 원죄와 타락으로 지옥에의 운명적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 죄가 되는 삶, 죄와 양심의 가책 없이는 살 수 없는 삶. 스스로를 학대해야 신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뒤바뀐 삶으로 신에 대한 감당하기 어려운 채무감을 가지고 있는데 신의 죽음까지를 빚으로 떠안게 되어 극한 채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인(超人)이 되어야하고 초인이 될 때 허무주의와 결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계(位階)는 사람들의 수준을 이야기한다. 니체는 정신적 유형과 근육과 활력의 유형 그리고 평균적인 유형으로 사람들을 나눈다. 그는 사람들이 평등할 수 없고 더 많은 불평등을 만들어 더 많은 싸움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서로가 위로 솟는, 스스로 차이를 만드는 불평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귀해지려는 고귀한 전투, 차이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이 차이가 위계다.

  거짓에서는 절대적 진리의 부정을 다룬다. 보편적 진리는 없으며 각자 오류를 범하며 산다는 것이다. 진리가 있다는 믿음은 무지를 세련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세계가 사라지면 만 남는다고 한다.

  사유(思惟)는 무죄로의 통찰을 말한다. 니체는기독교에 대한 맹목은 범죄 중의 범죄라며 현존의 무죄를 주장한다. 신이 이 세계와 다른 초월적 존재라면 이 세계의 삶과는 무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필연이라며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비난이나 칭찬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선택이 아니니 책임이 없으며 우리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죄의 개념이 없으니 벌의 개념도 없다. 진리나 자유의지가 사라졌으니 이제 사유는 새로운 인식의 모험을 향해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인은 이제 진리와 그 기준이 사라졌으니 참다운 진리와 그 기준이 되는 초인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긍정에서는 디오니소스를 얘기하는데 그의 긍정은 가혹한 삶의 조건에서도 강력한 삶의 의지로 꽉 찬 긍정이라고 한다. 디오니소스의 긍정은 아니오를 동반하는 순수한 긍정으로 병과 건강을 모두 품고 있는 풍요로운 존재, 생성과 파괴의 영원회귀를 경쾌한 발로 춤추듯 맞이하는 존재가 디오니소스라고 한다.

  질병에서는 질병으로 인한 유익과 깨달음을 말한다. 그는 정신이 육체를 통제하는 것도 정신이 육체와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철학은 육체에 대한 오해거나 해석의 일종이다. 심각한 병을 앓아보면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의문이 솟고 회의와 의문이 드는데 이런 것들이 삶과 사유의 깊이를 만든다. 질병이 세상을 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심오해지면 세상도 심오해 진다는 것이다.

  공부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룬다. 무엇에나 정확한 원인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바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인데 이런 지혜를 얻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우상을 부수고 건강한 욕망을 원한다면 무모한 싸움이 아니라 현명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신에게로 도피할 것이 아니라 이 세계와 싸우며 조금씩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깊어지고 숭고해 진다. 우리가 위대하고 성숙해 지는 길은 이 길이 유일하다.

 

  3. 읽고 나니

  니체를 최초의 비도덕주의자, 파괴자중의 파괴자라고 한단다. 시대를 거스른 자, 아니 인류역사 전체를 거슬렀다고 한다. 스스로는 역사를 니체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저자는 니체의 철학이 정서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가득해 절망한 이들에게 희망을, 상심한 이들에게 위안을, 슬픈 이들에게 기쁨을 준다고 했다. 내가 이 시점에서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삶에 환멸을 느끼고 절망하고 있다면 니체를 권하고 싶다고 했다. 니체는 아무 희망 없는 겨울 속에서 회복기의 따듯함을, 활력을 전하는 철학적 의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반적으로 어렵다. 읽는 것 자체가 힘든 작업이 아닐까 싶다. 어려움의 극복 방식이 독서와 깨달음인 이들에게는 권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라면 고통의 때에 니체를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과 친하려면 피해갈 수 없는 존재가 니체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아예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