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안주인의 조건(엘리에셀)
사라 안주인이 하늘나라로 가신지도 3년여가 지났다. 이삭은 40세가 되었고 주인 아브라함은 140살이 되셨다. 주인은 아들 이삭과 자기를 위해서도 그리고 먼저 간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며느리를 서둘러 보아야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얘기하면서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올 들어서는 가나안 유력 집안 사람들의 출입도 잦았고 그들이 줄을 댄 매파(媒婆)들도 심심찮게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주인어른의 표정은 별로 좋지가 않았다. 그런 일이 거듭될수록 주변으로부터 점점 좋지 못한 소문들이 돌았다.
몇 달 전, 주인어른이 나를 조용히 부르셔서 찾아뵈었더니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만보셨다. 내가 찾으셨냐고 했더니 그제야 정색을 하시고는 자신을 위해 내가 꼭 해주었으면 하는 부탁이 있다고 간곡하게 말씀을 하셨다. 내가 주인어른이 명하시면 할 수 있는 일이면 당연히 하는 것이고 이제까지도 그렇게 살아왔는데 무슨 새삼스러운 말씀이냐고 말씀만 하시면 죽기라도 하겠다고 했다. 주인어른은 고맙다하시며 자신의 허벅지에 내 손을 넣으라 하셨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할 때 하는 방식이어서 긴장이 됐다. 그분은 그간의 어려움을 토로(吐露)하시며 자신의 며느리를 자신의 족속에게 가서 구해다 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삭이 가나안을 떠나게 할 수는 없으니 아들의 아내 될 처녀를 친척 중에서 찾아 달라고 했다. 믿고서 하는 부탁이니 알아서 ‘이 사람이다’ 하는 아가씨를 골라오라며 넉넉한 노자와 많은 예물을 챙겨서 낙타 열 필에 실리고 동행자들도 붙여 주셨다.
이튿날 바로 길을 떠났다. 3000리가 넘는 먼 길이었지만 일에 대한 중압감으로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수시로 기도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이었다. 기도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힘이 났다. 자주 동행인들과 신붓감의 조건으로 무엇을 보아야하는지 이야기를 나눴고 혼자도 많은 생각을 하고 지혜를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다. 십여 일만에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성에 이르렀다. 해는 기울어가고 여인들이 공동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올 어간이었다. 나와 일행은 목이 말랐지만 물동이도 두레박도 없었다. 우리 일행은 그곳서 잠시 쉬며 물을 얻어 마시기로 했다.
우물 가까이 나무그늘에 앉아 잠깐 기도하던 중 흐르는 별빛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분이 그 순간에 주인어른과 자신의 백성을 위해 내게 주신 지혜였다. 생각을 정리하여 그분께 선하신 인도하심을 간구했다. 물을 요청해서 사람들과 가축들을 향한 사랑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더하여 얼마나 열린 마음과 적극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도를 막 끝냈을 때 품위 있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물을 길어 우물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에게 마실 물을 좀 줄 수 있겠는가 물었더니 상냥스레 건네주며 낙타들에게도 물을 먹이겠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열 필의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쉬운 일도, 짧은 시간에 끝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돌보는 가축들인 양 즐거운 표정으로 낙타들을 쓰다듬고 말을 걸며 오랜 시간 물을 먹였다. 일행들을 향하여 ‘찾았다’는 눈짓을 했더니 그들도 같은 의미의 눈짓을 내게 보냈다.
낙타들에게 물 먹이기를 끝낸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금팔찌 한 쌍과 다른 금붙이를 주면서 부친이 누구인가와 그녀의 집에 일행이 머물만한 공간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놀랍게도 주인어른의 가까운 친척이었고 모든 여건과 상황이 들어맞았다. 그녀는 주인어른의 동생의 손녀였고 이름은 레베카였다. 그들은 우리를 융숭히 대해주었고 우리는 주인어른과 집안의 이야기를 소상(昭詳)하게 전해주었다.
저녁상이 들어왔을 때 나는 먼저 반드시 할 이야기가 있음을 밝히고 주인께 받은 부탁과 진행과정을 소개했다. 그리고 모든 것에 꼭 맞는 사람이 레베카라고 말하고 가부(可否)를 듣기 전에는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그들도 갑자기 대두된 문제라서 당황스러운 듯 했지만 짧은 논의 끝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자신들은 따를 뿐이라” 고 했다. 그들의 허락을 듣고 나도 모르게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절하여 감사했다. 낙타 열 필에 싣고 간 온갖 패물과 진귀한 보물들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것들을 보고 그들은 내 주인어른의 넉넉함과 마음씀씀이를 헤아리고 딸의 장래에 대해 적잖이 마음을 놓는 얼굴빛을 띠었다.
이튿날 아침 만류를 뿌리치고 레베카와 함께 하란을 떠나 홀가분한 마음과 뿌듯함을 가지고 가나안에 돌아와 주인어른께 그간의 일을 아뢰고 큰 짐을 벗었다. 며칠 후 이삭과 레베카는 모두의 축하 속에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고 주름살 깊게 패인 주인어른의 얼굴에 오랜만에 피어나는 웃음꽃을 보았다. 믿고 의지하는 이를 선하신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 좋은 기회였고 한 가문과 족속의 훌륭한 안주인을 찾아내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이 내 말년의 보람이요 즐거움이다.
'성경이야기 > 아브라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삭) (0) | 2014.12.29 |
---|---|
내 주인의 마지막 모습(엘리에셀) (0) | 2014.12.27 |
막펠라에 아내를 묻으며(아브라함) (0) | 2014.12.23 |
아내 사라여, 먼저 가구려(아브라함) (0) | 2014.11.03 |
미안해요, 먼저 가요.(사라) (0) | 2014.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