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펠라에 아내를 묻으며(아브라함)
아내가 하나님께로 갔다. 아내 나이 127세.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없지만 그토록 원했던 며느리를 맞이하지 못하고 모든 이들의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가문의 모든 이들이 슬퍼했지만 그 중에도 이삭의 애도는 각별했다. 많은 일들이 아내의 장례에 초점이 맞추어져 엄숙하면서도 분주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장지(葬地)를 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유목민족이라 어느 곳에 쉽게 정착지를 정하지 않지만 아내를 묻을 이 땅의 거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형편상 가나안에서 구해야하고 그것도 며칠 내로 사들여야하니 헤브론이어야 한다.
아내의 병이 깊어가면서 내 나름대로 보아둔 땅이 있다. 히타이트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 소유의 밭과 그 안에 있는 굴인데 이곳 사람들은 그곳을 막펠라라고 불렀다. 지금은 이것저것을 재고 따지고 할 때가 아니다. 히타이트의 족장 집으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고 아내의 죽음을 다들 알고 있었다.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땅을 내게 팔기를 간청했다. 그들 중에 꽤 지위가 있는 이는 내가 그들 가운데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자신들의 묘실 중에 어디를 사용하든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향하여 허리를 굽히고 내 요청을 보다 분명히 했다. 내 아내가 이곳에 묻히는 것을 허락한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부탁해서 막펠라의 밭과 굴을 매장지로 내게 팔도록 힘써 달라고 했다.
그들 가운데 에브론이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이 그 밭과 굴을 그냥 주겠으니 아내를 그곳에 장사하라고 하면서 그곳에 함께 있는 모든 이들이 증인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더없이 고마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들 앞에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히고 에브론에게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것은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고마운 일이지만 현 시세대로 사는 것이 나로서는 더 마음이 편하겠다고 사정하듯 얘기했다. 그는 시세대로 하자면 은 사백 세겔(약 삼백만 원)이 되지만 어떻게 그 돈을 받을 수 있냐고 했다. 그의 말대로 그 자리에서 은 사백 세겔을 치르고 모인 이들을 증인으로 하여 그 밭과 그 안의 굴과 주변의 나무들을 샀다. 모든 이들 앞에서 그 땅은 우리 것이 되었다. 그곳을 물러 나오면서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예를 갖춰 고마움을 표시했다.
거래는 분명히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서로 관계가 좋을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만일의 경우에 그 땅을 돌려 달라고 하거나 자신들이 일부를 사용하겠다고 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또한 거래는 어느 한편이 크게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도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사들이는 사람이 후하게 계산해 주는 것이 좋다. 소유주가 팔지 않는다고 하거나 부족이 나서서 거래를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염려가 있었는데 원하던 대로 최선의 결과가 되었다.
집에 돌아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모두가 안도(安堵)하는 눈치다. 드러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근의 많은 이들이 찾아와 문상(問喪)을 하고 장례를 도와준다. 그저 모두가 고마울 뿐이다. 밤이 깊었는데도 구석구석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아 여기저기가 부산하고 가끔씩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몸이 어지럽고 피곤하다. 날이 밝으면 아내와는 공간적으로도 헤어져야 한다. 이 집에 여러 가지 많은 흔적들만 남기고 막펠라 굴로 아내는 가고 더 이상 이 땅에서 아내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은 아내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 오지 않는다. 안방에 긴 세월 앓아누운 것이나 수의를 걸치고 관속에 있는 것이나 큰 차이를 느낄 수가 없다. 내일이 지나고 분주함에서 벗어나 일상을 되찾으면, 넓은 방에 나 혼자 누울 때, 밥상머리에 아내가 없을 때에야 실감하게 되리라.
마을 곳곳에서 닭들이 분주히 울고 사위가 희부옇게 밝아온다. 남아서 밤을 새우던 이들도 지쳐 아무렇게나 새우잠을 자느라 코고는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입은 깔깔하고 몸은 휘청하는 것이 조금 어지럽다. 내 나이도 젊지 않음을 느낀다. 백서른일곱, 크게 아쉬움은 없다. 아내 없이 이 땅에서 언제까지 살아야하나…. 많은 이들이 모여들기 전에 마지막 점검을 위해 한 바퀴 돌아본다.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제 날이 밝으면 다 같이 아침을 먹고 하나님 앞에서 서로 마지막 헤어짐의 의식을 마치고 막펠라 굴까지 행렬을 이루어 가서 매장을 하고 돌아오면 장례일정은 끝이 난다. 그곳의 밭과 굴도 몇 번 확인을 했고 하인들은 정성스레 일들을 마쳐 놓았다. 마을 사람들도 협조적이고 날씨도 선선하고 일을 치르는 동안 불상사(不祥事) 하나 없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어느새 선잠을 자든 이들이 일어나 채비를 갖추고, 돌아갔던 이들도 모여들고 있다. 물 푸는 소리, 세수하는 소리, 그릇들이 부딪는 소리들이 이리저리로 떠다니고, 음식냄새가 차오르고 있다. 부은 눈에 부수수한 모습으로 이삭이 내게로 온다. 여기저기서 간혹 흐느낌과 제지하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모두가 이 땅에서 백 년 하고도 스물일곱 해를 살고 떠나는 한 사람, 내 아내 사라를 마지막 보내는 서글픈, 그러나 외롭지 않은 분주함이다. 아내는 이제 막펠라에서 편히 쉬며 그곳의 안주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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