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겪을 때
삶에서 고난이 없다면 어떨까? 그런 삶을 행복하다 할 수 있으려나? 현악기의 줄이 긴장과 이완을 하지 않으면 제 기능을 유지할 수 없고 인간의 근육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풀어져 걷기도 어려울 것이다. 연습 하지 않는 피아니스트나 훈련을 게을리 하는 운동선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얼까? 대회에 나가 본들 입상하지 못하고, 실력향상을 바랄 수 없을 게다. 치열하게 준비해도 들기 어려운 게 입상권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있을까? 고난은 영광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다.
고난을 겪을 때, 가능하면 자원하는 것이면 좋겠다. 때로 자격증이나 면허가 필요한 이들이 시험을 치른다. 합격을 위해 연습을 해야 하는데 식은 죽 먹기처럼 쉽고 간단하지는 않다. 그렇게 쉽고 간단한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자격과 면허라면 왜 필요하겠는가? 준비과정이 고난이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어려울수록 인정받을 테니, 고난의 양과 성취감이 비례할 듯하다.
자원해서 겪는 고난은, 회피하는 이들이 적으리라. 스스로 원한 것이니까. 예전에는 고시낭인들이 있었다. 그 유명한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아예 멀찍이, 형편없이 떨어지면 마음을 접을 텐데, 아슬아슬하게 그것도 실수로 떨어지면 얼마나 억울한가. 한 번만 더 보면 붙을 것 같으니 놓지 못하는 것이었을 게다. 대통령도 아홉 번 만에 붙었다지 않은가?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타의에 의한, 혹은 알 수 없는 고난일 게다. 우리 역사를 보면 그런 고난이 많다. 주변 강대국의 침략에 의한 전쟁에 져서 민초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국가 지도자들 잘못이거나 우리가 자리 잡고 있는 지리적 위치가 얄궂어서 당하는 것이다. 국가도 힘이 넘치면 양동이물이 흐르듯 밖으로 향하게 되는 것인가? 욕심과 본능을 통제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집단의 모습이라 하겠다. 그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난을 겪었던가?
고난을 안겨준 개인이나 집단이 성숙함에 이른다면 자신들의 잘못을 피해자의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진심으로 사과할 게다. 오만하고 미련한 이들은 사과는커녕 그때가 좋았다고 은근히 되새기고 힘으로 여전히 피해자의 입을 막으려하고 세력을 과시하려 든다. 한 때의 세력이 영원할 것 같아도 흥망성쇠를 겪어 강자가 약자 되고 약자가 강자 된다.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받는다. 고난을 통해서 힘을 기르면 타의에 의한 고난도 유익이 될 수 있고, 알 수 없는 고난도 의미를 깨닫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한 3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해의 고난주간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거의 죽다 살아난 셈이었다. 그 때는 나만 고난을 겪은 게 아니었다. 가까운 지인들이 함께 어려움을 겪었다. 자원해서 당한 고난이었지만 그 여파가 크고 느낀 바가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수시로 잊고 사는 때가 많았다. 당시에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고마움을 합당하게 표하지 못하고 흐릿한 기억으로 살아가는 내 자신이 그분들과 내 스스로에게 배은망덕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일에, 분명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고난을 감당하는 이들도 있다. 때로는 그 일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조국의 안녕과 민주화, 인류의 평화와 인간애를 드러내기에 온 몸을 불사르는 분들이다. 이 분들은 조국의 후손들과 인류가 오랜 세월을 기억하고 기린다. 대한민국으로는 안중근 의사 같은 분이고 인류에게는 테레사 여사를 들 수 있겠다.
이들에 대한 평가가 높으니 그 일에 현저한 공로를 남기고도, 끝까지 몸조심을 잘하지 못해 망신당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자칫하면 인간의 유약함으로 명예의 함정에 빠지거나 권력의 유혹에 넘어갈 수가 있다. 선한 이름에 욕됨을 초래할 수 있으니 모쪼록 조심할 일이다. 그런 분야에 있는 이들을 각별히 멀리할 일이다.
로마의 역사에 기억되는 노에 출신 검투사 중에 스파르타쿠스라는 인물이 있다. 검투사는 로마 시민들의 불만을 쏟아내는 분출구로서 짜릿한 긴장감과 유흥을 주는 소모품이라 할 수 있었다. 검투사 훈련을 견디고 시합에서 이기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그것도 검투를 통해 살해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며 못할 일인가? 그 불의에 항거해 그는 마침내 일어섰고 그를 위시한 6,000여 노예들은 기원 전 71년 십자가에 못 박힌 채 길거리에서 죽었다. 그런 희생을 바탕으로 긴 세월이 흐른 후 노예제는 폐지되고 누구나 천부의 인권을 누릴 수 있게 역사는 발전해 왔다.
인류사에 가장 큰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고난을 겪은 이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 분의 고난은 가히 우주적이다. 신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해와 누명 속에 멸시를 겪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 분의 죽으심으로 우주적 문제들을 풀었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탄생일을 기리고 그 분의 마지막 한 주간을 매년 기억하고 매 주 첫날에 모여서 그 분을 예배하는 것이 아닌가.
고난은 자신을 성숙케 하고 남을 살릴 수 있다. 고난은 피해야 할 부정적인 존재거나 고난 없는 삶이 행복하고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역사의 참된 발전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인류를 이어갈 한 생명도 한 여인이 열 달 동안의 고난을 기쁘게 감내하므로 이 땅에 오는 것 아닌가? 그리 생각하면 고난은 변형된 복이요 감사한 마음으로 겪어내야 하는 것 중에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