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모두 다, 안녕

변두리1 2023. 4. 17. 18:12

모두 다, 안녕

 

언제부턴가 푸른 싹들이 눈에 많이 보이네. 겨우내 아무 기척도 없더니 봄이 오기는 분명히 왔나봐. 흘깃거리며 봤지만 마주보며 소개하지 않았으니 오늘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하자고. 가끔 내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것 봐서 눈치 챘겠지만 내가 이 집 주인이야. 젊은 여인은 내 아내인데 어린 아이들은 글쎄 할머니라고 불러, 너네는 그렇게 부르지 마. 물을 안 줄지도 몰라. 아줌마 정도로 하면 그런대로 화내지 않고 넘어갈 거야.

가만있어 봐. 매발톱, 수레국화, 백일홍 그러고는 잘 모르겠네. 하여튼 반가워, 뭐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 , 이름이 중요하다고? 너는 참 의견이 분명하구나. 그래, 이름이 뭐야? 샤스타데이지. 미안해. 네가 꽃이 피면 알아볼 수 있는데 지금은 다른 꽃이나 잡풀들과 구분할 만한 안목이 내게 없어. 작년에 플록슨가 하는 꽃씨도 심었는데 피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 혹시 아줌마는 알아봐 줄지 모르겠네. 아저씨, 잡풀들과 나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건 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요? 미안한데, 그렇다고 처음부터 거짓말을 할 순 없지. 원래 내가 좀 시원찮아. 오래 자세히 보면 더 나은데 그게 잘 안 돼. 변명일지 모르지만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겨우내 이층을 오르내리면서 가끔씩 여기를 보곤 했는데 아무 움직임이 없더라고. 때로는 눈이 소복이 쌓이고 얼음이 얼기도 하고, 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줄 알았어. 입춘 우수 경칩 지나니 푸른빛이 돌더니 며칠 전에는 삐죽이 싹들이 돋아나더라고. 항상 무심히 지나다닌 건 아니니 너무 화내지 말고 날 용서해줘. 내가 분명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런대로 착한 사람이야. 꽃들이 너무 목말라 하면 아줌마가 알아서 물을 주지만 가끔은 나도 물을 줄 거야. 아까 잡풀 취급한다고 화를 냈잖아? 그럼 이제 잡풀처럼 보이는 걸 화초 취급하면 되려나. 잡풀도 꽃을 피우니 그들과 화초의 차이가 뭐야?

많이 알려지지 않아 사랑받지 못하는 꽃들이 잡풀인가? 그들은 무척 억울하겠지. 화초와 잡풀의 구분이 명확하달 순 없으니 잡풀도 많이 사랑받으면 화초가 되려나? 난 그런 구분 초월해서 깊은 숲속에 피었다지는 풀꽃이 외롭고 행복하다고 생각해. 아무도 와주는 이 없으니 햇빛, 바람, 빗물과 함께 하면서 벌 나비와 교감을 나누겠지. 온전한 생명을 누리다 미래의 씨앗을 남기고 시들어 스러짐이 아름답지 않아? 누가 보아주고 가꾸지 않아도 청초하게 피어나고 나름의 친구들과 어울려 한 삶을 사는 게 들꽃이겠지.

여러 해 살면서, 내가 겨울을 견디듯 꽃들도 그렇게 세월을 사는 줄 알았어. 아니더라고, 훨씬 열심히 애써 노력하고 나름대로 부지런히 겨울을 살아내는 것 같아 나로서는 미안하고 고맙더라고. 무슨 말이냐고? 난 겨울이면 웬만하면 집에서 잘 나오지 않아. 내가 추위에 약하거든.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그때는 무섭게 추웠지. 처마에는 고드름이 내 팔뚝 만하게 달리고 산과 밭에는 허연 눈이 겨우내 덮여있었어. 입성도 부실해 밖에 나와도 햇볕을 쬐는 게 다였어. 모두가 그렇게 살았었냐고?

활발한 친구들은 예외였지, 그들에겐 추위를 이기는 힘이 있었나봐. 썰매타고 연 날리고 팽이치고 눈싸움하고, 그 추위 속에서도 뛰어다니느라 여념이 없었어. 그런 친구들은 건강했고 주변에 놀 게 많았지. 그들은 겨울을 지나면 손등이 트고 갈라졌는데 나는 갈라지진 않고 때가 좀 꼈었어. 난 늘 겨울이 가고 봄이 빨리 오기를 바랐어. 봄이 오면 우선 눈이 즐거웠어. 흑백 세상이 천연색으로 황홀하게 달라졌지. 가난했던 산과 들이 눈부시게 풍요로워 지는 거야. 세상이 적당히 시끄러워 지더라고. 풀과 나무들 뿐 아니라 벌레와 사람들도 겨우내 집안에 갇혀있다 풀려난다고 할까. 여기저기 다 살아나는 느낌이었어. 새들도 날아와 추임새를 넣곤 했었지.

아까 말했잖아? 새싹일 때는 구분을 잘 못한다고. 나만 그렇지는 않은가봐. 내 주변 사람들 중에 그런 이들 많아. 그런 건 시골에서 자란 이들이 훨씬 더 잘 알아. 자연은 그 속에 사는 이들을 순박하게 하는 힘이 있나봐. 어떤 사람이 말했어. 평생 스승이 셋 있다고, 누군지 알아? 자연과 직업과 가난이라는 거야. 그분의 혜안에 공감했어. 자연에서 많은 걸 배운다는 데는 아무도 아니라고 못할걸. 가난을 스승이라고 한 데서 그분에게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어. 사람들은 엄청 부자가 되고 싶어 해. 그런데 부자가 되면 삶의 방식이 조금씩 안 좋은 방향으로 달라지는 것 같아.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이들이 많더라고.

앞에서 겨울을 잘 살아줘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말인 줄 알아? 내 경우에 비추어 꽃들도 별스런 일을 안 하고 세월을 보낸 줄 알았어. 그러다 푸른 싹들로 때맞춰 얼굴 내미는 걸 보고 땅속에서 할 일들을 부지런히 해내며 한 살이를 준비한 걸 느끼고 한 말이야. 꼼짝 않고 씨앗으로 지내다 갑자기 싹이 될 순 없잖아. 늦가을에 씨로 땅속에 묻혀 추위 속에 다져지고 세포분열도 하고 땅이 얼고 녹고를 반복하는 동안에 자고 깨고 했겠지. 날씨가 풀리며 물기를 머금다 마침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니 나가야 할 때라 짐작하고 얼굴을 내민 거잖아. 내 소박한 짐작이야.

첫인사라며 내 얘기만 했네. 이게 내 방식인가 봐. 사람들 앞에서는 주눅 들어 말 못하다가 책망 않는 새싹들을 만나니 이말 저말 쏟아놓는 거지. 참 못났지? 나도 알아. 아무튼 앞으로 서로 아는 척이라도 하고 잘 지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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