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눈을 감네
내 살아 온 날들을 돌아보니 스스로 미안하다. 내 자신 나를 상징하는 낱말로 “변두리”를 쓴다. 내가 자리 잡은 곳이요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내 재능의 한계다. 지워지지 않는 내 정체성이며 내 소심함의 근원이요 내 자유와 상상력의 기반이다. 말이 길어져 뭔가 싶지만 한 마디로 못났다는 게다.
어느 한 면 빠질 것 같지 않고 전문직에 잡기까지 능해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여타분야까지 실력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인생의 긴 세월, 수십 년을 한 분야에 있어도 이루기 힘든 일들을 어렵잖게 이뤄내는 이들 앞에 초라함과 허탈감을 갖는다.
변죽만 울리고 철저히 그들의 반대편에 서있는 내 얘기를 해 보자. 우리말도 아닌 영어를 오래 붙들고 있다. 출발이 썩 좋진 못해서 중학교 때에는 외부출제 문제에는 성적이 넷 중에 골라 맞을 확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발음과 악센트, 문법 문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요 헤어나기 어려운 늪이었다. 비슷한 세대를 사는 이들치고 영어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이 무모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긴 세월을 허송하고 있지만 CNN은 차치하고 취학 전 어린이 대상 유치원 영어방송도 잘 들리지 않는다.
학창시절 스포츠를 잘 하지 못해 민망한 일이 많아 반은 의도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탁구를 택해 오래 쳤는데 체계적으로 익힌 게 아니어서 실력이 늘지 않는다. 그래도 삼십 년을 헤아리는 구력인데 제대로 코치 받는 이들이 육 개월이면 너끈히 나를 넘어서니 분통이 터질 일이다. 이런 저런 사정도 있어 몇 년 전부터는 아예 그만두었더니 건강을 위해 그거라도 계속할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가끔 있다.
이런 것들을 열거하는 건 끝도 없는 일이다. 한 때는 이런 일들을 내 노력 부족으로 여겼는데 괴로웠다. 이제는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편하다. 오히려 내 부족과 단점으로 이나마 살아가고 있다고 위안을 삼는다. 좋게 보면 이런 분야는 내가 할 수 없다는 걸 일찍 알게 된 것이다.
자주 들어온 충고가 “자신보다 조금 아래를 보고 살라”는 거였다. 저런 이들도 열심히 살아가는데 내 처지에 ‘불평할 게 뭐가 있어, 이만하면 된 거야’ 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게다. 그런가 하면 “자신보다 높은 곳을 보고 살라”고도 한다. 그들에게 자극받아 뭔가를 이뤄보라는 고언일 게다. 이런 방법도 못난 내게는 위를 보고는 열등감을, 아래를 향해서는 자만심 사이를 오가니 난감하기만 하다.
차라리 눈감는 게 나을 것 같다.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른 이와 비교할 게 아니라 십년 전 자신과 오늘의 나, 오년 후 내 모습을 그려놓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횡만 아니라 종으로도 돌아볼 일이다. 조선시대 그 누구도 오늘의 내가 누리는 삶을 향유하지 못했을 게다. 계절 없이 과일을 먹을 수 있고 한여름 에어컨에 자동차로 이동하니 그 호사를 백 년 전 누가 누렸을까?
눈 둘 곳이 너무 많으니 그냥 눈을 감아보라. 스스로 반성과 분발을 하고 목적지를 향해 자신의 속도로 나아가라. 누구나 해도 안 되는 일들은 있을 게다.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남이 아니라 자기가 목표를 정하고 자신의 잣대로 성패를 가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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