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필시 이것도 병일 게야

변두리1 2021. 11. 18. 07:41

필시 이것도 병일 게야

 

어설피 알고 있던 단어를 찾아보려 휴대폰을 열었더니 지정된 장소에 배달을 마쳤습니다.’라는 문자가 찍혀있다. 앉은 자리에서 눈길을 옮기니 두툼한 비닐봉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한동안 꼼짝 않고 이곳에 있었거늘, 어느 틈에 갖다 놓았다는 것인가? 몹쓸 역병이 긴 세월 횡행하니 누구나 가능한 얼굴을 맞대려 하지 않는다. 부스럭대며 열어보니 중고로 주문한 책들이다.

스스로 압박을 받는다. 소설을 읽어도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을 연결시키거나 기억하지 못하면서 왜 책을 읽으려 하는 걸까? 책상 위에 한 줄로 쌓인 수북한 책들에 한 때는 아내도 왜 정리하지 않나하는 눈치더니 이제는 체념했는지 무덤덤하다. 읽겠다고 각오하고 늘어놓은 것이 오륙십 권은 되지 싶다. 물론 내 변명도 없진 않다. 굳은 결심으로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도 수시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때그때 읽어야 할 책들이 생기니 골라 놓은 책 위에 겹쳐, 어느 순간 처음 뺀 책은 저 아래에 묻힌다.

그런 책 중 하나가 테스. 먼저 어린이용 도서로 읽어 대강의 내용을 파악하고 두꺼운 책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빽빽한 책 한 부분을 읽고는 깊숙이 아래로 내려앉고 말았다. 가끔은 원하는 책을 찾으려 어질러진 책들의 등을 보다 쌓인 책들을 흩뜨리면 오래전 챙겨놓았던 책들을 만난다. 앞쪽 부분만 조금 읽다가 꽂아둔 책갈피가 눈에 들어온다. 그걸 보며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그렇게 읽으면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지 그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지 여러 고민에 빠진다.

이런 가운데 몇 권의 책이 더해진다.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보면 책이 책을 추천한다. 그 책들을 보고픈 호기심에 다시 애용하는 중고 사이트를 찾아 검색하면 또 그 책들이 있다. 택배비를 아껴보려 기존의 판매자로 검색하다보면 이삼십 분이 삽시간에 지나가고 어느덧 흥미를 끄는 책의 제목들에 붙잡혀 충동구매를 한다. 그렇게 소모하는 시간들이 아깝다. 그 시간이면 읽던 책 한 장()은 넉넉히 읽었을 거라는 후회가 밀려온다.

내 관심분야가 크게 달라지지 않으니 선택하는 책이 비슷하다. 며칠 전에는 네댓 권의 책들을 힘들여 골라 주문하려 했더니 이미 구입한 책이라는 조언이 뜬다. 구매한 것도 몰랐다니 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자신에게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불만이 솟아오른다.

한 번은 몇 안 되는 책꽂이를 점검해 보았다. 읽지 않은 책들이 주욱 꽂혀 있어 구분이 쉽도록 조금씩 앞으로 뽑아 놓았다. 대략 다섯 권 중에 한 권은 앞으로 나온 것 같다. 책을 더 구입하지 않아도 넉넉히 일 년은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런 마음으로 한동안은 책들을 주문하지 않았다. 유혹이 밀려올 때마다 있는 책이나 읽어라. 값싼 중고 책이라고 못된 허영에 휩싸이려 하느냐는 질책을 자신에게 쏟아 부었다. 그런 결심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내 감출 수 없는 무지와 부족함이다. 독서 중에 이름난 고전을 만나면 아직도 이 책을 읽지 못했음이 스스로 민망해 구입을 결정한다. 그런 책들은 두껍고 여러 권인 경우가 많아 쉽사리 도전을 하지 못해 책상 한쪽에 머물러 있기가 쉽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적과 흙」 「부활」 「닥터 지바고」 「쿼바디스」…. 한없이 이어지는 빚진 것 같은 책 이름들을 보며 아득함을 느낀다.

이렇게 책들을 대하면서 자연스레 들었던 자가당착의 질문이 있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그게 과연 바람직한가?’ 작가는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긴 세월 각고의 노력을 쏟아 붓는데 이삼일 혹은 한 주일 동안 그 책을 다 읽었다고 그걸로 끝인가? 깊이 영향 받은 내 책이라고 하면 여러 번 읽어 흐름을 좌악 꿰고 있는 그런 책 아니던가? 내 영어의 얕은 지식에 많은 영향을 준 지금은 그 내용을 잊은 한 권의 책, 내게 영어 학습을 물었던 이들에게 추천했던 그 책도 대여섯 번은 넘게 읽었지 않은가? 만화로부터 여러 유명 역자의 번역본을 읽었던 삼국지, 내 신앙의 근본이라 할, 많이 읽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성경책, 답이 없다. 어떤 책은 한 번만 읽고 어떤 책은 의미가 오롯이 드러날 때까지, 자신의 성장기에 따라 여러 번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하면 무책임한 답이려나?

중고로 구입한 책들이 도착해 그것들과 첫 대면을 할 때면 약간의 긴장과 설렘이 있다. 이들은 내게 무엇을 더해 주려나? 내 사고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려나? 실제로는 책상의 한 모퉁이에 놓여 한동안 잊히거나 어느 책꽂이에 등을 조금 더 내밀고 내 선택을 무한정 기다리는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말게다. 그리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또 책 주문에 눈이 가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악행이란 말인가?

책상과 서가에 방치된 책들의 원망과 항의가 들리는 듯하다. ‘이렇게 읽지도 않고 모아만 두려면 왜 우리를 데려왔는가? 차라리 새 주인에게 가게 하라.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게 하라.’ 그때마다 내 대답이 다르지 않다. ‘이제까지도 참고 기다려 주었으니 조금만 더 견뎌 주세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셔야죠.’ 알면서도 한 번 더 속아주는 그들이 고마우면서도 언제까지 내 알량한 변명이 통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오늘도 새로 온 이들에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다. ‘내게 와 줘서 고맙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를 먼저 읽어보겠다.’ 모르긴 해도 이게 병중에 중병이지 싶다.

'변두리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벽두에  (0) 2022.02.09
송소(松韶) 고택에서  (0) 2021.12.02
이렇게 후회하고 힘들 걸  (0) 2021.11.18
가을 문광(文光)을 보다  (0) 2021.11.10
나에게 설겆이는…  (0) 2021.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