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설겆이는…
언제였던가, 꽤 오래 전이다. 밥을 먹다가 설거지 양이 많으니 가족들이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얘긴즉슨, 자기 그릇들을 알아서 닦아놓자는 게다. 어떤 일 끝에 부담이 남는 걸 나는 무척 싫어한다. 대충 찬성하는 분위기에 내가 반대를 했다. “그러면 나는 아예 밥을 안 먹겠다” 했더니,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한다. 차라리 내가 하겠다고 했다. 설마 내게 맡기기야 할까 했는데 정말 설거지가 내 몫이 되었다.
그런대로 안하던 일이니 재미도 있었다. 고무장갑이 불편해 맨손으로 하는데 아침에 한 30분이면 할 수 있었다. 몇 번 이런저런 지적을 받았지만 이제 많이 적응이 되었다. 설거지는 처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수저든 그릇이든 처음의 깔끔한 모습을 가능하면 오래도록 간직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묻은 오물들을 다시 씻어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해두는 게 설거지 아닌가. 꼭 필요한 빠질 수 없는 과정이다.
아침에 개수대를 바라보면 그릇들이 수북이 쌓여있을 때가 있다. 조금은 부담스러우면서도 내 할 일이 있고 내 존재 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하려 한다. 긴 세월 무능한 가장으로 살아온 것이 항상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했는데 설거지를 하는 동안은 무언가 나도 하고 있다는 느낌과 내가 가족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데 마음이 편하다. 내 일이 성과가 금방 나타나거나 손에 잡히는 일이 아닌데 비해 설거지는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니 성취감이 있다.
몇 달 전에 딸들이 식기세척기를 사자는 의견을 냈다. 그냥 하던 대로 하지, 큰 돈 들여 살 필요가 있냐고 했더니 중고시장에서 구입하면 그리 비싸지 않고 내 일거리를 줄일 수 있으니 낫지 않느냐며 며칠 신경을 쓰더니 적당한 걸 찾았다고 했다. 봉명동까지 가서 사 왔는데 예상보다 크고 무거웠다.
주방에 놓으려니 좁아 마땅치 않고 큰 것이 늘 한쪽을 차지하고 있을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란했다. 이 집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필요한 이에게 되넘겼다. 다시 넓어진 공간을 보니 시원하다.
실제 공연을 하고, 경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 오기까지 쏟아 붓는 연습과 훈련의 과정이다. 그 지난한 과정들이 있어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일상적이고 따분한 훈련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게 설거지의 일이다. 본래의 모습, 기본의 단계로 돌아가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한 번 더 땀을 흘리는 게 연습이요 훈련이고, 해도 해도 부족해 마지막 한 번 더하는 반복에서 기술이 무르익는다.
때로 책상에 앉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어디선가 본 것이 떠오르지 않기도 하고 몇 권 되지도 않는 서가에서 원하는 책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다. 다 내 주변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제 때에 정상적인 출발을 못하는 게다. 마음속으로는 무슨 일이든 미리하자면서 행동은 미리는 차치하고 제때에도 따라주지 않는다. 무의식중에 식구들에게 하는 말을 내게 적용해보면 오히려 그들보다 내가 먼저 들어야 할 말들이다.
조금만 여유를 부리면 당장 쓸 그릇과 수저가 없다. 개수대에 몸을 뉘고 있는 그들을 볼 때마다 아직도 설거지를 통한 내 삶의 훈련이 끝나지 않았음을 본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식구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다. 그것 하나, 몇 년 째 하면서도 불편하지 않게 해줄 수 없나. 그럴 때마다 부모님 세대 어머니들에게 존경심이 인다. 끝없는 가정 일들을 언제 다 하면서 그 많은 자녀들을 양육하고 농사지으며 억척스레 사셨을까.
세월이 가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컴퓨터를 원망하며 아쉬운 대로 자주 써야 하는 기능이라도 익숙해져 보려고 결심했던 활용능력시험도 교재만 사놓은 채로 해를 넘길 태세다. 주변을 둘러보면 주눅이 들어 남과 비교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내 할 일만 하자하지만 수시로 찾아드는 자괴감을 몰아내기 어렵다.
최근엔 ‘무능이 유능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각 분야에 상층부만 필요한 게 아니다. 하층부가 기반이고 무엇이든 토대가 튼튼해야 성과가 나는 것이니 나 같은 존재가 바닥이라고 위안해 본다. 모두가 축구 국가대표가 될 수는 없다. 그보다 ‘조기축구인’들이 늘어나고 경기장에 관객들이 가득할 때, 그 나라에 축구 수준과 문화가 발전할 소지가 크다.
아침에 당황스런 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저녁에 미리 설거지를 해 놓아야 할 것 같다.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미리 할 것들을 꼽아보고 작은 성취감을 맛보며 스스로를 돌아본다. 당장 어떤 일을 해도 좋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내게 있어 설거지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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