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푸른 유리잔

변두리1 2021. 4. 14. 19:22

푸른 유리잔

 

 

진한 하늘색 유리잔을 본다. 그릇가게에 가면 찻잔으로 어렵잖게 볼 수 있을 듯한 조금은 세련돼 보이지만 딱히 눈에 띌 것 같지 않은 잔이다. 다탁에 올라 녹차를 담고 있어야 할 유리잔을 경주국립박물관 특별전시실의 전시품으로 대하고 있다. 나로 눈길을 거두기 어렵게 하는 건 천마총에서 나온 유리잔이라는 사실이다. 천마총은 6세기 초반에 축조한 지증왕 무덤으로 추정한단다.

무덤 속에서 1500여년 잠자던 잔이다. 별다른 흠 없이 내 앞에 놓인 이 푸른 잔은 어떤 길고 긴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이 잔은 이집트나 동지중해 연안 같은 곳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 한다. 그 옛날, 먼 이국땅에서 만들어져 어떤 경로를 거쳐 신라인의 손에 들어왔을까? 좋은 재료로 높은 온도를 거쳐 투명한 푸른색으로 만들어져 당시에는 대단한 귀중품으로 다루어졌으리라. 배 혹은 낙타에 실려 오랜 기간 조심스레 이동해 신라인 앞에 놓였을 때, 감탄으로 넋을 잃고 바라보았을 사람들, 우여곡절을 거쳐 그 잔을 소유했을 이의 흥분과 감동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과정을 거쳐선지 유리잔은 왕실이 소유했고 그것을 무척 소중히 간직했나 보다. 천마총의 주인이 아무리 권력이 대단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어 세상을 등졌을 때, 무덤 속에 넣을 것들을 신중히 선택했을 게다. 값나가고 좋은 것들로 새로 제작한 것도 많았으리라. 그런 물품들과 함께 꼭 넣어야 하는 것으로 고인이 평소 가장 아끼던 물건들을 추렸고, 그 중에 하나가 푸른 유리잔이었을 게다. 하늘을 닮은 푸른색, 또 다른 세상에서도 이 땅에서 즐기고 완상하듯, 잔과 함께 편안하기를 기원했으리라.

천오백여년이 흐르고 천마총의 주인이 잠들어 있던 무덤에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던 날, 뭇사람의 시선이 몰린 곳은 금으로 된 부장품과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였다. 어쩌면 한 박자 늦게 몇몇의 시선이 푸른 유리잔으로 향했을 게다. 긴 세월을 견디고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투명한 푸른 유리잔, 그 시대 신라의 국제적 활동과 역할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내게는 천마총에서 발굴된 11,000점이 넘는 유물 중 가장 눈길이 가는 푸른 유리잔, 유리 장인은 무슨 생각으로 그 잔을 만들었을까? 하늘과 바다를 닮은 투명한 푸른색, 이 땅의 삶을 다한 이들이 가는 하늘과, 바다 속 또 다른 세상 용궁이 있다고 상상했던 이는 아니었을까?.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통치하는 지하세계가 아닌 선망과 아련한 동경의 영역이었던 하늘과 바다를 그리며 최고의 잔을 만들었지 싶다.

그 잔이 천오백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새로운 운명으로 벌써 50여 년 동안, 백년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 잔을 보며 사람들은 무엇을 느낄까? 나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묻는다. 푸른 유리잔은 살아있는가 아니면 죽었는가? 무엇을 생명이라 말해야 하나. 호흡이 없으면 죽은 것인가. 유리잔의 길고도 유별난 운명을 어떻게 설명할까? 당장이라도 시장에 가면 이삼천 원이면 살 것 같은 그 푸른 유리잔이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기려지는 것은 왜인가?

수작업으로 만들었음을 느끼게 하는 조금 굴곡진 개구부 언저리와 높이가 다른 세로무늬들, 아랫부분의 육각무늬가 보인다. 어느 유리 장인에 의해 태어나 제가 만들어진 땅을 떠나 동쪽 끝 한반도 구석에 머물다 무덤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뎌야 할 줄을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어느 땅에 나서 누구를 만나고 어디서 생을 마치는가는 사람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어떤 이를 만나느냐에 삶의 질과 방향이 달라지고 무엇이 더 좋은 결과를 이룰지 당시엔 모른다. 긴 세월이 지나 때로는 이 땅의 삶을 마친 후에도,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내게 푸른 유리잔이 먼 타국에서 이 땅에 시집온 수수한 아낙처럼 보이는 건 무슨 연유일까?

푸른 유리잔의 삶을 생각한다. 천마총의 주인과 함께 무덤에서 긴 겨울잠을 잔 게 한 생이었다면, 깨어나 경주박물관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는 삶은 또 다른 생이다. 동양에서 푸른색이 봄과 동향과 새 출발을 상징하듯, 푸른 유리잔의 또 다른 삶이 펼쳐지고 있다.

천마총의 수많은 부장품 중 푸른 잔에 꽂힌 내 삶도 전과 다른 수준의 새 봄 같은 날들로 펼칠 순 없을까? 푸른 유리잔은 보물 제620호로 공적인 인정을 받고 제자리를 얻은 데다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을 확보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세월의 흔적 없이, 비싸지도 않을 듯한 자태와 재질로 자기 세계를 이룬 푸른 유리잔이다. 세월이 가도 지루하지 않게, 매끄럽지 않으나 수수한 모습으로, 많은 이와 조금은 다르게, 하늘을 생각나게 하는 존재로 내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잘 고장 나지 않는, 기본기능이 강한 명품으로 내게 남은 길을 살아갈 순 없을까? 유리잔 앞을 떠나며 한 번 더 뒤돌아보고 내 마음에 투명하고 푸른 그 유리잔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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