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향방
“으으으앙, 으으악앙, 아으앙…”. 알 수 없는 음들이 단속적으로 들려온다. 가족들에게 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단다. 내 판단에는 들 고양이가 어느 집에 들어와서 무엇이 불편한지 신음하는 소리 같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거처가 마땅치 않은지도 모르겠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딸들이 강아지가 어딘가 끼여 죽어가며 내는 소리 같다며 어떻게 해봐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복잡하게 얽힌 주택단지에서 어느 집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나? 그래도 그 소리가 너무 안타까우니 119에 신고라도 해야겠다며 전화를 한다. 답답하기는 119요원들도 마찬가지일 게다. 주말 저녁에 위치도 정확하지 않은 곳의 강아지 울음에 출동하고 싶은 이들이 누가 있을까?
반응은 시원찮고 애처롭기는 해서 딸들이 위치라도 알아보자고 골목을 다녀보았단다. 뒷골목 어느 집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문 아저씨를 보았는데 한참 후에 또 그 소리가 들렸단다. 그분에게 물어보았더니 어디서 새끼강아지를 한 마리 얻어왔는데 적응을 잘 못하는지 그렇게 울어대고 있다고 하더란다. 비슷하게 짐작은 했는데 위험에 처해서가 아니라 어쩔 줄 몰라 울어대는 소리였던 게다. 강아지라고 무슨 대책이 있을까?
엄마 품에서 형제들과 함께 걱정 없이 지내다가 난데없이 모든 것이 생소한 곳에 홀로 옮겨졌으니 엄마를 찾는 소리요, 불편함을 호소하는 게다. 강아지의 어미도 같은 마음 아닐까. 낳은 지 며칠 못돼 새끼를 빼앗겼으니 걱정과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게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횡포다. 인간중심으로 판단하고 동물들이 말을 하지 못하니 전혀 그들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은 게다.
동물이 사람의 반려 자리를 점차 차지하면서 그들의 권리도 강화되고 있다. 그들에게 상해를 입히면 의외의 법적 처벌을 받는다. 생후 며칠 안 된 동물을 강제로 어미로부터 떼어놓는 것도 잘 하는 일 같지 않다. 그들의 일이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마음은 내게 없다. 그 돌연히 우리 가족의 일상을 파고든 사건을 대하는 방식이 적절했는가를 생각해보고 싶을 뿐이다.
남들이 들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난 동물에 별 관심이 없고, 기르고 싶거나 아끼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집을 자주 드나드는 들 고양이를 볼 때도 달갑지 않다. 때로 그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면 난감하다. 지자체에서 어찌 들 고양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지 불만이다. 고양이와 쥐 같은 많은 야생동물들이 도시에서 사라져 숲속으로 가 주었으면 좋겠다. 내게는 그들이 백해무익한 존재로 보인다. 가끔 길거리를 지나다 애완동물을 옷 입혀 안고 가는 이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이 불편하다.
가난한 국가의 어린이들은 단돈 몇 푼이 없어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동물들에게 쏟는 비용이 타당한가 싶고 얼마나 정줄 곳이 없이 외로우면 저렇게 살아갈까 애처롭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존재보다 애완동물이 귀하고 반려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걸 이성으로는 이해한다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다.
어린 강아지의 애처로운 울음에 보인 내 반응은 그런 것이었다. 언젠가 막내가 해외에 파견되는 직장 동료가 고양인지 강아진지 다시 돌아올 때까지만 맡아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핑계로 은근히 기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을 때, 안된다고 잘랐다. 출근 후 퇴근까지 그 종노릇을 어떻게 감당하며 그로인한 여러 부담을 감당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딸들은 모성의 보호본능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강아지의 애처로운 울음에 어떻게든 도우려는 의지를 보였으니 말이다. 내 사는 곳 주변에도 동물병원과 사료가게를 비롯해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점포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시대의 추세도 섣부른 대인관계에서 상처받느니 말로 피해 입히지 않고 살갑게 대해주는 동물에게서 위로받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내가 동물들에게 지금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게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아직까지는 인간관계에서 그리 심한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더 늙고 대화를 나눌 이도 없고 며칠이 되도록 아무도 나를 찾거나 찾을 이가 없을 때에는 애완동물을 기르며 친구처럼 지내려 할지 모르겠다.
아직은 동물보다는 꽃과 나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우리고 그들과 친해지고 싶다. 식물은 동물처럼 많은 손길을 요구하지 않을 듯해서다. 내게는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있고, 그 안에 나와 대화를 나누기를 고대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들의 얘기를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내 부족함이 보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동서양에 걸쳐 오랜 세월을 살다간 이들이 책속에서 자신들을 만나달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들을 만나는데도 시간이 부족해 순번을 정해야 할 지경이다. 나는 아직 외롭지 않다. 강아지 울음에는 애써 무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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