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겨울과 딸기와 막내

변두리1 2021. 2. 20. 10:25

겨울과 딸기와 막내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하는 막내의 손에 딸기 상자가 들려있다. 하얀 씨들이 조로록 박혀있는 과육이 엄지손가락만하다. 딸기를 받치고 있는 짙은 녹색의 꽃받침과 빨간 열매가 대비를 이뤄 무채색 겨울에 산뜻한 생기가 돈다. 겨울에 과일이 먹고 싶어 퇴근길에 사왔단다. 막내는 가정을 살뜰히 챙긴다. 요리하기를 좋아해 식재료나 조리 기구를 사오는 일도 흔하다.

세태가 많이 달라진 건지 나와 차이가 나는 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80년대 후반이 내가 30대로 들어서던 시기다. 결혼 전까지 부모님께 무엇을 사다드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두가 가난한 때이기도 했고 내가 경제적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생각하면 참 못난 막내아들이었다. 그때는 내가 부모님께 잘못하는 거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아무리 경제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도 마음만 있었으면 크게 돈 들이지 않아도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많이 있었을 게다. 형들과 누이와 나이차이 많았던 막내라 주로 받는 처지여서 내가 주도적으로 주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부모님 생신에 선물이나 용돈을 드려본 적도 없다. 당시는 주변에서 그런 일을 보지 못했다. 그냥 지나치는 것이 일상사라 해도 허전함까지 가시지는 않았을 게다. 누군가 기억해주고 축하받기를 바라셨을 것을, 이제 마음 아파한들 아무 소용없는 헛일이다.

무슨 복과 염치로 자녀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넙죽넙죽 받는가 싶다. 아무 날이 아니어도 소소한 것들로 나를 감동케 한다. 내 자신이야 스스로 택한 가난의 길이니 마음 준비가 되어있어 감당한다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쉽지 않았을 게다. 주변 친구들은 쉽게 갖는 것을 왜 자신은 소유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이 많이 불편했을 것임도 모르지 않는다.

다 지나간 일이 되었다. 많은 일들이 가슴 아프지만 되돌릴 수 없다. 살아온 지난날들과 오늘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이 끝난 50년대의 우리 형편을 객관적으로 나타낸 말이 최빈국(最貧國)이란다. 1965년쯤 일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정도로 아프리카 가나와 비슷했단다.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에 학교나 공공시설에 적혀있던 문구가 “1000불 소득, 100억불 수출이었다. 이 목표가 이루어진 게 1977년쯤 이란다. 가파른 보리 고개와 그 질곡의 세월을 견뎌 낸 앞선 세대 덕에 풍요로운 날들을 누리고 산다.

몇 년 전에 수출이 6000억불을 초과하고 일인당 소득이 3만 불을 넘어섰다고 한다. 세계 10권 안팎의 경제규모라니 놀라울 뿐이다. 시대를 조금만 앞뒤로 돌아보면 연민과 걱정을 금할 수 없다. 부모님 세대만 생각해도 온갖 고생을 하고 좋은 시절은 구경도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안됐고, 자녀세대를 보면 점점 험해지는 세상을 어떻게 헤쳐 갈지 염려가 가득이다.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좋은 때에 태어나서 호시절에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산다. 부모님께는 해드린 것 없고, 자녀들에게는 많은 것들을 받는다.

한 겨울에 싱싱한 딸기라니, 딸기의 제철이 양력 오뉴월이라지만 요즘은 대표적인 겨울 과일이 된 듯하다. 한 세대 전만해도 임신부가 원해도 구하기 어려웠을 것들을 이제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쉽게 구할 수 있고 경제를 걱정하지 않고 편하게 먹을 수 있다. 그래도 시대에 두세 걸음 뒤떨어져 살려하는 내게는 황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막내가 가끔은 팔이 아프다고 하고 회사가기 싫다고 한다.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언젠가 가져온 설계도를 보니 그냥 보기에도 머리가 아팠다. 그런 것들을 매양 들여다보고 혹은 그리고 고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이해가 간다. 웬만한 일들은 컴퓨터를 통해 할 테니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서 눈이 빠져라 보고 있을 모습도 떠오르고, 아차 실수하면 손해와 불편이 만만치 않을 테니 얼마나 긴장될까도 느껴진다. 게다가 크리스천으로 사회에서 살아가며 처신하기가 쉽지 않을 게다. 사회적으로 교회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시절이니 더욱 힘겨울 것을 미루어 짐작한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곳이다. 제대로 하려면 무한히 어렵겠지만 성경만 읽고 듣는 이들 형편을 잘 알지 못한 채, 성경 내용을 전달하는 내가 제일 편한지 모르겠다. 나라고 왜 내 분야에서 전문가답게 동료들보다 앞서가며 인정받고 살고 싶지 않았을까? 내 능력을 정확히 모르던 시절에는 생각도 많고 꿈도 컸었다. 세월 지나며 내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이고 예상하던 게 내 모습이 아님을 알았을 때, 고민이 많았다.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의 모습을 재설정해야 했다. 누구나 그 과정을 피하긴 어려울 게다.

자녀들도 비록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드러내 표현하지 않아도 그 과정을 예외 없이 거쳐 가고 있으리라. 아무 일 없는 듯, 모든 게 순조로워 보여도 내부에서 한없는 긴장과 갈등이 왜 없으랴. 살아있음이 그때그때 해결해야 할 과제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각자가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걸게다.

겨울딸기가 제철 딸기보다 오히려 곱고 달고 새콤한 것 같다. 다듬어다 준 한 접시 딸기가 어느 순간 다 비었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모를 일이다. 빈 접시를 개수대에 놓아두고 내 자리로 오면서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냉장실에 싱싱한 딸기가 나 여기 있다는 듯 생기를 띤 채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가 좋은 시절을 살고 있구나, 그저 고맙다 막내야.

'변두리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보다리 옆 굽은 소나무  (0) 2021.03.23
노년을 산다는 것이…  (0) 2021.03.13
위 무위(爲 無爲)가 평안  (0) 2021.02.16
우째, 이런 일이…  (0) 2021.01.05
근원에 대한 사색  (0) 2021.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