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한 수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던가? 이제는 삶의 길이가 점점 길어져가고 있다. 내 나이 이제 예순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인생이라 할 것이 없지만 몇 십 년 전만해도 환갑이면 얼추 제 살날을 살았다고 했다. 그 비슷한 길이의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면 이렇다 내세울 것이 없다. 대단하지는 못하다 해도 남들의 평균치는 살았으면 했는데 아쉽기만 할 뿐이다.
청년의 때까지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나름 노력을 한다고 했지만 깨달은 건 사람마다 타고난 능력치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청소년의 때에 여행도 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라 하면서 자기는 할 것 다하고도 대한민국의 가장 어렵다는 대학의 학과를 입학하고 가장 어렵다는 시험을 통과해 사회의 지도자로 살고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며 왜 안 되느냐고 한다.
그런 것들을 이루지 못했으니 할 말이 없다. 많진 않지만 더러 청소년들을 만나고 학습을 지도하며 느낀 것이 있다.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다. 스무 살이 넘었지만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청년이 있었고, 지역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생이었다. 다른 여성도 나이 삼십이 다 되었지만 간단한 덧셈 뺄셈을 하지 못했다. 시험 보는 누가 만점을 맞고 싶지 않을까. 공부 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꽤 오랜 기간 그들을 지도했지만 원하는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 시대의 설리번이 될 수 없음이 야속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적 능력이 크게 부족한 이들이나 더없이 두드러진 이들은 스스로의 노력이라 말할 수 없는 선천적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선인들은 어떤 것을 터득하는 데 서너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태어나면서 안다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學而知之), 곤경을 겪고야 아는 곤이지지(困而知之), 곤경을 겪고도 배우지 못하는 곤이불학(困而不學)이 그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제 노력으로 그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노력이 부족해서 성과가 그렇게 없는 것도 아니란 것이다. 많은 부분이 그렇게 만들어져 태어났다는 게다.
여러 분야를 다 잘하는 팔방미인이 있는가 하면 한 분야도 잘 하는 게 없는 이도 있다. 어쩌란 말인가? 이미 결정이 났고 내 노력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이 너무도 적은 것을…. 내 오십 여년의 삶은 열등감으로 주눅 들어 지낸 세월이었다. 안 되는 게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게 없는 시절이었다. 내게 열등감을 심어준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학교였다. 시종 경쟁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늘 지기만 했다.
사회에 발을 디디고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 어디에나 통하는 원리는 선착순이었고 그것은 남보다 앞서는 능력을 요구했다. 내가 그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오십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였다.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고 내가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자 형편이 달라졌다. 내게는 하지 않는 것이 자유로움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이 내게는 고통이었고 다른 이들에게 외로움이 내게는 편안함이었다. 편안함과 함께 내게 시간이 주어졌다.
그 후 어느 순간에 무능과 미력이 내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것은 둘이 아닌 하나였고 남들이 말하는 지질함이었다. 오십여 년을 두고두고 원망하던 벗기 어려운 내 거죽이었다. 주변에는 빛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건장한 체격에 명석한 두뇌, 빼어난 외모에 예술적 능력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이들이 도처에서 안됐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해봐, 다 되는 거야’라는 눈짓과 함께 내 어깨를 두드릴 기세다.
그들의 진심을 모르지 않는다. 또한 적어도 내게 만큼은 해도 안 되는 것이 있음도 안다. 내 인생의 한 수는 그래서 더욱 무능과 미력이다. 알만한 소설가는 부족함이 자신의 힘이라 했다. 남들보다 부족함을 알기에 더 치열하게 생각하고 쓴다는 게다. 긴 세월 지나, 해도 안 되는 것을 알게 되니 그 부분의 일들을 아예 내려놓는다. 내 것이 아니다. 무능이 깨우쳐준 것이다. 내려놓으니 그 만큼 시간이 생긴다. 그것으로 미력이나마 주어진 곳을 파내려간다.
내가 파내려간 깊이가 얼마인지 잘 모른다. 굳이 알려하지 않음이다. 알아 실망할 일이 아니다. 어제까지 내려간 곳에 오늘 또 한 번의 호미질을 할 뿐이다. 그곳에서 캐어낸 작은 돌들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혼자 즐거워함이 내 일이다. 다른 이들이 보여주는 휘황찬란한 보석들은 내 것이 아니다. 빛나는 남의 보석들을 보면 눈으로 호사를 누리고 마음으로 찬탄을 보내는 게다. 내가 그들을 소유할 수 없고 그것들이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날마다 내가 파내려가는 구멍에서 건져 올린 자잘한 공깃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때로는 사이에 낀 못 보았던 흙을 털어내고 닦아가며 그들과 친해지는 게다. 그 옆에 오늘의 호미질에서 찾아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잘디 잔 돌 하나를 더함이 내 즐거움이다. 어쩌다 지인들이 날 찾아와도 그것들을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설혹 그들의 눈에 띄어 이게 뭐냐 물으면 별거 아니라는 내 말에 누구도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에 몰입할 뿐이다.
집안을 치우는 아내 눈에 띄면 버려질지 모르니 좋은 날 눈에 띄지 않는 더 깊고 호젓한 곳으로 옮겨 놓아야겠다. 이것들이 무능과 미력이 내게 선물한 내 인생의 한 수요, 내 삶의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