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한자

20장 曉 傳 康 疑(효 전 강 의)

변두리1 2019. 10. 18. 17:10

20曉 傳 康 疑(효 전 강 의)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

안식 후 첫날, 지금으로 주일 새벽에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을 둔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 혼자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두렵지 않았을까. 주님을 향한 마음이 두려움을 극복한 게다. 아직 어두울 때, 육중한 돌을 누구 옮길 것인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찌되든 주님 계신 곳에 가까이 가 있고 싶었다. 지난밤에 아마 한 숨도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슬픔의 길을 넘어지며 힘겹게 가셨던 광경들과 십자가에 묶이고 못 박히던 순간들의 망치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땅에 덮이던 어둠과 처절하던 예수님의 외침과 다 이루었다는 숨이지는 듯 작은 소리의 선언도 기억에 생생했으리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달려가 보니 놀랍게도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뭔가 사건이 생겼음을 직감하지만 너무 두려웠다. 무덤 안을 들어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 사건을 알리고 상의하러 다시 제자들에게로 달려갔다. 분망하고 당황스런 새벽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가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다.

  曉(새벽, 동틀 효)+ + 로 이루어졌다. (해 일)은 해를 본 뜬 것이니 시각과 관계가 있다. (사람이름 요)(흙 토)가 세 개 모여 있는 형태로 땅 위에 흙이 수북이 쌓여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땅이 높다는 의미다. (우뚝할 올)(사람 인)이 더해진 것인데, 이 글자의 아랫부분, 곧 발의 위치에 올 때 사용되는 변형이고, 그 위에 넓게 펴진 모습의 이 더해졌으니 높고 위가 평평한 것이다. 새벽하면 해가 산이나 언덕위로 떠오르는 장면이 연상된다. 그것을 중심으로 앞뒤 얼마간을 일컬어 부르는 명칭이 새벽이다. 흙이 높이 쌓여 평평한 곳 위로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표연한 것이 고 그러한 때가 새벽이다. 새벽은 희망의 시간이다. 하루가 펼쳐지는 순간이니 신선하고 경건한 상태에서 좋은 기대를 걸고 하루를 연다. 어두운 긴 밤이 지나고 밝은 날이 다가오는 시점이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 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와 전하는 소식을 듣고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찾아간다. 더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않는데 베드로는 더 늦게 왔지만 그대로 지체 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들은 대로 무덤을 막았던 돌은 옮겨져 있고 주님의 시신은 없었다. 더 충격적이고 의아한 일은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머리 부분의 수건이 따로 그곳에 있더라는 것이다. 얼마간 차이를 두고 요한도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베드로와 같은 상황을 볼 수밖에 없었다. 두 제자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시신은 사라지고 시신을 쌌던 천들이 따로 놓여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 밖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 뜨기 전 그 큰 돌을 옮기고 무덤에 들어가 여유 있게 세마포와 수건을 벗기고 나신만을 가져갔다.’혼자가 아닌 이들이 두려움 없이 뚜렷한 의도로 행한 일이고, 그렇게 하려면 행정당국이거나 적어도 그들의 비호나 묵인을 받는 이들일 것이다. 나신을 만들어 가져간 것은 수수께끼 중에 수수께끼다. 두 제자들이 가고 막달라 마리아는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주님의 죽음도 서러운데 시신마저 없어지고 행방을 알 수 없다니, 알 수 없는 눈물이 솟구치고 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허전한 마음으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이들이 있었다. 두 천사였다. 이어 그녀의 뒤에도 한 분이 계셨다. 마리아를 부르시는 주님이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이 살아났음을 전하라 하셨다. 기쁨에 싸인 막달라 마리아는 힘찬 발걸음으로 제자들을 향하여 달려갔다.

  傳(전할 전)+ (제외) + 이다. 이 변에 올 때 사용되는 변형부수이고, (제외)는 실을 뽑아 감는 방추를 그린 것으로 다른 것을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도 있다. 은 손으로 잡는 것을 나타낸다. (제외)(마디 촌)이 합쳐진 (온전 전)은 그 일만 한다는 의미다. 은 또한 (구를, 옮길 전)의 본래자로 굴러간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은 사람이 다른 것은 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이동해 전달해 주는 것을 뜻한다. 마치 육상의 계주(繼走) 경기에서 각 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전달하기 위해 하는 일을 연상하게 한다. 그들의 목적이 빠르게 그것을 전해주는데 있듯이 그렇게 필요한 사항을 전달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수용과 거절에 따라 영원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비밀의 소식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듣는 이들의 반응과 결과에 상관없이 전하는 것까지가 신자의 의무다. 그 임무를 맡고 실행하지 않아 상대가 선택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전하지 않은 이에게 있다는 게다.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이 있을지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다. 이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고 몇몇 제자를 제외하고는 함께 모여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확인한 바로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은 따로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어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이번에는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께서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단다. 그녀는 주님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일의 진상(眞相)을 모르니 불안하고 일을 꾸미는 상대가 권력과 연결돼 있다는 추측이 더 불안하게 한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동안에도 해는 기울어 저녁이 되었다. 불안하고 두려우니 문을 닫고 모여 있었다. 문이 열리지도 않았고 어떤 소리가 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예수께서 우리 앞에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그 중에도 주님이라는 것이 반가웠다. 어지럽던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지만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康(편안할 강)+ . (고칠, 곡식 경)은 양손에 절굿공이를 쥐고 있는 모양이다. (쌀 미)의 변형이다. 절구로 벼를 가공하여 아래에 쌀들이 나와 있는 모습이다. 혹은 탈곡 후 쌀과 관계된 여러 가지를 거두어 모아 둔 것으로 걱정 없음의 의미 같기도 하다. 조금 상상력을 발휘하면 산이나 바위 언덕에 기대어 만든 집 혹은 창고랄 수 있는 广(돌집 엄)에 탈곡용 농기구로 농작물을 다스려 (다스릴 윤) []이나 쌀 부서진 것인 가루[]들을 쌓아 놓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수렵이나 채취가 쉽지 않은 겨울을 생각해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을 뵌 제자들의 마음은 오래 헤어져 있던 부모를 만난 자녀의 심정이었으리라. 편안하고 푸근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게 평강인 것이다.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항상 설득하기 더 어려운 이들이 현장에 없었던 이들이요 그들이 말썽을 일으킬 소지도 더욱 큰 것 같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현장에 도마가 없었다. 그는 삼년을 함께 한 동료들이었지만 제자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모든 이야기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예수의 시신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세마포와 수건이 있었다는 알쏭달쏭한 이야기에 막달라 마리아의 그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과 제자들까지 무더기로 주님을 보았다는 전언은 허약한 이들의 집단최면을 연상하게 한다. 도마로서는 그들의 한심한 작태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는 그들을 경멸하듯 자신을 선언하듯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고 쏟아 부었다. 어찌 상식 밖의 소리들을 한단 말인가. 희망사항을 사실로 인식하는 건 심신이 약하다는 반증 아닌가. 이런 때일수록 더 이성적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는 제자들 열과 열렬한 추종자들을 합한 이들과 혼자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바짝 차려서 허황된 말에 속거나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아야지. 그렇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疑(의심할 의)+ + + 이다. (비수, 숟가락 비)는 짧은 칼 혹은 숟가락, 화살과 화살 촉 같은 것들을 말한다. (화살 시)는 그대로 촉 달린 화살을 그린 것이다. (아들 자)는 머리가 크게 강조되고 한 손을 내밀고 다리는 보자기에 싸여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발 필)은 정강이 아래 다리를 그린 모습이다. 서로의 거리가 아주 가까울 때나 주요요인을 암살할 때 사용하는 짧은 칼과 화살이 놓여 있으면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기 어렵다. 그 때에 어디로 가야할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모습이다.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아직 확실한 정보나 결심이 없는 상태의 표현이다. 의아(疑訝)해하며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의 걸음걸이가 똑바르지 못해 넘어지지 않을까 의심하는 모습이라고도 하고 네거리에서 소나 다른 것을 잃어버려 좌우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라고도 한다.

  성도들의 새벽은 분주하다. 새벽[]에 주님을 만나는 것은 은총이다. 만난 주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은 복음 중에 복음이다. 이것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복되다. 성도들의 마음에는 평강[]이 있는데 그것은 주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인한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늘나라 백성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기쁨과 감사로 하루하루를 산다. 이것이 성도의 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