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한자

13장 浞 範 愛 否 (착 범 애 부)

변두리1 2019. 9. 20. 10:55

13浞 範 愛 否 (착 범 애 부)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세상에서 다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임박했음을 예수께서 아셨다. 제자들에게 섬기며 살라는 잊힐 수 없는 가르침을 주시기 원했다. 저녁을 드시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떠나 대야에 붓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더니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신다. 발 씻김을 받은 제자는 영문을 몰라 당황스럽고 민망하다. 말없이 발 씻기는 일이 계속되어 베드로에게 이른다. 역시 베드로다.

왜 이러십니까, 안됩니다. 제 발은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네 발을 씻지 않으면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

그럼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세요.”

목욕한 사람은 발만 닦으면 되는 거다.”

 

  베드로를 끝으로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발도 씻어 주시고 물기를 닦아주셨다. 본래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인데 자신이 본을 보였느니 이제는 서로 발을 씻어주고 섬기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일상이 뒤집힐 때, 신선함과 은혜와 감동이 있다. 가족 간에 볼 수 있는 사랑의 법칙이다. 가정에서는 성인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돌본다. 강자가 약자를 먹이고 입히고 기른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그곳에서는 다스리고 지배하는 이가 아니라 섬기고 돌보는 이가 큰 자이고 어른이다.

  浞(젖을 착)+ 으로 이루어졌다. 는 알고 있듯이 유동성이 있는 액체를 나타내고 에서 을 제외한 부분이 합쳐진 것인데 글을 쓰는 편리를 위해 생략한 것도 같다. 는 무릎부분의 뼈를 그 아래 부분은 다리를 그린 것이다. 은 서로 통용된 듯하다. (발 족)(발 소)는 같은 의미의 글자다. 다리와 발이 서로 큰 구분 없이 사용된듯하다. 다리가 튼튼하면 몸을 넉넉히 지탱할 수 있으므로 넉넉하다, 만족하다의 뜻도 지닐 수 있었다. 성경에서 다리는 복음의 전파나 말씀의 실천과 쉽게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발을 씻어주는 세족식(洗足式)이 교회행사에서 자주 행해진다. 주로 씻어주는 이들은 섬김을 받는 이들에게는 사랑과 배려가 강조되는 느낌이다. 서로가 서로를 씻겨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을 보였노라

  예수님의 의도는 평생 잊지 못할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가르침은 본 곧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서로 섬기는 모범을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어줌으로 보이셨다. 발은 사람의 몸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땅과 가장 가깝다. 온몸을 지탱하고 그 무게를 묵묵히 견딘다. 신발 속에 갇혀 있고 햇볕과 공기를 잘 누리지 못한다. 먼지나 오물에 접하기 쉽고 냄새나고 때가 끼기도 쉽다. 얼굴처럼 대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손처럼 사교적이거나 유용성이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묵묵히 음지에서 고생할 뿐이다. 모범이 되는 것은 힘겹고 고생스런 일이다. 늘 눈에 띄기 때문에 숨거나 적당히 넘어갈 수 없다. 뒤따를 이들의 본보기로 화제의 중심이 되므로 흠잡을 것이 없어야 한다. 짧은 기간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몸에 밴 습관이 자연스레 표출되어야 효과가 크다.

  範(. 본보기 범)+ + 이다. (대나무 죽)은 곧게 뻗은 대와 양 옆으로 난 잔가지 혹은 아래로 쳐진 대나무 잎 두 개를 그렸다고 한다. 대나무는 정절의 상징이고 생활용품의 재료였고 기록을 적어두기 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곧게 자라고 굽지 않는 특성이 잘 알려져 있다. (수레 차, )는 바퀴와 굴대와 차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표준화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느낀 물건 중에 하나일 것이다. 각각의 수레가 다르면 고장과 수리에 그만큼 애를 먹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병부 절)은 소속에 따라 사용하는 재료가 달랐다. 두 개의 신표를 맞추어 확인했으니 하나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따라 다른 하나의 모양이 정해졌다. 이것은 오히려 규격화되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참된 모범은 개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상황에 따라 적절히 수행될 수밖에 없다. 옛 성현 공자가 같은 사실을 제자들의 형편에 따라 다르게 가르치고 있음이 이를 잘 보여준다. 상징과 규범 그리고 개별성이 분명한 셋을 모아 모본을 삼아 글자를 만들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은 성도들에게 변치 않는 살아있는 모범이다.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기독교의 가르침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이 될 게다. 예수님은 에덴 동산에서 최초의 인류가 추방당할 때 어쩌면 그 이전 창세전부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비 된 분이다. 그 역사적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삼십 년 준비를 거쳐 삼년의 공생애를 사셨다. 짧다면 짧은 삼년의 삶을 마치고 하늘로 가시는 때, 우주적 역사를 이어갈 제자들이 보기에 따라 너무 초라했다. 과연 이들이 그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주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믿는 것이었다. 유다에 의해 잡히시는 마지막 날 만찬에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실 때,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자들이 깨닫자마침내 너희가 믿느냐며 안도하셨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며 그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 서로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이 그들을 주님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 사랑하지 않고 거꾸로 미워하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愛(사랑, 아낄 애)+ + + 가 합쳐져 있다. 원래는 두 손으로 심장을 들고 입으로 소리치는 것을 나타냈다고 한다.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의 글자가 되었는지 모르나 현재 사용하는 글자를 유추하는 것도 흥미롭다. (손톱 조)는 손톱이다. 가 본 모양으로 손가락 세 개를 나타내 손으로 무엇을 잡는 모습을 그렸다. 나중에 손발톱을 의미하게 되고 글자의 일부로 쓰일 때는 의 모양으로 변형되어 쓰인다. (덮을 멱)은 물건을 덮은 수건을 그린 것으로 덮개를 의미한다. 은 심장으로 표현된 마음이고 (뒤쳐져 올 치)(천천히 걸을 쇠)와 현재에는 구분하기 어려운 것 같다. 발의 형태가 거꾸로 되어있는 모양을 그렸다고 한다. 발이 거꾸로 되었으니 느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정을 더해 풀이하면 마음을 감추고 손톱을 깨물며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라 하겠다. 서로 주고받음을 나타내는 (받을 수)가 준다는 의미를 분명히 하려고 (손 수의 변형)를 첨가해 (줄 수)로 독립시키니 받는다는 뜻만 남았다. 의 중간에 을 더하면 와 같아진다. 아래 부분이 발보다 손이니 더 확실한 듯고 하다. 언제고 상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정경이 떠오르지 않는가. 주께서 제자들을 또 성도들을 제자들과 성도들이 예수님을 성도들 상호간에 아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 하겠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직설적이고 참지 못한다. 그래서 대단히 솔직하다. 앞뒤를 재고 에둘러 말하지 못한다. 주님께 책망도 듣지만 주님은 베드로의 그런 면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예수께서 자주 떠나신다 하니 베드로가 어디로 가시는가 물었다. 주께서 너는 따라올 수 없다 하시니 왜 못 따라 가느냐 목숨까지라도 바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는 목숨을 버리겠느냐 이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의 뒷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무척 서운했으리라. 그의 성격에 비추어보면 참기도 어렵고 구시렁거리지도 않았을 게다. 다 들릴만한 소리로 주님은 내 맘을 그렇게도 모르시나, 버선목이라고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했을지도 모른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인간의 약함을 알게 해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큰 소리 쳐봐도 위기를 만나면 무너지고 실수하기 쉬운 게 인간 아닌가.

  否(아닐 부)+ . (아니 불)은 새가 하늘로 날아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고도 하고 꽃의 씨방으로 아직 과일이 되지 않은 모습이라 하기도 하고 씨앗이 땅 속에 뿌리는 내렸지만 아직 싹은 틔우지 못한 것을 그렸다고도 한다. 모두 아직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다. 좀 더 자유롭게 상상해보면 (바칠, 보일 시)에서 윗부분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部首(부수)로 하는 글자들이 제사 기도와 관련이 있음을 고려하면 제물이 올려 진 제단을 그렸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물이 없는 제단은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으로 혹은 를 하늘에서 땅으로 [] [] []을 통해 하늘 뜻을 알리는 의미라고 하면 위의 짧은 이 없으니 하늘이 알려주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는 입의 모양을 본 뜬 것이니 말을 통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 를 합한 는 말로써 아니라고 확실히 否認(부인)하는 것이 된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섬기는 사랑의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그들에게 주셨고 베드로는 그 밤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슬픈 일을 겪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