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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택

변두리1 2019. 2. 25. 21:19

선 택

- 한 여성학자가 본 세상 -

 

  권인숙, 한 시대의 아픔의 아이콘이 아닐까. 그녀가 여성학자가 되어 쓴 책이다. 노동운동가였다가 한 아이의 어머니로 여성학교수로 살아가면서 외국에 주로 살며 조국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뭔가 달랐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하니 솔직함을 드러낸 일상을 통해 생각들을 나눠보는 것도 흥미가 있겠다. 딸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아가는 모습이 이제 우리 사회에서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남녀가 공히 결혼이 선택인 시대를 살고 있다. 결혼의 삶과 비혼, 어느 게 더 행복할지 누구도 모른다.

  영어이야기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영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평생을 왜 영어를 무거운 짐처럼 지고 살아야 하나. 영어가 국어나 공용어가 아니면서 십여 개는 족히 될 영어가 쏟아져 나오는 텔레비전 채널을 넘기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저자의 딸은 어린 나이에 미국에서 수년간을 살아 영어에 익숙한 모양이다. 친구들이 처음 만나면 주로 하는 이야기가 영어 잘해 좋겠다는 거란다. 하지만 저자는 영어에 주눅들일이 많은 모양이다. 왜 그렇지 않으랴. 외국어로 배운 언어로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이들에게 강의한다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일까. 요즘 우리의 일상 언어에 영어가 쉽게 섞이는 걸 본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쉽지 않다. 꼭 필요한 이들 외에는 영어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일본어나 중국어를 못하는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 될 수는 없을까.

  부모님들이 대단하다. 원주가 고향인 모양인데, 대범한 어머니와 자제력이 대단한 아버지시다. 딸이 자랑스럽기도 했겠지만 격동의 시기를 지나며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 강요나 한탄을 드러내지 않음이 대단하다. 딸의 인생의 굴곡을 지켜보면서 삶을 더 일찍 많이 살아본 이들로 왜 하고픈 이야기들이 없었을까. 혼자 어린 딸을 양육하며 외국에서 힘겹게 공부하는 딸이 또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의 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게다. 지금의 내가 당시 그녀의 부모보다 적은 나이라 할 수 없을 텐데 딸들이 그녀의 처지라면 그분들처럼 처신할 수 있으려나. 자신이 없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보는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그녀 주변에 좋은 이들이 많이 있었나보다. 늘 생각이 난다는 조영래 변호사,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한 때는 지도교수로, 또 성실한 후원자로, 동료교수로 지낸다는 신시아 인로 같은 이들이 그런 좋은 이들일 게다. 그들 중에서도 조 변호사 분을 잊지 못하고 늘 그리워한다. 그와는 다른 차원으로 소개해주는 신시아 인로, 삶에서 그런 이를 만난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사실은 우리 모두가 그런 이들을 이미 만났는지 모른다. 스치듯 지나가 관계의 끈이 이어지지 않았을 뿐일 수 있다. 내게 영향을 주기 원하고 내가 영향을 주었어야 할 많은 이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흘려보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 그러한 이들을 만난다 해도 좋은 관계로 지낼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도 않는다. 결혼도 하지 않고 꼼꼼하고 철저하게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신시아 인로 같은 이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기를 바랄뿐이다.

  어떤 환경에서건 자신의 안경을 통해 모든 걸 볼 수밖에 없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우리 사회의 남성 가장들이 겪었을 고통과 절망을 그녀는 여성학자의 시각으로 본다. 그러면 그들보다 더 힘들었을, 사회적 조명조차 받지 못하고 위로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 여성들이 보인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 15년 정도 지난 이야기여서 인지 현재는 많이 좋아진 듯하지만 아직도 여성들의 권익이 제대로 누려지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각 분야에 고쳐져야 할 폐습들이 적지 않다. 최근 들어 미투(me too) 바람이 사회를 강타했다. 그동안 얼마나 깊게 성적인 차별과 폭력적 상황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나를 모두가 보게 된 계기였다. 한 꺼풀만 들어가면 벗겨지지 않은 민낯들이 아직도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성폭력의 문제에 있어 여성보다 남성이 더 문제고, 딸들보다 아들이 더 위험하다는 견해를 들려준다. 인터넷 포르노를 본다고 할 때, 딸이면 큰 일 난 것처럼 하고 아들은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인식이 더 큰 문제라는 게다. 남에게 피해를 줄 개연성이 더 큰 게 남성들이고 그 책임의 많은 부분은 남성들에게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아예 발달단계를 민감한 성감대에 따라 구분하고 두 가지 인간본성을 성정충동과 공격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평생을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아차하거나 긴장이 풀리면 가해자가 될 위험이 늘 있다는 건 아닐까.

  성형에 대한 그녀의 외침은 차라리 절규로 느껴진다. 사회적인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고 그것은 각 영역의 다양성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게다. 미의 기준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 되고, 성공의 기준도 단일이 아닌 다양화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외적인 미나 학력 같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 자체로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어느 영역의 우열이 인격의 평가와 이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사회의 건강한 의식의 전환이 속히 이루어지면 좋겠다. 성형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져 지난번에 어떤 영화를 보았다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할 수 있는 열린사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