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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사도세자(정조 나무를 심다)

변두리1 2019. 2. 6. 18:42

내 아버지 사도세자(정조 나무를 심다) 

 

  1776320,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하신지 보름, 내가 왕으로 오른 지 열흘 되는 날이다. 310, 왕으로 오르며 내가 한 첫 말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폐 세자하여 뒤주에 가둬 죽게 하고 나를 왕으로 세우려, 오래전에 죽은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았다. ()이 내 이름이다. 보고[] 또 보았다[]는 게다. 아버지의 최후를 보고 또 보았다. 연산군의 심정을 이해한다. 나는 아버지의 한()을 바르게[] 푸는 임금[]이 되련다. 할아버지와 신하들은 내게 죽음을 보여 주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묻힌 곳을 통해 생명의 기운을 강력히 드러낼 것이다. 14년 전, 임오화변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나를 향한 할아버지의 은총을 잊을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내게 피와 살을 물려주셨다. 왕이 되던 날, 문무백관들이 내 일성을 듣고 낯빛이 변하고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던 광경을 잊을 수 없다.

  오늘 아버지를 장헌세자(莊獻世子), 그 무덤과 사당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시켰다. 할아버지 영조는 임오화변 2년 후인 17642월 갑신처분을 통해 아버지를 절대 높이지 말라고 내게 명했다. 한 글자라도 올리면 할아비를 잊는 것이라 했지만 나는 아들 된 도리로 신하들이 반대하기 어려운 즉위 초, 곧 오늘 강행했다.

  아버지는 불쌍했다. 뭇 신하들과 할아버지에 의해 희생된 게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늠름하고 현명하던 세자에서, 할아버지에게 겁먹고 신하들과 맞서다 한 발씩 물러나는 흔들리던 이십대 왕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는 자애로웠지만 아버지에겐 교활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무예에 힘쓰고 그에 관계된 책을 쓰고, 자신의 신하들인 노론과 맞서는 형세를 보이니 몹시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신하들은 아버지를 깐깐하고 힘겨운 상대로 불편하게 여겼던 것 같다.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걸로 생각했을 게다. 왕권이 강력하면 신하들은 죽은 듯이 복종할 것인데, 할아버지가 늘 신하들 편이어서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그들을 자신의 신하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양위(讓位)라는 치졸한 연극으로 드러내놓고 끈질기게 아버지를 괴롭혔다. 아버지가 4,5,9,10,14세 때에, 15세 이후 대리청정을 할 때도 세 번이나 더 그 방법을 더 써먹었다. 누가 보아도 억지, 생떼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놀이를 오십 전후의 왕이 한다는 것을 제정신이라 할 수 있을까. 신하들도 처신이 어려웠다. 결과가 뻔한 어리광을 받아줄 수도 물리칠 수도 없었다. 신하들 앞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당하는 아버지는 더 가엽고 불쌍했다.

  아버지는 어느덧 마음의 병이 깊어 할아버지를 지극히 두려워하고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행하기 시작했다. 한 궁궐에 거하면서 할아버지를 열 달 가까이 직접 만나지 않기도 하셨다. 외할아버지도 철저히 할아버지 편인데다 자신의 동료들인 신하들과 한 패였고 어머니조차 아버지 편에 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철저히 고립무원이셨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1762년 음력으로 513, 한 여름 더위에 아버지는 보름가까이 음식을 드시지 않은 채,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했다.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높여 질책하며 자결을 명하다,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를 뒤주에 들어가라 명해 가두고는 자물쇠를 잠그고 못을 치고 밧줄로 묶었다. 그 때 내 나이 열한 살, 내게 관대한 할아버지께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며 애원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게 다 나라와 우리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 했지만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비정한 악마를 보았다.

  날마다 아버지 신음소리와 부르짖음이 환청처럼 들리다 끝내 잦아들었다. 뒤주에 갇힌 지 팔일이었다. 돌아가신 것이다. 내겐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장례가 일사천리로 집행되고 다시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복위되었지만 무덤조차 험지에 마련되고 수은묘(垂恩墓), “()”가 되고 말았다.

  1796,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내가 왕이 된지도 벌써 20, 임오화변에 관계된 이들은 대부분 이런저런 명분으로 조용히 처단했다. 신하들도 이제는 알아서 처신 한다. 내 사람들을 양성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즉위와 함께 규장각을 세워 정약용을 비롯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같은 이들을 등용했고, 장용영을 만들어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했다. 한양의 호족세력을 약화시키려 군사 상업 도시로 2년 전 수원화성을 새로 건설하기 시작해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버지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해 1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시들지 않는 녹음으로 아버지의 위상을 높였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해준 고모부 박명원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할아버지 대부터 왕궁의 궂은일을 도맡아 성심껏 해내더니 내 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 의빈성씨 일을 치르고는 과로로 생을 마쳤다. 현륭원의 이전도 그가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순조롭진 못했을 게다.

  백성과 선왕들께 면구스러움이 아주 없지는 않다. 왕으로서 그간 통치를 도외시한 건 아니지만 아버지의 한을 위무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능을 옮기고 건물들을 짓고 특히 천이백 만 그루가 넘는 어마어마한 나무를 심느라 다른 곳을 소홀함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내 딴에는 재정지출을 최소화하며 내 평생 이루고픈 소원을 국론을 분열시키지 않고 무사히 이루어 낸 것이다.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이제 아버지도 저승에서나마 내 마음을 받고 한을 푸셨을 게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낮아서야 되겠는가. 할 수 있다면 내 생애에 내 손으로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해 드리고 싶다. 그것 외에는 언제 죽어도 마음 편히 눈감을 수 있다.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세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것뿐이다. 아버지를 높여드리고 아들이 늠름한 장부가 되기까지 앞으로 십 년만 더 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