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한자

6장 飽 涉 餠 魔(포섭병마)

변두리1 2019. 1. 18. 18:06

 6飽 涉 餠 魔(포섭병마)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모였다. 말씀을 듣다보니 저녁때가 되고 제자들은 예수께 사람들을 돌려보내자고 요청한다. 사람은 많고 주변 시설도 열악한데다 적어고 천만 원은 가져야 한 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빌립이 거든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당황스러웠을 게다. 주님이 말씀은 잘 하시는데 현실인식이 없다고 느꼈을 게다. 이 때, 안드레가 멋지게 받아치며 다시 공을 예수께 넘긴다. 여기 한 아이 도시락,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데 뭘 해볼 수 있으시겠어요.

  주린 것은 飢餓(기아). (주릴 기)의 합이다. 은 수북이 담긴 밥그릇과 숟가락이니 먹는 일 혹은 그 밥이고 ()는 팔걸이 도구 혹은 흙담 쌓는 틀이다. 안이 비어있을 먹을 수 없는 것들이다. (주릴 아)(굶주릴 아)가 더해진 형태다.

  굶주림이 해결된 것이 배부름이다. 그것을 나타낸 것이 ()인데, ‘배부르다, 가득 차다, 만족하다, 물리다의 뜻이다. 배부르고 등 따듯하면 일차적 생리욕구는 해소되는 것으로 예전에는 그 이상 바랄게 무어냐고 하던 이들도 있었다. 의 해결이 어려운데 어떻게 까지 바랄 수야 있을까.

  예수께서 무리를 오십씩, 백씩 앉히라 하신다. 한 가족 먹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한 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말이다. 제자들도 어찌되나 보자는 것인지 하라는 대로 따른다. 무리들은 먹을 것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집행부가 알아서 해 주려니 하는 마음이다. 예수께서 도시락을 놓고 기도하시곤 원하는 만큼 나눠 주란다. 그렇게 해서 남자 어른만 오천 명,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만 명이 넘는 이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게 열두 바구니였다.

  飽(배부를 포)의 상태가 된 것이다. 가 더해졌다. (쌀 포)(자식 사)가 합해진 것으로 여인이 아이를 배서 배가 커진 것을 나타낸다. 그러니 는 모양은 아이 밴 것과 같으나 그 원인이 , 곧 밥을 많이 먹어서임을 보여준다. 에서 로 된 것이 핵심이지 그 방법을 논리 혹은 과학적으로 분석해 볼 수 없다. 그것이 신앙의 세계다.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분석되면 그건 더 이상 신앙이 아니라 과학이다. 과학이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면 신앙은 이성을 넘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五餠二魚(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예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제자들은 갈릴리의 활동거점인 가버나움으로 따로 떠났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던 중에 역풍을 만나 힘겹게 노를 저었으나 지지부진 갈릴리 바다 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때 그들 앞에 바다 위를 걸어오는 존재가 있었다. 그들은 얼떨결에 유령이라 소리치며 무서움에 떨었다.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제자들이 기뻐하고 예수께서 배에 오르니 풍랑이 멎고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전날 저물녘에 적은 것으로 많은 이들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의 제자인 것에 으쓱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곧바로 현실을 깨닫는다. 수십 년 살아온 갈릴리 호수에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바람과 파도에 지쳐갈 때 유유히 바다 위로 걸어오시고 그 분이 오시니 바람이 그치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자신들과는 너무 다른 대단한 예수님이었다.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셨다. 물 위를 걷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니 적당한 한자를 찾기 어렵다. 비슷하다고 찾아낸 것이 (건널 섭)이다. 본래의 뜻은 시내를 걸어서 건너다정도였을 텐데 건너다, 지나다, 거닐다로 확장되었을 게다. (걸을 보)가 더해진 것이고, 는 발모양[](적을 소)가 합쳐진 것인데 처음에는 를 위아래로 겹쳐 썼다고 한다. 한 걸음에 갈 수 없으니 반복의 의미였을 듯하다. 그 분의 능력이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우주에 이르기까지 창조주께 순종치 않는 것이 없고 그 분이 통제하지 못할 게 없었다. 죽은 이를 살리고 중력을 거슬러 승천하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오병이어를 경험한 무리들이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으러 왔다. 예수님은 그들이 떡을 먹고 배부름을 체험해서 다시 찾아왔다고 말씀하신다. ‘썩을 양식이 아닌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하라, 이 양식은 내가 너희에게 주리니 나는 하나님이 보증하는 사람이다엄청난 말씀이다. 무리들은 놀라운 체험을 한고로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를 믿는 것이다표적을 보여주시오, 조상들이 만나를 먹었듯이 우리에게 떡을 내려 보시오. ‘내 아버지께서 생명의 떡을 주시니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하늘에서 온 생명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이 떡은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만나와는 다른 영생하는 떡이다.’이 말을 들은 이들 중에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오해의 여지도 많고 받아들이기 결코 쉽지 않은 엄청난 말씀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고 함께 숨 쉬고 대화하고 걸어 다니는 그들로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는 어려웠을 게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어려운 말씀이었다. 마리아의 큰 아들, 요셉이 아버지, 그 어린 시절을 다 아는데, 어디서 자기가 하늘에서 왔고 무슨 생명 떡이래, 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올 만하다.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할 게다. 답답하기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너무 답답해 진실로진실로를 되풀이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으로 인해 나타나는 이적들을 보면서도 한없이 의심만 한다.

  餠(떡 병)(아우를 병)이 더해졌다. 원래는 이었고 그것은 에서 또 그것은 변을 가진 것에서 과 합쳐지면서 이 빠지고 간략한 형태로 굳어졌을 것이다. []이 가진 아우르는 기능은 무엇이었을까. 먹어 배고픔을 해소하고 큰 일 때의 음식으로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함께 나누기도 했을 게고, 께 드리기도 하고 화해의 매개물이 되기도 했으리라. 참 떡이신 예수님으로 영의 힘을 얻고 삶의 원칙을 삼고 소통의 근본으로 여기기도 한다. 다른 것들은 먹을수록 죽음에 가까워지지만 이 생명의 떡은 먹을수록 영생하고 강건해지는 떡이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가룟 유다를 가리켜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아시면서 열두 제자 중 하나로 선발하시는 그 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마귀가 유다에게 들어가는 장면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며 떡 한 조각을 적셔 유다에게 주시니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라고 했다. 마귀의 도구가 되어 마귀 일을 하는 이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必要惡(필요악)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역할에 걸리는 이를 안됐다, 불쌍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 마음에 잠재요소가 있는 이들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연극이나 드라마에서도 평소에 그 역에 잘 어울릴 듯한 이들에게 그 역할이 주어지는 것 아닌가. 여덟 명이 달리면 1등부터 8등이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실력을 따라 어느 정도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魔鬼(마귀)에게 접근할 틈을 평소에 주지 말아야 한다.

  魔鬼(마귀)에는 (귀신 귀)가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에도 가 있다. 로 이루어졌고 또 에서 우상단부의 점을 뺀 글자를 옆으로 겹친 삼의 총명, 패로 되었고, 패는 삼 줄기의 껍질을 벗긴다는 의미의 빈이 겹친 것이다. (삼 마)와 관련된 혼미케 하는 의미를 가지지 않나 싶다. 广()은 산이나 절벽에 지어진 집을 뜻하는데 의 거처, 좋아하는 곳을 나타낸 걸 것이다. 외딴 곳에 살며 어둡고 습기 있는 곳을 좋아하며 사람을 미혹케 해 나쁜 일을 하게 하는 사탄의 하수인이 魔鬼(마귀)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다. 항상 말씀으로 무장하고 깨어있는 것이 최선의 방비이다.

  배불리 먹고 물을 건너지만 그렇다고 떡을 마귀에게 줘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