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수필

내 마음의 수필

변두리1 2017. 8. 30. 00:07


내 마음의 수필
(2017 그 여름의 기록)
 





2017 방송대 여름 수필특강 작품집




《교수님의 응원수필 》

 무너진 밭둑

김홍은

 

생활 주변에는 많은 쉼터가 있다. 그때그때 잠시나마 피곤함을 달래는 모습과 장소는 다양하다. 그 중에도 농부가 밭둑에 둘러앉아 새참을 먹고 난 후 휴식을 취하는 전경은 아름답다.

농부는 담배를 피워 물고 푸른 들판을 바라보는 뒷모습은 행복해 보인다. 밭을 다 갈고 쟁기를 벗어 놓고 고삐가 풀린 채 풀을 뜯고 있는 암소의 휴식도 평화롭게 다가온다. 지금은 어디를 가도 이 같은 자연스런 풍경은 거의 볼 수가 없다.

지난해 밭둑 경사면에다 앵두나무를 나란히 심었다. 키가 큰 나무를 심으면 작물에 피해를 줄까봐 관목으로 선택하였다. 앵두나무는 첫해부터 심은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분홍빛깔로 줄기마다 구슬을 매달은 것 같다. 어떤 가지는 아직 꽃몽우리가 가득하고, 어떤가지는 화사하게 피었다. 꽃잎이 날리는 풍치도 멋지지만 여름이면 앵두가 알알이 앙증맞게 익어갈 아름다울 밭둑을 상상하였다. 자연은 술수나 거짓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를 짓다보면 이웃과 밭둑이란 하나의 경계를 두고 서로 경작을 한다. 논에는 모를 기르기 위해 물을 가두려면 논둑이 꼭 필요하다. 밭은 평지에서는 서로간의 경계만 확실하다면 굳이 밭둑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웃 간의 정을 나누며 두레의 마음으로 살아감은 농촌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인간미가 아니던가.

우리의 생활은 60년대만 해도 이웃 간이 정답게 살아갔다. 이제는 한 마을에 살아도 인간미를 져버린 채 서로가 경계를 두고 점점 삭막한 이웃이 되어가고 있다. 이기심에 가득 찬 삶으로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는 사회로 변해 가고 있지나 않는지. 물론 예전에도 그랬다.

욕심 많은 이웃과 같이 살다보면 제논에 물댈 줄만 알고 남의 논에 물들어가는 꼴을 못 보는 사람도 있었다. 초저녁에 물고를 막아놓고 가면 얼른 물길을 자기 논으로 도려 놓는다. 제욕심만 차리는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이웃과도 참으며 살았다. 물은 건너봐야 깊고 얕음을 알며, 사람의 마음은 겪어 봐야 안다고 했다. 시골인심도 가뭄을 겪어봐야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있다.

지난해부터 지인과 밭뙈기를 얻어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 어느 날 늦은 여름비로 둑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흙을 높여 물길을 돌려놓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밭둑을 원형대로 정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농사를 짓던 지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멀쩡한 밭둑이 적은양의 비에 무너졌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느닷없이 “밭둑은 내가 무너뜨렸어요” 한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전에 밭을 관리하던 분이 비닐 뭉치를 밭둑에 묻어둔 것이다. 이를 빼내고 흙으로 메우는 것을 깜빡 잊었단다.

순간 정직한 마음을 느꼈다.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으련만 솔직함이 감동되었다. 이렇게 털어놓는 마음을 갖은 우정을 만남이 참으로 기뻤다. 한편 이런 분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자신의 부족함에서 스스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 분은 공직에서도 청백(淸白)한 공무원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의 사회는 사방을 둘러봐도 거짓으로 자신을 유리하게 포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뿐이다. 정을 나눌 믿을만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렵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신의도 져버리는 세상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옳고 그름이 어떤 것인지 판단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은 살아 가다보면 환경에 따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변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련만 그렇지가 않다. 밭둑은 장마로 무너져 버려도 경계를 만들어 놓으면 되지만, 사람의 양심은 한번 무너지면 다시 구축하기가 어렵다.

나는 늘 마음속으로 사무사 무불경(思無邪 毋不敬)이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좋아한다. 예의도 모르는 인간은 무너진 밭둑만도 못한 슬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가치 없는 삶이다. 존경받는 인생으로 살아가려면 생각에 사심이 없고, 늘 공경과 배려하는 마음 갖음이 아니던가.

남을 공경할 줄도 모르고, 물욕만 앞서있으면 그 마음은 돌밭이 되고 만다. 그동안 밭을 갈며 겉으로 들어난 돌들은 쓸모가 없어 밭가로 주워다 버렸었다.

우리는 둘이서 버렸던 돌을 번갈아 다시 주워서 무너진 둑에다 쌓았다. 자연은 상황에 따라 쓸모없음을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우악하고 거치른 세상이라 하지만, 밭둑양심 쯤은 지키며 살아가는 그런 이웃들이 그립다.


  

 
 

 





〈책을 엮으며〉

하늘 향해 여린 순 하나 뻗는 심정으로

  교수님께서 방송대특강을 계획하시며 홍보가 시작될 때만해도 함께 할 이들이 얼마나 될까 했습니다. 하지만 가슴 속 묻어둔 사연들을 표현해 보고픈 열망은 활화산 같았습니다. 개강하기 전 40여 분이 등록을 해 주었습니다. 실제 강의에 함께 하지 못한 분들의 마음을 알고도 남습니다. 좋은 기회가 어쩌면 다시 올 수도 있다고 기대하고 싶습니다.
  화양동, 음성 심지어는 경남 함양에서 오직 열정 하나로 달려온 2017년 여름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기간 동안, 엄청난 물난리도 있었습니다. 무더위도 대단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뜨거움을 식히지 못했습니다.
  교수님은 우리보다 항상 더 끓어 오르셨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들을 향하여 채찍질하셨습니다. 그 진심을 알기에 몸에 힘을 돋우어 줄 쓴 약을 마시듯 받아들였습니다. 오랜 경험에서 울어난 강의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글이 되게 하려는 지적은 다른 곳에서 듣기 어려운 감로수 같았습니다.
  “첫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을 기억합니다. 돌을 앞둔 아기가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딛듯이, 자전거를 배우는 이가 때론 넘어지기도 하고 삐뚤거리며 나아가듯이, 생애 여린 새 순을 하늘 향해 뻗어 봅니다.
  이름난 이들이나 전문가들 같은 좋은 글이 아니라는 걸압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소중한 흔적입니다. 그냥 지나치고 흘러 보내기에 너무 아쉬워 책으로 엮습니다.
  우리의 빛나는 여름을 위해 열강을 해주신 김홍은 교수님, 감사합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총무로 모두를 섬겨줘 편하게 수업을 듣게 해 준 정미숙 선생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수시로 음료수를 비롯해 먹을 것을 가져다 준 글동무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방학 중임에도 모든 편의를 보아주고 불편을 모르게 해 주신 행정실 선생님들, 특히 김홍우 선생님 고맙습니다.
  겨울방학 특강을 구두로 약속해 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이번의 애씀과 땀방울이 헛되지 않게 지속적인 글 모임으로 이어지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름만 갖고 제대로 한 일 없음을 너그러이 보시고 넘겨주시면 더 없이 큰 은혜로 알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문운을 기원합니다. 
                                              2017.8.17.  최 한 식   
《교수님의 응원수필 》
〈책을 엮으며〉
차           례(무순입니다)

이영희님  가족들과의 행복
          하늘 물빛 정원
          아름다운 의림지

김영희님  감자
          그대(추모시)

김숙자님  김밥
          네 잎 클로버
          깨달음

민안자님  목화꽃
          고추 화분
          개암과 헤이즐넛

정금자님  못난이 사랑
          우리 집 보약
          월정사 전나무 숲

최례진님  연분홍치마
          아파하는 지구를 위해
          봄을 만나다
          가을과 함께 한 과거로의 여행

이성숙님  새
          성씨 이야기
          내가 꿈꾸는 책방

최한식님  샛노란 꽃 한 송이
          연녹색 댓잎들
          서가에 놓인 문진 


이운우님  서예
          다래 순
          과거로의 여행

나명희님  이제 나도 사업 할래!
          더 큰 파도
          이웃사촌

박근열님  녹두전
          자아 달려가 보자!
          남편

한옥례님  청소
          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
          무료급식

전혜경님  하늘도 너무 하시지

김미란님  누렁이

임인숙님  감사                     

2017 여름 수필 강좌 수강생 명단
 






가족들과의 행복

 

                                                           향담 이영희

 

    날씨가 뜨거운 날, 오랜만에 괴산 산막이 옛길에 6남매 모임이라 가족들과 동행하였다. 산막이 길 주차장에서 모두 만나기로 해서 차로 가다 내려서 걸어 보니 무척 더워 힘들었다. 2시간 코스라 해서 올라가다가 자매들과 양산을 같이 쓰고, 부채를 부치면서 오랜만에 대화하니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되었다.

    정상에 올라가다가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팻말사이에 추억과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산막이 옛길 시도 읽으며 감동을 하였다. 대학 창 문학 시절에 시를 회상하면서 괴산 색소폰 앙상블 연주도 바라보며, 고인돌 쉼터와 소나무 도산도 돋보인다. 산막이 옛길의 소나무 림 곁에 초록 소나무들이 하늘로 치솟아 소나무 출렁다리와 함께 멋지게 보여 기뻤다. 소나무가 사랑을 나누는 정사목과 함께……. 구불구불 뻗은 소나무와 단정하게 쌓은 돌담길이 제법 운치 있어 오르는 길이 힘든 줄 모른다.
    좋은 자연경관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걸으니 생각도 비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좋았다. 더워서 힘들기는 했지만, 자연과 마주하는 순간 피곤과 수고가 순식간에 사라져 좋은 시간들이었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오고, 곳곳에 나무 그늘과 자연바람은 힐링 그 자체여서 자매들과 얘기 나누며 공감하는 시간이라 기뻤다.
    시골 청년들의 사냥터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호랑이굴 앞에 어른 아기 호랑이 동상들이 나란히 고함을 지르며 다가오는 모습이 무섭게 느껴졌다. 잔뜩 웅크린 채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노려보고 있다.
    산막이 옛길의 굴피나무 림과 굴참나무 림이 아름다운 미녀참나무와 함께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추억과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산막이 옛길과 낙화 시를 읽어보며, ‘ 떨어진 꽃은 아름답다. 아련한 그리움이 입술에 묻기 때문이다.’ 에 공감해 본다.

    괴산바위와 꾀꼬리 전망대 등을 바라보다가, 산막이 옛길 다래 숲 동굴이 나와 터널 모양으로 자연 속에 묻혀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든 장소라 무척 좋았다. 산막이 옛길의 거의 끝나는 지점 소나무 숲 아래 진달래 군락지로서, 위는 푸른 소나무, 밑은 붉은 진달래 동산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멋있게 보인다.
    하얀 연꽃과 함께 초록빛 연잎들이 다수라 보기 좋게 다가와 아름답다. 산막이 옛길의 소나무 림도 있어 동산에서 만나볼 수도 있는 소나무들이 산막이 나루와 멀리서도 돋보인다.

   농경문화의 중심지인 괴산군 칠성 댐 근처의 산막이 길에 잘 왔다는 생각을 하며 배를 타러 부둣가로 향해 본다. 배를 20분간 타면 빠르다고 하여 찜통더위를 이기고 싶어 바로 선착장으로 가 보았다. 하얀 배들이 멀리서도 다가오며 맑은 물 위로 와서 모두들 배에 올라갔다. 물거품을 뒤로 하며 멀리 소나무들과 배위에 둥근 보트 모양 사이로 산들도 있어 시원하고 아름다웠다. 배에서 내려 오다보니 하얀 구름과 나무아래 할머니 할아버지 동상들과 인사하는 멋진 조각상들이 있어 귀엽고 예쁘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산막이 옛길, 뜨거운 태양빛에 오곡백과가 익어 가는 여름의 꼭짓점이 가고 있다. 숲과 함께 어울린 오늘의 시간이 멋지고 아름다워 행복한 시간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하늘 물빛 정원

 

향담 이영희

 

    파랗고 맑은 하늘을 보면서 오랜 만에 하늘 물빛 정원으로 가족들과 출발하였다. 가는 길에 만개한 빨간 꽃이 반겨주어 무더운 여름의 절정인 듯 싶다. 꽃이 피고 지는 시간만큼의 인생, 때로는 인생의 길이가 그 정도 쯤인 듯하다. 화사한 꽃들을 보니 나의 순수한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어릴 때 부모님이 일찍 일어나시어 벌처럼 열심히 일하셨다. 사고 싶은 책을 문의 후 공부에 관한 책을 얼마든지 사라고 하시며, 돈이 부족할 땐 빌려서 사 주시곤 하시어 무척 감사하고 감동적인 느낌이 들었다. 거실 책장에 좋은 책을 많이 꽂아 두시어 귀가 시에 보이는 책을 읽게 되고, 그 중에 시와 수필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늘 물빛 정원처럼 착한 마음을 먹으면 착한 행동이 나오고, 나쁜 마음을 먹으면 나쁜 행동이 나온다. 확실한 것은 마음은 늘 현재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를 떠올릴 수도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지만 그 마음은 늘 지금 여기에서 작동한다. 이 마음을 잘 쓰는 것이 부모님의 모습처럼 향기로운 삶의 요체가 될 것 같다.

 

    기쁜 일과 슬픈 일 가슴에 포용하며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소망으로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자리와 웃고 흐느끼는 삶의 어울림……. 하늘 물빛 정원에 들어가서 허브 열대 식물원에 먼저 진입해 보았다. 파초일엽과 새우초 공기정화 식물인 트리안과, 푸른 나뭇잎들 사이로 하얗게 쏟아지는 폭포수 아래로 맑은 물이 흘러 보기 좋았다. 아프리카 원산지인 바오밥 나무와 박쥐란 오로라 등이, 붉은 잎 옆에 초록 잎새들과 함께 돋보여 기뻤다.

    의자 위에 하늘 물빛 정원 팻말과 그 옆에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 라는 빨간 하트 모양 안의 글귀가 마음에 깊이 다가 왔다. 금호 선인장과의 모습과 느낌이 부드럽고 연초록 색상이 밝은 왕고사리가 미란타와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어 볼만하다. 머들령 계곡을 흐르다 장산호수가 태어났고 꽃다지와 산당화, 물속에 우뚝 선 뚝버들의 수목과 야생화들이 수많은 시간들 속에 피고 또 지어 아름답다.

    밖으로 나오니 주황빛 꽃들이 물빛정원 산책길 옆에 아름답게 피어 있어 예쁘고 즐거움을 주었다. ‘지칠 테지만 믿음을 잃지 마, 운명의 그 사람은 너를 향해 오고 있어. 그것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말이야’ 등 글귀가 옆에 바위 조각상들과 다가와 아름다움을 빛내 준다. 바위에 그림들과 사랑에 관한 내용의 글들이 빛나며 힘을 주어 기분이 상쾌하다.


   늘 푸른 소나무들과 하얀 꽃잎들이 파란 하늘 흰 구름 아래 하늘 물빛 정원을 돋보이게 하며, 하트 모양의 사랑 팻말과 장미꽃의 예쁜 모습이 어울렸다. 허브 향 내음 길 안의 빨간 꽃들이 초록 잎들과 돋보인다. 멀리 새하얀 하늘과 더불어……. 그 옆에 노란 꽃들이 귀엽게 오기종기 모여 있고, 붉으며 하얀 꽃들이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치솟아 산책길이 예쁘게 보였다.

    라넌 쿨러스 꽃과 참 숯가마 앞을 지나 발걸음을 옮기며, 오늘 온 하늘 물빛 정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해 보아 따스하고 훈훈한 마음이 들어 기쁘다. 아쉬움에 다시금 돌아보는 하늘 물빛 정원의 볼거리는 다시 보아도 그림 같다. 친구의 소개로 처음 가서 친구들과 찜질방도 들어가 담소하던 시절을 회상해 보며, 사계절이 만발하는 정겨운 곳이 바로 하늘 물빛 정원이라는 생각에 즐겁고 흐뭇하였다. 한없는 기쁨과 함께 꿈이었던가? 오늘 하루 몸은 하나이지만 내 마음은 나무 정원 사이로 선녀가 된 듯한 활기찬 시간이었다. 삶에 지친 심신에 새로운 힘을 넣어 주듯이…….

  

   


아름다운 의림지

                                               향담 이영희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는 날, 승용차로 가족들과 제천으로 향했다. 푸른 나무들과 집들이 창가에 많이 보이며 경치가 아름답고 멋지다. 파란 하늘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들판에 초록 벼 잎들이 보기가 좋다. 가족들과 함께 파랗고 넓으며 하얀 물결이 돋보이는 의림지를 향하며 즐거움이 맴돈다. 흐린 날씨라 하얀 구름과 멀리서도 보이는 아기자기한 오리 배의 모습은 제천에 살던 옛 시절이 생각나 기쁘게 하였다.

 

    의림지 파크 랜드를 지나 놀이동산 팻말과 제천시 캐릭터 금봉선녀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우리를 반겨주어, 우람한 소나무와 함께 웃음꽃을 피워 본다. 세 줄기 분수가 시원하게 하늘로 치솟고, 멀리서 바위 틈새로 떨어지는 하얀 폭포가 인상 깊게 다가와 뜨겁던 열기를 식혀주고 있다.

    예전에 아이들 어릴 때 16년간 제천에 살던 기억이 새롭게 다가오며, 멀리 떠나가는 오리 배의 풍경이 나뭇잎들과 같이 정겹게 보인다. 노송 앞에 돌탑이 손짓하며 반기고, 농경문화의 발상지 의림지 팻말을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곳은 삼한시대에 축조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호수와 어우러진 노송이 장관을 이루고, 충북의 자연환경 명승지로 지정될 만큼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다.

    영호정을 지나 고사목의 멋진 자태를 음미해 보며, 행복한 농촌을 만드는 의림지의 시설 현황도 좋아 보인다. 제방에 수백 년 묵은 소나무 군락과 주변에 우륵정과 서쪽에 경호 루와 같은 정자와 누각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제비 바위 용 바위 등 전통적 시설물이 함께 어우러져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명소로 지정되어 아름답다.  

    나오는 길에 다시 보니 흐린 하늘에 흰 구름이 맴돌며, 푸른 물 사이로 오리 배들의 멋진 모습과 초록 잎사귀들의 미소가 멀리서도 돋보여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두부마을 식당 앞의 붉고 노란 꽃 아래 예쁜 화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보기 좋다. 의림지 팻말 뒤에 다니고 있는 다정한 오리들의 모습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수리시설 제천의 유명 관광지의 경치를 보며, 저수지 입구의 노송이 믿음직하고 멋스러웠다.

   오늘 본 의림지의 멋진 정취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찻집 근처에서 제천 선배의 전화를 받고 만남의 설렘이 다가왔다. 바쁘다더니 일이 있어 근처로 왔다며, 우리들을 만나러 와서 즐겁게 정담을 나누었다.

     의림지는 최근에 제천 시민들의 휴양지로 각광받을 만큼 잘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자연과 인공을 적절히 조화시킨 작품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아이들 어릴 적에 길러주신 큰 이모께서 다른 곳에 가시어 오늘 만나기 힘들었는데, 오랜만에 와 준 후배가 딸에게도 정성을 다해 감개무량하였고, 헤어지면서 다음 모임을 서로 얘기하며 행복한 마무리를 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이번 여행을 기회로 가족들과의 화합과 건강을 기원하며 즐거운 선후배와의 만남도 가져 정겨운 하루가 되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어 행복했다.

    전에 가 본 스위스의 호수처럼 아름다운 의림지,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시리는 듯 형언할 수 없는 짜릿한 감동마저 준다. 휴식은 인생을 살면서 놓쳤던 소중한 것들,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때로는 여유를 즐겨야 더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오늘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면서, 다음에 또 가고 싶은 의림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청주로 발걸음을 돌렸다.


 
김영희
방송통신대학 재학
청소년 교육학과 2학년










감자
                                                             김 영 희

 지금은 아련한 시절의 이야기다. 방 두 칸에 이엉을 올린 집, 높다란 봉당과 부엌에는 쇠죽을 끓이는 큰 가마솥과 한 아궁이에 두 개의 솥을 걸어 놓은 뽀 오얀 부뚜막 아침 일찍 굴뚝에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구름처럼 흩어진다.
 흐린 날은 마당으로 내려앉으니 단발머리 조그만 어린 나는 이것이 하늘나라 라고도 생각 했었다, 구름이 내려앉으니, 아버지는 쟁기를 지고 큰 소를 몰고 아니 당신 보다 더 큰 쟁기와  소를 이끌고 계단식 논두렁을 가신다. 가시는 길이 위태로워 가슴을 조이지만 아버지가 앞장서시고 덩치 큰 소는 그 높은 논두렁을 어찌도 잘 따라가는지 걱정을 하노라면 산중턱 비탈에서 아버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랴, 이랴, 어 여여  그렇게 비탈 밭을 갈아 고랑을 만들어 재를 뿌리고 감자 씨가 놓여지고, 곰배로 흙덩이를 툭 툭 쳐서 덮는다. 그리고 한 달 뒤면 예쁜 감자 꽃 들이  밭 가득 채운다. 까만 고무신 아이들은  꽃을 잘라들고 논두렁 밭두렁을 놀이터삼아 감자 꽃노래 부르며 뛰어 놀았었다. 자주색, 하얀색 꽃을 따서 물위에 띄우면 감자 꽃은 물위에선 파란하늘에 별처럼 떠돌았다.
 이 예쁜 꽃이 몇 날의 노을 끝에  잎이 누르스름해지면, 부지런히 캐 들여야 한다.
 아니면 이것들은 어찌나 잘 썩는지 보리 베랴 논 삶으랴 몸이 열 개라도 모라는 시기에 수확을 해야 하건만 햇감자 먹을 욕심에 꼬맹이들은 손 보다 큰 감자를 딸 챙이 숟가락으로 박박 긁고, 마주 보며, 깔깔 거린다 감자껍질이 긁히면서 얼굴에 하얀 점들이 생겨 자기 얼굴은 못보고 마주보며 웃고 또 웃으며, 껍질을 벗겨서.  양은솥에 넣고, 눈물 콧물 흘리며, 보리 짚으로 찌고 나면, 두레반상에 아버지 어머니 단말머리 우리들은 호호 불어가며, 맛나게 먹었던 그 감자  하얀 속살이 파슬파슬 부서지며 우리 가족의 행복을 채워 주었었다, 더운 여름날 하늘엔 별이 총총 빛나고 보리 까래기와 풀들을 태워 모깃불을 피우면, 매캐하고 향긋한 모깃불과 달콤 파슬한 그 햇감자의 맛을 잊을 수 가없다. 어린 시절에 햇감자의 행복을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대

                                       김영희

초하나 향하나 그윽한 향기
그대의 품안에 나래를 접고
그대 안온으로 나의 가슴 채우며…
그리운 님 그립다
아니하고
서러움 서럽다 아니하고
외로움 외롭다 
아니하고
당신의 여울에 안기어
영원히 살게 하소서.
그대는 나의 사랑이며
그대는 별빛 그림자
그대는 내 마음속 영원한 등불
그대는 나의 운명이요
사랑은 영원하며
그리움은 아득한 것
초승달 비치는
창가에
촛불 밝히고
창가에 어린
그대의 향기
웃음 가득한 나래에
내 마음 실어 오리다
오늘도
그대의 가슴에
달빛 그늘 드리우면
우리 마주보며 먼 길 함께 하길….


 
김숙자
방송통신대학 재학
국어국문학과 4학년









김 밥
                                                                    김 숙 자

 식구들과 새해 들어 친정에 다녀왔는데 친정엄마가 싸 주신 여러 음식들 속에 김밥이 들어 있었습니다.

 86세인 어머니께서는 환갑이 다 되어가는 딸과 아이들에게 아직도 지극 정성이십니다. 음식을 받아들고 오며 ‘귀찮아 꼼짝거리기도 싫을 나이신데 어머니의 정성은 식을 줄 모르고 퍼 주시기만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밥을 보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김밥 체인점도 있고 자주 접할 수 있지만 그때 내가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소풍 갈 때였지요. 먹을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 어머니는 무료 강습에서 배운 요리로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어요. 찜을 하는 그릇은 마치 도깨비방망이처럼 무엇이든지 만들기만 하면 나와서 너무 신기하고 만능 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요리강습에서 배운 솜씨로 할아버지, 할머니 회갑잔치와 각종 행사를 다 치르셨어요. 아버지께서 장남이시라 대가족이 같이 사는데다, 시골에서 대전으로 학교 다니는 친척들이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녀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고 이야기할 사이도 없었지요. 어머니는 힘드셨을 텐데 내색도 안으시고 소풍 갈 때는 김밥을 싸주셨어요. 그때는 고맙다는 생각을 못했고 어머니의 정성을 몰랐지요.
 
 시집와서 고3인 시누이 김밥을 싸게 되었는데 보기만 하고 해보지를 않아서 김밥을 말아 썰려니 부서지고 벌어져 도시락에 담지 못하고 그냥 보냈어요. 아래층 사는 아우에게 물어보니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서 잘 할 수 있다며 가르쳐 주었지요. 김밥 싸는 것을 배워 그때부터는 야유회를 갈 때나 나들이를 갈 때 김밥을 싸가지고 갔습니다.

 아이들이 소풍 갈 때는 아파트 엄마들이 남은 김밥을 가지고 와서 차와 함께 수다도 떨고, 아이들 생일 때 아이들을 초대해 김밥과 음료수 과일들을 주면 밖에서 실컷 놀고 땀을 흘리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너무도 예뻤습니다. 아이들이 편식할까 봐 김밥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가서 자주 싸주었더니
“너의 어머니 김밥 장사하시니?”라고 아이들이 묻기도 했다더군요.

 한번은 운동회 때 어머니께서 김밥을 싸오셔서 선생님께 드렸더니 아이들 연습 관계로 식사를 못했는데 맛있게 드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밥을 통해 선생님의 수고도 알게 되었고 김밥이 좋은 일을 했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나들이를 할 때 속 재료로 당근 소시지 등을 넣어 달라고 하면 경쟁하며 신나게 넣던 아이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김밥은 이렇게 나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 잡았어요. 처음에는 김밥을 쌀 줄 몰라 시누이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김밥을 통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기회가 있어 김밥 집에 들렀더니 소풍 때는 너무 바쁘고 선생님께도 주문해서 드린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태의 흐름도 느껴지지만 아이들에게 엄마의 정성이 들어간 김밥이 더 좋을 거고, 선생님께도 서툴지만 정성이 깃든 김밥을 싸드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해서 점점 편리해져 가지만 김밥을 통해 이웃과 정도 나누고 아이들은 친구도 되고 언니 오빠 누나 동생으로 한데 어울려 뛰어놀던 추억들이 사라져 가고 있지는 않은지. 어머니 김밥을 보며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정성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으리라 생각합니다.

 ‘김밥 싸는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못한다고 포기했더라면 못 쌌겠지?’
무엇이든지 보고 생각으로 머물렀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더 생각하고 실수하는 가운데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김밥을 보며 나이가 들어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봅니다.
어머니의 김밥을 수년간 맛있게 먹었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김밥을 싸서 드리지 못했을까를 이제서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김밥을 싸서 가져갈 기회가 있으니까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네 잎 클로버
                                                                          김 숙 자

 작년 6월 어느 날, ‘흥덕의 집’에서 수업을 마치고 무심천변 도로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걷는 도중 우연히 주위에 펼쳐 있는 토끼풀을 보았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예쁘게 핀 꽃을 보며 어릴 적 아이들과 토끼풀을 가지고 놀던 일이 생각나서 잠시 추억에 잠겼습니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 뒤편에 뜰이 있었고, 뜰 안의 길을 따라 조금만 가다 보면 아파트 끝동 뒤에 작은 야산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한집에 아이들이 둘씩이라 셋집이 각각 도시락을 싸거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야산으로 놀러가곤 했습니다. 
 돗자리를 펴놓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이야기를 하다가 음식도 먹고 산에 피어 있는 꽃도 구경했지요. 토끼풀을 뜯어 목걸이, 팔찌, 반지도 만들어 아이들에게 해주면 신기해하면서 마냥 좋아하던 기억이 납니다.
 “말 잘 들어서 주는 선물이야. 예쁘지 않니?” 하며 여자 아이들에게 머리띠까지 만들어 주고는 했습니다. 누가 제일 예쁜지 아이들에게 빙 둘러앉은 자리를 한 바퀴 돌게 하였는데 모두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가끔 아이들에게 아파트 뒤뜰에서 소꿉장난도 하고 사방치기, 땅따먹기도 가르쳐 주었는데, 어릴 적 친구들과 놀았던 추억을 회상하니 더욱 재미있고 즐거웠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토끼풀로만 알고 꽃을 뜯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어요.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말에 따라서 열심히 찾았죠. 모두 세 잎뿐인데 네 잎이 어디에 있는지 한참 찾아도 보이지 않아 짜증이 날 무렵 찾았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부러웠습니다. 그 뒤로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시작했고 중간 정도의 것을 발견하고는 너무 기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 나도 드디어 찾았어.” 잘 가져와서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아이의 앨범에 잘 넣어 두었습니다.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폴레옹이 우연히 클로버가 있는 들판을 지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게 되어 뜯으려는 순간 적군의 총알이 나폴레옹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 뒤로 행운의 상징이 되었다고 하네요.
 또한 외국에서는 클로버는 신성한 식물로 5세기경 아일랜드의 성자 성 패트릭이 ‘성부 성자 성령은 신의 세 모습이지만 원래는 한 몸이다.’라는 삼위일체를 세 잎 클로버로 비유하여 사랑, 희망, 신앙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꽃말과 같이 행복의 상징도 이때 생긴 것입니다. 흔치않던 네 잎 클로버는 모양이 십자가와 비슷하여 행운의 상징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다섯 클로버는 경제적 번영, 여섯 클로버는 사회적 지위나 명성을 얻는 것, 일곱 클로버는 목숨을 건지는 최대 행운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누었던 이야기, 아이들 엄마들과 나누었던 즐거운 추억을 생각하며 새삼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즐거운 추억을 생각하며 토끼풀을 뜯었습니다. 오늘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동요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뜯었습니다. 봉지에 담아 가다가 징검다리를 보니, 초등학교 시절 조그만 냇가를 친구들과 맨발로 신발을 들고 물을 가로질러 가던 옛 생각이 났습니다.
 그 생각에 잠겨 징검다리를 건너서 지역 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선물이라는 동시를 읽어 주었습니다.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엄마 손가락에 끼워 주고요. 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만들어 아빠 손목에 끼워 주고요. 아빠 쪽 엄마 쪽 내 두 볼에도 동그라미가 그려졌어요.」
 동시를 읽어준 후 아이들에게 외워보게 하였더니 곧잘 하네요. 잘 외운다고 칭찬을 하면서 시 두 편을 더 외운 후 둘씩 짝을 지어 토끼풀로 반지도 만들고 팔찌도 만들었어요. 아이들이 마냥 신나고 즐거워서 하하 호호하며 웃네요. 선생님이 너희들에게 선물 한 거라고 하면서 그 아이들만 했을 때 놀던 이야기며 전쟁 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해 주었어요. 부모들이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이야기했지만 코끼리를 만져본 장님의 표현이 다르듯이 생각이 다 다르겠지요.
 다르지만 모든 것들을 지나치지 말고 잘 관찰해서, 네 잎 클로버를 한번 찾아보면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했답니다.

 오늘 우연히 무심천 길을 걷다가 토끼풀을 보면서 옛 추억을 떠 올렸고, 지역 아동센터 아이들에게도 토끼풀로 하나의 추억을 심어 준 것 같아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어요. 우리는 막연히 더 좋을 것이라고 네 잎 클로버를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닌지 싶어, 역시 행복은 평범함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합니다.
깨 달 음

김 숙 자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두고 살아가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때가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반성해 볼 때도 있다.

어느 날 작은 딸 아이가 대성통곡을 했다. 왜 우느냐고 말하라고 했더니 아이가 이야기하였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에도 오빠 이름만 부르고, 양말도 오빠는 챙겨 주면서 자기는 네가 신으라고 하고 책도 오빠 이름으로 사주었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마음의 상처가 된 것이다. 연년생이다 보니 책을 살 때도 둘이 보라고 사주고 양말 같은 것은 여자아이니까 잘 챙길 것이라고 남자아이만 챙겨 주었던 것이다. 눈높이 수학도 잘 알아들을 것 같아 작은 아이는 연필 자욱을 지워서 시켰다. 아이는 하다가 안 한다 하고, 바지를 입으라면 안 입고 치마를 입겠다고 고집을 피운 이유가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고모가 여섯 살 차이가 나는데 어릴 때는 안 그러시더니 커서는 고모 옷을 입으라고 했다. 할머니께서 고모가 깨끗하게 입어 아깝다고 주셨는데 입지를 않았다. 어린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둘째 시동생이 자기는 자전거가 타고 싶은데 매일 형 자전거나 밀라고 하고 어딜 갈 때도 형만 데리고 갔다고 서운함을 이야기했다. 명절 때 가끔씩 이야기를 했는데 부모는 어느 자식이나 똑같지 누가 차별하나 했는데 내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부모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했기에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네가 무척 속상했구나. 엄마가 너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라며 꼭 끌어안아 주었다. 큰 아이가 동생으로 하여금 피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큰 아이를 혼내고 나서도 마음 아파했는데...

작은 아이에게 “네가 엄마에게 이야기해주어 정말 고맙다. 그렇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거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식을 잘 키우고 싶어 닦달을 한다. 조금만 성적이 떨어져도 큰 아이에게는 용납이 안 되어 혼내고, 눈높이 수학 문제 안 풀었다고 선생님께 대신 때려 달라고까지 했더니 아이는 주눅이 들어 수학을 잘 하지 못하였다. 작은 아이는 그냥 놔두었더니 좋아하여 이과로, 큰 아이는 문과로 가서 자기의 일을 한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게 따로 있는데 모든 것을 다 잘하기를 원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데 나 자신도 다 못하면서 아이에게는 만능 슈퍼맨이기를 바라고 있었나 보다.

작은 아이의 울음으로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이 성적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아이들을 궁지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지?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의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욕심을 내려놓으려 애쓰다 보니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목화꽃

 

                                                             민안자

 “야! 솜사탕 꽃이다. 할머니 따먹어도 돼요?” 유치원에 다녀온 소녀가 옥상에 화분 두 개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 "채은아, 꽃을 먹는게 아니라 다래를 먹어야 한단다." 이른 봄, 큰 화분 두 개에 씨앗을 두 개씩을 심었더니 연한 노란색의 꽃이 피었다. 다음날 연한 분홍색으로 변하는 모습이 꿈속의 뭉게구름처럼 신기하다. 며칠 후 제일 먼저 핀 꽃이 다래 속에서 목화솜이 터져 나왔다. 솜사탕인 줄 알고 먹겠다고 한다. 마치 갓 시집온 새색시가 새 옷을 갈아입고 아침저녁 시 부모 임에게 인사를 드리듯 ‘목화’ 꽃이 하늘하늘 비단 옷감을 연상케 한다. 어릴 때 먹던 다래 생각에 예쁜 꽃이 질 때만 기다려지기도 하고. 다래는 꽃이 지고 일주일쯤 지난 후에 먹을 수 있다.

  아침부터 넋을 잃고 화분 곁을 떠나지 못했다. 햇빛과 속삭이며 개화의 미소가 소곤소곤 들린다. 부푼 꼼에 설레는 생각을 꿈꾸는 사춘기 소년 소녀처럼 꽃잎이 화사하다. 하얀 미소가 아름답다. 몽실몽실 뭉게구름이 소복이 핀 솜꽃이 내 마음을 빼앗아간다.
  옥상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내겐 목화 꽃이 핀 이후로는 화분에서 눈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철없는 아이들처럼 일도 하지 않고 온종일 놀고 싶다. 따뜻함을 남기는 꽃, 목화 나 또한 누구에게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마음을 베풀며 살았을까? 아련한 추억이 실바람을 타고 가슴을 두드린다.
 “솜꽃이 피었어요. 할머니 여기쫌 보세요.” 목화솜이 터져 나온 것을 보면서 손자들이 하얀 솜 꽃나무인 줄 안다. 요즘 도시 아이들은 ‘벼’ 이삭을 보고 쌀 나무라고 한다더니. 목화가 그렇다. ‘이것은 솜꽃이 아니고 옷을 해 입는 목화솜이란다.’라고 알려 주었더니 이상한지 한참을 고개를 갸웃 하더니 끄덕인다.

 

 

  마당 한옆 꽃밭에는 키가 흔적 큰 가지마다 밑 부분에는 목화솜이 터져 나아왔다. 중간에는 분홍색, 윗부분은 연한 노란 색이다. 한 포기에서 세 가지 꽃이 피었으니 지나가던 학생들이 스마트폰을 누르기에 바쁘다. 정말 목화를 심기 잘했다. 예전에 문익점은 중국에서 목화씨를 북통에 숨겨 왔다고 한다. 그 고마운 분 덕에 후손들이 따뜻한 옷도 만들어 입을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다. 목화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한다. 요즘 잊고 살았던 목화를 심어 지인들한테 목화 댁으로 불린다.

  꽃도 보고 목화를 가만히 바라보면 포근하고 따뜻했던 어릴 적 어머니가 밤새워 등잔불 밑에서 저고리에 솜을 다독다독 놓아 햇솜이 몽치지 않을까. 들뜨지 못하게 바늘로 일일이 박음질을 해서 누비저고리를 해주셨다. 어릴 적에는 따뜻하게 입고만 다녔지 여러 가지 공정을 거쳐야만 되는지는 몰랐다.

  목화를 따면 ‘씨’ 분리 작업 을하고 솜을 수작업으로 솜을 탄다. 예전 어머님들의 고된 솜 농사에 고달픔은 애잔한 마음이 든다. 목화솜을 딸 결혼 시킬 때 시댁 어른에게 내 딸 잘 봐 달라는 뜻에서 솜을 두둑하게 농아 양단 이불을 예단으로 보낸 친정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꽃 속에서 보인다.

  꽃이 예쁜 것은 작은 것이나 들꽃도 예쁘지만, 목화 꽃은 참 고마운 꽃이다. 어르신들의 무명 치마저고리를 떠올리게 하고 아버지 할아버지 생각이 떠오른다. 솜저고리 생각만 해도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 곁으로 달려간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솜이불을 생각하며 목화솜이 따스운 가슴을 느끼게 한다. 하루의 행복을 열어주는 꽃을 생각하며 주춤거리며 늙어 가는 가슴에 훈훈한 솜꽃이 한 아름 피어난다.
  

 


고추 화분


                                                              민안자

  아직 추석이 보름이나 남았는데, 아침저녁은 쌀쌀하다. 옥상에 심어놓은 고추화분에 눈길이 간다. 나의 욕심나무에 불씨가 살아났고, 결국 불이 붙었다.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고추화분 여섯 개 중 제일 튼실하고 꽃이 마디마디 핀 것 두 개를 골라 겨울에 거실 햇볕 잘 드는 곳에 내려놓고 고추를 따 먹을 요량으로 비료를 조금씩 주고 물을 충분히 주었다.

  욕심이 과한 나는 시골 갔다 오는 길에 남의 밭 뚝 모퉁이에 소복이 쌓여있는 소똥거름을 조금 가져와서 고추 화분에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시골 큰 형님 댁 아궁이에서 불 땐 재를 비닐봉지에 가득 가지고 와서 고추 화분에 또 주었다 올겨울 장보기 할 때 고추 값은 안 들겠구나. 상상을 하면, 마음이 팔월 한가위만큼이나 풍요롭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었다.

  고추포기가 건강하게 잘 살겠지 꿈에 부풀어 아침 일찍 물을 한 바가지씩 주고 고추가 주렁주렁 달리면 한겨울 그 어떤 꽃 화분에도 뒤지지 않을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하얀 꽃, 파란색 고추,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달리면 먹는 즐거움도 크지만 보는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 아닌가 싶었다.

  거름을 주고 3일쯤 되던 아침 옥상에 가보니 거름을 주지 않은 고추 화분 네 개는 잎이 싱싱하고 하얀 꽃이 마디마다 피었는데, 거름을 준 두 개의 고추 화분에만 시들시들 늘어져 있다. ‘어머나! 어떻게’ 나의 욕심 때문이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중얼거려 보지만 이미 늦었다.

  다음날 혹시나 살아났을까 마음을 졸이며 고추 대를 만져보고 시든 잎에 물을 추겨 보지만 이미 잎은 말라가고 있는데, 화분에 마사 흙을 조금씩 얹어주고 물을 흠뻑 주었다. 물을 많이 주면 거름이 밖으로 빠져 나가길 기대해보았지만 말라 죽고 말았다.

  옥상 바닥에 주저 안고 싶었다. 부풀었던 마음은 고무풍선에 바람 빠지듯 한순간에 무너졌다. 고추가 한 겨울 거실에서 튼실하게 잘 자라면 가족, 친지,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나는 환상의 꿈을 그리고 신바람 났던 마음은 물거품이 되었다.

 지금처럼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생활 속에서 구시대적인 내 일상생활이 창피할 수도 있겠지만, 경험이 부족해서 고추화분을 축였으니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부끄럽고 창피하다. 다음에 재도전해서 내년 겨울에는 거실 한 옆 양지 바른 곳에 고추화분의 고추를 따 먹을 것을 상상하며 욕심을 내려놓아야겠다.

  이 세상 사람을 모두 속일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못 속인다. 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떠오른다. 고추를 죽인 것도 내 탓이오 욕심을 낸 것도 내 탓이오 고추는 살아나지 않고 내 마음의 욕심 꽃만 활짝 피어났다.
  

 
 

 







개암과 헤이즐넛
                                                        민안자


 잠시 틈을 내어 찾으면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쉼터가 나에겐 보은 밭이다. 남들은 다 늙어서 무슨 청승에 농사를 짓는지 의문이 많다.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찾는 쉼터가 밭이다. 일만 하는 곳이 아니다. 농사는 노동이라고 하는 고정 관념을 깨트리고 싶다. 밭둑에 걸터앉아 어릴 적 범바위 골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릴 때 살던 집이 경기도 광주군 샘말 산7번지 깊은 산속에서 살았다. 앞마당에서 쳐다보면 범바위가 보였다.


범바위라고 하는 큰 바위 밑에 움푹하게 파인 굴이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이 그 굴속에서 호랑이가 엉금엉금 기여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범바위 골에 가면 바위 뒤편에 어릴 때 내 키만큼 작은 개암나무 가 많이 있었다. 먹을거리가 넉넉지 않던 시절 나에게 개암은 간식 나무였다.


아침밥 먹고 산책을 나간 남편은 점심때가 지났는데 감감 무소식이다. 새참 때가 훨씬 기울어서 집에 돌아온 남편은 개암이나 따먹으러 가자고 한다. ‘아니, 도시 한복판에서 개암이라니’ 남편은 빙그레 웃더니 매봉산에 개암나무가 있다고 같이 가보자고 한다. 반신 반이 하며 따라 가보았다. 조그만 나무에 노르스름하게 잘 익은 개암 두 개가 세월을 접어놓은 듯 반긴다. 육십여 년 전 어릴 때 따 먹던 바로 그 개암이다.


개암은 누구나 따먹을 수 있는 우리 산야의 야생 견과(堅果)였다. 개암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과실이지만, 역사책은 물론 옛 선비들의 문집에도 실렸다고 한다. 고려 때는 제사를 지낼 때 앞줄에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저녁 늦게 딸네 식구들이 차나 한잔하자며 수박과 참외를 사 들고 왔다. 사위와 딸은 내가 정성껏 꽃을 따서 만든 들국화 차를 향기까지 음미하며 마시는데 손녀딸들이 커피를 마시겠다고 한다. “아니 어미 아비는 국화차를 마시는데” 중, 고등학생이 굳이 커피를 고집한다. “할머니 저희들은 헤이즐넛 커피 주세요.” ‘아니 어미 아비는 꽃차를 마시는데, 좀 의아 하다.

“채은아, 유진아 너희들 헤이즐넛이 무슨 열매로 만든 커피 인줄 알고 그러니?”

“할머니 할머니는 영어로 된 이름이라 잘 모르실 거 에요”

“헤이즐넛 커피는 향기가 가장 좋은 커피에요”라고 한다.


이때 애들 어미가 한마디 한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너희들이 좋아 하는 커피 열매 개암을 산속에서 직접 따먹고 사셨다고 알려 주었다. “할머니 헤이즐넛 커피 열매를 직접 보셨어요?” “응. 배가고파서 개암을 많이 따먹고 살았단다.” 그 말을 듣고 의아해 하는 손녀딸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한잠 커피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그 열매를 따먹고 살았다고 하니 “할머니 미안.” 저녁 차 시간에 개암 때문에 가족 모두가 한바탕 솜뭉치처럼 한태 뭉쳐 웃음꽃이 피어났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개암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막상 ‘개암’이 무엇인 줄 아느냐고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한다. 개암은 개암나무의 열매다. 어릴 적 내가 알던 개암나무는 내 키만한 조그만한 나무였는데, 요즘 우리가 즐겨 마시는 헤이즐넛 커피는 키가 큰 신품종 개암나무라고 한다. 모양은 도토리 비슷하며 껍데기는 노르스름하고 속살은 젖빛이며 맛은 밤 맛과, 비슷하나. 더 고소하다.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열매이기에 항상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 열매다. 그 시절 배가 고파서 깊은 산속에 가서 따 먹던 개암 덕분에 마치 내가 특별 한 것을 아는 것처럼 손자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열매는 개암 깨무는 소리에 도깨비들이 화들짝 눌라 도망간다는 ‘도깨비와 개암’ 같은 전래 동화 속에도 나올 만큼 우리에겐 꽤 친숙한 견과류였다. 어릴 적 개암나무를 ‘깨금나무’ 개암을 ‘깨금’ 이라고했다. 어쩌면 개암나무나 개암보다는, ‘깨금나무’ ‘깨금’ 이란 말이 더 귀에 익을 수도 있겠다. ‘개암’ 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지금도 자주 접하는 열매다. 커피 가운데 향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헤이즐넛(hazelnut)커피가 개암으로 볶은 커피다. 영어 헤이즐넛이 우리말로 ‘개암’ 이고, 헤이즐(hazel)은 ‘개암나무’ 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마셔 봤을 법한 헤이즐넛 커피가 바로 ‘개암’ 커피라고 한다. 어릴 때 즐겨 따먹던 개암이 요즘 즐겨 먹던 커피라고 하니 반백년이 지난 지금 다시 추억 속에 가족들과 함께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우며 마음은 범바위 골로 개암을 한아름 따러 산행 중이다.


  

 
 

 







 
 못난이 사랑

                                                                                                                                 정 금자


  폭염이 계속되는 오후 밭에 있는 채소들이 어찌 지내나 궁금했다. 가뭄이 계속 되어 보기조차 안쓰러울 것 같아 며칠 만에 들렸다. 채소는 잎의 끝이 타들어 갔고, 오이들은 목이 말라 등이 꼬부라졌다. 가지 역시 쇠고 크지도 못하고 힘없이 매달려 있다. 지난해 미끈하게 많이 달려서 이웃과 나누어 먹었던 생각이 난다. 토마토는 억지로 달려 있는데 갈라져서 먹지 못할 것이 많았다. 그러나마 주섬주섬 담아서 들어보니 묵직하다.
  집에 가져와서 신문지를 펴고 널었다. 모두 수준 미달이다. 그래도 이 가뭄 속에서 힘들게 생명의 끈을 잡고 견디어 준 것만으로도 소중하게 생각되어 타들어간 잎은 가위로 오리고 정성껏 다듬어 봉지에 담는다. 기르는 재미로 심고 가꾸었지만 하나같이 맘에 들지 않는다. 올해는 가뭄이 심해서 더욱 그러하다. 적기에 정성을 다해 심고 가꾸어도 시장의 미끈하고 싱싱한 젓과는 비교가 안 된다. 자식들이나 이웃들에게 나누워 주기도 민망하다.
  돌아보면 요즈음 세상에는 못난이가 별로 없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듯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미끈하고 세련되어 보기에도 좋다. 채소들의 경우 아무리 가물어도 살수시설을 갖추고 물을 주며 농약이나 비료를 주므로 미끈하게 잘 키워 상품으로 내놓는다. 그러니 나의 솜씨로 올 같은 가뭄에 어찌 큰 기대를 하겠나마는 작년 농사에 비해 너무 초라해서 속이 상한다.

  오이야, 가지야, 미끈하게 잘 생겨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작물들도 많건만 꼬부라진 네 모양이 내 모습을 닮았구나. 너나 내나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게 없구나, 애써 가꾼 작물에 실망하다 보니 나의 삶이 번져가며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내 인생도 이 채소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친구같이 수완이 좋아 가정 경제에 큰 도움을 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연구 활동을 열심히 해서 사회에 공헌 한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남에게 해악하지 않고 먹거리에 농약 뿌리지 않고 농사지으며 열심히 살아왔다지만 남들에게 이렇다 하게 내놓을 것이 없다. 오랜 가뭄처럼 시원치 않은 건강을 추스르느라 힘든 세월을 지나며 등만 굽어졌다.
   인생의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 왔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크게 잘못한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잘 한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지금껏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허무함을 느낀다. 그럴 때 마다 당신이 있어 우리 가정이 행복한 거 아니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말 한마디에 못난이를 알아주는 이가 있었네? 하며 웃곤 한다.
  그러고 보니 못난이 들을 사랑하는 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아이들과 아파트 이웃들, 사돈댁에 벌래먹어 구멍이 난 것이라도 주게 되면 농약을 하지 않고 기른 것이라며 못난이를 반가워한다.

   그래 생각을 바꾸는 거다. 나도 소중한 사람이다. 다시 일어나 밭으로 나갔다. 기다리는 비는 아직 이건만 버티어준 채소들이 고맙다.
  상추와 쌈채의 떡 잎은 따서 고랑에 깔아 주고. 아욱의 순을 자르려다. 손을 멈춘다. 어머나! 그 힘든 가운데서도 아욱들이 보랏빛 작은 꽃을 피웠다. 가슴이 짠하다. 키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던 쑥갓에도 아주 작은 노란 꽃이 앙증맞게 보인다. 그들을 바라보며 용기와 희망을 가져 본다. 저쪽 끝에 달려있는 못난이들을 바라본다. 볼품은 없지만 사랑스러워 애잔한 미소를 보낸다. 나는 못난이를 사랑한다.









 우리 집 보약

                                                                                                                                     정 금 자


  모처럼 단비가 내렸다. 비가 흠뻑 내려 해갈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찔끔 내려서 안타까웠다. 최악의 가뭄이라는 뉴스가 연일 쏟아져 나온다. 모내기도 못한 논이 많고 모내기를 한 논바닥이 갈라져 모가 말라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내 마음도 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올해는 5개월 동안 비가 단 하루 왔다고 한다. 비가 얼마나 내려야 할런지, 최근 몇 년간 가뭄이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그야말로 폭우가 필요하다고 한다. 여름에는 넉 잡아 1000 밀리미터는 내려야 한다는데 한꺼번에 쏟아지면 비 피해가 많으니 적당히 비가 내려 주었으면 좋겠다. 올 여름도 평년보다 강수량이 적다고 해서 걱정스럽다.

  우리 마을은 모내기는 끝내서 다행인데. 우리 집 보약인 마늘밭이 걱정이다. 아파트에서는 TV를 통해 가물다고 해도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지만, 들에 나가보면 가뭄에 농작물이 목말라 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리다. 가뭄이 심해 작물의 성장이 멈추고 그냥 시들어 간다. 이제나 저재나 기다리는 비가 오지 않아 참다못해 사경을 헤매는 마늘 앞에 호미를 들고 앉았다 .마늘밭을 바라보며 농사는 하늘이 도와야 한다던 어른들의 말씀을 생각해 본다. 마늘은 하지가 지나서 뽑아야 잘 여물고 저장성이 좋다지만 하는 수 없이 마늘을 뽑기로 했다. 줄기는 다 말라버려 뽑는다기보다는 호미로 캐는 것이다. 마늘의 몸통은 자라지를 못하고 뿌리만 길게 달려있다. 까먹기 어려울 정도의 마늘을 주워 담으며 물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땅속깊이 뿌리를 내려 생명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을까 그 추운겨울을 견디어낸 마늘이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 해 우리 사람들에게 건강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다. 생명체들은 종족 보존이라는 크나 큰 사명을 으뜸으로 여기는데 마늘종을 뽑아 올려 씨앗을 만들지 못해 올해는 그 흔한 마늘종을 한 개도 보지 못했다. 지난해는 마늘종을 큰 소쿠리로 3개나 뽑았다.

 마늘종 하나 뽑을 때마다 바늘을 마늘 줄기 밑에 가로로 꼽고 지그시 두 손으로 잡아당겨야 길게 뽑힌다. 허리를 구부렸다 펴기를 수십 번 을 해야 하니 허리가 많이 아프고. 매우 힘든 작업이다. 저녁이면 아들네, 딸네, 사돈네, 이웃집, 줄 것으로 나누고 식구가 많은 집은 조금 더 넣어서 묶으며 낮에 뽑으며 힘들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별것 아니지만 정을 나눌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나눌 것이 없어 마음이 허전하다.
 마늘은 강한 냄새를 제외하고는 100가지 이로움이 있다고 일해백리라고 부른다. 우리 지방에서 나는 마늘은 한지형으로 가을에 심으면 뿌리는 내리나 싹이 나지 않아 겨울을 넘긴 뒤부터 생장한다. 난지형 보다 저장성이 좋다.
  마늘은 고혈압, 협심증, 뇌졸중, 혈관성 질환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특히 항암작용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고 있다. 인슐린 분비를 촉진시켜 당뇨를 예방한다.

  우리 집에서는 유황을 뿌리고 마늘과 무를 심는다. 가을에 서리 맞은 무에 유황마늘과 생강을 많이 넣고 오랫동안 끓이다가 한약재를 넣어 다려서  무엿을 만든다. 사철 건강식으로 복용 하면서 우리가정의 보약이 되고 있다.
  마늘이 정력제나 원기를 보하는 강장제라는 것은 고대 이집트 쿠프왕의 피라미드 벽면에 상형문자로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한 노동자들에게 스테미너 용으로 마늘을 먹였다고 새겨져 있다. 그리스에서는 마술을 푸는 약초로 신성시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뱀 전갈 역병을 물리치는 강력한 약초로 오래전부터 널리 이용되었다.
  마늘은 따뜻하고 매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 살균해독에 효과가 뛰어나 음식을 통해 건강에 많은 도움을 준다. 항산화 작용과 원기 회복에 탁월한 마늘을 먹어 건강을 지켜보자.







월정사 전나무 숲

                                                                                                       정 금 자

   싱그러움이 가득한 오월 새벽을 가르며 4시간을 달려 오대산 월정사에 도착 했다. 월정사는 오대산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금강교에서 바라본 호수와 계곡이 매우 아름다웠다.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나고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 신성시 되고 있다. 많은 선 지식인들이 머물던 월정사에는 팔각정 9층탑 및 보물 석조보살 좌상등 수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월정사 본당인 직광전의 앞뜰 중앙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팔각구층탑이 있다. 탑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으고 공양을 드리는 석좌 보살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초파일에 달았던 오색의 연등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연등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담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궁금해 살며시 꺼내 보았더니 가족들의 건강, 사업, 자녀들의 학업, 취업 등 우리가 살면서 소망하는 여러 가지 사연들을 적어 부처님의 자비를 청하고 있었다   연등 속의 간절한 소원들이 이루어지길...


깊은 산 속 사찰에서도 여러가지 이름 모를 꽃이며, 아름다운 나뭇잎의 빛깔이 봄의 화사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불상을 쳐다보면 빙그레 웃는 모습에서 관용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정신의 길을 닦는 사람은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지만, 세상을 잘 사는 사람들은 가지고 가지고 또 가지려 한단다. 번뇌와 고통이 욕심 때문인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끝내 버리지 못한다. 석가모니는 비워야 채울 것이 보이는데 채우고 싶다면 먼저 비우라고 한다.


  월정사를 잠시 둘러 본후 그 유명한 전나무 숲길로 접어 들었다. 사실 내가 보고 싶었던 곳은 전나무 숲길이다. 1km 늘어선 전나무 숲길에는 수령이 300년 넘은 고목부터. 평균나이 86년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길 양쪽에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나무들이 크고 거대해서 진짜 숲에 온 느낌이고 산림욕 하는 기분이다.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좋다. 푸른색은 시각적으로 청량감을 주어 눈의 피로를 풀리게 하고 숲의 향기는 나의 후각을 자극하고 기분을 맑게 해 주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 좋은 초록잎들, 생명의 빛깔이다. 내가 이곳에서 지금 숲이 주는 피톤치드를 만끽 하는구나 생각하니 행복하다

 울창한 숲길이 넓고 흙으로 잘 단장 되어서 유모차도 다닐수 있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다닐수 있다. 걷다보면 중간에 조형물들이 간간이 보이는데 무슨 의미를 지닌 것들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오래된 큰 나무의 등걸을 보며 천년의 고목은 사라 졌지만 천년을 견뎠던 정신은 살아 있었다. 우리 인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의 소리를 새로운 생각과 마음으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더 낳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삶의 풍요로움을 자연에서 찾지 못하고 문명이라는 것들로 채우려 했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숲을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얼마나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리를 그려본다.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내 몸을 깨우는 숲과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련다. 숲에서 우짖는 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흐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숨 쉬고, 또 나무도 숨을 쉰다. 어느 순간부터 호흡을 통해 나와 숲이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다. 부족함이 가득한 내 모습,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자연 앞에서 부질없이 느껴졌다. 내 본연의 모습에서 나는 누구인가? 고민해 본다

 다음에는 선재 길을 걸으면서 참 나를 찿아 보고 싶다.


  다람쥐가 쪼르르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바람이 귀엣말로 다 지워버리란다. 산이 높아 계곡이 깊고 물이 맑은 이곳에서 무심을 배운다.


세상 이야기를 뒤로 하고 유유자적 걷다보니 번뇌가 사라지며 맘껏 즐기면서 최고의 행복을 누렸다. 텅빈 충만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느낄수 있었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은 언제 걸어도 몸과 마음이 힐링 되는 참 좋은 길 인것 같다.



  

 
 

 



  

 
 

 



연분홍 치마                   최례진

 시간이 멈춰버린 듯 복잡한 도심 속의 차들과 사람들 속에서 난 한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그곳에 멈춰 서있다. 주변의 그것들은 부지런히 제 갈 길 가는 그 시간에 난 나대로의 정적 속에 갇혀있는 채로...쇼윈도 속의 연분홍 치마를 바라보며 한참을 정지된 상태 그대로 과거 속으로 젖어들었다. 울 엄마. 한복이 참 잘 어울렸었는데...한복 곱게 차려 입고‘봄날은 간다.’를 멋들어지게 한 곡조 뽑고 나면 다들 난리가 났었는데... 보고 싶다.
 엄마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겠다던 막내딸은 이렇게 커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예쁘게 잘 살고 있는데, 이런 모습 보여드리지 못해서 마음 한 편이 아려온다. 늘 당신보다 자식새끼들이 먼저라고 말씀하셨던 엄마의 몸에선 항상 향기로운 화장품 냄새가 아닌 찌든 삶에 배어버린 생선 비린내와 음식 냄새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바로 엄마의 냄새가 그것인 것이다. 출장이 잦았던 아빠는 말 그대로 무늬만 아빠일 뿐 낯선 이방인에 불과했다. 경제적인 도움마저도 책임지지 않은 체...
 섬이라는 조금은 불편한 바다 위의 육지에서,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여자 혼자 몸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조그마한 농토 하나 없이...그래서 엄마는 가게를 하시기로 생각하셨나보다. 혼자의 몸으로 그 누구보다 짠 내 나는 가난한 삶을 살며, 그저 행복이라 느끼는 것은 자식들의 무탈 이었으며 웃는 얼굴은 크나큰 위안이었다. 부는 바람결에 가슴 설레고, 이파리 하나에도 삶의 희망을 갖는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반 과부처럼 사셨던 것이다. 편안한 삶의 포기와 그 억세고 굵어진 손안에서 우리 7남매는 큰 탈 없이 자랐다. 새벽이 가장 어두운 시간에 호롱불에 불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 엄마의 하루는, 늘‘오늘도 무사히’라는 간절함을 담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손에 물 마를 새 없이 발 동동거리며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허리 한번 펴지 못하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우리 식구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호롱불 밑에서 숨죽이며 눈물 훔치시던 엄마의 가녀린 뒷모습에 애잔한 맘이 들어 잠 못 든 적도 많았었다.
 안방에 있는 높이가 낮은 장롱 서랍 맨 아래 칸엔 유일하게 엄마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최고의 선물이 있었다. 힘들고 지칠 때는 늘 서랍 속의 그것을 바라보고 만지작거리며, 한숨이 묻은 미소와 함께 한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시집올 때 입고 오셨던 연분홍빛 한복과 그 외 여러 벌의 한복들. 그것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지나간 시절의 그리움일까? 아님, 고운 한복 입고 따스한 봄 햇살 받으며 사랑하는 이 손 꼭 잡고 나들이 가고 싶으셨을까? 그것도 아니면, 설렘 가득 담은 연분홍 치마 곱게 단장하고, 복사꽃과 같은 새색시 수줍은 볼을 감추시려 옷고름 돌려 쥐며 시집왔던 그때를 생각하셨을까? 그때는 이렇게 굴곡진 인생을 살 것이라곤 생각도 못하셨을 것이다. 일에 파묻혀 일 바지만 입다 보니 장롱 속의 그것들은 주인과 함께 할 시간이 드물었다. 겨우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배를 타고 육지에 다녀올 일이 있을 때만...“엄만 이 연분홍 한복이 참 좋다. 이 옷만 입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너무 좋아”어린아이 마냥 뱅그르르 돌며 춤을 추며 좋아하셨다. 그런 날이면 하얀 연꽃을 생각나게 하는 곱디고운 얼굴에 화사한 연분홍치마 휘날리며, 시원한 바다 위를 나풀나풀 날갯짓하는 어여쁜 나비가 되신듯했다. 좋아하시는 그 잠깐의 얼굴은 세상 그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함 그 자체였다. 어린 마음에 동화 속의 선녀가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날아갔듯이 울 엄마도 연분홍치마 입고 우리를 떠나가 버리면 어떡하지? 생각하며 엄마의 분홍치마를 감춰버리고 싶은 맘을 가진 적도 없지 않았다.
 거실 한 편에 고운 자태를 뽐내는 연분홍빛의 나도 제비난 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연분홍 치마를 좋아했던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고운 한복 입고 나래를 펴고 싶은데도, 자식이라는 아픈 손가락들 때문에, 주저앉아 버리고 만 긴 세월. 어쩔 수 없는 그 현실을 끌어안고 살아야만했던 안타까웠던 엄마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때는 몰랐었다. 연분홍 치마가 엄마 삶의 희 노 애락이었다는 것을...엄마의 연분홍치마는 그렇게 젊은 날의 꿈과 회상이었다.
 여유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엄마는 사랑받고 싶은 여자였나 보다. 남편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잠시 잠깐이라도 타인에게서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시골에서 보기 드문 깔끔한 차림의 김 선장이란 분이 자주 가게를 들리곤 했다. 무엇 때문인지 식사가 끝난 뒤에도 가지 않고 입가에 웃음을 띠며 엄마만 바라보고 있기도 했으며, 우리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사다 주기도 했다. 그런 그분을 우리는 참 좋은 분이라 생각했었다. 우리 아빠도 저런 분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엄마도 김 선장이 오면 다른 때 입지 않았던 연분홍 한복 곱게 차려입고 반찬 하나라도 더 만들어 챙기기도 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면 플라토닉 러브 정도가 아니었을까. 잠깐이지만 생기 도는 얼굴빛에 기분 좋은 목소리. 그런 엄마가 조금은 미웠다. 엄마는 항상 막내인 내 차지였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그 힘들고 버거운 삶 속에서도 이러한 것이 아마도 진하지 않은 연한 연분홍 사랑이 아니었을까.
 우리 집 뒷마당엔 없는 꽃이 없을 정도로 꽃들이 정말 많았다. 꽃을 좋아해 꽃을 심고 그것을 보며 함박웃음 지으며 좋아했던 엄마. 그 꽃들 중에 여러 자식들처럼 조그마한 꽃잎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국이 제일 예쁘다며 마지막 눈길은 늘 그곳에 머물러 계셨다. 엄마는 그냥 엄마 이뿐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그랬다. 당신도 역시 여자였던 것이다. 일만 하는 엄마는 꽃을 좋아하지도, 꾸미고 단장하는 것도, 보석이나 옷가지들을 좋아하지도 않은 줄만 알았다. 사실은 혼자 몸으로 여러 명의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그런 곳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노년이 되어 유독 옷과 보석에 관심을 갖고 탐을 내셨다. 젊은 날의 보상이라도 받을 것처럼...아기가 돼버린 엄마에게 그것들은 예쁘고 치장하는 단지 그것 만이었을까? 아니면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의 한 맺힌 부족함을 채우는 만족이었던 것일까? 세월이 흘러 그 곱디고운 모습은 어디 가고, 깊게 팬 주름 훈장만이 가슴 졸여 애태우는 세월의 그림자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화사하고 예뻤던 연분홍치마는 뼈마디 시려온 세월과 함께 눈물 꽃 수놓으며, 지는 해 부여잡고서 구슬피 애조만 읊조리셨던 그 긴 세월. 그 흔적을 뒤로한 채, 버겁고 힘듦이 없는 편안한 곳으로 어머니와 함께 먼 여행을 떠났다.
 돈 벌어 고운 한복 지어드린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는데...미안하고 죄스럽다. 엄마의 헌신과 사랑에 보답 할 길이 없어 가슴만 아파온다. 부족한 자식들은 인생의 참고서가 됐던 엄마의 뜻 받들어, 서로 우애와 사랑으로 예쁜 당신의 추억의 흔적으로 남아야겠다. 언제든지 발걸음 옮길 때, 편히 잠드신 그곳에 가서 예쁜 꽃 한 아름 가슴에 안겨드리며 못다 한 얘기꽃 피우고 오련다. 당신 인생의 애환을 담고 있는 연분홍 치마가 오늘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귓전에 울리는 구슬픈 엄마의 노랫가락이 나의 마음을 서럽게 울리며 어느새 함께 부르고 있다.






 아파하는 지구를 위해
                                                               최례진

 딸아이와 다정히 손을 잡고 나선 저녁 산책길. 비온 뒤라 공기가 좋다며 하늘을 올려다본 딸아이의 하이톤 목소리에 놀라 바라본 하늘엔 초승달이 예쁘게 떠 있었다. 그 옆엔 달랑 작은 별 하나.‘겨우 저걸 보며 저리도 좋다며 목소리가 높아지나...’사실 밤하늘을 올려다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 인듯하다. 문득 어릴 적 고향의 새까만 밤하늘이 생각난다. 밤하늘엔 노란 빛의 반짝이는 별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으며 북두칠성, 북극성, 카시오페이아, 사자자리, 오리온 등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서로 별자리 찾기 하며 하늘에 대고 손가락으로 그려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수많은 별들을 이어가며 그립고 보고픈 사람의 얼굴도 그려보고 하늘의 도화지에 별들로 그린 그림은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걸작이었던 것이다. 가끔 운 좋게 노랗고 큰 별똥별을 보면 두 손 모아 소원도 빌어 보았다. 장래의 꿈과 희망, 그리고 포부를 생각하면서...
 그런데 요즘의 하늘은 어떠한가! 하늘도 새까맣지 않을뿐더러 그 넓은 하늘엔 반짝이는 작은 별 하나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분명 하늘에 별이 없지는 않을 텐데... 이는 바로 대기오염 때문일 것이다. 대기오염이라는 심각함에 하늘의 색도, 그 위의 별들도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숨쉬기조차 힘들다는 소리들을 한다.
 대기 오염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인공적으로 배출되어 인간 생활에 나쁜 영향을 주는 매연, 먼지, 일산화탄소 따위와 같은 물질이 공기와 섞이는 일이라고 나와 있다. 대기를 오염시키는 것으로는 몇 가지가 있지만 우리가 생각했을 때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이 산성비와 미세먼지 일 것이다. 또 프레온 가스로 인한 오존층 파괴, 지구의 온난화의 주요인이 된 이산화탄소의 증가 등 그 종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로 인한 피해 또한 더더욱 많고 크다.
 세계 속의 한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모든 것이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서 대기오염은 점차 광역화되며 심각해져 지구가 숨쉬기 힘들어하고 아파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한 부분에서만이 아닌 여러 방면에서의 문제가 제시되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서 그 예전 발전되지 않았던 그 시대 그때의 모든 것이라면 굳이 대기오염이니 뭐니 말들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기오염이 미치는 영향이 커서 누구나 청정지역에서 살기를 바라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기에 아직까지도 환경 의학적으로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대기오염이 심각할수록 호흡기 관련 질환은 더 늘어나고 또한 인류가 발전해 감으로 인해서 대기오염은 더욱더 심각해질 것이다. 지금과 같이 대기오염 상태와 속도가 계속 심해지면 머지않아 공기도 물처럼 값을 지불하고 마셔야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마시는 물의 양에 비해 공기는 약 2만 배 이상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들을 자연이 공급하기에 인간은 만족한 삶, 쾌적한 삶을 살기 위해 자연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우리의 삶 자체는 풍부하고 윤택해졌지만, 그로인해 자연과의 조화는 깨지기 시작했다.
 에너지의 사용을 줄이고 대체에너지인 태양에너지와 같은 에너지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화석연료나 많은 황이 들어있는 석탄 사용을 줄이며 자동차의 매연가스도 줄여야 하기에 개개인의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대체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지구는 자연과 함께 인간이 잠시 잠깐 빌려 쓰는 정도로 생각하고 잘 보존하고 지켜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개인 이기심으로 가득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훼손하며 인간 중심주의 사고를 갖고 살아가고 있기에 지구의 기후 변화로 인한 재난 속에 파괴의 길을 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자연과 인간은 서로 공존해야 하는데 왜 자꾸 이렇게 엇나가기만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본다. 고마운 자연과 더 나아가 이 지구를 더 이상 아파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대기오염물질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며 우리의 자연과 지구의 회복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금 잠깐의 바람이라면 딸아이와 올려다 본 하늘이 어릴 적 올려다 본 하늘처럼 새까맣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어 그 위에 딸아이와 엄마의 추억이 담긴 멋진 그림 하나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봄을 만나다
                                                               최례진
                                                              
 봄 햇살이 좋아 나서 본 산책길. 봄꽃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본다. 톡톡톡’봄꽃 터지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히는게 엊그제 같은데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아침나절 다르고 오후나절 다르게...지금 이 시간에도‘톡톡톡’개나리 꽃잎 벌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노란 물감이 더 많이 더 먼 곳까지 번지고 있다. 곳곳에 매화가 터지고 지나간 자리에 산수유가 터지고, 개나리 진달래가 터지고...목련꽃 향기가 자리하던 자리에 라일락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히며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오게 한다. 길가에 늘어선 이름 모를 야생화며, 누군가가 화단에 심어놓은 예쁜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이 계절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자연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꽃의 계절이니만큼 흰 꽃, 붉은 꽃, 노란 꽃, 마구마구 터져야겠지. 길가의 야생화가 참 예쁘게 피었다. 돌계단 틈 사이에 조그맣고 앙증맞게 핀 제비꽃이며, 누군가가 화단에 심어놓은 팬지, 베고니아, 비올라, 청순한 소녀의 수줍은 미소를 닮은 데이지, 담벼락 밑에 수줍게 피어있는 수수한 민들레며 그 옆에서 향기를 뽐내며 봐 달라 손 이끄는 라일락까지.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꽃들...눈 닿는 곳곳이 봄으로 가득하다.
며칠 전에  딸아이가 엄마가 팬지 좋아한다며 외출 잘 안하는 엄마에게 선물이라며 휴대전화로 찍어 와서 감상했었는데 오늘은 직접 보니 아~~~나비들의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참~예쁘기도 하지. 보라색, 노랑색, 하얀색...한가지색으론 성이 안차는지 각자 두 가지 이상의 색으로 뽐을 내는 모습이 어쩜 저리도 곱고 색색이 예쁘기만 할까. 길가 화단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팬지와 벗되어 얘길 했다. 너무 좋다. 돌아온 길에 재래시장을 들렀다. 이곳에도 봄은 벌써 자리하고 있었다. 재래시장 좌판에는 향긋하고 야리야리한 쑥 바구니가, 얼크렁 설크렁 엉기어 앉아있는 달래, 제법 뿌리가 단단해 보이는 냉이가 눈과 식욕을 끌어당기며 찾아줄 손길을 기다리고 앉은 폼이 완연한 봄이다. 모두 장바구니에 담아오고 싶었으나 한꺼번에 식탁을 봄으로 물들이면 두고두고 진정한 봄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 냉이와 풋마늘 대를 식탁 메뉴로 정하고 사 들고 와 깨끗이 씻은 냉이를 살짝 데치고, 풋마늘 대 어슷썰어 새콤 달콤 초고추장에 참기름 아주 살~짝 향기만...깨소금 송송 뿌려서 맛난 봄의 향기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즐겁게 했다. 내일 저녁엔 달래 넣어 끓인 작은 뚝배기 된장으로 또 다른 봄을 느껴볼까 한다.
너른 들녘과 시원하고 확 트인 바다, 산새가 좋은 곳에서 나와 함께 자란 내 친구가 생각난다. 늘 이맘때만 되면 바구니 끼고 봄나물 캐러 가고 싶다고 말한다. 어디로 가면 봄나물이 많은지 알려달라며...
좋은날에, 봄바람 한웅쿰 뿌리며 화사하게 밝은 날에, 고운 추억 엮을 수 있는 보람된 날에...나는 봄을 만나고 왔다.















   가을과 함께한 과거로의 여행
                                                             최례진

 가을 하늘을 벗 삼아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기로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조금은 한산하고 마음의 평안을 주는 곳을 찾다가 아산 외암 민속마을을 가 보기로 했다. 파란하늘에 하얀 솜사탕 같은 구름과 눈 닿는 자리 자리마다 가을이 한창이다. 길가의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며 춤을 추고 있고 탐스러운 노란 해바라기는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한다. 들녘의 벼이삭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에 어느새 저렇게 자라 알알이 열매를 품고 있다. 가을의 전령들이 나를 보고 손짓을 한다. 눈은 가을과 인사하느라 바쁘고 코는 가을 내음에 흠뻑 취해있으니 이 시간이야말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최고의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외암 마을은 500년 전통이 살아있으며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간이 그의 호를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 이유는 우뚝 선 설화 산의 형상을 따서 지었으며 그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도 외암(外巖)이라 지었다한다. 외암 민속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어있으며 살아있는 민속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중요 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후기 중부 지방의 향촌모습그대로이다. 대부분이 초가집으로 되어있지만 기와집도 10여 채가 되며 대개 100~200년씩 된 집들 이라한다. 예안이씨의 집성촌으로 현재에도 8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외암마을의 앞쪽은 넓은 농경지를 두고 있으며 그 뒤는 병풍처럼 산이 막아주는 그런 사이의 구룡지에 있다. 얼핏 보면 한국 민속촌과 비슷하지만 이곳은 실제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으며 가옥 주인의 출신지명이나 관직 이름을 따서 병사댁, 참판댁, 참봉댁, 영암댁, 등등의 택호가 정해져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소박한 우리네 전통적인 옛 마을 그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마을 입구 다리를 건너기 전 왼쪽엔 ‘열녀 안동권씨’의 정려가 있다. 다리 밑 개천 바닥엔 기미년에 이백선이 썼다는 ‘동화수석’과 이용찬이 썼다는 ‘외암동천’이란 글씨가 새겨진 자연석으로 된 반석이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과거로의 여행은 시작됐다.
 여러 가지 표정의 얼굴로 동네를 지키는 많은 장승들. 그 장승 뒤에는 문관석과 동자석을 갖춘 예안이씨의 선조 묘가 있다. 곳곳에 설명문이 있어서 아이들 교육에도 큰 도움이 될듯하다. 조금 올라가니 영상관, 홍보관과 민속관이 같이 있다. 먼저 상류층의 가옥을 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큰 디딜방아, 연자방아도 있다. 디딜방아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연신 쌀을 뒤적이며 고르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리 오너라.’ 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하인이 달려 나올 것 같은 큰 기와집도 보이고 그 앞쪽으로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투호놀이와 고리 던지기, 외줄타기 등 민속놀이들도 있다. 한옥집의 내부는 옛 살림 그대로를 꾸며놓고 있어서 볼거리가 너무 많았다. 어릴적 해봤던 절구방아도 찧어보며... 양반집 마루엔 다듬이질도 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 부엌을 들어 가보니 무쇠 솥을 걸어놓은 아궁이에 불 때던 고향집이 생각났다. ‘그래. 그땐 산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와 그 나무로 쪼그리고 앉아 후후 불어가며 아궁이에 불을 땠었지. 참 힘든 때였어.’ 여름엔 감자, 겨울엔 고구마가 항상 아궁이 속에 들어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간식거리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저 농사지은 곡식이나 수확물들이 간식이며 식량이었을 뿐. 그것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들도 많았었는데...지금처럼 달콤하고 맛있으며 환상적으로 입맛을 사로잡은 마약 같은 달달한 먹을거리를 상상이나 해 봤을까? 찬장 안에 엄마가 몰래 숨겨둔 갱엿 한 숟갈 퍼 먹으려고 어두운 부엌을 뒤지다가 혼나기도 하고...
 헛간, 곡간 등에도 기구들이 잔뜩 들어있지만 그곳엔 들어가지는 못했다. 집집마다 뒤뜰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장독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옛날의 냉장고 역할을 했던 삼각뿔 모양의 짚으로 만들어 놓은 김장독 묻어 놓은 곳도 있다. 전통 혼례 하는 곳도 멋지게 마련되어 있으며 미리 신청할 경우 전통 혼례도 체험 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곳 외암 마을의 멋스러움은 집집마다 담장이 예쁜 돌담이라는 것이다. 이내 눈길을 한참을 머무르게 하는 돌담길에서 느껴지는 정취야말로 환상 그자체이다. 대개 막돌을 아무렇게 쌓은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돌담을 쌓았는지...예전에 가봤던 전남 승주의 낙안읍성 마을과 함께 가장 멋스럽고 아름다운 돌담을 보여 준듯하다. 구불구불 연결된 나지막한 돌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이끼도 살짝 끼어있고 길게 늘어져 엉켜있는 담쟁이 넝쿨도, 또 계절에 맞게 주렁주렁 박들이 매달려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돌담에 살짝 무게를 얹고 있는 박과 여주들은 여름엔 푸르름으로 겨울엔 조금은 삭막함 그대로를 보여주며 세월의 이야기들을 돌담과 함께할 것이다. 그 담장 너머로 빨갛게 익은 감나무도 보이고, 이미 열매가 다 떨어져버린 살구나무, 산수유나무, 앵두나무 등이 보인다. 꽃이 피는 계절에 왔더라면 멋진 돌담위로 흘러내린 꽃들의 향연과 그 너머로 보이는 우아한 한옥과 그 처마선의 아름다움의 조화가 나의 눈을 한층 더 부유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눈 오는 겨울이오면 또 어떠할까? 하얀 눈송이가 포근하게 내려 돌담의 담장 위와 초가지붕을 살포시 감싸 안은 정경이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낼 것이다. 가는 길에 돌담길에 고개를 늘어트린 채 임금을 기다리는 후궁(소화)의 모습을 담은 능소화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그 사연을 알기에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기와지붕과는 달리 서민층의 초가삼간의 초가지붕이 한층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고향집이 생각난다. 그땐 지붕위의 새끼줄을 따라 호박넝쿨이 뻗어가고 그 곳에 매달린 누런 호박들이 지붕위에 열려있었는데...고추도 따서 지붕위에 말리곤 했었는데...그 뒤 농촌주택지붕개량사업으로 인해 초가지붕이 시멘트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어 초가지붕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곳처럼 우리의 생활상의 변화됨을 기억하기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지 않는다면 초가삼간은 구경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동네 한가운데 수령 600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어떻게 저리 오랜 시간동안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까? 동네 자체가 참 예쁘고 포근한 엄마의 품 같은 마을이다. 호롱불을 밝히고 밤새 바느질하는 아낙네의 모습도, 배고파 울던 젖먹이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리는듯하다. 어느 집 뒷마당엔 진짜 닭이랑 토끼가 놀고 있다. 이곳을 지나치다보니 조금 아쉬운 점은 이곳에, 이토록 좋은 곳에 밝고 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해졌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지금도 여러 가구가 거주하고 있고 민박체험도 하고 있지만, 어린 아이들이 살고 있지는 않는듯하다. 도심에서 답답하게 사는 어린이들이 이런 곳에 산다면 그야말로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게 자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산책길은 부담 없이 걸어 다니기엔 정말 좋다. 어느 곳은 흙을 밟고, 또 어느 곳은 현대식의 시멘트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만큼의 세월이 흘렀으니 시멘트길 정도는 애교로 봐줄만하다. 보이는 곳곳이 푸르름으로 덮여있어 시원하고 차분함을 선사해주니 정말 힐링 제대로 한다. 쉴 틈 없이 구경하다보니 조금은 지칠 때 쯤 조그마한 동산이 보였다. 춘향이가 탔을법한 그네가 마련돼 있다. 그네위에 앉아서 잠시 숨 고르면서 살짝살짝 불어주는 가을과 담소를 나눈다. 올려다 본 하늘이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를 본 듯하다. 푸르른 나무의 사이사이에 내 비치는 햇살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한 바퀴 산책하고 돌아 나온 마을 옆으론 큰 연 밭이 보인다. 자신이 감당 할 만 한 빗방울만 쉬게 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 없이 비워버리는 넓고 큰 푸른 연잎. 좀 더 빨리 왔었다면 연꽃도 봤을 텐데...누렇게 익어가는 넓은 황금들녘의 너머로 설화산과 초가집이 절경을 이룬다.
 조금 가다보니 저잣거리가 나왔다. 수구리 국밥 등 전통국밥집이 있는가하면 전 집, 국수집 여러 곳이 있었다. 저잣거리 중간 중간엔 맑은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있어 시원함을 선사해 주었다. 공예품 전시 판매관, 또 우리 선조들의 장인정신이 묻어있고 숨 쉬는 놋그릇도 보이고 색이 곱고 아름다운 칠보공예, 짚으로 만든 수공예품, 또한 작고 귀여운 장식품들까지. 한참을 넋 놓고 들여다보았다. 또 한 편엔 달고나 체험하는 곳, 딱지치기, 윷놀이, 널뛰기, 투호, 국궁체험, 한지공예, 전통 엿 체험, 소망 등 날리기 등등 체험할거리가 많았다. 가족들과 함께 온 아이들은 마냥 신나 있었다. 물론, 그중엔 체험하는 시기와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있고 더러는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외암 민속마을에는 연중의 행사가 참 많다. 매년 음력 1월14일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전통적인 의식인 장승제, 또 매년 10월중에 하는 짚풀 문화제는 국악공연, 추수, 연 만들기, 짚풀, 장승 만들기 등 여러 민속 문화체험에 참여해볼 수 있다. 정월대보름 하루 전에는 쥐불놀이, 정월대보름날 저녁엔 달집태우기와 연날리기, 그리고 10월 중순부터 11월까지 한 달 정도 초가 올리기 등 다양한 행사가 있다. 이처럼 외암 마을은 우리 역사가 묻어있고 민족이 살아 숨 쉬는 생활박물관을 체험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삭막한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빌딩 사이를 누비며 아등바등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쉼터로 외암 민속마을에 와서 머리도 식히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아 가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한국 민속촌이나 전주한옥마을처럼 먹을거리, 볼거리에 큰 기대를 하고 온다면 조금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외암 민속마을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정겨운 우리네 삶의 뿌리가 담겨있는 엄마의 품 같은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가을과 함께한 과거로의 여행인 오늘. 옛 추억도 되돌아보며 늘 마음속으로 그리워만했던 그 시절 그때의 고향을 만나본 듯 좋았으며 정말 눈과 마음이 부유해지고 벅참에 온종일 들뜸과 흥분의 연속인 하루였다.









     새
                                                              이 성숙
                                                                                                 
간밤에 창문을 열어두고 자다가 이른 새벽 새 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 앞 난간에 참새 서너 마리가 재잘 거린다. 모처럼 귀가 맑아지고 상쾌하다. 여러 가지 핑계로 창문을 닫고 살다보니 어쩌다 새가 날아와도 새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가끔은 전에 살던 시골집의 한적하던 삶이 그립기도하다. 산 아래에 살면 새들은 늘 옆에 있는 친구처럼 가까울 수밖에 없다. 어슴푸레 새벽빛이 숲을 비추면 밤 새 잠들었던 새들은 저마다의 소리로 경쾌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제각각 내는 울음소리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다. 매일아침 들어도 지루 하지 않은 숲속의 오케스트라 연주회다. 새 울음소리는 같은 새가 울어도 기분 따라서 그 소리가 달리 들리는 것 같다. 어느 날은 ‘쿠욱쿡, 쿠욱쿡’ 슬피 우는 것 같다가 어느 날엔 ‘쿨쿠덕, 쿨쿠덕, 골이 잔득 난 것 같은 울음소리다. 처량한 듯싶지만 한요 하고 평화롭다. 지금 같이 무더운 여름, 소낙비 한 줄금 온 뒤에 산에서 들리는 새소리는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청아하다. 아무리 좋은 연주라 할지라도 이렇듯 온 종일 지루하지 않게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운 노래 소리다.

 
시내로 거처를 옮기고서 집에 새들의 쉼터를 만든 적이 있다. 쉼터라 하여 거창 할 것도 없다. 장독대 위에 큼지막한 장독소래기를 수반삼아 부레옥잠 하나 띄워 놓으면 새들의 쉼터가 된다. 이른 아침 참새들이 빼곡하게 둘러 앉아 저희끼리 한참을 지줄 대는 것을 시작으로 온종일 이런 저런 새들이 제 집 드나들 듯 들락거린다. 새도 깃을 들일 때는 앉을 자리를 가려 앉는다는데 우리 집이 저희들 깐에는 안심이 되었는가 싶다. 집 모퉁이 아늑한 곳에 서너 개씩 알을 낳아놓기도 했다. 그렇게 한두 해 살다가 지금 집으로 이사 온 뒤로는 새들의 쉼터를 만들 수가 없다. 몸은 편해지고 마음은 평화롭지 못하다.

 
죽으면 새가 되어 여기저기 훨훨 다니고 싶다던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신지 서른다섯 해가 지났다. 돌아가시기 전 의식을 잃으셨다가 깨어나신 아버님께서 꿈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님은 바람대로 새가 되셨다고 했다. 하염없이 날다가 어느 깊숙한 동굴에 갇혀 입구를 못 찾고 한참을 헤매셨단다. 그러다 어찌어찌 간신히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다음날 육십 삼세 아직은 청춘 같으시던 아버님이 황망하게 가셨다. 아버님 꿈 이야기는 무언중에 마음이 쓰였다. 윤회가 있다면 새가 되기보다는 천도를 하시어 천당에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바쁜 일상으로 아버님 생각도 더러 잊으며 몇 달이 지났다. 어느 날 밤이다. 새 소동이 벌어졌다. 집안에 새가 들어왔다. 불이 환하면 없다가 자려고 불을 끄면 날아다녀서 쫒으려 해도 쫒을 수가 없었다.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 만 되면 나타났다. 사나흘을 그렇게 쫒으려고 애를 쓰다가 갑자기 아버님 꿈 생각이 났다. 밤마다 나타나는 이 새가 필시 아버님이 새로 환생하시어 우리 곁에 오신 건 아닐까. 우리는 새를 보며 아버님 인양 함부로 하지 못했다. 불교의 윤회를 믿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말없이 속을 끓이며 며칠이 지났다. 아침에 화분 손질을 하다가 다복한 군자란 사이에 조그맣고 이상한 생쥐 같은 것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박쥐라고 했다. 실제로 박쥐를 본 것은 처음이다. 그 것이 밤마다 우리를 놀라게 한 새의 정체였다. 박쥐가 어떻게 집으로 들어 왔는지 모르지만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출몰 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동안 마음 졸이며 지낸 것이 어이가 없었다. 박쥐도 몰라본 어리석음의 소치니 웃고 넘겼지만 아버님 생각으로 한 옆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아버님이 바랐다 한들 새가 되시진 않았으리라. 평생을 고단하게 일 밖에 모르고 사셨던 아버님이 천국에서는 환 하게 웃으시던 생전의 모습으로 행복 하시리라 믿고 싶다.

 
까치가 떼 지어 우리 집 난간에 앉는다. “훠이훠이” 남편이 새를 쫒는다. 새 소리가 좋다고 물그릇을 놓을라치면 저놈의 새들이 조류 독감의 원인이라고 화풀이를 한다. 새 똥은 누가 칠거냐고 난리다. 마당이 없는 이집에서 새들의 쉼터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아! 나는 자연인 이다’ 로 살고 싶다.    -끝-    

성씨 이야기

                                                                                                               이  성숙

나는 경주(월성)이씨 익제공파 표암 공 자손 40세손이다. 아들이었다면 희 자 돌림으로 족보에도 쓰였겠지만 딸이라서 내 이름은 없다.

특별히 족보에 관심을 가져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수 없이 들어서 잊혀 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에게 경주이씨 자손임을 되풀이해서 말씀 하셨고 손녀가 또랑또랑 외우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 하고 싶어 하셨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손님이 오시는 날엔 영락없이 경주이씨 익제공파를 위아래 항렬자까지 줄줄 외웠던 것 같다. 뿌리를 알려 주려 애쓰시던 할아버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조상에 대한 소임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내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에 초계 변 씨인 남편과 혼인을 했다. 시댁 동네는 변 씨 집성촌이다.

남편은 읍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변 씨 말고도 다른 성씨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동네 속에 있는 학교에서 출석을 부르면 변 아무개 로 시작해서 변 아무개로 끝날 정도였다니 그럴 만도 하다.

지금은 인기 있는 주말드라마 주인공 가족이 변 씨로 나오지만 남편과 결혼 할 때만 해도 춘향전의 변 사또나 영화에 나오는 변강쇠등 좋지 않은 인물들로만 변 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 후 첫해에 시댁에서 아버님 회갑 잔치를 할 때이다. 서투른 일을 하느라 분주하게 동동 거리고 있는 중에 육촌 손윗동서 되는 분께서 이 씨 라고 하던데 본관이 어디냐고 느닷없이 물으셨다. 친정엄마 연배와 비슷하신 그 형님은 손끝 야물고 입심까지 좋으셔서 집안의 모든 일에 앞장서는 분이었다. 나는 경주이가 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런데 형님은 전주이가로 들으셨는지 본인도 전주이가라 하시며 양반 자손은 뭐가 달라도 달라야 된다고 하셨다. 형님에게 전주이씨는 그대로 자부심이 된 듯이 보였다. 뭐가 달라야 되는 건지 몰랐지만 예상 못한 형님의 반색에 당황하여 경주이가 라고 되 집어 말 하지 못했다.

그 뒤로 형님은 만날 적마다 막내 동생 대하 듯 정답게 하셨다.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경주이씨 익제공파 40세손을 말씀 하셨는데 나는 아기 때처럼 똑똑 하게 말하지 못한 채 형님 앞에서 전주 이 씨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일부러 찾아가 밝히기도 우스울 만큼 긴 세월이 지났다.

 
춘향전에 변 사또는 왜 하필 변 사또 일까. 숱한 성씨 중에 변 씨라고 한 것이 의아하다. 구전되어 전해 내려왔다고 하니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지만, 춘향전은 변 씨의 아들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변 사또라는 별명을 만들어 주었다. 남편에게 어쩌다 “변 사또” 하고 부르면 으레 본인 인줄 알고 대답 한다. 명예로운 사또가 아님에도 별명으로 굳어졌다.

 
아들의 결혼 전 상견례 자리에서 사부인께서는 사윗감이 변 씨라서 혼사를 조금 고민 하셨다고 했다. 이유인즉 아이가 태어나면 변 사또라 놀림을 받을 것이고, 사회생활에서 얻을 직함 붙이기도 좀 그렇지 않겠냐고 하셨다. 사부인의 농담으로 어색한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되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혼사를 고민 할 정도는 아니라도 생각은 하셨던 것 같다. 변 점장, 변 소장, 변 사장, 맘에 들진 않지만 어쩌랴 성씨를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꿈꾸는 책방

                                                                                                         이 성숙

나는 오래 전부터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작지만 편안한 쉼터 같은 책방을 해보는 것이다. 대형서점이 동네 서점을 사라지게 만들고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지만, 나는 사랑방처럼 따뜻함이 있는 책방을 하고 싶다. 그동안 살면서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바라는 것이 많았지만 이제는 욕심을 덜어 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꿔오던 책방을 현실로 이루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 것은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내가 꿈꾸는 책방은 시내에 있지 않고 조금 변두리에 있어도 괜찮다. 지대가 살짝 높아서 전망이 트인 곳으로 밤마다 야경을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상관은 없다. 작더라도 마당은 꼭 있어야겠다. 집은 단층으로 꾸밈없이 수수 하게 지어서 마당에 매화 몇 그루와 감나무 한두 그루는 심고 싶다. 계절별로 피는 화려하지 않은 야생화가 눈 맞춤 할 만큼은 있으면 좋겠다. 추위 속에 핀 매화를 보면 책방에 오는 손님들의 마음도 선해지고 생기가 넘칠 것만 같다. 감나무는 봄날의 반질반질한 연초록 잎부터 사계절을 뚜렷이 보이며 사람들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리라 생각 한다.

 
책방의 넓이는 30-40평이면 족하다. 서쪽으로는 테라스를 넓게 만들고, 한낮의 뜨거운 해를 가려줄 진회색 어닝(두꺼운 천으로 된 차양)을 설치 할 생각이다. 테라스에서 자유롭게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석양의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볼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다.


요즘 작가들의 책은 물론이지만 예전 작가들의 책도 많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젊은 엄마들이 볼 수 있는 육아 책이나 인테리어 책, 요리책도 시대에 맞게 갖추어 놓고, 여행 작가들의 책도 골고루 있어야 하겠다. 인문이나 철학책이 없으면 섭섭하다. 하지만 참고서나 문제집 또는 사람이 잘 살려면 어떻게 요령을 부려야 되는지를 가르치는 책은 사절 하고 싶다. 지역 작가들의 책은 잘 보이는 자리에 놓고 귀한 대접을 하고 싶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 동네 작가들과 만나기도 하고 그들의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좀 더 욕심을 부려서 책방 옆으로 스물다섯 평쯤 갤러리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갤러리에서 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몇 해 동안 하는 일 없이 그림 공부 하는 남편의 걸음마 수준인 그림도 가끔은 걸어 두고 용기를 주고 싶다. 또 첼로를 전공했지만 형편이 어려울 때라서 독주회나 협연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이었던 우리 딸내미. 악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딸의 첼로연주도 간간히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갤러리 한쪽 벽면에는 대형스크린을 매립으로 설치하여 평소에는 빈 벽으로 활용 하다가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고전 영화 한편씩 볼 수 있으면 그 또한 좋다. 갤러리의 북쪽 코너에는 꼭 벽난로를 놓을 것이다. 눈 내리는 저녁 책방을 찾아와준 손님이 있다면 난로 가에 둘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포도주 한잔쯤은 함께 해도 좋으리라.

 
책방이 편안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다가 미안해하는 손님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주인 보기 미안해서 책을 한두 권 사가는 마음 여린 손님들이 와 준다면 그 것으로 족하다. 손님이 많으면 좋고 많지 않아도 걱정 하고 싶지 않다. 자식들은 다 어른이고 우리 부부 낭비 하지 않으면 그럭저럭 사는데 크게 지장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책방 이름도 한두 개 준비 해둔 것이 있다. 그중 하나가 ‘다홍치마, 책방’ 이다. 이유도 없이 ‘다홍치마’가 좋아서 짓고 싶은 이름이다. 그야말로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책방을 수도 없이 짓고 또 허물기도 한다. 허물어도 손해볼일 없는 책방이다. 한나절이면 근사한 책방이 머릿속에서 새롭게 완성될 수 있으므로. 이런 생각들로 어느 날은 온종일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다. 꿈을 이루는 날까지 행복한 나의 상상은 계속 될 것 같다. –끝- 

최한식


 














샛노란 꽃 한 송이

                                                           최 한 식
                                                             
  호박꽃 한 송이가 오도카니 피어있네. 그다지 관심 쏟아 보아줄 이도 없는 곳에 서럽게 홀로 피어 어쩌자는 건가. 기름 진 땅도 아닌 쇳조각을 감아 돌며 줄기 잎 푸르고 꽃마저 활짝 피니 오히려 안쓰럽네. 친구들은 둥글고 길쭉한 열매들을 자랑스레 달았건만 주인과 땅 잘못 만나 즐거운 날 기대 못 하네. 내 눈에 찬란하여 발걸음 멈추고 잠깐 들여다 볼 뿐이네.

  척박한 좁은 땅에 호박 모종 심었더니 줄기 벋고 잎 달리고 꽃까지 피워내 열매 모습 보이더니 얼마 못가 떨어지네. 두세 해를 거듭하니 아내도 더 이상 호박을 기대하는 눈치 아니네. 그저 잎을 얻고 꽃을 보는 재미를 누리고자 함이라네. 올해는 벌써 두 집에 호박잎을 따서 안겨 주었네.
  제 처지 모르고 무성한 이파리는 생기를 띠네. 며칠만 지나도 여기저기 돋아난 잎들은 삶의 의욕을 보이네. 볼 때마다 신기한 건, 저들의 넝쿨손이네. 허공 속을 휘휘 젓는 걸 계단 난간 쇠에 올려 주었더니 연약한 손으로 가는 쇠를 두세 번씩 척척 감고 올라가네. 눈여겨 볼 때엔 시치미 뚝 떼고 바람 따라 하늘거리다가 어느 순간 돌돌 감으며 앞으로 나아가네.
  꽃 중에 억울한 게 호박꽃이리라. 샛노란 통꽃이 나름 예쁘건만 꽃으로 쳐주지 않으려 하고 일쑤 낮추고 무시하는 일에 오르내리네. 대대로 단련이 되었는지 흔들림 없이 피고 지기를 거듭할 뿐이네.
  꽃밭 귀퉁이에 심겨 가느다란 줄기 타고 멀리멀리 이어가는 그 생명의 힘에 경의를 표하네. 그 가는 줄기를 타고 어찌 삶이 건너갈까. 혹시 자신이 실한 열매 하나 맺지 못할 걸 알기나 하려나. 그런 호박들을 기르는 거친 땅은 얼마나 주인이 원망스러울까. 가진 힘 모두 내어 올려 보내도 옹골찬 자손 하나 영글게 못함이 한스러우리라.
  누이가 그러했지. 가난하고 힘없는 가정에 태어나 못 배우고 꿈조차 펼치지 못한 채 사춘기가 갔네. 가정을 이루고 아들 둘 낳았지만 열사의 나라까지 갔다 온 신랑은 삼십대 중반에 하늘로 갔네. 시어머니와 두 아들 돌보며 억세게 살아온 세월들. 흙 수저로 나서 흙 수저로 사네. 육십 너머 몹쓸 병 걸려 갖은 고생 다 겪고도 오직 하나 믿음의 힘으로 버티네. 말은 안 해도 친정 시댁 부모님들,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게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미안하단 말 한마디 못하고 어느새 다 돌아가셨네.
  누이를 한했더니, 스스로 돌아보니 내 무능함이 훤히 보이네. 온 가족의 기대와 지원으로 막내 하나 번듯하게 키워내, 이 땅을 당당하게 살기 바랐으리라. 본래 시원찮은 재질에 열심마저 부족하니 스스로 힘겨울 수밖에. 겉으론 샛노란 꽃 한 송이, 그럴듯해 보여도 기름진 땅에 든든히 뿌리내리지 못했던 게지. 내 눈앞의 호박꽃처럼 그렇게 살아가네. 가문을 살리고 돕기는커녕 내 집안 건사하기도 만만치 않네.
  열매를 거두지 못하면 어떤가.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은 걸. 잎과 꽃만으로도 나와 아내는 불만이 없네. 꽃이라고 다 튼실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건 아니지. 꽃꽂이에 쓰여 여러 행사를 빛내고 한 아름 꽃다발 되어 좋은 날 맞은 이들을 축하하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쇠 난간을 감으며 앞으로 나아가 싱싱한 잎들을 내놓고 노란 꽃으로 나를 즐겁게 해주는 이 호박꽃을 보며 내 앞날을 생각하네. 욕심을 부린다고 안 될 일이 되어 질까. 할 수 있는 일들을 끈기 있게 해 나가야지. 내 삶의 모습을 보고 위안도 받고 새 힘을 얻는 이가 있다면 그것으로 넉넉하지. 스스로 실망하여 주눅 들지 않으면 내 삶도 꽃처럼 빛나리라.
  호박꽃은 이 아침이 지나고 햇볕이 더워지면 꽃잎을 오므리고 아름다움이 쇠해가며 잊혀 가겠지. 그것이 숙명이리라. 내일은 또 다른 꽃이 피고 또 다른 일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오늘 내게 맡겨진 일을 잘 해내면 족하네. 내 꽃과 내 이파리들 하나하나 피우고 내미는 게 내 일이네.

  내려가세. 오늘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내 덩굴손을 쇠 난간에 단단히 감는 일이네. 그 후에 샛노란 내 모습을 드러내세. 내 부실함을 아는 이, 모르는 이에게 즐거움을 줄 내 꽃을 피우려네. 샛노란 호박꽃 한 송이를….      




연녹색 댓잎들

                                                           최 한 식

  오랜 가뭄이 끝나고 자주 비가 내린다. 빗소리가 타닥, 타닥 내 마음을 때린다. 그들은 땅의 열기를 식히고 더러운 것들을 쓸어가 산하를 말갛게 씻어 주리라. 찬물에 세수한 아이들처럼 싱싱한 풀과 나무들이 이 빗속에 온 몸을 흔들며 춤추는 모습이 떠오른다. 모처럼 내린 비다운 비를 실감하고 싶어 가경천과 무심천을 가 보았더니 물은 기대만큼 불어나 있지 않다. 천변 도로를 집어삼키고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을 예상했지만 평소의 유량을 조금 넘어설 뿐이다.

  며칠 전 일이 떠오른다. 모처럼 아침 산책을 하고 집으로 들어서려니 아내가 대문 아래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수돗가에 있는 화단용 물뿌리개를 보다가 평소에 닦고 싶었던 대문의 쇠막대에 물을 뿌리고 먼지 쓸린 물을 밀어내느라 또 물을 쏘아대고 있었나 보다. 유리창을 닫고 그 위에도 뿌려보라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는 듯 신나게 물을 뿌렸다. 유리창도 문제지만 더욱 청소가 필요한 것은 방충망이었다. 이사할 때 새로 했으니 5년이 넘었다.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했지만 이거다 하는 것이 없었는데 우연히 찾아낸 셈이다. 유리창에 물을 주욱 죽 부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방충망은 아예 떼어내 바닥에 놓고 물을 뿌리니 묵은 때가 시원스레 씻겨나간다.
  둘이 신이 나 힘든 줄도 모르고 닦아냈다. 오늘 어떤 일을 더 할지 모르지만 가장 의미 있는 일은 5년 묵은 방충망을 청소한 걸 거라며 서로 즐거워했다. 들어와 밖을 내다보니 후련하고 시원했다. 우리처럼 속 시원한 청소를 한 이들이 누가 있을까. 한 장면이 떠올랐다. 3000마리의 돼지를 치면서 30년 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악취가 지독하고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그걸 헤라클레스가 강물을 끌어들여 하루가 못되는 짧은 시간에 깨끗이 치웠다. 앓던 이 빠진 것 이상으로 얼마나 상쾌했을까. 외양간 주인과 청소한 이 모두 시원함과 후련함을 맛보았을 것이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기까지 고민이 적지 않았다. 간단한 물건도 직접 보고 사는 세상에 팔려는 집을 보여 주려하지 않았다. 집주인은 세를 주고 다른 곳에 살았고, 세든 이들은 집이 팔리기를 원치 않았다. 계약을 하는 날 겨우 보고 나니 심란했다. 구입을 결정하고 나서도 즐거움이나 기대감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잔금을 치르고 집을 양도받았다. 내부수리를 크게 해 예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 공사 중간 중간에 설명을 들을 때마다 그냥 넘어가거나 질 낮은 재료를 쓰기가 어려웠다. 계속 늘어난 공사비는 최초금액의 두 배를 넘었다. 수리를 맡은 이가 친척이어서 서로 편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다. 공사를 끝내고 정산을 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혔다. 나는 아무리 해도 그렇지 형편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예상액을 두 배나 넘길 수 있느냐고 했고, 그는 매번 상의를 하고 하라는 대로 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몇 차례의 밀고 당기기를 거쳐 계산을 마쳤다.
  살아 보니 마음을 다해 수리해준 것을 알 수 있었다. 살면서 조금씩 계속 손을 보았더니 점차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이제는 별 불편 없이 지낸다. 좁은 자투리 공간에 꽃과 나무를 심고 마음을 기울이니 그런대로 정이 들었다. 그다지 소음도 없고 맑고 쾌적하다. 아침이면 새들이 날아와 잠을 깨우고 밤에는 별들을 볼 수 있다. 앞면의 아파트 정원은 우리 것인 양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청소가 지저분하고 불편한 것들을 깨끗이 치워 상쾌하게 하는 거라면 5년여 세월이 흘렀어도 서로 시원하게 털어내지 못한 앙금을 해소해야 하는 그와의 청소가 내게 남아 있는 셈이다.

  아이들이 다 자라 성인이 되었다. 나나 아내가 머리 손질을 하면 금방 알아보고 “머리 했네요, 십년은 더 젊어졌어요.”한다. 그들이 하나씩 우리 앞에 나타날 때마다 유리창을 보면 뭐 달라진 게 없느냐고 물었다.  5년여 동안이나 못 보던 일이니 예상하기 어려운지 아무도 알아맞히지 못한다. 창문을 자세히 보라고 해도 눈치를 못 채고 유리창이 깨끗해진 것 같다고만 한다. 답답한 내가 방충망을 자세히 보라고 하니 그제야 우리 의도를 헤아려 방충망이 깨끗해진 것 같단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는 오늘 일을 신나게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그래요?”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깨끗해진 방충망 뒤로 작년에 옮겨 심은 조릿대와 올해 나무시장에서 구입한 오죽의 연녹색 잎이 전보다 더 선명하다. 생기 띤 댓잎들이 내 눈 앞으로 다가선다. 오래 별러 왔던 방충망 청소로 오늘 내가 얻은 것은 댓잎들의 생기 나는 연녹색이다.
  그 연녹색 댓잎들이, 묵은 때가 잔뜩 낀 방충망을 후련하게 청소하듯 그와의 관계에 막힌 것들을 속히 해결하라고 내게 재촉하는 듯하다.


서가(書架)에 놓인 문진(文鎭) 

  전화기를 열어보니‘카톡방’에,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로부터 초대되었습니다. 이 사용자를 신고하시려면 이 링크를 눌러주세요.”하는 문자 화면이 눈에 띈다. 내 이름과 함께 초대한다는 문구가 있다. 신학교 1기 단체 카톡방이다. 이런 기능을 쓰기는 하는데 묻는 것에 답만 하다 보니 어떻게 여는 건지 잘 모른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물어보자 생각하고 지내다 열흘이 넘어갔다. 자세히 보니 화면 맨 아래 문자 쓰는 곳이 열려 있다.

  “반갑습니다. 전 조용히 숨만 쉬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적어두었다. 분명치 않은 한자어휘를 찾으려 열었더니 몇 개의 토막글들이 동기들의 안부를 내게 전하고 있다. 글들을 읽으며 내 서가에 오독하니 자리하고 있는 문진(文鎭)을 바라본다. 서진(書鎭)이라고도 한다는데 한 해 후배들이 졸업선물로 해 준 거다. 스물네 명의 이름이 정답게 모여 있다. 그 중에 한두 해 먼저 학사 편입해 공부하다 졸업을 같이 한 이들이 있어 순수하게 입학부터 졸업까지를 함께 한 이들은 열다섯이다. 그들 가운데 세 명은 벌써 하늘로 가고 세 명은 연락이 되지 않고 둘은 외국에 나가 있어 일곱이 이 땅에 남아 있다. 함께 졸업한 이들과 열 사람 남짓이 소식을 주고받는 듯하다. 문진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은 내 생각과 달리 서둘러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아담한 학교와 몇 채의 건물, 많지 않은 학생들, 소수의 교수진들과 잘 가꿔진 이곳저곳의 모습들은 내 이십대 중반을 어루만지기에 적당했다. 주변은 우리에게 나이어린 학생들과는 다른 기대를 가지고 대해 주었다. 이른바 산전수전 다 겪은 다양한 경력을 지닌 우리에게, 침체된 공동체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동기들은 대학의 신문과 방송 편집장과 교련 교관, 예비군 대대장을 하면서 그런대로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챙기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닷새를 공부하려면 생업을 포기해야 했다. 대부분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한창 경제활동에 전념할 시기에 다시 학생이 되었으니 쉬울 리가 없었다. 수년간의 갈등과 번민을 거쳐 늦은 나이에 특별한 일을 위해 모인 사람들, 모두 생각과 행동이 다르고 독특했다. 많은 이들은 나를 비롯한 어린 동기들을 젊다는 것만으로 부러워했다. 그분께 구석으로 몰리고, 깨닫기까지 어려움을 당하다 김장배추처럼 절여져 항복하고 온 사람들, 그 효력이 한 학기는 지속되었다.
  두 번째 학기가 되자 환경에 그런대로 적응이 되고 개인의 성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몇 되지 않는 이들도 공감대를 따라 자연스레 노장과 소장으로 나누어졌다. 젊은이들은 좀 더 단순했고 열정이 있었다. 대부분이 기숙사생활을 해 함께 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젊음과 가난과 고민을 찬양과 기도로 넘겼다. 군대를 마치고 온 이들은 사명에 따른 진로문제로 직접 뛰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또 한 친구는 군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실제적인 일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젊은이들은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준비된 것이 없고 현재가 불안한 이들이 동지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문제에 부딪혀 흔들리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외부에서 후원이 있으면 한 사람이 받아도 자발적으로 나누어 사용했다. 서로가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의무감도 없었지만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함께 같은 곳을 방문하고 서로의 생활을 챙기고 상대를 배려했다. 미래에의 꿈도 푸르고 이상도 높았다. 신학교의 삼 년, 여섯 학기는 빠르게 흘렀다. 서로의 일터를 찾아 흩어지니 만나기가 쉽지 않다. 현장에서 자리잡기위해 바쁘게 살다보니 어느덧 자녀들이 자라나 그때의 내 나이를 훨씬 넘고 있다.
  삼십여 년의 세월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후배들이 여기저기서 맹렬히 활약하고 있다. 그동안에 이 땅의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늘에 가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남은 이들은 맡겨진 곳에서 자신의 일들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동기들에게 내 근황을 알리면서 불비불명(不飛不鳴)하며 지내고 있다고 하고 싶었다.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는 것은 맞지만 그 뒷일을 감당할 수 없어 사용하지 못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나. 이제는 내가 가진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애달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내 시간과 노력을 쏟기를 원한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 주눅 들고 싶지 않고, 내 눈과 귀를 그들에게가 아니라 내 스스로 이루려 정한 일에 고정시키기를 원한다.

  “백세시대”라 하니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아직 내게 남아 있다. 이제까지가 준비의 기간이었다 한들 문제될 것이 무언가. 눈치 볼 일, 부담스런 일이 많이 줄었다. 한눈팔지 않으면 수월찮은 거리를 갈 수 있을 게다. 이 일을 하기에 현재의 상황이 최적화되어 있다고 믿고 싶다. 내 자신에게 목표를 정해 주고 스스로 상과 벌로 채찍질하며 오랫동안 조금씩 가고 싶다. 문진 맨 끝자리에 새겨진 내 이름을 가만히 바라본다. 문진도 나를 바라보고 “잘할 수 있어요 주인님”하고 미소 짓는 듯하다.     

서 예
                                                  이운우

정말 신기하다. 변덕 심한 여인의 마음이랄까? 조금 힘을 줘도, 조금 옆으로 뉘어도, 조금 늦게 떼어도 그려지는 글자는 영 딴판이다. 선생님이 손에 쥐어주고 써준 글자와는 다른 글자가 된다. 늦게 시작한 붓글씨 배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선생님이 써주는 견본을 따라 나름 집중을 하고 열심히 따라 그려 보지만 글씨가 아닌 그림이 된다. 이렇게 해서 배울 수 있을까, 난 안되는 것 아닐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똑 같은 한 글자를 서너 시간동안 열심히 그리다 보면 수업이 끝날 때쯤엔 ‘비슷하게 돼가네’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더 많은 집중을 쏟아본다.  그렇게 해서 가로줄, 세로줄을 비롯하여 물수(水), 길영(永), 새을(乙) 등 가장기초가 되는 글자들을 배우는데, 그냥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고 붓을 눌러주기도 하고, 들어주기도 하고, 돌려주기도 하는 재주를 부려야만 글자가 된다. 그런 재주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적당히 하느냐에 따라 글자가 되기도 하고 그림이 되곤 하는 것이다. 글자를 만들기 위하여 그림을 수없이 반복 하여 그리는 과정이 서예공부이다. 잘 안될 때는 붓을 좀 더 누르고 써보기도 하고 좀 더 들어서 써 보기도 하고 제발 잘 써지라고 애원하는 마음으로 붓을 굴려보기도 한다. 붓 가는대로 글자도 되기도 하고 그림이 되기도 하여 서예를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이라고 하나 보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붓글씨처럼 매일 매일 하나하나의 글씨에 정성을 들이고, 똑 같지만 조금씩 다른 하루를 반복하여 쌓다 보면 인생이 되고 삶이 되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도 무조건 하루하루를 보태는 것이 아니고 강하게도, 때론 부드럽게, 여유를 가지고 붓글씨 쓰듯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간난 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서른 살 청년이 된다거나 오십 살 장년이 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마찬가지로 붓글씨도 한일자를 배우다 갑자기 유명한 서예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사 모든 삼라만상에는 절차가 있고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은 수없이 많은 노력이 있어야 훌륭한 결과물이 생긴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신의 섭리인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반복한다. 이렇게 해보고 안 되면 저렇게도 해보고...
그래서 다음에는 같은 실수가 안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삶이고 붓글씨인가 보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란 옛말과 같이 젊었을 때 수많은 실패가 커서는 인생의 밑거름이 되듯, 붓글씨 역시 배울 때의 실수가 쌓여 어느 정도의 실력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곁눈질로 보이는 옆선배의 정갈하게 써 내려 가는 글씨가 부럽다. 그런데 그 선배 역시 만족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된다고 푸념이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옛말과 같이 해도 해도 끝이 없음이 인생이고 붓글씨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나도 저 정도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나도 저 정도로 살았으면’ 하는 누군가도 있을까?




다래 순
                                                    이운우
냉이로 시작한 봄나물이 두릅 순, 달래, 다래 순, 취나물, 쑥, 고사리, 돌미나리, 옻 순 등 봄나물의 잔치가 한창이다.
영양가 넘치는 봄 햇살을 받아 통통하게 살찐 새싹이 반짝인다.
푸르른 꿈을 간직하고 막 피어오르는 새싹을 한 잎 한 잎 딴다.
차마 애처로워 한 가지에 있는 싹을 다 따지는 못하고 몇 개씩 남겨놓는다.

요즘은 봄나물 뜯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제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봄나물을 뜯으러 괴산으로 갔다. 오늘 목적은 다래 순 과 취나물, 고사리 등 이다. 산에 오르기는 벌써 여름이다. 땀을 흘리며 취나물이 있을 만한 양지바른 숲속을 살펴봐도 아직은 너무 작다. 몇 잎 따고 계곡 쪽으로 내려오니 다래 순이 반짝이며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한 나무씩 맡아 싹을 따기 시작했다. 따면서도 새싹의 꿈을 몽땅 빼앗아 나무에게 너무 안쓰럽고 미안했다. 잎을 몽땅 따면 나무 자체가 죽을 것 같아 끝에 몇 잎씩은 남겨 두긴 했지만 왠지 미덥잖다. 다가 올 푸르른 한여름의 전성기를 기다리며, 모진 추위와 눈보라를 묵묵히 견디며 기다려 왔을 텐데. 미처 꿈을 활짝 펴보지도 못하고, 얼굴을 내밀려는 찰나에 싹을 잘라내니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겨우내 간직한 내 꿈을 내 놓으라 항의하는 듯 가지가 휘청 인다.
미안한 마음에 휘청 이는 가지가 부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순을 딴다. 조심하여 따기는 하지만 가지는 개나리 가지처럼 길기만 하지 연약하여 잘 부러지는 것이 더 불쌍한 생각이 들게 한다.

다래나무는 오랫동안 간직하고 키워온 자신의 전부와 마찬가지인 새싹을 우리 봄 입맛을 위해 선뜻 자신을 희생한다.
싹을 잃은 다래나무는 햇볕을 받을 잎이 없어졌으니 생존에 필요한 영양을 만들 수 도 없고, 뜨거운 여름날의 햇살을 가려줄 잎이 없으니 그대로 말라 죽는 건 아닌지.
하찮은 봄날의 입맛을 돋우려 다래나무를 죽이는듯하여 마음이 심란하다. 내가 안 먹으면 다래나무는 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지 주변에 죽은 다래나무가 많다. 수명을 다해서 죽었는지, 내 생각처럼 해마다 잎을 사람들이 다 따가니 영양을 만들 수 없어서 죽었는지, 아님 며칠 더 있으면 이파리를 피우며 살아날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누군가를 위하여 다래 순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꿈 조각이라도 나눠준 적이 있는가? 겨우 년 말에 불우이웃돕기나 어쩌다 몇 번 봉사 활동이 전부이다. 어떤 이들은 봉사 활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던데, 실천을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잘못돼서 그런가, 아님 용기가 부족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 존경스럽고 부럽기까지 하면서도 실천은 못하고 있는 것은 왜 일까, 나도 모르겠다.

다래 순을 바라보며 다래 순 보다도 못한 나를 바라본다.






과거로의 여행
이운우
눈 깜박할 사이는 얼마의 시간일까.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를 말하는 찰나는 얼마나 빠른 걸까. 과학 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지만,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들은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가지고 다니는 손바닥 보다 작은 컴퓨터의 놀라운 기능이 무궁무진하지만, 나는 전화기능과 문자, 단어검색 등 겨우 몇 가지만 활용할 수 있는 정도다. 요즘 나오는 자동차는 직접 운전하지 않아도 된다. 자동차에 명령만 입력하면 저 스스로 운전하여 목적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발달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 나주 딸에게 가기 위하여 오송역에서 케이티엑스를 탔다. 잠깐 졸았는가 싶었는데 나주 내릴 준비를 하라고 방송 안내가 나와 깜짝 놀라 부랴부랴 내릴 준비를 했다. 차를 타면서 이것저것 생각도 정리하고 눈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도착했단다.
오송에서 나주까지의 거리가 얼마인가. 약 220km로 자동차로 2시간 40여 분 소요된다. 버스로 간다면 중간 쉬는 시간까지 3시간은 걸릴 듯한데 1시간15분 만에 도착하니 거의 날아온 느낌이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다 보면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공상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1초에 30만 키로를 가는 빛의 속도를 능가 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과거의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 갈 수도 있는 것일까. 거슬러 갈 수 있다면 어디쯤으로 되돌아 가볼까, 초등학교 시절로?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갈까.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할까, 그때 선택했던 방향을 조금만 바꿔 선택 했다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내가 될 수 있겠다. 어머님이 하라는 대로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여, 중학교를 다른 곳으로 선택했다면 고등학교, 대학교 등 내 가 지나온 과정 모든 것이 달라졌겠지. 그러면 만났던 선생님도 다르겠고, 동창, 친구, 환경도 다르고, 선택한 직업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쯤엔 전혀 다른 내가 되어있을 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 처음으로 여자애와 짝꿍이 되었다. 언뜻 보니 예쁘다. 긴장하며 의자에 앉다가 그 애 팔을 건드렸다. 그 애 연필이 굴러 내 쪽으로 떨어졌다. 연필을 얼른 주워 주지 못하고 못 본척하였다. 그 애가 너무 예쁘기도 하고, 미안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삐졌는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뒤에도 그 애와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시절로 돌아 갈 수 있다면 연필을 얼른 주워 주며 ‘미안해’ 라며 말을 걸었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에게 먼저 말거는 것이 쑥스럽다.
얼마 전 동문체육대회가 있어 그 동네 사는 선배랑 애기를 하다 그 애 소식을 물어 보니 오빠란다. 그 애는 이미 먼 곳으로 갔다고, 오래 전에 갔다고...

기술의 발달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오불변즉기세아(吾不變則棄世我),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버린다는 지인이 써준 족자를 가훈처럼 걸어두고 다짐을 하지만, 타고난 오랜 습성은 고쳐지지 않고 다람쥐 체 바퀴 돌 듯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산다. 미처 고치지지 못하지만 마음만 으로라도 고치며 살고 싶다.




나명희 이력 (사진은 첨부)


1957년 전남 나주 출생

1976년 전남여자고등학교 졸

1980년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졸

1980-1981년 전남 장흥 유치중학교 영어교사

1982년 전남 화순 도곡중학교 영어교사

2006-현재 클린폼 대표

2016년-현재 방송통신대 국문과 재학중
 






더 큰 파도
                                                                                                                                    나 명 희
 "까똑" 단톡방이 뜬다.

 '정욱이가좀많이아파요저번주부터안좋아서동네종합병원에서CT찍어보니대학병원가라고해서급하게서울대병원갔어요MRI와정욱이상태보고판독의사선생님이말씀하시길...수술해도일상생활하기힘들다고 ㅠㅠ 그렇게말을하였어요지금정욱이상태가발음도어눌하고어지러워중심도못잡고손발에감각이없어요의사들은최악의상태로말을하는건알지만무서워죽겠어요.'

  청천벽력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엊그제까지 씩씩하던 지인의 중학생 아들이 아프단다. 그것도 위험할 정도로!
정욱이 초등학교 때, 모임에 데려오면 통통하고 귀여운 게 고기를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그 모습보고 침을 꿀꺽 하곤 했었다. 중학생 되서는 크는 모습을 가끔 사진으로 보내주는데 점점 살이 빠지며 키가 커졌다. 중3인 최근 사진엔 이 애가 정욱인가? 할 정도로 훤칠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키는 이미 엄마아빠를 추월해서 딸 있으면 사위삼고 싶을 정도였다.
 '어쩌니?'
 '옴마나 뭔일이래?'
 '갑자기이게뭔말?'
다들 놀란 문자가 한마디씩 올라온다. 시간이 조금 흐르니
 '기도할께.'
 '엄마가 정신 바짝 차려야 돼!'
 '나도 기도할께.'
제3자라 그런지 쉽게 받아들인다.

  정욱엄마는 얼마나 놀랍고 무서울까?
덜덜 떨면서 아무 실감이 안 나겠지? 꿈인가 하겠지? 발이 땅에 닿지도 않을 거야. 옆에 가서 꼬옥 안아주고 싶다.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는가? 그래도
  '현대의학의 힘을 믿어 보자. 정욱엄마 힘내!'
라고 문자를 보냈다.

  똑똑하고 야무지게 집안 일, 직장 일 잘하고 아들 둘 먹이느라 맛있는 것 푸짐하게 만들어 사진으로 찍어 보내 자주 내 식욕을 돋워 주었는데... 한 달 전 우리 집 모임 와서 젊음을 발산하며 잘 먹고 깔깔 웃고 뒤처리 도맡아 하였는데... 마당에 흐드러진 나무열매가 보리수인 줄 처음 알고 예쁘다, 맛있다를 연발했었는데... 보리수가 천식에 좋다하니
  "그래요? 우리 정욱이 천식 있는데 효소 만들어 먹여야지."
어찌나 열심히 따든지 기특해서 다들 도와주었는데... 우리보다 좀 더 젊다고 재롱떨며 우리를 웃겨 줘서 오랜만에 신나게 웃었었는데...

  인간은 간사하다는 말이 정말인 것 같다. 정욱엄마의 갑작스런 불행을 보며 내 아이들이 자라면서 병치레 안하고 잘 커준 게 새삼 고맙다. 그래도 왠지 마음이 불안하여 결혼한 딸에게 전화해 본다.
 "퇴근했니?"
 "엄마, 아직 사무실이요. 일 조금 더해야 해요."
 "배고프겠다. 얼른 하고 들어가."
 "엄마,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낼 휴가 조심히 잘 다녀와."
 "네, 엄마아빠도 저녁 맛있게 드세요."
사무실 옆 직원 들을까봐 소곤소곤 말하는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돈다. 우리 딸은 아무 일 없구나! 나는 괜찮구나! 정욱엄만 어쩌나!

 '인생을 살다보면 파도가 온단다.'
예전 친정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파도가 하나 왔다 가면 다 끝난 줄 알고 안도하지만, 더 큰 파도가 뒤에 따라오는 걸 몰라서다. 그러니 항상 겸손하게, 감사하며 살아야해.'
그렇다고 날마다 걱정과 두려움에 떨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올 파도는 와라! 파도가 오면 넘어가면 된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큰 파도가 와버리면?
누워있는 아들 옆에서, 소리 죽여 흐느껴 울고 있을 정욱엄마! 이번 청주 홍수에 침수돼 버린 집을 바라보는 집주인처럼, 아끼던 책들이 물에 잠긴 모습에 망연자실한 표정의 내 수필 교수님처럼, 넘을 수 없는 큰 파도에 내 가슴도 먹먹해진다. 할 수만 있다면 구조대원이 되어 파도에 휩쓸리는 정욱이랑 정욱엄마 모두 구조해 내고 싶다.


이웃사촌


 초롱이 이삿날!

요즘 비가 잦아 걱정했는데 날씨가 화창하다. 이삿짐 아저씨들도 8시 못되어서 도착하셨다. 어제 초롱이와 사위가 퇴근길에 사온 빵과 커피 한 잔으로 기분 좋게 짐 싸기 시작하였다. 엄마가 잊어먹고 시키지 않아도 그런 걸 준비하는 아이들의 마음 씀이 예쁘고 대견하다. 강남역 대로변 오피스텔 겸 아파트에서 이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다리차도 못 쓰고 엘리베이터로 짐을 내려서 1층 현관을 뱅뱅 돌아 나와, 대로변 사람들 무지 많이 지나다니는 인도를 건너 차도에 주차된 트럭에 실어야한다. 이삿짐 네 분이서 서로 분업화되어 일사분란하게 잘 하신다. 내가 이사를 30번 쯤 한 사람이라 했더니 본인들은 천 번은 더 했을 거란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으려 했었다. 어려운 짐 내리기를 12시까지 끝내고 새집으로 출발!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사 갈 금호동 아파트 딱 그 라인의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다. 짐은 사다리차로 올리니 괜찮지만 사람이 7층 까지 걸어올라 가려니 더운 날씨에 숨이 턱에 찼다. 식당도 주변에 없어 갈비탕을 시켰는데 음식점철가방도 사다리차로 올렸다. 짐 싣느라 고생한 아저씨들을 걸어 올라오게까지 하여 미안해서 내게 있는 갈비를 나누어 드렸다. 막걸리도 한 잔 씩 드리니 기운이 나시는지 다시 신나게 이삿짐을 올렸다. 마지막 액자 걸고 커튼까지 달고 끝내니 5시. 사위가 더운데 고생 많이 하셨다고 계약 금액보다 더 얹어 드리니 옆에서 보는 나도 기분이 좋았다. 다음 번 이사할 때 또 맡아주시라 미리 예약하며 이삿짐센터를 이웃으로 만들었다.

뒷정리 좀 도와주다 연수기 기사가 와서 설치하느라 수도를 끊으니 더 해 줄 수가 없어 나도 간다했다.

“내 남편 기다리니 초롱아, 네 남편과 마무리 잘해라”

열심히 운전해 오니 남편이 반겨줘서 노고가 보람 있었지만 몸살감기가 와버렸다. 3일 정도 일상적인 일만 하고 조심했다. 좀 나아지니 짐만 올려놓고 정리도 못한 초롱이 집이 어른거려 편치 않았다. 이사하느라 먹을 것도 소진시켜, 언제 정리하고 언제 먹을 것 준비하나하는 걱정에 내 몸이 나선다. 열무 사다 김치 담고, 멸치 꽈리고추 볶음 만들고, 등갈비 찜도 만들고, 마지막으로 우리 이웃 복숭아 과수원 가서 복숭아도 4상자 샀다. 복숭아는 크고 좋은데 약간 흠집 있어서 정품 안 된 것을 한 상자 만원에 살 수 있다. 과수원을 이웃집에 두지 않은 사람은 절대 살 수 없는 가격이다. 이게 바로 복숭아 과수원이 있는 음성 생극에 사는 이점이다. 이웃끼리 잘 지내니 조금만 사러가도 철복숭아를 한 아름 더 주신다. 우리 부부 둘 다 복숭아를 엄청 좋아하니까 배가 터질듯이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한 계절이다. 초롱이 엘리베이터를 같이 쓰는 이웃이 세 집이라 선물 드리며 인사하라는 뜻으로 구입했다.

딸집에 평일 날 가니 모두 출근하고 아무도 없어 우렁각시 놀음 시작!

저희들이 정리 한다더니 이삿짐 아저씨들이 해 준데서 거의 그대로 있다. 그럼 그렇지 하며 30번 이사한 내공을 발휘하여 일사천리로 정리하였다. 퇴근해서 먹으라고 밥하고 미역국까지 끓여 놓고 나도 퇴근. 또 열심히 운전해 내려오니 9시. 그제야 퇴근해서 엄마가 해준 밥 먹는다며 행복한 목소리로 전화한다. 이 후는 카톡으로 소통.

‘엄마, 이웃 세집 중 한 집만 감사히 받고 그림 주셨어요. 그림 그리시는 분인가 봐요. 나머지 두 집은 좀 있다 다시 가 볼께요.’

 ‘그렇지, 내가 바라는 바다. 처음 이사해서 떡을 돌리며 인사하면 어느 정도 안면이 트고, 다음에 보면 구면이 되니 반갑게 되어 정이 싹트는 것! 이사 내공 30번 엄마의 노하우를 잘 활용해!’

지난 번 강남역 오피스텔은 그야말로 각자 사는 것 같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사니 엘리베이터서 만나도 인사 안 하고 서로 그냥 모른 척 있어서 너무 어색했다. 이번에야말로 이웃의 정을 듬뿍 느끼며 살아라하는 심정이었다.

‘엄마, 가운데 집은 불이 켜있는데 사람이 없는 듯 아무 인기척을 안내요. 옆집에서 왔다해도요. 또 한 군데는 문은 열었는데 복숭아는 거절한대요.’

옴마니나? 그 맛있는 복숭아를 거절해? 없는 듯이 문을 안 열어?

30번 내공이 경험하지 못한, 이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엄마, 요즘은 아랫집이 중요하니 아랫집에 가 볼께요.’

 ‘아랫집도 불은 켜 있는데 아무 대답이 없어요. 그 집도 문 열어주고 싶지 않은 듯해요. 엄마 나 이 동네 무서워!’


요즘 세상이 예상치 못한 끔찍한 일이 많으니 이렇게 변화 되었나 보다. 나도 변화를 못 쫓아가는 노털이 된 건가? 머리가 혼란스럽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속담이 무색해진건가? 어쩌다가 사람 사이가 이렇게 되었지? 우리 아이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더 행복하기를 바라고 열심히 키웠는데, 이건 무슨 세상인가?

‘네 집 중 한 집이라도 서로 인사 교환한 것으로 만족하고 남은 복숭아는 경비랑 청소아주머니 나누어 드려라.’

마음속에 찬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어떻게 하면 예전같이 이웃 간 정을 나누고 살 수 있을까? 복숭아는 안 받겠다는 집은 이웃 간에 얽히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문도 안 열어주는 집은 모르는 사람이 무서워서 아예 만남 자체를 피한 것일까? 이삿날 떡부터 돌리고 이웃을 사귀던 예전의 풍습이 좋은가? 아니면 요즘처럼 개인으로 교류없이 사는 게 좋은가?

인정이 흐르는 이웃이 있는 게 홀로 외롭게 사는 것보다 비할 데 없이 더 좋은 게 아닌가? 그러다가 상처를 주고받으면 그것도 기쁘게 받는 게 살아가는 인생 아닌가? 어떻게 하면 이웃 간에 서로 교류하고 싶은 마음들이 생길지 커다란 숙제를 안은 기분이다.       



이제 나도 사업 할래!
 
                                                             나 명 희
    초롱이 대학 합격
 
  “김초롱 학생 댁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김초롱 학생이 연대 사회계열에 추가합격 하였습니다.”
  “네? 그래요? 감사합니다. 합격증을 받으러 가야하나요?”
  “그러실 필요 없는데 굳이 오시겠다면 연대 입학지원센터로 오십시오.”
  “아니? 그렇게 중요한 연락을 전화 한 통화로 된다고요? 제가 지금 당장 가겠으니 합격증 주십시오.”
  나는 너무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휴대폰과 지갑만 챙겨들고 집을 뛰쳐나왔다. 가는 길에 전철 기다리며 남편께 전화하니 남편도 감격하여 목이 메어 한다. 며칠 전에 초롱이가 연대 떨어지고 어떻게나 울던지 위로가 안 되었다. 다행히 성대 합격 통지가 왔지만 초롱이의 상심한 마음이 치유되지가 않아서 집안 식구가 모두 침통해 있던 참이었다.
  3살 위 오빠 지용이는 공부에 별로 흥미가 없어 특례로 숭실대 컴퓨터학과 입학하여 모두가 아주 고마워했고 만족하였다. 초롱이는 공부도 곧잘 하고 본인도 욕심이 있어 연대 합격을 무지 바라고 기대 했었다. 실패의 쓰라림을 잠시 맛보고 추가로 합격하였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연대 정문 쪽으로 가니 연대생들이 엄청 많이 들며 날며 하고 있었다.
  ‘이 놈들아! 우리 초롱이가 곧 여기 나타난다. 기다려라!’
웃음이 절로 나며 기어이 합격증을 출력해 왔다.
 
  저녁에 온 식구가 모여 다시 합격의 기쁨을 누릴 때 남편이 평소처럼 활짝 웃으며,
  “이제 나도 사업 할래!”
  “드디어 때가 온 거야?”
  “아버지 하시고 싶은 데로 하세요.”
  “아빠, 응원할께요.”
  아이 둘 있는데 둘째가 대학에, 그것도 단번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니, 모두가 마음이 붕 떠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깊이 따져보지도 않고 쉽고 즐겁게 결정이 내려졌다.
 


 
  십여 년 전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교 다닐 때, 어느 한가한 주말 남편이 백지에 화학식을 적는다. 인문학도인 나는 고교 때 화학에 취미가 있어서 그나마 무슨 내용인지 겨우 알아 볼 정도다.  남편은 서울공대와 KAIST, 결혼 후 다시 서울대 박사과정을 마쳤으니 100% 이공계 전문가다. 한가하면 가끔 이렇게 나에게 설명하곤 해서인지 남편이 언젠가는 이 일을 할 줄 알았다. 그 꿈을 계속 지니고, 아이들 클 때까지 다니던 회사를 23년 째 이어오다 드디어 그만두고 자기 꿈을 펼치겠다는 거다. 회사에서도 상무까지 되었으니 그 꿈을 회사 안에서 펼쳐보려 했으나 위로 층층시하 설득하기가 힘들었단다. 남편이 만들고 싶어 하는 아미노산은 미국, 일본, 중국에서는 생산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품목이라 국내시장 형성도 잘 안되어 있단다. 정 그렇게 하겠다면 나도 같이 하자고 나섰다.
 
  사업 시작
 
  2003년 11월 27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내 이름으로 주식 납입금 5000만 원 입금하고 (주)엠에이치투 바이오케미칼을 출범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저런 생각으로 뒤로 물러설까봐 일단 시작부터 해버렸다. 2004년 2월 남편이 회사 퇴직하고 남편이름으로 이전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사급에서 자진 사표 내는 일이 거의 없는데 남편이 자진 퇴사하니 경쟁회사에 가지 않나 하는 의혹도 받았단다. 자신의 꿈을 이루느라 23년 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낼 만큼 간절하게 원하는 일이니 잘한 결정이야 하면서 뒤로 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먼저 공장 지을 땅 찾느라 인터넷 서핑하여 경기도 안성과 충북 음성을 검색하였다. 안성은 경기도라 그런지 공장 짓기가 음성보다 까다로웠다. 음성 땅 몇 군데를 보다가 지금의 공장 터에 오니 너무 마음에 들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전에도 가끔 내가 중고차를 사거나 집을 살 때 뭔가 느낌이 오면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이번에도 그랬다. 남편이
  “어때? 느낌이 와?”
하더니 본인도 맘에 들어 하며 흥정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부동산 말은
  “길로 된 땅은 값을 제외하고 본 터 값만 계산하시면 됩니다.”
그 말만 믿고 2000만 원 주고 생극면 병암리 430-15번지를 기분 좋게 계약했다.
 


 
  다음 수순은 정식으로 사업설명회 한 후 주주를 모집하는 일이다. 주주는 일단 가족은 제외하고 내 동창, 남편 동창들과 지인 몇 분에게 사업설명회 한다고 초대장을 돌렸다. 가족을 제외한 이유는 혹시라도 잘못 되었을 때 모두가 같이 힘들어 질까봐 그랬다. 그래도 언니는 부담 없이 투자한다고 그동안 집안에 모인 금붙이를 주면서 팔아 쓰라 해서 종로 금은방들 순례하는 경험도 했다. 서울대 작은 강당 빌려 30명 쯤 모여 설명회 하고나니 지인들이 뭔가 이루어 질 것 같아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를 직접 아는 친구뿐만 아니라, 그 친구 소개로 온 사람들 까지도 우리 부부 믿고 투자 한단다. 우리를 믿어주니 그동안 잘 살아온 것 같아 뿌듯하였다. 서로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로 한 가구 당 2500만 원 씩만 투자해 달라 했다. 가까운 몇몇 친구들은 그 정도면 친구 사이에 없어져도 되는 금액이니 부담 없이 투자한단다. 한 친구는 우리 부부가 한다면 무슨 일에든지 투자하겠다며 4구좌를 해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몇 배로 키워주고 싶은 욕심이 물씬 생겼다. 5억을 목표로 했는데 모집 마감해 보니 4억 7천 500만 원이 들어 왔다. 우리가 마저 2500만 원 더 넣어 5억 채워서 자본금으로 등록했다.
  당시 한 지인이
 “그런데 MH2 BIO에서 MH2가 무슨 원소 기호 인가요?”
 “아 네, 우리 부부 이니셜이 같이 MH라 그렇게 지었습니다.”
 “아하, 멋지네요.”
하며 칭찬받기도 했다.
 
  땅 잔금 치르러 가면서
  “우리 참 무모하다. 투자 안 들어오면 어쩔 뻔 했어?”
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막상 잔금 치르려니까 땅 주인이 마음을 바꿔 길 값도 달라한다. 그때서야 ‘아뿔싸! 계약서에 길에 대한 내용을 썼어야 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땅 주인이 법대 교수님이라 말로만 해도 잘 해 주시리라 믿었는데...길 값을 안쳐주면 안 팔겠다고 곧 나갈 듯하고, 부동산사장님은 쩔쩔 매고만 있고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남편이
  “여기 저수지에 고기가 잘 잡힙니까?” 
  “아 예, 많이 잡힙니다.”
대답하며 땅 주인과 낚시 이야기로 분위기가 좋아져서 남편이 길 값 계산해 주고 잔금을 치렀다. 길 값이 너무 아까워 속이 상해 돌아오면서
  “아까 왜 낚시 이야기 했어?”
 


  “응, 작은 일에 욕심 부리다 큰일을 그르칠 까봐 마음을 비웠어.”
그 말 듣는 순간 남편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보이고 안심이 되면서 나도 편안해졌다. 그 길이 훗날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복으로 돌아올 줄 그때는 몰랐다. 욕심 많은 땅 주인은 나중에 문중 땅을 혼자 먹으려다 소송까지 당했다.
 
  공장 지을 준비
 
  서울대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해서 다방면으로 일할 직원도 한 명 채용 하였다. 식당에서 식권으로 점심을 먹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남편은 공장 설계하면서 6개월간 새로운 일에 날마다 즐거워했다. 자본금은 목표달성 했으니 다음 수순은 공장 지을 자금을 만들어야 했다. 지인이 신용보증기금을 소개해주어 거기서 우리 아이템이 좋다고 10억을 외환은행으로 파킹해 주었다. 10억 받는 날 외환은행 잠실역 지점 가보니 지점장님이 남편 중학 동창이었다. 몰랐다가 우연히 만나니 서로 무척 반가와 하며 점심을 같이 하였다. 이런저런 사업 얘기하다가 지점장님이 우리 부부가 같이 하니 마음이 놓인단다. 돈이 들어가면 사람이 꼬여 자칫 실수할 수가 있는데 아내가 지키고 있으니 안심이라고, 잘 할 것 같단다. 그 말씀에 힘이 불끈 났다. 다른 어떤 격려보다 현실적인 지적이라 어떻게든 남편 도와서 성공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불탔다.
 
  은행 담당 직원 앞에서 공장부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옥수 현대아파트까지 담보 잡히는 싸인을 남편과 연대 보증인으로 나도 같이 하고, 신용보증기금 가서도 둘이 같이 싸인하면서, 이 싸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따지지도 않고 무언가 새로운 걸 하는 기분에 즐겁기만 했다
  일이 진행되면서 생산할 직원 한 명을 추천 받아서 남편이 심사숙고하여 채용하였다. 처음엔 일이 많지 않고 서로 잘 몰라 서먹하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헌신적인 노력을 해주셔서 신뢰감이 쌓여갔다. 남편 아는 교수님 추천으로 연구직 초임직원도 채용해서 회사 기틀이 잡혀갔다.
 
  토목공사
 
  금왕에 있는 건축사사무소와 측량설계공사, 음성군청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공장 인허가 서류 만들기 바쁘던 중 첫 번째 암초를 만났다. 우리 공장 들어가는 입구에 농로가 50m쯤 있는데 양 쪽으로 논 주인이 10명이다. 그 사람들에게 길 사용승낙을 받아야 한단다. 별 고민 없이 사용승낙서 들고 가까운 집부터 찾아 갔더니 일거에 거절이다. 우리보다 위에 있는 공장에서 큰 차들이 지나다니며 쓰레기도 버리고, 큰 기계소리도 내고해서 주변 축산농가의 젖소가 낙태하기도 했단다. 몇 군데를 더 가 봐도 마찬가지다. ‘어쩌지?’ 고민하다가 혼자 계시는 할머니부터 작은 선물 들고 몇 번을 찾아갔다. 처음엔 선물 받는 것도 어색해 하셨는데 두 번째 가니 좀 웃으셨다. 세 번째 찾아 가니 우리 아들 땅인데 하시면서 활짝 웃고 찍어 주셨다. 다음에 공장 지으면 풀 뽑기라도 시켜 달라하셔서 그러마고 했는데 우리가 공장 짓는 동안 몸이 안 좋아지셔서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한 집 도장 받은 걸 들고 다른 집도 3번 정도씩 찾아가서 사정하니 한 분 씩 도장을 찍어주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동네 분들의 사정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이장님께서는 공장하기도 힘들 거라고 격려까지 해 주시며 도장 받는데 도와주셨다. 도장 80%만 받으면 허가해 준다 했는데 돌다보니 100% 다 받았다. 시골 분들이 꼬장꼬장 한 것 같지만 직접 찾아뵙고 인간적으로 대면하니 아주 순박하신 걸 느꼈다. 도장 받는 과정이 좋은 이웃이 되는 과정이었다. 처음엔 이런 불편한 경우가 다 있나? 했는데 다 받고 나니 어차피 이웃 분들인데 미리 알게 해주는 좋은 제도였다. 농업기반공사 음성지사에 도장 받은 서류 가지고 갔더니 이렇게 다 받으셨느냐고 놀라면서 허가해 주셨다.
 


 
  드디어 부지 2500평 토목공사 시작!
땅주인이 있던 묘지 파내서 이장하던 날이었다. 파묘한 후 유골을 천으로 깨끗이 감싸놓고 모두 옆 이장할 데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남편이 땅에 꿇어 절하며 좋은 데로 떠나시라고 빌어드렸다. 엉겁결에 나도 같이 하면서 남편의 성공하고 싶은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느꼈다.
  우리 땅이 산의 끝자락이라 포크레인이 흙 파내서 낮은 아래쪽을 돋우고, 남은 흙은 이웃 논을 메우는데 사용하여 어렵지 않게 토목공사가 진행되었다. 남의 일 일 때는 포크레인이 일하나 보다하며 별 느낌이 없었는데 우리 일이라 그런지 포크레인이 참 크고 씩씩하고 멋져보였다. 흙을 파서 트럭에 싣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만 봐도 뿌듯했다.
  땅 둘레 언덕 부분에 잔디 입히고 바위틈에 영산홍 심던 날, 엄청 많은 인부들이 와서 무슨 축제 같았다. 우리가 일을 벌이니 이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이 생겨 왠지 애국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박근열

충북음성군맹동출생
방송통신대학교농학과졸업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4학년생
덕성유치원 돌봄 시간강사
자존감 코칭1급 강사
푸른솔 문학회 회원
 










 자아 달려가 보자!
                                       박 근 열


서리가 내렸네!
나무에도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충북도로관리사업소 지붕위에도 빌리지 타운에도 하얗게 내렸다.
바닥에는 어느새 녹아 물기만이 보이고 저 멀리 주중사거리의 증평길 위에도 녹아 내려 길이 짙어 보인다. 자동차들은 이리가고 저리가고 온기가 있어 녹았는지 그 도로도 짙게 보인다. 비가 내린 찻길처럼 짙다. 그런데  내 집 창문가의 나뭇가지 위에는 아직도 하얗다 아마도 주변이 그늘진 때문인지 한산해서인지 아직도 만지기만하면 사각사각 부서져 내릴 것만 같다. 하나 둘 순서대로 차들이 지나간다. 위로 아래로 오른쪽, 왼쪽,  턴 ......,
자주 두루는 곳에는 도로 위의 길처럼 온기가 느껴지는데 같은 바람 아닌 바람이 부는 이곳에는 서리가 하얗다. 아마도 지나다님이 드문 때문일까 싶다. 아니 아파트 그늘 때문일까?
엊그제 계단의 등불만을 믿고 걸어가던 내가 전등이 나간 것을 모르고 내디디다 넘어져 골반의 근육이 뭉치듯 나무의 서리도 나무에 달라붙어 하얗다. 물결은 결정을 이루어 자연의 섭리로 아름답지만 내 엉덩이 위의 골반은 근육이 수축되어 두 주째 뻐걱거린다. 움직일 때마다 뻐걱뻐걱 삐걱삐걱 뒤틀린 문지방 문처럼 삐걱 거린다. 시계바늘 추나 돌덩이처럼 매달린 근육이 달라붙어 고무줄 당김처럼 움츠려 댄다. 정해진 순리대로 천천히 난간을 잡고 갔더라면 좋으련만 주중사거리의 차들은 교통신호대로 우로 좌로 정해진 순서대로 잘도 가는데 나만 유독 더 아픔을 느낀다. 병신년의 붉은 원숭이처럼 나무나 나나 잘 견디어내야 한다. 내년의 한창 푸르른 여름을 위해 견디어 내듯 나도 골반위의 근육을 이완수축 시켜 병신년 아닌 병신 같은 삐걱거림을 견디어 내고 붉은 원숭이가 되듯 이 서리고 아린 겨울을 견디어 내어 단 두 달의 여름이라도 맛보기 위해 움츠림을 펼치어 내어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잠시 춥고 힘들다고 골반의 근육 탓만을 말하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여 저 바깥세상으로 나가야한다.
병신 같을 것 같은 붉은 원숭이가 미래를 내다보며 견디듯 나도 묵묵히 견디어 병신 같을 것만 같은 나의 고통을 견디어 내어 세월 감을 받아드리자 늙어 감을 희망 삶아 쪽빛하늘과 더불어 서리발로 하얗게 희어버린 나뭇가지가 푸른 나무의 꿈을 꾸듯 늙어 감을 희망 삶아! 나의 앞날에 푸르고 푸른 쪽빛 백발의 광선을 쏘아 올리자.
붉은 잔나비아!  가자. 새해 맞으러 같이 가자!
붉은 태양을 먹은 것 같은 부푼 꿈을 가슴에 안고 함께 가자!
뚜벅 뚜벅 쩔룩쩔룩 뒤뚱뒤뚱 뒤뚱 걸음이라도 잰 걸음으로
동트는 붉은 해를 맞으러 검은색의 세발달린 삼족오 지팡이 짚고 달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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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편
                                         박근열


늘 멀었다.
옆에 있어도 남
언제나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시·공간은 무척 외롭고 힘겹다. 마음은 같은 시간대에 같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더 좋다고 믿었다. 같은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쓸쓸했다. 언제나 나만을 위로하고 나만을 생각한다고 생각했다. 욕심은 과욕이라 다심이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일심동체라고 착각 아닌 착각을 했다.
일심동체도 하루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쉰 살이 훌쩍 넘었다.
믿음과 의무와 정으로 한 평생을 살아냄을 아는 것은 그렇게 더디고 어렵다. 그것이 남편이고 울타리라고 하더라도 매 마찬가지다. 그런 존재가 남편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사랑으로 산다고 대단한 착각과 동시에 망각을 해버린 것이다 사랑은 온유가 아닐까싶다. 그런 존재가 남편이라고 여겨질 때는 더욱 더 더디다. 남편은 이런 존재일까? 한 번 더 짚어 보게 된다.
가까이 할수록 도방가고 챙길수록 거부하고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허전하고 쓸쓸한 것, 시간이 되면  사라졌다 나타나는 타임캡슐처럼  타임캡슐 같은 자가용을 타고오가는 영 같은 존재이다.  또 다른 나의 남편은 가끔씩 폰이나 문자에 적절한 댓글을 달아주고 가끔씩 따뜻하게 위로 해주는 것, 늘 가까움을 공유하는 것 같은 것 그것이 내 마음의 남편이라면......,
남편은 늘 손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 늘 손닿는 곳에 있을 것 같은 존재인데 그렇지 못하다. 내 마음속 남편은 텔레파시 세계에서 나 가능한 내 마음의 이상이기 때문에 현실과는 너무 동 떨어진다. 춘추전국시대의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조선시대의 황희, 율곡이 온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10차원에서조차도 어려울 것 같다. 마음은 늘 공기의 흐름처럼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지형이달라 기류가 다르듯 마음도 흐름의 시·공간으로 흐름을 탄다.
 나는 다른 시· 공간인 마음의 공간에서  늘 손닿는 곳에 있다고 여겼다. 영원히 내편이 아닌 영원히 남편이라는 말을 지인들로부터 들으면서도 나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랬었어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그 순간부터는 자유다. 다름은 그렇게 서로를 인정한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마음속에서 조차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그만큼  오래오래 견디어야한다. 남편이 늘  손닿는 곳에 있으며 믿음과 의무와 정을 담고 온유하게 지구 보호막처럼 서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거나 좋으면 무지개처럼 영롱한 존재로 늘 손닿는 곳에 있어주길 하느님처럼 믿는 존재일까? 다시 생각해본다. 알렉산드로 푸쉬킨은 시에서 말한다.

마음은 미래에 있는 것......〈생략〉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라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그러고 보면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나이고 바람이 현재 생각중인 생각의 미래이고 보면 나로 부터의 생각과 너로부터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내 삶은 내가 설계하고 진행하고 기쁨과 성취를 내가 느끼는 것이니 만큼 주체는 내가 아닐까 싶다.







녹두전
                           박 근 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에서 땀이 흐른다.
“툭” 소리와 함께 식탁에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떨어진다. 꺼내보니 손 두부만한 정사각형 냉동식품이다. 온도차로 겉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기에 한 봉지 가져왔지.’ 남편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3살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겸면적어 했다. 칭찬의 기다림이다. ‘직원들이 맛나다고 하기에.’ 이 말은 나를 기쁨과 슬픔으로 오가게 했다. 평범하게 쉬운 말이다. 녹두전은 바로 부쳐 먹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치지직 칙칙’ 소리와 함께 스르륵 쓱, 스륵스륵 천천히 돌리기도하고 빨리 돌리기도 하시는 할머니의 맷돌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70년대 방앗간은 집에서 멀었다. 간단한 것은 맷돌을 사용했다. 맷돌은 두 개의 둥근 돌에 부채꼴 모양의 결을 내 포개서 둥근 돌의 아래 위를 구별해서 사용한다. 아래의 돌(숫맷돌)은 중심에 꽂지(숫쇠)가 꽂혀있어 위의 둥근 돌(암맷돌)을 포개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맷돌에 어처구니(손잡이)를 꽂아 잡고 돌리면 맷돌을 사용할 수 있다. 집에서 녹두를 맷돌에 타서 충분히 불린 후 맷돌의 투입구에 할머니는 녹두 한 수저 나는 쌀 한 수저를 간다. 김 진사 댁 다섯째 딸인 할머님은 그렇게 전통방식의 녹두전을 고수했다. 또한 어린 손녀인 나의 호기심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꺾지 않고 배려했다. 농번기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꾸지람에 거절할 법도 한데 몇 곱절이나 힘듦을 마다 않았다. 요리의 방법과 맷돌 돌리는 방법을 옛날이야기와 함께 어린 손녀에게 알려주었고 아녀자가 할 일임을 말했다. 요즘은 누구나 할 수도 있는 요리지만 요리는 아녀자가 지녀야 할 덕목중 하나로 곡간 열쇠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살짝 귀띔했다. 그쯤 되면 ‘할아버지는 녹두전은 언제 나오랴.’ 소리쳤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그 열아(아명) 어처구니가 뭔지 아냐?’ 갑자기 문는 질문에 몰라요. 뭔데요. 얘기 해주세요. 빨리요...하면서 보챘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말을 계속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답만을 했다. 이야기가 끝날까봐 걱정되어서 연결시키는 대답만을 했다. 경북궁, 지붕, 원숭이, 당태종이 겁쟁이라, 화(火)가 무서워...할아버지께서는 어처구니(어디에 다가 몸을 둘지 모르다)는 뜻, 어(於)처(處)구(軀)니(呢) 한자로 쓴다고 했다. 그렇듯 알게 모르게 조부모는 나에게 생활문화의 DNA를 남겼다. 오늘도 검은 비닐봉지 속 사각 녹두전 냉동식품이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재생시켰다.
집에서 녹두를 맷돌에 타서  마당에 멍석 펴고 앉아 할머니가 부쳐 주시던 녹두전 그것을 서로 먼저 먹기 위해 쭉 둘러 앉아 기름 튐을 마다않고 할머니의 안전주의보 소리에도 듣는 둥 마는 둥 상관없다는 듯이 앉아서 견디었다. 녹두전을 한 접시 뒤집게로 얼른 담아주시면 “후”부신다. 그때는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호박 약간, 중공산고추약간 등 넣어서 부쳤다.
“치지직” 생각만 해도 군침이 꿀꺽 넘어간다. 그런데 나의 편리성을 생각해서 남편이 안긴 이 냉동식품은 아뿔싸! 재료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완전히 다 녹지 않아서 녹는 대로 얼른 얼른 부친 탓일까? 맛난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마른 콩고기 물 묻혀 놓은 민민한 맛이다. 가공식품이라 설명서를 잘 읽고 침착하게 비율을 따져가면서 녹두가 100%로가 아니고 부재로가 섞였음을 감안하고 고마움을 첨가해서 했어야 했다는 것을 ......,얼마나 정신없이 부쳐댔는지 앞뒤가 노릇 노릇은커녕, 앞은 노릇노릇 뒤는 꺼먹꺼먹 영락없는 얼굴과 뒤통수이다. 녹두전용냉동식품은 100%로 녹두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다.
‘여보 이번에는 실패에요. 그냥 양념장이라도 찍어서 드세요. 그렇게 100%로가 아니라고 투덜대더니만 할 수 없지.’ 하는 말이 마음속으로 왔다간다. 다음번에는 ‘오징어와 김치,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고 양념을 더 해서 아주 맛있게 노릇노릇 구워 줄게요. 오늘은 그냥 파 송송, 마늘 고춧가루 양념장에 드세요.’ 정말 미안한 마음이 지나간다. ‘남들은 맛있다는데 당신만 100%로 타령이야.......투정 3살 아이의 말투다. ‘100%가 아니면 어때 생각해서 챙겨 줬는데......’하는 소리가 뒤통수를 툭툭...치는 듯하다.
 설거지를 하는 나의 등줄기는 땀으로 흘러내린다. 그사이 조용해지며 TV가 켜지고 커다란 볼륨소리가 마치 오늘은 이제 그만이라는 듯이 점점 작아지고 수돗물소리와 달그락 소리가 자자든다. 다음번에는 녹두를 거피해서 현대문물인 믹서 기를 사용해 구수하고 정성듬북담긴 녹두전을 만들어야겠다. 저 멀리서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부르시는 것 같다
‘그 열아, 열 그야... ’
소리가 클로즈업 된다.


한 옥 례
1952년 6월생, 아호는 소래
2011년 4월 계간 〈스토리문학〉으로 등단
2014년 중 ․ 고 졸업 검정고시 합격
2015년 한국방송통신대학 입학
한국방송통신대학 재학 중

진천 문예창작반 수료
제2회 직지전국시조백일장 수상
2010년 진천군민백일장 수상
한국스토리문인협회 회원
자작나무수필 동인











무료급식
                                                        소래 한옥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 나이에 공부해서 뭐 할 거야 하며 ‘편하게 살다 죽어라’, ‘취미도 별나다’농담 반 걱정 반으로 만류하지만 내가 좋아서 늦게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기말시험 때만 되면 암기과목이 너무 힘들어 이번
시험만 보고 그만 두어야지 한다.
  이런 감정은 마치 해산의 고통이 아이가 커가며 재롱을 부리면 봄눈 녹듯 녹아버리는 것처럼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가는 재미로 자연스럽게 다음 학기를 준비하게 된다.
  기말시험이 내일이다. 모처럼 의자에 엉덩이를 단단히 붙이고 시험공부를 하려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보내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입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오늘 6월 24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청주시 ‘사회적 기업협회’에서 나와 무료급식을 실시합니다. 장소는 205동 뒤편 농구장입니다.” 친절한 안내방송은 두 번 반복되었다.
  날씨는 덥고 몸은 비비꼬인다.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운동도 할 겸 가서 무료급식을 받고 싶었다. 봉사라면 나도 이런 저런 단체에서 참 열심히 했다. 이제는 나이 들고 몸도 불편해서 오히려 민폐가 될까 나서지 않으려한다. 무료급식은 봉사자로만 했지 수혜자 나선 것은 처음이라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기말시험이 내일인 오늘 같은 날엔 밥하는 시간도 아까워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되는 것을 안 먹을 일도 아닌 것 같아 용기를 냈다.
  10시 땡하고 줄서기는 쑥스러워 11시 반쯤 급식실에 도착했다. 식사는 반계탕이다. 수박과 떡 그리고 이렇게 더운 날에 부침개까지 정성을 다해 준비한 것이 분명하다. 아이 생일만 돌아와도 신경이 쓰이는데, 수백 명이나 되는 어르신의 무료급식을 준비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잘 준비한 잔치인데 문제는 배식방법이었다. 10시부터 오라고 했으면 오는 순서대로 주면 되겠지만, 노약자와 어르신이 많으니 더 잘 해주고 싶어 ‘편한 곳에 앉으세요.’하고 음식을 들어다 주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식사하려고 기다리는 어르신은 많은데 음식을 나르는 사람은 적었다. 한 시간도 넘게 종이컵에 빠진 닭다리 하나 건져 올리기 위하여 눈으로만 남들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언제 나에게도 저 음식이 올까.’바라만 보는 어르신이 애처로웠다. 순서도 뒤죽박죽이었다. 끝가지 기다리면 주기야 하겠지만, 앉아있을 의지도 없었다.
  전동차나 휠체어에 그대로 있거나, 끌고 다니는 유모차에 앉기도 하고 바닥이나 풀밭에 그대로 앉아서 줄 때가지 무작정 기다린다.
  나는 끝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착한 가게에 가서 3천 원 하는 국수나 먹을까, 아니면 나온 김에 청국장 집에 가서 4천 원짜리 밥을 먹을까’ 하다가 혼자 식당에 가는 것은 내 돈 주고 먹어도 눈치가 보여 싫었다. 그냥 돌아서 가려니 아쉬움이 남아 배식테이블로 가서 차려놓은 음식 중에 수박 한 접시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가지고 가면 절대 안돼요. 갖다 드릴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리세요.”한 소리 들었다. 그래도 나는 “언제 기다려요, 이거 한 접시만 가지고 갈게요.”접시를 밀고 당기는 바람에 수박조각이 식탁위에 떨어졌다. 떨어진 수박을 일회용 접시에 담는데, “이 할머니 왜 이렇게 극성스러워”한다. 그래도 나는 반계탕이 담긴 종이컵과 떨어진 수박조각을 담은 접시를 들고 다른 할머니들이 계신 벤치에 와서 그들고 같이 먹었다. 떡과 부침개도 가져다 먹었다. 그런데 먹는 것이 참 치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꼭 이렇게까지 이 음식을 먹어야하나, 그냥 가지 못한 내가 미웠다. 할머니들은 나 때문에 잘 먹었다며 고맙다고 하신다. 할머니들이 김치를 찾는데, 김치를 가지러 가면 눈총을 살까봐 갈 수가 없어 못 들은 척, 깍두기는 못 갖다드렸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마음대로 집어가면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하다. 그 자리에서만 드시는 것이 아니라 비닐봉지에 이것저것 음식을 싸가는 어르신이 가끔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경우는 다르다. 처음부터 배식방법이 잘못되어 봉사하는 손길이 더뎠다. 큰일을 치르고 나면 늘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잘 준비된 음식이 제 시간에 골고루 전해지지 못한 아쉬움에 더해서 급식 수혜자들이 대접받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서운한 감정으로 남는다. 생색내기나 보여주기 식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이런 무료급식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다.





 청  소

                                                        소래  한 옥 례

  나는 화가 나거나 마음이 아프면 폭식하는 습관이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잔다. 그러다가 하루쯤 지나서 슬슬 배가 고파지면 밥그릇이나 국 대접이 아니라 양푼이나 바가지에 밥을 푸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있는 대로 집어넣는다. 고추장은 듬뿍 뜨고, 평소에 아끼던 참기름도 한 숟가락 넣어서 맵게 비벼 먹는다. 매워서도 울고 슬퍼서도 울며 눈물 콧물이 범벅된다. 먹는다기보다는 범 본 놈 창구멍 틀어막듯 꾸역꾸역 목구멍을 틀어막는다. 이 세상의 모든 미운 생각이나 슬픔을, 먹어서 치워버려야 하는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처럼, 우아한 멋이나 맵다거나 짜다거나 하는 맛을 모르고 오직 먹는 일에만 집중한다. 그렇게 먹고 나서 배가 부르면 기분이 좋아지고 잠이 스르르 찾아온다. 잠을 자고 나면 화났던 기분이 슬며시 가라앉는다. 나에게는 자는 것, 먹는 것이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그러다가 먹는 습관도 시들해졌다. 산 넘으니 또 산이고,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을 그냥 이쯤에서 포기하면 안 될까?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누군가는 먹기 위해 산다고 하고, 누군가는 살기 위해 먹는다고 하는데, 안 먹고 안 살고 싶었다.
  “네가 이토록 살기 싫은 오늘이, 누군가는 그토록 간절히 살고 싶었던 내일이었다.” 이런 말도 저런 말도 도무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을 한 사람이 누군가 찾아가서 드잡이하고 싶었다. 당신이 나처럼 살아보았냐고?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이느냐고, 이 세상사는 것이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고 앞이 안 보이는데, 세금 안 나온다고 그딴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혼자서 주먹질도 하고 욕도 해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어느 날 안개처럼 슬며시 사라지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는 습관이 생겼다. 우울증이 치료받아야 하는 병이라 팔다리가 부러지는 아픈 것보다 더 중증인 것을 나는 몰랐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말로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배부르고 등 따듯한 사람들이나 하는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름대로 혼자서 그러다가 정말로 죽거나 자연치료가 되어 살거나 했을 뿐이다.
  어느 날 우연히 TV뉴스에서 부잣집 사모님이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들켰는데 그것이 생리 전에 자신도 어쩌지 못하게 일어나는 주기적인 습관성 도벽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의 이런저런 어수선한 잡념이 생리 전에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습관성 우울증이 아니었나 싶다. 문제는 매번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몰랐던 것이다.
  친구나 지인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도 습관성 우울증이란 것이 있다는 것은 도벽이 있는 사모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 스스로 내린 진단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마술에 걸린 것처럼 평상시에는 조금 그러다가 그 시기를 넘기는데, 무언가 집안에 문제가 생기거나 힘든 일이 겹치면 마음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심각한 중증이었다. 병이 심각해지면서 ‘내가 떠난 자리를 누가 보더라도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정돈을 하고 떠나자.’라는 생각을 하며 청소하는 습관이 생겼다.
  무슨 일을 생각하면 그 일에 푹 빠졌다. 옷장도 훌러덩훌러덩 뒤집어서 정리정돈을 다시하고(특별히 정리해야 할 옷이 많지 않아서 크게 할 일도 없으면서) 평소에는 어림도 없던 가구도 혼자서 번쩍번쩍 들어 다시 배치해놓고, 먼지 구덩이 속에 철퍼덕 주저앉아 사진첩을 넘기면서 큰 아이 초등학교 졸업사진도 보고 막내 유치원 때 남이섬에 소풍가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울다가 웃다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쉬기도 한다. 입고 싶어서 산 장미꽃이 화려한 원피스는 장사하느라 바빠서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하고 상표가 달랑거린다. 화장실 청소는 약국에서 염산까지 사다가 변기나 세면기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았다.
  그렇게 떠나는 시간을 미적거리는 동안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영영 못 받을 것 같던 물건 값이 수금되기도 하고, 꽉 막혀 풀릴 기미가 없던 일도 머리카락을 빼낸 하수구처럼 뻥 뚫리는 일이 기적처럼 생기기도 했다.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죽어야지 하던 생각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죽을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위로하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지금 되돌아 생각하니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다. 그 와중에 좋은 쪽으로 만들어진 청소하는 습관이 다행이고 감사할 일이다.





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

                                                   소래  한 옥 례

  서울로 이사 가던 첫해 겨울이다. 남편의 누나가 사는 집 옆에 방을 한 칸 얻어서 남편은 어렵사리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서울 지리도 잘 모르는 동생이 특히 눈이 오는 날 운전을 나가면 누님은 안절부절 하셨다. 동네의 골목길을 빗자루를 들고 쓸고 다녔다. 동생이 운전하는 길이 미끄러운 것을 생각하며 그렇게라도 해야 본인의 마음이 편해서 하는 일이겠지만, 만고에 쓸데없는 일로 본인 신세 본인이 볶는 일을 하고 있는 형님을 보는 나는 어찌해야 할지, 늘 난감하기만 했다. 같이 골목길을 쓸고 다닐 수도 없고, 아무 것도 안 하고 바라만 보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 말라고 말리자니 ‘시’자가 무서워 시금치도 안 먹던 때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좋은 누님을 둔 남편이 부러웠다.
  택시가 교대시간인 저녁이 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아직도 안 들어왔구나. 이 사람은 벌써 자네. 사람이 안 들어왔는데 걱정도 안 되나. 잠이 오나.” 앞뒤도 안 맞는 말을 혼자서 주고받는다.
  이것이 곧 ‘시집살이’였다.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과 지극정성으로 도와주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를까 마는, 정도가 지나치니 간섭이고 월권이라 오히려 부담스럽고 귀찮아서 짜증이 났다. 세상의 일 중에는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만 못하고 욕먹는 일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나 보다.

  시부모님이 사시는 시골집과 마주보고 살 때의 일이다. 남편이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해서 읍내로 약을 사러 간 길에 이것저것 시장을 보느라 조금 시간이 지체되어 들어왔다. 시어머님이 오셔서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 안방에 놓고 남편 이마에 물수건을 올리고 혼자 보기엔 아까운 풍경이 펼쳐졌다. 주방에는 죽을 끓이고 금방 죽을 것처럼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는 모자의 모습을 바라보자니, 작년에 먹은 송편이 올라올 것 같다.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수시로 일어나는 남편의 엄살과 어린아이같이 받아주는 시어머님의 응수가 못마땅하던 터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참다 참다 화가 나면 나도 한 성질 한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어른에게는 바른 말이 앙살이라지만 시어머니에게 심하게 뭐라 했다.
  “장가들여서 애를 셋이나 낳은 아들이니 잡아먹어도 내가 잡아먹을 것이고 살려도 내가 살릴 것이니, 놔두고 가든지 데려다가 같이 살든지 해요.”라고 심하게 화를 냈던 것 같다. 지금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몰아서 다 한 것 같다.

  그 뒤론 시부모님도 내 눈치를 보시고 남편의 엄살도 줄었다. 무조건 참고 살 일이 아니라, 가끔은 독한 마누라, 못된 며느리가 되면 내가 살기 훨씬 편해진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무조건적이거나 지나치면 오히려 간섭이 되고 장애가 된다. 요즈음 이혼율이 높은 것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도 원인이 되겠지만, 친정 부모의 맹목적인 딸 사랑이 한 몫을 한단다. 살다가 부부싸움하고 친정에 쪼르르 달려오면 자초지종 들을 것도 없이 무조건 딸 편에 서서, ‘내가 어떻게 키운 새끼인데 이 지경을 만들었나, 집에 밥이 없나, 옷이 없나, 가지 마라, 이혼해라.’부모라는 사람이 불난 집에 부채질이 아니라, 아예 선풍기를 틀어서 자식 신세 날려 버린다.
  옛날에는 ‘출가외인이다.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라.’며 문턱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야단을 쳐서 보내니 속상해도 감히 시댁을 나올 생각을 못하고 큰 맘 먹고 나와도 다시 들어가고 돌려보냈다. 나도 친정이 있으면 이혼을 해도 열두 번은 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친정이 없으니 부부싸움하고 갈 수 있는 곳이 시부모님 계신 시댁이라 처음에는 울고불고 못 살겠다 하면 ‘오냐오냐 잘 왔다. 내 그놈의 자식 혼내 주마.’하시더니, 정작 하루 밤만 자고 나면 초록은 동색이고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당신 자식 손을 들어주고 만다.
  사돈의 풍속은 오이 먹는 것도 다르다는 말과 같이, 사랑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새를 사랑한다고 새장 속에 가두고 위험해서 보호한다고 먹이를 주고 사육하는 사람은 그것이 구속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알아도 어차피 모른 체 하고, 금붕어는 사랑한다고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이를 주고 도무지 왜 죽었는지 모르고, 화초는 심심풀이로 물주고 또 줘서 석어 죽어도 정성을 다해 키웠는데 죽었다고 서운해 한다. 친절도 지나치면 월권이나 간섭이 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 



하늘도 너무 하시지
(2017.7.19. ) 전혜경


“아, 예배만 보고 있으면 어쪄. 가재도구라도 건져야 될 거 아녀.”
이장님 혀 차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쫓아나갔다. 금세라도 집이 잠길 것같이 시뻘건 황톳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입이 딱 벌어지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뭔 일이여! 아이고 어쪄!”
집사님은 가뭄에 고추가 말라갈 때보다도 더 큰 시름으로 한숨을 토해 내셨다.
집을 나섰을 때만해도 마당이 질퍽할 정도였다는데 20분 지났을까말까 한 시간에 흙탕물이 무릎에 찰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급히 수중펌프를 돌리고 물길을 돌려 보려 하지만 도로를 넘어 쏟아져 들어오는 물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산에서 휩쓸려 온 돌과 나무 조각들에 지름이 일 미터나 되는 수로가 막혀 집 쪽으로 물길이 틀어져버린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어마어마한 물줄기는 멈출 낌새 없이 거침없이 쏟아져 집 아래 고추밭과 논까지 삼켜버렸다.
이장님이 면사무소에 도움을 요청 했지만 저녁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밤실은 고립되고 기암리는 도로가 끊겨 그 마을들부터 먼저 복구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며 물이 좀 줄어들기만을 기도할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모든 것을 삼킬 듯이 쏟아지던 비도 그치고 집 안까지는 물이 들어가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옥화대 피해는 훨씬 더 엄청나단다. 달천이 넘치는 바람에 논밭은 물론 집들이 물에 잠기고 펜션이 떠내려가고 사람도 두 명이나 죽고 한 명은 실종됐다고 한다.
 20여 년 전 장맛비에 피해 입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된다며 30년 만에 처음 보는 수해라고 옥화대에 다녀 온 옆집 언니는 한참 걱정을 늘어놓았다. 윗집 아저씨는 20년 전 장맛비에 아내가 개천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렸을 때 장맛비에 돼지며 통나무, 가재도구 들이 무심천에 떠내려가던 일이 아슴푸레하다. 그나저나 순식간에 가족을 잃고 수해를 입은 사람들은 어쩌나.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이 나오지만 그 심정이 어떨지 헤아리기 어렵다.

오늘 아침 면사무소 앞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전국에서 몰린 자원봉사자와 구호물품을 싣고 온 버스 들이 즐비하였다. 한 손이 아쉬울 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수해 입은 분들이 위로받지 않을까 싶다. 애 닳고 막막한 심정이야 하늘이 깜깜하겠지만, 십시일반으로 도우려는 따스한 마음이 전해져 그 주름이 조금이라도 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가뭄 끝에 내린 고마운 비일지라도 이제는 제발 그만 와 주길 하늘에 빌어본다.












누렁이

 김 미 란


  제주도에서 개를 보았다.
진돗개만큼이나 큰 개들이 목줄도 없이 자유로이 다녔고 시베리아허스키도 돌아다녔다. 식사하러 들어가는 식당 입구 앞에 흰 큰 개를 보고 식당 주인에게 물어 보았다. 제주도에는 개가 그것도 큰 개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자주 보인다고 했더니, 식당 주인이 그런다. 제주견이라고, 진돗개랑 많이 닮았는데 제주도에는 개를 풀어놓고 키운다고 했다. 식사를 다하고 나오니 흰 큰 개가 가게 문 앞에 온 몸을 돌돌 말고 편안히 누워 있었다. 개들을 보면서 제주도민들의 마음이 참 넉넉하고 여유롭다고 느껴졌다.
  길에서 마주치는 집 없는 개는 늘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한다. 어떻게 먹고 사는지 비와 추위는 어디서 피하는지 더러워진 털색과 말려져 밑으로 쳐진 꼬리, 눈치 보는 눈빛…. 하지만 제주도에서 만나는 개들은 나를 걱정하게 하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내 어릴 적 우리 집에도 개 두 마리를 키운 적이 있었다. 검둥이, 누렁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검둥이 누렁이를 쌍둥이라며 자랑하곤 했다. 나는 개들도 사람처럼 한 번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 줄 알았기 때문에…, 그 때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나는 이 두 마리의 개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달라붙는 게 귀찮기만 했었다. 비가 몹시도 내리던 날, 검둥이가 끙끙 앓더니 시름시름하다가 어느 날 안 보였고, 몇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모르는 아저씨가 누렁이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때 그 길가에서 누렁이는 나를 보았고, 나도 누렁이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과 놀기 위해 해맑게 웃으며 골목길로 사라졌지만 나는 누렁이가 어떤 처지였는지 어린 마음에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런대도 노는 게 더 바빴다. 끌려가는 누렁이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을 떠나 팔려가는 누렁이에 대한 마지막 인사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누렁이의 착한 눈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는 걸 이따금씩 내 안 깊숙이 자리한 가슴이 내게 말해주곤 했었다.


가끔은
잊고 있었던 다 잊혀졌던
기억들이 불쑥 나오곤 하는데,
누렁이의 눈이 그러하다.
다시 그 길가
누렁이가 나를 보았던 애잔한 눈
울 누렁이에게 가서
커서는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던
울 누렁이를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사랑해주지 목 해서 미안했다고….












감 사
 임 인 숙

 

 ‘띵똥’하고 문자가 옵니다. 방송대 수필 강좌 회장님의 문자였습니다. 수필을 작성해서 프린트해 오라는 약간은 강한 부탁의 문자입니다. 안 그래도 뭔가 한 가지는 써가야 할 텐데, 머리 싸매고 고민 중이었는데 일기도 제대로 써 본적 없는 내가 무슨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수필반에 오게 된 동기도 일기 같은 간단한 글쓰기 정도라도 배울 기회가 온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등록했습니다. 수업은 들을수록 수준이 높아져 가는 것 같고 내 글쓰기는 한 없이 멀어져 가는 듯합니다. 이건 아니지 싶어 감사란 제목으로 글을 기록해 봅니다.

  감사! 참 고맙고 감사한 말입니다.
최근의 감사한 일들을 적어보려 합니다. 신랑이 안면신경마비로 충북대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수술하는 동안 마음이 답답하고 안정이 되지 않아 네 시간 반이 하루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수술이 끝났다는 안내판 글씨에 한 걸음에 달려가 중환자실에서 마주친 남편 모습은 십년은 고생한 사람처럼 초췌해 보였지만 내 마음으로는 ‘이것이 감사구나’싶어 수십 번도 더 ‘감사합니다.’를 되뇌었습니다.
  네 살배기 외손자가 있습니다. 성후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말썽꾸러기입니다. 놀이터나 집안 어디서든 한눈팔기 어렵습니다. 손자 눈이 찢어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몇 배로 빨리 뛰고 안정이 안 되어 어떻게 손자를 보러 갔는지, 다행히 손자는 몇 바늘 꿰매고 안정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감사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오늘도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음이 감사하고, 방송대에서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게 감사하고, 막내아들 학교 잘 다니고 큰아들 직장생활 잘 하는 것이 감사하고 주변의 아는 분들 건강하게 지내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가장 감사한 것은 부모님께서 살과 피를 주셔서 제가 이 땅에 태어나고 살아가게 해주심입니다.  

2017 여름 수필 강좌 수강생 명단
    지도: 김홍은 교수님(043-262-1789)

연번
이   름
학과(학년)
  전 화 번 호
1
정미숙
문화교양(졸)
010-2366-1369
2
김미란
문화교양(졸)
010-4127-3370
3
최한식
영문과
010-7113-3576
4
한옥례
국문과
010-4409-2002
5
김숙자
국문과
010-7455-3321
6
이영희
평생교육
010-5872-7633
7
정금자
평생교육
010-8849-7658
8
민안자
평생교육
010-7544-6949
9
이운우
평생교육
010-9413-1876
10
이성숙
평생교육
010-7183-6300
11
박근열
교육학과
010-7165-9607
12
전혜경
일반
010-3469-2344
13
김영희
청소년교육
010-8738-9795
14
이정주
일반
010-2484-7857
15
나명희
국문과
010-5342-8211
16
안인숙
국문과
010-6602-4546
17
임인숙
교육학과
010-6407-9500
19
김진아
교육학과
010-9862-8885
20
최례진
문화교양
010-5586-7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