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각

늙은 호박

변두리1 2016. 10. 1. 13:45

늙은 호박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문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던 곳에 한 덩이 늙은 호박이 앉아 있다. 그곳에 철문을 열어젖히고 유리문을 해 달았다. 북향이긴 하지만 훤하고 시원한데다 타일까지 깔려있어 상하기 쉬운 것들을 그곳에 둔다. 열흘 전엔가, 청주근교의 나보다 열 살쯤 많은 가까이 지내는 이와 우리내외가 살가운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며 받아온 것이다. 껍질 벗긴 오렌지를 지그시 눌러 백배쯤 확대한 모습인데, 짙은 갈색으로 아주 강고하게 생겼다.

 

   질 좋은 찰흙을 연상케 하는 빛깔에 코스모스 꽃잎처럼 생긴 것이 깊은 주름이 지고 윤곽이 뚜렷해, 굵고 분명한 삶을 잘 살아낸 품격 있는 노인 같다. 바싹 마른 꼭지도 여간해선 떨어지지 않을 듯 고집스런 형세다. 그 호박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겨우 반 년 남짓의 세월에 저런 모습을 지닐 수 있을까. 그 호박을 재배한 이의 넉넉한 손길과 정성스런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마 호박은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자신이 자라왔는지 모를 게다.

   올해 우리 집 앞마당과 뒤뜰에 호박 몇 포기를 심었다. 유년의 추억을 회상하며 잎과 줄기가 무성하고 실한 호박들이 달리는 광경을 그렸다. 진노랑의 밝고 생기 있는 꽃들도 기다렸다. 싹이 트고는 날마다 빠른 성장을 보이더니 드디어 꽃피우고 잎들을 내며 한 방향으로 줄기차게 뻗어나갔다. 암꽃은 드물었고 어쩌다 열매가 달렸다가도 며칠 후에는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땅이 척박해 영양을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비록 싱싱한 애호박을 즐기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긴 세월 빛나는 꽃들을 만나고 녹색의 풍성한 호박잎을 식탁에서 대할 수 있었다.

   내 유년의 꼭대기 집에서 호박은 어머니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으리라.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한 여름 반지르르 윤기 흐르던 호박은 빼놓을 수 없는 맛깔난 반찬 재료였다. 좁은 밭가를 따라 넉넉히 거름을 주고 때맞춰 씨 뿌리고 정성을 쏟으면 그들은 힘차고 씩씩한 모습으로 화답해 주었다. 한여름 시원한 새벽에 커다란 이파리 속에 숨어있는 미끈하고 통통한 호박을 찾아내 어머니께 일러주면 어린 아들을 대견해 하시며 아침상에 반찬으로 해 주시곤 했다.

   키우는 이에 따라 작물상태가 다른가 보다. 얕은 경험에 돌봄마저 시원치 않으니 어찌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랴. 마음이 쳐지려는 순간에 강고하고 실한 늙은 호박에 다시 눈길이 간다. 저 호박은 좋은 땅에 심겨 풍부한 영양과 넉넉한 햇볕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해충을 잡아주고 버팀대를 대주고 수시로 눈 맞추고 돌보아 주어 그 결과가 내 앞에 넉넉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스스로는 당연하다 생각해도 썩 좋은 환경에서 성공적인 한 생애를 산 것이다.

 

   넉넉하고 빛깔 좋은 그 늙은 호박을 인간에 비한다면 어떤 사람일까. 건강하고 곱게 나이 든 품격 있는 노인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긴 세월 성실하게 살아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고, 자녀들과 또 그 자녀들을 대하는 주름진 얼굴과 인자한 미소를 지니고 유유자적한 삶을 사시는 분들 일 게다. 주변에 그러한 분들이 적지 않다. 부드러운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보다는 거센 비바람과 높은 파고가 이는 험난한 삶을 살아내고 이제는 현장에서 조금 벗어나 편안한 여유를 즐기는 그분들을 본다.

   내가 그분들 연배에 이르려면 적잖은 세월이 남아 있다. 살아온, 적지 않은 날들을 돌아보면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에 쏟아내지 못한 적은 노력들이 오늘의 후회를 만들었다. 다시 10년 후에, 혹은 20년 후에 지나간 오늘을 회상하며 꼭 같은 뉘우침을 토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생각의 틀을 바꾸어본다. 나도 눈앞의 늙은 호박 같은 모습으로 성숙해 가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고,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잘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뿌리내려 살아온 삶의 터전이 그렇게 척박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내 성장에 이상이 올만큼 영양이 부족했던가. 햇볕의 양이 적었나. 주변과 견줄 때 열악했다고 자신에게 변명거리를 내어 줄 수 없다. 그 시절에 그만하면 최상은 아니었지만 탓할 처지는 아니었다.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면 그것은 오롯이 내게 책임이 있을 뿐이다.

 

   어린 때는 싹 터나오는 순수함과 귀여움으로, 초반기에는 쑥쑥 자라나는 모습과 윤기 나는 아름다움으로, 중반기에는 꽉 찬 내면과 빛나는 모습으로, 후반기는 향기와 넉넉함으로 종반에는 영양과 씨앗을 남기는 호박의 생애처럼 삶의 단계와 순간마다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을 주고 누리며 살아간다면 삶을 마치는 순간에도 넉넉하고 의연할 수 있지 않을까.

   한동안 내 눈길이 늙은 호박에서 떠나지 않는 것을 보던 아내는 올 겨울 눈 내리는 어느 날 늙은 호박을 갈라서 범벅이나 해 먹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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