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답하다》를 읽고
-사마천의 인간 탐구-
책을 쓴 김영수는 고대 한중관계사를 주제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하고 16년간 100여 차례 중국을 돌며 동양사의 현장을 답사했다고 한다. 20여 년 간 연구한 《사기》를 통해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열어갈 방법을 고민하고, 그것을 대중과 소통하기위해 애쓰고 있다고 한다.《사기》에 관한 여러 책들을 썼다.
《사기》를 쓴 사마천(BC145-90)은 사관을 가업으로 해온 집안에서 태어나 사관인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고 20대 초반에 전 중국을 돌며 역사의 현장을 답사한다. 부친을 이어 벼슬길에 올랐다가 49세 때, 한 무제의 심기를 거슬러 궁형을 받는다. 42세 무렵 시작한 《사기》의 집필을 시작해 14년의 노력 끝에 56세에 책을 완성하고 죽음을 맞는다.
《사기》는 130권 526,500자에 달하는 통사이자 세계사다. 연대기, 연표, 인물, 주제별 논문을 종합한 중국 정사 서술의 표준인 기전체의 효시가 되었다.
힘들거나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다. 그런데 책을 덮고 읽은 것을 기억하려니 글쓴이에게는 민망하지만 명확히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다. 다시 한 번 죽 훑어보았다. 내 빈약한 책읽기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의 고향 섬서성 한성시의 서촌에 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마(司馬)씨가 동(同)씨와 풍(馮)씨로 나뉘고 그들이 사는 마을이 두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는 서촌(徐村)으로 불린다는 것이나 주변의 지형지물과 장소가 ‘야작와(野雀窩)’와‘첨치구(尖齒口)’로 불리고 있다는 것, 또한 마을 입구에 서있는 돌 패방에 기록된“궁행왕법(宮行枉法)”이란 명칭이 사마천과 관련된 일들에 대한 후대인들의 평가와 비꼼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늦게나마 사마천과 그 후손에게 약간은 위로가 될 듯하다.
초나라의 장왕(莊王) 이야기도 의미심장하다. 즉위 후 3년 동안 밤낮으로 술과 여지에 젖어 살면서 바른 소리로 간하는 신하는 용서치 않고 죽음으로 다스리겠다는 장왕에게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수수께끼를 내는 오거와 목숨을 걸고 간하는 소종. 삼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그 둘에게 중책을 맡기며 나라를 이끌어간 장왕이 대단하다. 그는 진(陳)나라를 치기 전 자신의 관찰력과 상황판단능력을 보여준다. 인재를 갈구하는 모습과 임기응변, 주위 사람들에게 귀를 여는 소통의 능력은 현대인에게 얼마나 절실히 그리워지는 요소들인가.
초장왕 당시에 진(陳)나라에서 발생한 희대의 스캔들을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정(鄭)나라 목공(穆公)의 딸 하희(夏姬)를 부인으로 삼아 아들을 둔 진(陳)의 대신 하어숙(夏御叔)이 죽자 그녀는 고위층인 두 관료들과, 그리고 진영공과 놀아난다. 하어숙의 아들이 영공을 활로 쏘아 죽이자 다른 이들은 초나라로 도망을 가고, 초나라는 진을 정벌하여 현으로 강등시키고 초나라에 귀속시킨다. 잡혀온 하희를 본 장왕은 첩으로 삼으려 하나 신하 굴무(屈巫)의 간언을 듣고 포기한다. 이에 장왕의 아들 태자 자측(子側)이 탐을 내지만 다시 굴무가 설득하여 상처(喪妻)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하 연윤양공(連尹襄公)과 결혼을 시킨다. 그 후 연윤양공이 싸움에 나가 전사한 후, 연윤양공의 아들과 바람이 나자 굴무는 장왕을 설득하여 하희를 친정인 정나라로 돌려보낸다. 그 후 초나라에서 제나라로 사신을 보낼 일이 생기니 굴무가 자진하여 나서서 제나라로 가지 않고 정나라로 가 하희를 차지하고는 초나라로 돌아오지 않는다. 굴무의 끈질긴 집념이 무섭다. 굴무에게 자신과 태자가 모두 농락당한 꼴이 된 장왕은 굴무의 가족을 몰살시킨다. 굴무는 이에 한을 품고 신진 강국으로 떠오르던 오(吳)나라로 가서 초의 군사정보를 제공하고 군대를 훈련시켜 초나라를 친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마천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1974년 한 농민이 우물을 파다 병마용갱(兵馬俑坑)을 발견한다. 현재 1호, 2호, 3호 갱을 발굴했다고 하는데 8,000구의 병사가 출토되었단다. 이 병사들은 실물모형으로 같은 얼굴이 하나도 없고 수염과 상투머리까지 흐트러져 있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진시황릉의 일부분으로 진시황릉을 호위하는 병사들이라고 한다. 그 병마용갱이 일반에 공개된 1979년 이래로 한 해 수입이 평균 3800억 원에 이른단다. 1980년에 소림사가 영화로 소개된 후로 영화가 몇 편 더 제작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당시 소림사의 하루 입장료 수입이 1억이 넘었다고 한다. 문화재가 돈이 된다는 것이 입증되니 진시황릉을 발굴하자는 요구가 거셌다고 한다. 하지만 주은래는 세계인의 유산을 위해 과학기술이 좀 더 완벽해질 때를 기다려 후손에게 맡기자고 했고 그 원칙이 지금가지도 굳게 지켜지고 있다고 한다.
우정에 관한 이야기들도 잊히지 않는다. 백아와 종자기를 다룬 ‘지음’,관중과 포숙을 이야기한 ‘관포지교’, 염파와 인상여의 ‘문경지교’, 그런가하면 소진과 장의, 장이와 진여, 손빈과 방연의 이야기들은 친구에 대한 여러 경우의 관계들을 보여준다.
사마천은 《사기》에 〈화식열전(貨殖列傳)〉을 넣었다. 경제를 그만큼 중시한 것이다. 그가 소개한 계연(計然)이란 인물이 아주 흥미롭다. 그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경제철학은 “폭리를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폭리를 취하려면 독과점이나 매점매석을 노리게 된다. 그것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무리를 가하는 일이다. 그는 “비싼 물건은 쓰레기를 버리듯 내다 팔고 싼 물건은 구슬을 손에 넣듯 사들여라”라고 충고한다. 한마디로 가격이 오르면 팔고 내려가면 사라는 것이다. 평범한 말 같지만 시장의 안정을 말하고 있다. 그는 2,500년 전에 이중 곡가제를 주장하고 물건의 유통기한을 언급했다.
나는 《사기》를 비롯해 고전이랄 수 있는 작품을 얼마나 읽었던가. 별로 읽은 것 같지 않다. 설혹 읽었다고 해도 그 작품을 직접 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동양고전 중에 텍스트를 직접 읽은 것이 없는 듯하다. 언젠가 다른 이의 손을 빌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하나만이라도 읽고 싶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항상 난세라고 말하는 듯하다. 글쓴이는 《사기》를 통하여 난세를 살아가는 비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어려운 현실에 쓰러지지 않는 맷집을 기르는 것과 더 나은 세상이 온다는 믿음을 갖는 것 그리고 역사를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것 같다. 맷집과 믿음,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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