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콘서트》를 읽고
지은이 황광우는 1958년 광주에서 나서 고교시절 반독재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 제적을 당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사회과학대에 들어가 틈틈이 고전을 읽었단다. 1980년 대학에서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제적당하여 노동자의 길을 걸었단다. 1998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니 마흔한 살에 대학을 끝마친 셈이다. 이 책이 나올 때에는 광주 ‘다산학원’에서 제자들과 고전을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큰 형은 스님이고 작은 형은 시인이라고 하니 만만치 않은 가문이다. 글쓴이는 소크라테스에서 노자에 이르기까지 열 사람의 인물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철학으로 가는 길을 칸트와 함께 강고하게 봉쇄했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가장 앞에 다루고 있는데 역시 거리감이 있고 만만하지 않다. 다음으로 다룬 석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허(虛)와 공(空)과 무(無)로 죽음의 문제나 현실과 직면하지 않는 감이 있다.
그가 설하는 인간 공자에 연민이 간다. 열여섯의 안징재와 칠순의 숙량흘의 야합(野合)으로 태어난 공자, 생후 삼 년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여섯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신다. 무당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면서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스스로 섰다고 한다. 자신의 학문에 일가를 이뤘다는 말일 것이다.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인지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마흔까지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쉰에는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였다. 평천하(平天下)를 위해서는 한 나라를 다스림[治國]이 필요했다. 평천하를 마음에 품고 치국을 위해 쉰 넷에 천하주유의 길에 오른다. 그때의 공자의 기개가 일 년이면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삼년이면 천하를 평안케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그를 제대로 써주는 나라는 없었다. 가는 곳마다 푸대접을 받고 ‘상갓집 개’처럼 떠돌다 때로는 도가(道家)의 은자(隱者)들에게 야유와 조소를 받았다. 마침내 몸과 마음이 지쳐서 돌아오니 예순여덟, 그로부터 딴 곳에 마음 두지 않고 제자를 기르고 책을 엮으며 살다가 일흔셋에 삶을 마감한다. 그가 이상으로 삼았던 인간형 “군자 ”그들의 핵심인 인(仁)과 의(義)와 예(禮)를 받들며 동방의 나라들이 수천 년을 살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위로를 받을 일이다. 공자의 이 불우하다면 불우하달 삶이 우리를 서럽고 우울하게 하기도 하고 위무해 주기도 한다. 공자에게 있어 천명(天命)은 배우고 가르치고 책을 엮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수 그분은 앞서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보통사람들 나아가 천민의 친구였다. 출발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되돌린 분이요, 알맹이 없는 껍데기를 붙들고 권세와 이익을 탐하려던 이들을 책망하며 혐오하신 분이다. 그분은 패하므로 이기고 죽음으로 사셨으며 사랑으로 미움을 녹이신 분이다.
유일하게 다룬 한국인 퇴계 이황. 학문에 진지하고 정직했으며 스물일곱이나 어린 고봉 기대승에게 깍듯한 예우를 갖춘 겸손한 선비며 학자였다.
어쩌면 은연중에 강조하고 싶었을 인물들, 토머스 모어와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경제에 조명을 들이대는 것이다. 노동자로 사회운동가로 경제학도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토마스 모어가 보았던 양에게 잡아먹히는 농민들, 땅을 잃고 방랑하다 부랑자로 적발되어 처형되는 이들, 그들을 줄이기 위해 하루 여섯 시간노동을 주창했던 토마스 모어였고, 부의 악한 모습, 자본가의 탐욕과 자신의 몫을 빼앗기고도 알지 못하는 가련한 노동자과 교묘히 노동자들을 속이는 현대 자본가들을 향한 자신의 분노를 카를 마르크스를 빌어 내리치고 싶었으리라,
그런가하면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듯한 애덤 스미스, 모든 허위의식을 벗고 인간을 보자는 것이다. 그 경제행위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그것이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후련하고 산뜻한가. 문제는 그 이기심이 끝이 없고 통제할 길이 없다는데 있다. 그 이기심을 극대화하고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 가지고 있는 이들. 급기야 자본이 또 다른 자본을 불리는 악일지도 모르는 일들을 행하는 이들을 현대의 국가는 다수의 빈곤한 이들의 세금으로 국방과 치안과 법을 만들어 지켜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와 학문과 문화도 그들에게 호의적이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그들은 면죄부를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들이 되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나아갈 길인가를 우리는 심각하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 노자를 두었다. 오늘을 사는 해답이 어디에 있는가를 나름대로 노자에게서 찾은 것 같다. 그 노자의 한국에서의 현대판 전도사로 시인 백석을 본 것 같다. 노자는 인위적인 기준을 두지 말자는 것이다. 인위는 자연을 이길 수 없고 무리 없이 돌아가는 것이 자연이니 자연을 닮아 살아가라는 것이다. 물처럼 낮은 곳으로 내려가며 작은 모습으로 살자는 게다. 그것이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도는 자연을 따른다는 것이니 거두절미하면 곧 사람이 자연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철학 콘서트는 한마디로 꼭꼭 씹어야 할 한 상 가득한 삶의 밥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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