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사이
식탁에 고춧잎무침이 올라왔다.
일전에 몇 그루의 고춧대에서 퍼렇고 붉은 고추 약간과 얼마간의 고춧잎을 따낸 바 있어서 조만간 반찬이 되리라고 기대했더니 드디어 내 앞에 나타났다.
이것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은 봄날에 내가 노점에서 모종을 사왔고 우리 집 뜰 안에서 자라 그들의 성장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노점에서 고추모를 팔던 아주머니는 매운 거 아니냐는 내 물음에 하나도 안 매운 아삭이 고추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여섯 그루 정도를 사온 것 같은데 시원찮은 꽃밭에 심었는데도 잘 자랐다. 뿌려준 물 먹고 비 맞고 하더니 살아나서 며칠 안 되어 앙증맞은 꽃을 피웠다. 작고도 흰 꽃에 마음이 갔는데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꽃 밑으로 정말 작은 고추가 달리고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몸피를 불렸다.
줄기는 야리야리 하더니 십대 소년들처럼 무럭무럭 자라나 웬만한 비바람에는 흔들리지 않을 작은 나무처럼 자라서 새끼손가락만큼이나 굵어져 있었다.
한여름이 되자 이십대 청년 같이 싱그러운 고추 몇 개가 자랑스럽게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날 우리 가족들은 그 빛나는 생명들을 차마 딸 수 없었다.
또 다시 며칠이 지나 감격이 무디어지고 청년 고추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을 때, 그 중 두세 개가 식탁에 올라왔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들을 혀와 치아의 도움을 받아 식도를 거쳐 위로 이송을 했는데 나와 아내는 하나도 맵지 않고 아삭하며 달착지근하다는 식후감(食後感)에 완전히 일치했다.
몇 달이 지났지만 고추모를 팔던 아주머니 말이 진실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후로는 오랫동안 신선한 청년고추들이 우리 여름식탁의 단골 반찬으로 자리를 잡고 가족들에게 비타민을 듬뿍 공급해 주었다.
여섯 그루에서 쏟아내는 고추의 양은 예상 그 이상이어서, 며칠 소홀한 듯 했는데 우리는 그 양에 압도당했고, 그들 중 몇몇은 이미 그 색상을 주홍으로 바꾸어 가고 있었다.
고추가 친숙하기는 해도 심고 가꾸기는 처음이라 대처하기 어려운 일도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 고춧잎에 구멍이 늘어가고 잎들이 진초록으로 바뀌어 가는데도, 지식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치료할 수가 없었다.
부실한 영양과 돌봄으로 잎들이 오그라들고 잎 뒷면에 허연 것들이 늘어나도 어설피 들은 것 때문에 농약을 치기도 내키지 않아 방치해 두었다.
여름도 가고 고추에 대한 애정이 시들해 갈 즈음, 아내는 고추를 수확하자고 했다. 웃음이 나왔다. 십 분이면 끝낼 일을 수확이라고까지….
오전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들어오니 고추를 베어 놓았으니 따고 잎을 좀 뜯어 달란다. 내가 콩쥐도 아니고, 또 구태여 그 일을 내가 해야 하나. 하지만 얼마 되지 않으니 심심풀이로 하면, 기분전환도 되고 새로운 경험도 될 듯 했다.
의자를 놓고 신문을 깔고 여유를 부리며 고춧잎을 따고 고추를 거뒀다. 해 저물고 햇볕 사라지니 쌀쌀함이 몰려왔지만 그들을 향한 미안함과 애틋함으로 생명이 끊어진 그들의 잔해를 내 손으로 거두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른 변신으로 그들은 내게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잔해처리로 그들의 삶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늘, 고추장 기름과 깨에 버무려져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식탁에 돌아와 있었다.
그들은 깻잎장아찌와는 방식부터 달랐다. 깻잎은 각각의 모습을 유지하고 개별자로 나타나지만 고춧잎은 숭숭 뚫린 구멍도 찾을 수 없고 몇 장이 뭉쳐진 것인지도 모르게 봄과 여름을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았다는 듯, 끼리끼리 삼삼오오 덩어리로 뭉쳐 식탁에 올라와서 자신들을 돌보아준(사실은 방치였다) 나에게 기쁜 마음으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마지막 봉사를 하려는 결연한 자세였다.
강한 연대감으로 함께 덩어리진 그들을 젓가락으로 함께 잡아 아린 마음으로 꼭꼭 씹는다. 나는 이제 그들과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쩌면 내 속에 하루 이틀 머물 뿐 아니라 내 몸의 일부가 되어 한동안 나를 힘 있게 지켜줄지도 모른다.
어느 봄날, 우리는 만나서 서로의 눈 맞춤을 주고받으며 봄과 여름을 한 울안에서 보내고, 내 손으로 그들을 마지막을 수습하고 그들은 또 최후의 봉사를 내게 행하니 우리 사이가 얼마나 특별한 가를 무엇으로 더 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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