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생활

형님 팔순을 맞다

변두리1 2022. 7. 7. 17:26

형님 팔순을 맞다

 

팔순을 며칠 앞두고 형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일요일 아침에 밥이나 먹잔다. 내가 그 날은 갈 수가 없으니 월요일 저녁에나 들르겠다고 했더니 서운한 눈치다. 왜 그렇지 않으랴. 삼남 일녀 중에 둘째 형은 먼저 죽고 누이와는 서먹하니 유일하게 오가는 게 내니 충격을 받으셨는지 휴대폰에 곧바로 터치가 되었다. 늘 겪듯이 끊는 것을 잘못해 건드려졌다고 넘어갔다가 하루쯤 지나 연락을 했더니 모이는 시간을 토요일 저녁으로, 장소도 식당으로 바꾸었단다.

조금 일찍 갔더니 제일 빠르다. 시간이 되어 모두 모이니 열다섯이다. 멀리서 조카가 왔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 노래를 불렀다. 대학생 아들을 둔 딸이 팔순기념 펼침막을 준비해 걸고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는 밥을 먹었다. 유일하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정이라 조금 마신 술에도 형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때는 대화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 극히 조심해야 하는데 조카가 이 말 저 말 늘어놓는다. 대화가 별로 없는 편이라서 주로 들으며 한 마디씩 더하는 식이다.

나는 형의 생애에 대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희생과 배려를 바탕으로 살아온 성실한 삶이었다. 혼란과 역경의 십대와 이십대를 보내고 서른이 되기 전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서문시장에서 닭 장수는 이어지고 첫 아이를 잃었다. 말썽 많은 아래 동생을 책임감을 가지고 챙기느라 말다툼도 적지 않았을 게고 막내 동생의 학업 뒷바라지에도 적지 않은 재물이 들어갔다. 마음 같지 않은 부모 섬기기에도 심적 고통이 작지 않았으리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길을 터주려는 노력에도 동생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막내는 또 그대로 물만 먹고 자라는 풀과 나무가 아니어서 생각과 바람대로 응해주지 않았다. 그냥 주어지는 대로 중고등학교 교사로 살면 서로 편할 것을 마다하고 신학교에 가더니 군종장교로 군대에 갔다. 그곳에서 걱정 없이 연금 받을 때까지 한 20년 있으려니 했더니 그것도 박차고 나와 교회를 한다고 했다. 때마침 가지고 있던 땅에 허름하게라도 짓고 출발하라 했더니 그마저도 상의 없이 건물 전세를 얻어 시작했다.

형님의 기대를 조금도 충족시켜드리지 못하고 나는 살고 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너 그렇게 살라고 내가 고생해가며 공부시킨 줄 아느냐는 원망이 들리는 듯하다. 건강문제로 수술도 하시고 두 아들은 사십이 넘어도 가정을 이루지 않고 있다.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느낄 것만 같다. 한 때는 꿈도 많았을 테지만 가장 형편과 시절의 불운으로 접어야만 했을 게다. 아쉽고 서럽고 그리운 젊음은 모두 사라지고 한 세대 너머 자녀들의 젊음도 저물고 있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한다.

삶의 흔들림이 왜 없었을까? 한 때는 삶에 지치고 권태로워 탈출구를 춤에서 찾기도 하고 몰래 주식에도 손을 대보고 답답함에 화투판도 기웃거려 보았을 게다. 그 어디에도 참다운 삶의 길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신산한 삶은 멈출 줄 몰랐다. 부모님의 묘소 관리도 쉽지가 않아 묘지를 사고 이장하고 돌보는 것까지 혼자서 해야 하는 일처럼 되었다. 남들은 다 아무 문제없이 쉽게 되는 일들이 왜 내게는 이토록 힘이 드는가 생각도 들었을 게다.

연세가 들어 몇 년 전까지도 아파트관리원으로 일하셨다. 소일거리로 취미삼아서가 아니라 경제적 필요 때문이었을 게다. 고용주가 원한다고 위험물 관리산가 하는 자격을 갖추려고 고령에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평생을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념을 떨칠 수 없다. 어느 한사람 소설 같지 않은 삶을 산 이가 있을까? 한 많은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명절 때 찾아뵈면 텔레비전을 보다 나오신다. 눈치로는 중국영화, 그중에도 무협물에 많이 몰입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랑과 복수와 해피엔딩, 형님의 굴곡진 삶이 어쩌면 그런 말들 가운데 들어있는지 모른다.

인간의 삶은 출생과 함께 많은 것들이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와 가문과 생활의 주 무대와 성별과 신체적 특징과 성격에 질병까지 많은 것들의 기본 틀이 정해진다고 생각하면 굉장한 일이다. 출생당시 가정형편에 따라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정해지는가? 누구도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없으니 쉽게 풀 수 없는 고차방정식이다. 다시 건강하게 구순을 맞으시라는 덕담에 별 말씀이 없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간사라는데 어떻게 십년을 장담할 수 있으랴.

이 세밀하고 견고하게 짜인 판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예수를 영접하고 그 안에서 새롭게 사는 것이다. 우리 안에 오시는 성령이 근본 판을 새로 짜신다. 사고방식과 습관과 성격을 밑바닥부터 갈아엎으니 새로 태어나는 게다. 형님의 삶에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있다면 예수님으로 인한 근본적인 변화다. 그것을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형님 앞에 서면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 늦추고 미룰 여유가 없음을 알면서 시도하지 못함이 안타깝다. 좋은 세월이 많이 갔지만 이제라도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삶에서, 천국을 바라보고 희망 속에 기쁘게 하루하루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란다. 그러한 삶이 어쩌면 이제까지 힘든 삶에 대한 보답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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