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불안
여행을 가자고 하네요, 일박이일로. 나는 일정표도 모르고 따라 나설 겁니다. 어디로 가냐고요, 청송으로요. 무엇을 볼 거냐고요? 그건 몰라요. 그냥 일정에 따라 가자면 가고, 쉬자면 쉬고, 무얼 보자면 볼 거예요. 사전지식도 없이 가느냐고요? 딩동댕…,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15박16일도 아닌 1박2일에, 남미도 아프리카도 아닌 경북 청송이라니까요.
그렇지만 여행이라 설레요. 일상을 벗어나는 거니까요. 여행은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한 거라고요? 맞아요, 맞아. 아내와 세 딸과 손녀에 나까지 여섯이 가요. 그러니 차 한 대가 부족해 두 대로 갑니다. 떠나기 전에는 감기네, 힘드네, 엄살을 떨었어도 나도 운전을 해야 할 거예요. 딸들이 세워 둔 계획에 맞춰 가능한 군소리 없이 다녀오려 해요.
몇 번 비슷한 여행을 했는데 큰 무리 없이 진행되는 걸 봐서 안심이 돼요. 한 번은 외국에서 여권을 잃어버려 그래도 나이 많고 가장인 내가 나서야겠거니 했더니 일처리가 느리다는 로마에서 딸들이 바로 임시 여권을 받아와 차질 없이 둘러볼 수 있었어요. 제대로도 못하면서 앞에 나섰다 괜히 망신당하고 체면구기는 것보다 맡겨두니 알아서 잘 하더라고요.
아무 준비 없이 떠나는 게 걱정되지 않아요. 이 땅의 삶을 한 시인은 ‘소풍’이라 말했잖아요? 이것저것 준비하고 이 세상 오는 이 없지요. 그냥 부모 믿고 한동안 그분들 도움으로 사는 거지요. 한 마디 더하면 난 군 생활을 60개월 쯤 했는데 아무 준비하지 않았어요. 미리 알았다면 훨씬 힘들었을 거예요. 다 안다고 생각하면 다가오는 일들이 더 힘들 수도 있어요.
난 성격이 소심해요. 초등학교부터 여러 번 소풍 갔지만 신났던 적은 없었어요. 소풍이나 여행은 일상탈출이니 약간의 일탈과 흥과 노래도 있는 걸 텐데 난 그런 거 하나도 못하고 안 좋아해요. 그런 게 싫어요. 남들 좋아하는 음악, 체육시간도 불편했어요. 오죽하면 그 긴 학교생활에 노래도 운동도 하나 제대로 못해 그 시간들을 비실비실 때웠을까요? 스스로 내가 불쌍하다 생각해요.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물으면 답이 없지요.
이제 가장이 된지 사십년 다 돼가요. 가족들이 책임감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담이 돼요. 낯선 일을 만나면 내가 해결해야 하는데 실제는 이젠 성인이 된 딸들이 나서고, 그 다음은 아내가 나서서 처리할 기세니까요. 새로운 일에는 설렘보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요. 그냥 익숙한 게 좋아요. 남들은 내게 도전 정신이 없다고 해요. 어쩌면 그렇게 나의 약점을 잘 보나 무서워요. 하지만 도전 정신이 없는 게 무슨 문젠가요? 도전 정신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게 더 문제지요.
익숙한 것에는 편안함이 있어요. 새로운 걸 향한 도전이 없으니 삶에 기복이 없고 게으르고 발전이 없대요. 맞아요, 하지만 그럼 이제 와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살아온 방식과 거꾸로 살라고 하면 불안해서 못 견딜 거예요. 그냥 타고난 대로 살아야지 어떡해요? 짧지 않은 세월을 그런대로 살아왔으니 이대로 살 게 둬요. 그대의 삶에 내가 밤 놔라 대추 놔라 하지 않잖아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많더라고요. 내가 군 생활을 꽤 했다고 했잖아요. 초기에 몰라서 덕본 때가 있어요. 훈련받을 때였는데 제일 힘든 게 유격훈련이라 했어요. 일주일 어떻게 하든 지나가는 건데 당하는 처지에선 쉽지 않아요. 그 중에 담력훈련이 있어요. 여기저기 무섭고 기괴한 것들을 놓아두고 한밤중에 하는 거예요. 깜짝깜짝 놀랄만한 경험들을 하면 웬만한 일은 견딘다는 거겠지요. 그 날 낮에 훈련받다가 안경이 깨졌어요. 안경이 없으니 보이는 게 시원찮고 더구나 어스레 달밤이라 분명히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삼사십 분 걸렸나, 그 훈련을 하면서 똑똑히 보이는 게 없으니 겁날 일도 없었지요.
다 돌고나서 동료들이 무섭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하나도 안 무서웠다고 했어요. 어디서는 무얼 보고 또 다른 곳에서는 뭐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제야 알았지요. 참말로 눈에 뵈는 게 없으니 무서운 것도 없더라고요. 모르면 태평하고 용감할 수 있나 봐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잖아요. 모든 걸 자세히 알려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아쉬운 것도 있어요. 아는 만큼 보고, 본 만큼 안다잖아요? 그러니 볼 수 없으니 알 수 없지요. 모르면 또 답답하고요. 그것만 참으면 돼요.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닌가요?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곳도 있고 눈부시게 빛나면 맞은편은 칠흑같이 어둡고요.
아침 일찍 출발하려면 이제 잠을 자야해요. 그렇게 계획을 짰다니까요. 일박이일 동안은 내 맘대로 사는 게 아니어요. 하자는 대로 하면 되니 얼마나 좋아요. 운전할 일이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온전히 좋은 일이 어디 세상에 있나요? 낯선 일들이 기다리는 내일을 위해 조금의 두려움과 불안을 가진 채로 잠자리에 들어야 해요. 왜요? 일박이일 청송을 다녀온다고 했잖아요. 내 말을 제대로 듣기나 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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