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소시민이 산다
- 변두리 최한식의 소심한 삶의 기록 -
⦁내가 자서전을 쓴다고…?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오는 듯하다, ‘그 양반이 자서전을 쓴단다’, 가끔 큰 길을 지나는 들 고양이와 강아지들도 코를 씰룩거릴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진지하다. 내가 자서전을 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대단한 사람들이 써 놓은 자서전은 기죽어 읽기 싫더라. 이 땅을 사는 절대다수가 평범한 이들이니 평균보다 조금 떨어지는 내가 자서전을 쓰면 얼마나 즐거우랴. 이제 자서전의 주인공인 나도 기쁘고 시원찮은 글을 읽는 이들은 자신감이 차오르리라. 자서전이 별 건가. 과장 안하고 솔직히 기록하면 잘못한 건 같이 안타까워하고, 조금 잘한 건 함께 기뻐하면 될 거 아닌가.
지지부진하게 살아온 내 삶을 소개한 글 한편이 있어 옮겨본다.
비 오는 날의 하늘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올려다 본 흐린 하늘엔 점점이 먹구름이 머물러 있다. 흐릿한 하늘처럼 마음이 애매하고 우울하다. 한여름 장마철 하늘이 그렇지, 비가 적당히 내려야 풀과 나무와 곡식들이 튼실하게 자라는 것 아닌가.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청년들 처지가 떠오른다. 정해진 것은 없고 불안하기만 하다. 모든 게 불확실하고 흐릿할 뿐이다.
내 청소년기가 생각난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밤늦게야 돌아오는 학교생활이 다였다. 고교시절 삼년은 공부가 모든 것이었다. 그 때는 공부만 잘하면 행복할 것 같았다. 사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남들은 별 일이 아니라지만 내게는 해결해야할 그 시기의 과제들이 있었다. 어쩌면 친구들은 모든 분야에 그토록 만능이었을까? 내 나름으로는 한다고 하는데 늘 남들보다 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대학에 가고 무슨 직업으로 평생을 살아갈까. 애매하고 불확실한 나날이었다. 그때 주변에서는 그런 나를 부러워하는 듯도 했다.
20대의 내 모습은 더욱 불안했다. 부실한 내 육체도 말썽을 부리지 않고 학교의 분위기는 적당히 놀아도 되었지만 난 놀 줄도 모르는데 세월은 흐르고 있었다. 배우는 바에 정붙이지 못하고 어울리지 않는 공부를 어쭙잖게 하고 있었다. 차라리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라도 제대로 해봤어야 하는데…. 내 삶의 하늘은 20대에 잔뜩 흐렸었다. 그때도 몇은 나중에는 잘 될 거라고 했다.
30대의 나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기반과 토대는 불안했고 현실은 내 예상과 같지 않았다. 바람 가득 든 풍선처럼 혼자서 대단하다고 착각했지만 현실은 조용히 그것을 부정했다. 내 기대와 일치하는 것은 없었고 바닥에 발 딛고 있지 않은 것은 허망함을 알려주었다. 내가 삶의 실기는 물론 이론도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식대로 문제를 풀어보려 했고 현실은 해답을 주지 않았다. 삶의 현실은 정확히 입력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컴퓨터와 같았다. 그때도 사람들은 내게 잘 될 거라고 했다. 내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4~50대의 나는 현실이 버거웠고 자신감을 잃었다. 세상이 어둡고 흐릿해 보였다. 모든 이들이 무시당하기 싫어 잘 안되지만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새로운 일을 시도했지만 지쳐가기만 할뿐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한참 성장하고 있었고 필요한 것들을 해주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무능했고 자존심은 지킬 수 없었다. 그때도 주변에서는 자신의 재능을 따라 주위 눈치 보지 않고 잘 살고 있으며 아무나 할 수 없는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60대 중반을 향해 내 삶은 나아가고 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거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거듭되는 부진으로 이젠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겉으로는 힘 있고 당당한 척 하고 있지만 앞날이 걱정이다. 같이 출발했던 친구들이 직장이라는 장거리 경주의 결승점을 속속 통과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부럽고 그들은 더 달릴 과정이 있는 나를 부러워 할 게다. 물어보지 않았지만 친구들도 이뤄놓은 일이 별 것 아니라고 말하지 싶다. 이젠 주변에서 내게 뭐가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한다. 자녀들 다 성장했고 오랫동안 한 우물을 파왔으니 만족하지 않느냐 물으리라. 요즘 내 하늘은 내 미래처럼 여전히 흐릿하다.
내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본다. 좁고 희미한 흔적들, 어떤 구간은 그것마저 이미 사라져 아무 표시가 없다. 흐릿하고 애매하다. 지금도 주변의 몇 사람은 말한다. 나처럼 살고 싶다고….
돌아보니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 겉으로는 하얀 눈길을 걸은 듯하나 속으로는 미끄럽고 추웠다. 비틀거리는 구간도 있었다. 속도 무제한으로 달리는 신나는 구간은 없었다. 쨍하고 햇빛 비친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는 비가 내릴 듯 흐릿하고 군데군데 먹구름 낀 그늘진 날이 익숙하고 편하다. 가끔 비가 흩뿌리는 것도 견딜만하다. 내 삶 자체가 흐릿하고 애매해서 그런가 보다.
주변에서는 나를 향해 항상 괜찮다고, 잘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면 그들이야말로 잘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들은 대부분의 날이 푸르렀고 나는 흐려있었다. 그들은 내게 걱정할 게 뭐가 있느냐고 한다, 내게는 모든 것이 걱정이다. 남의 것은 윤곽만 보이고 내 것은 세세히 보여 그런가 보다. 가을이 오면 자주 푸른 하늘이 드러날 게다. 내 삶의 하늘에도 푸르른 날이 오려나. 여전히 부슬비는 내리고 산책길은 아직 반도 돌지 않았다.
누군가 많은 서민들을 “가붕개”라고 했다. ‘가재, 붕어, 개구리’면 어떤가. 용은 여러 마리가 함께 있기 어렵다. 영웅은 둘만 모여도 세력다툼을 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평범한 소시민은 같은 편이 많아 즐겁다. 더러 읽어주는 이가 있으면 더 좋고, 나라도 보며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지 별 거 있냐고 스스로 위로하고 싶다. 나는 세월이 흐를수록 비누방울처럼 가볍고 투명해지다가 어느 순간 ‘퐁’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싶다. 가족들과 주변에 나를 아는 이들이 읽고 파안대소가 아니라면 슬며시 입가에 미소라도 지어주면 좋겠다. 이 땅에 다른 아무 흔적 없이 글 한줄 남기는 것도 그럴듯하지 않은가.
2020년 12월 청주의 변두리에서
최 한 식 쓰다.
여기 소시민이 산다
⦁내가 자서전을 쓴다고…?
Ⅰ. 내 삶의 바탕 : 변두리
1. 내 인생의 요람
⦁유년의 추억
⦁내가 겪은 세기의 대결
⦁고향을 그리며
⦁새벽녘의 꿈
⦁봄날의 아릿한 찬바람
2. 나를 만든 가족
⦁부모님 생각
⦁아버지에 대한 이해
⦁내가 본 어머니의 삶
⦁아버지 같은 형
⦁작은 형과의 이별
⦁오직 믿음으로
3. 군대의 추억
⦁막막한 나날들
⦁아련한 밤 소풍
⦁미안했던 이별의식
Ⅱ. 내 삶의 모습 : 소시민
4. 내 취미와 놀이
⦁고흐를 만나다
⦁내 삶의 창문
⦁숙제 같은 독서
⦁정지용 문학관을 가다
⦁요르단의 하늘
5. 아내와 함께
⦁솔숲에서
⦁우리들의 서울 나들이
⦁연녹색 댓잎들
⦁바다와 함께 산 하루
6. 자녀들은 다 자라고
⦁끈
⦁찬찬이
⦁축하하네, 진짜 어른들
⦁막내와 안경
⦁승진
7. 우리도 소풍가요
⦁때늦은 나들이
⦁순천만의 갈대
⦁성 베드로 대성당
⦁파리에서 보낸 사흘
⦁하산 길
8. 외손녀가 태어나고
⦁정말 반갑다
⦁무덤덤하기
⦁엄마, 아빠를 안다는 것
⦁돌을 맞은 너에게
9. 소심한 내 모습
⦁내 일상의 삶
⦁귀뚜라미의 당부
⦁20년 동행의 끝
⦁전화에 대한 변명
⦁조심 또 조심
⦁유야무야
Ⅲ. 내 삶의 생각들 : 사색의 편린들
10. 부르신 그 분을 생각하며
⦁내 인생의 중간점검
⦁시원찮아도 괜찮아
⦁힘을 꼭 가져야 하나
⦁고난을 묵상하며
⦁맨송맨송한 성탄절
11. 세상을 보는 눈
⦁고통을 거쳐 얻는 힘
⦁미안하고 부끄럽다
⦁대나무 가는 줄기
⦁우리 사는 세상
12. 삶의 빛나는 조각들
⦁영원을 꿈꾸다
⦁흔적 속의 기억
⦁금장시계
⦁화해
⦁안을 보는 거울
⦁여신 아프로디테
13. 사색의 둥지를 틀고
⦁공림사
⦁구름둥지
⦁살구꽃 벚꽃은 피었다 지고
⦁서가에 놓인 문진
⦁아름다움에 대하여
⦁책을 덮으며
Ⅰ. 내 삶의 바탕 : 변두리
1. 내 인생의 요람
⦁유년의 추억
⦁내가 겪은 세기의 대결
⦁고향을 그리며
⦁새벽녘의 꿈
⦁봄날의 아릿한 찬바람
2. 나를 만든 가족
⦁부모님 생각
⦁아버지에 대한 이해
⦁내가 본 어머니의 삶
⦁아버지 같은 형
⦁작은 형과의 이별
⦁오직 믿음으로
3. 군대의 추억
⦁막막한 나날들
⦁아련한 밤 소풍
⦁미안했던 이별의식
1. 내 인생의 요람
⦁유년의 추억
가끔씩 생각이 난다. 빨간 고추잠자리가 날고 산책길 아릿한 들풀향기에 삽상한 바람이 불면 흐릿한 기억 속 내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른다. 기억은 혼재되어 조각처럼 나타나는데, 몇 개를 불러내 보자.
가장 오래된 듯한 기억이다. 한 겨울에 내 살던 마을 고샅인지, 골이 난 나는 털장갑을 버리고 갔다. 당연히 부모님 중 어느 분이 주워 오리라 여겼을 텐데, 장갑을 챙기지 않아 잃어버렸다. 길었던 겨울, 한 번의 골부림으로 벙어리장갑이 사라졌다. 부모님 편에선 어렵게 사준 것을 철없이 잃어버린 어린 아들이 야속하고 안타까웠을 게다.
내가 태어나고 몇 년을 보냈던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모른다. 어른들로부터 ‘북리’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어쩌면 현재의 외북동 부근이 아닐까 한다. 집 뒷마당에 감나무가 있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가보면 감꽃과 감이파리들이 떨어져 있었고 감꽃의 달착지근한 향기가 나서 그것들을 묶어 목걸이를 하던 기억이 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둠벙이 있었는데 동네 형이나 누이들이 잠자리를 잡아 실에 매어 그것으로 또 잠자리를 잡았다. 햇볕이 따가웠으니 늦가을쯤이었을 것이다.
그 곳을 떠나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이었다. 온 가족이 이불과 가재도구 같은 것을 이고 지고 시리고 추운 눈길을 걷고 걸어 청주시내로 왔다. 내 나이 대여섯이었을 게다. 형들과 나이차가 있어 큰 형은 스물 안팎, 작은 형은 열대여섯 되었을 테니, 사정을 알겠지만 누구도 구체적으로 얘기한 것 같지 않다. 더 이상 그 마을에 살 처지가 못 되어 빚잔치를 하고 떠나 온 것으로 짐작만 하고 있다.
우리 가정이 그 때 정착한 곳이 금천동사무소 뒷산 꼭대기 집이었다. 우리 집 위로는 절뿐이었고 아래로 몇 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셨다. 마을에 논 일이 있으면 가셨고 우렁이 같은 것을 잡아다 내게 주곤 하셨다. 구슬을 만들기도 하셨고 시장에 나가 닭을 사고팔기도 해서 아버지를 따라 하루 종일을 장에서 보내며 약장수들이 보여주는 신기한 것들도 보았다. 늦게야 알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고 부모님은 힘겨우셨을 게다.
외딴집이었고 길로부터 돌아앉아 있어 밤이면 마을 어른들이 우리 집에 자주 모였다. 그 힘든 시절 시간을 보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게다. 모이면 자연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을 풀어놓았다. 절의 젊은 스님이 어디 가서 무엇을 해 얼마를 벌었다는 것이 단연 흥미가 있었다. 그래도 긴 세월을 함께 했던 이들이라 마음을 열었던 것 같았다. 그분은 체격과 목소리가 좋아 많은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그 분이라고해서 매번 계시가 있고 족집게였을까. 얼렁뚱땅 넘긴 이야기들이 웃음을 자아냈다. 우리 밑에 집에는 한쪽 다리를 저는 분이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고물을 사다 팔았다. 자주 척산을 다녀왔다고 했는데, 이제 가끔 그 지역을 지나면 그 분 생각이 난다.
한 번은 아버지가 명절을 앞두고 나를 데리고 할아버지 묘소에 갔는데 그곳이 진천 사석부근이었다. 개울만 따라 가면 된다고 하시며 길도 없는 산을 풀들을 헤치고 가서 잡풀이 무성하고 무덤의 형체도 없는 곳을 알려주시며 기억해 두라고 하셨다. 정면으로 멀리 신작로가 뚫리고 있었고 무덤 옆에 큰 나무가 있었다. 무덤가에 자잘한 돌들을 묻어두고 왔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들과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할아버지 묘소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후회를 많이 했다.
어린 시절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내 이마에 사마귀가 나서 쉬 낫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과 가끔 어울려 놀았으니 아이들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심심하면 “마빡에 혹”이라고 나를 놀렸다. 부모님이 내 혹 때문에 애를 많이 썼지만 잘 낫지 않았다. 가렵기도 했는지 잠을 자면서 무의식적으로 긁곤 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 끝에 빨갛게 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학교 가기 얼마 전에 없어져 더 이상 놀림을 받지 않았다.
가족 모두가 어디를 가곤 했는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혼자인 때가 많았다. 날이 어두워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혼자 있어야 했다. 때로 내가 등잔불을 켜는 날도 있었다. 혼자 놀기는 힘들지 않았다. 제일 쉬운 것이 구슬치기였다. 혼자 하는 구슬치기는 따지도 잃지도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그러다 지루하면 낮 시간 내내 방송하는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오후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에는 어린이를 위한 방송을 해서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마당 양 쪽으로 비스듬한 높이에 작은 나물 밭이 있어서 장다리와 배추꽃, 호박꽃과 찔레 같은 것들을 철따라 볼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가난이 어른들에게는 고통이었지만 내게는 자연을 경험하고 낮에는 외로움을, 밤에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조기교육의 시기였다. 때로 무능해보였던 아버지, 자주 아버지와 다투고 눈물짓던 어머니, 그 사이에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내가 몰랐던 형들과 누이, 모두가 힘겨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 때는 한 방에 모두 모여 잠자고 티격태격하며 살았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특별대우와 가득한 사랑을 받던 그립고 아련한 추억이 서린 내 유년이다.
⦁내가 겪은 세기의 대결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이었으니 1970년 무렵이었을 게다. 그 시절 나는 참 모범생이었다. 집과 학교를 왕복하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학교에서도 가만히 앉아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가는 것도 선생님의 허락을 받았다. 친구래야 학교 오가는 길에 만나는 같은 동네 아이들이 다였다.
육학년이 되었어도 그 모양이니 내게 시비를 거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키도 작고 힘이 약한데다 전혀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니 또래들도 제쳐 놓았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친구 따라 도장에 구경하러 갔다가 사범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고 태권도인지 합기도인지를 배우게 되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운동을 배우려했지만 세월이 가도 흰 띠를 벗어나지 못해 끝내 파란 띠 한 번 허리에 둘러보지 못하고 내 무도인의 생활은 끝이 났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서열에 민감한 이들이 있는가 보다. 내가 운동을 배운지 몇 달이 되었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그들은 싸움을 부추겼다. 상대는 별명이 ‘빼빼’였을 만큼 마르고 기운을 잘 쓰지 못하는 아이였다. 말하자면 반에서 싸움을 제일 못하는 둘을 붙여놓은 셈이다. 날짜를 정하고 홍보를 했다. 정해진 날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흥행사들은 신이 났다.
학교가 끝나고 한 무리의 악동들은 산에 올라가 무덤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의 싸움은 단순명료해서 코피가 나거나 울면 끝이 났다. 우리 두 선수는 진지하게 싸움에 임했다. 심판의 신호와 함께 서로 자세를 잡고 묘지 앞 무대를 두세 바퀴 돌았다. 둘 다 한 번의 공격도 없이 빙빙 돌기만 하자 심판은 끝을 외쳤다. 심판진들이 어떻게 판정을 내렸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후로 그 친구가 나를 무서워하는 빛이 역력했으니 현실은 내 판정승이었다.
이제까지 누구와 맞싸워 본적이 없다. 그날이 내 생애 유일한 대결이었으니 내게는 세기의 대결이었다. 5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때의 악동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오히려 그 때는 내가 잘 싸우지 못한다는 것에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티브이 방송에서 이종격투기 경기를 자주 보여준다. 그 방송을 가끔 보면서 내 몸이 전후좌우로 기울고 간혹 움찔움찔하는 것을 느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논리도 마음에서 솟아오른다. ‘내가 남을 이길 수 있다는 신체적 확신이 자신감의 원천이라’는 유치한 발상이다. 그것이 조금 다듬어져 나타나는 게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최소한의 호신술 정도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몇 년 전에 온 가족이 유럽을 다녀왔다. 출발하기 전에 나는 간단한 운동을 배울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나 말고는 가족 모두가 여성이니 외국에서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눈앞에서 물건을 낚아채 도망가면 쫓아가 찾아올 만큼의 힘과 근력은 필요할 것 같았다. 세계에서 소매치기가 많기로 이름난 도시 중 세 곳을 갔었다. 두 곳에서는 누군가 지갑에 손을 댔는데,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다행이 현금을 넣지 않아서 바닥에 떨어진 것을 챙길 수 있었고, 여권만 잃어버려 곧바로 임시여권을 재발급 받았다. 남자에게 힘은 여성들에게 여성미 같은 건 아닐까.
요즘은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전자기기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훨씬 잘 다룰듯하다. 집에서의 위세를 반영하는 티브이 리모컨 소유권도 어린이가 더 우선이지 싶다. 밖에 나가면 그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험악하고 영악하다. 어린이 노래인 동요는 어디가고 유행가를 좋아하고 팝송을 줄줄 꿴다. 풍요로워진 덕이겠지만 한 편으론 아이다움을 너무 일찍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내 어린 시절에는 또래들이 산으로 들로 냇가로 몰려다니고, 친구네 집에서 숙제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던 듯하다. 모두가 힘들고 어렵던 시절, 함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치된 듯 자랐지만 친구끼리 어울림은 더 잦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자녀가 하나인 경우가 많아 왕자와 공주처럼 대우받으며 자라니 좋은 점도 많지만 폐단도 적지 않을 게다. 학교가 멀지 않은 데도 차로 데려다 준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순례에 바쁘다. 집에 돌아와도 자기 방에 들어가면 가족과 별반 교류가 없다. 실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 전자기기와 노는 것에 더 익숙하고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하다.
방송의 영향으로 이런저런 세기의 대결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얼마 전에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바둑대결이 벌어졌다. 결과는 인간의 완패요 인공지능의 완승이었다.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더 어려서부터 한 곳에 집중해야 두각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점차 우리가 사라지고 개인만 강조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지금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난다면 몇 명이나 알아볼 수 있을까. 당시에는 한 반이 80명 가까웠다. 아마 대여섯을 넘을 수 없을 게다. 내 슬픈 지난날의 자화상이다.
다시 만나 함께 할 기회가 온다면 이제는 무엇으로 세기의 대결을 펼칠 수 있으려나. 어디선가 비슷한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을 그날의 악동들이 보고 싶고 함께 대결을 펼쳤던 친구는 더욱 보고 싶다. 내 자녀들마저 훌쩍 커버렸으니 손자 손녀들이라도 친구와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그들에게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어떤 세기의 대결거리가 있으려나.
⦁고향을 그리며
무척 당황스러웠다. 동네는 분명 맞는데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골목과 산과 오솔길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한 동네 살던 어르신들을 찾을 수 없고 친구들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을이 오면 좁다란 길을 따라 메뚜기 잡던 논들, 햇살 따갑던 오후에 첨벙거리던 제법 폭이 넓었던 개울, 가끔은 죽은 뱀들이 누워있고 산 뱀들도 스르르 지나가던, 철따라 꽃들이 피던 산길도 우거진 풀들에 사라지고 없었다.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난감함이 밀려들었다. 빈 가슴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워도 변해버린 낯선 도시에 내 유년시절이 송두리째 사라진 느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 번 더 가보기로 결심했다. 차라리 살았던 옛집을 근거지로 해서 기억을 더듬어 가고 싶었다. 내 삶의 십오 년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산꼭대기에서 산 아래 마을로 집을 옮기고 나서는 잘 찾지 않다가 사는 곳을 옮기고 오랜 세월이 흐르니 낯선 마을이 되고 말았다. 그 마을에 사시던 형님마저 이사하니 더 갈 일이 없어졌다. 마을도 끈질긴 인연이 있는지 처가붙이들이 그 마을 가까이에 집들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내 어릴 적, 그렇게 커보이던 우리 동네에 이웃한 마을이었는데 이제는 한 동네와 다름이 없이 되었다.
몇 년 전, 명절에 그곳에 간 김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틈을 타 혼자 내 살던 근처를 찾아보려 나섰다. 십 년이 훨씬 넘게 살던 집으로 가는 길은 찾기가 어려웠다. 수없이 다니던 골목길은 사라지고 정든 이웃과 친구들의 집 대신아파트와 연립들이 들어서 길을 막고 있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중턱도 가기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길 없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풀이 우거지고 발이 빠지는 곳을 지나서 허위허위 도달한 곳에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철거대상으로 남은 폐허가 되어가는 뼈대만 유지하고 있는 집들이 있었다. 어릴 적 우리 집과 아랫집, 그리고 절이었던 곳들이었다.
내 유년, 부모님과 따스했던 추억들이 만들어졌던 좁다란 공간들, 혼자 놀던 여기저기 드문드문 잡초들이 자라던 마당, 초등학교 고학년 때, 설치했던 펌프가 놓였던 공간들. 에돌아 산길로 이어지던 학교를 오가던 길들을 기억 속에서 더듬어 보았다. 마당보다 높았던 밭 쯤 되었을 곳에서 전망을 막아선 연립주택에 막혀 눈을 감고 예전의 풍경을 그려보았다. 커다란 냇물이 흐르고 골목이 나타나고 논들과 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입구 같았던 다리와 이어진 가게와 이발소, 국숫집과 쌀가게, 공터가 있었다. 내 서있는 곳 가까이에 집 뒤로 바위가 많았던 바위백이 집과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던 아랫집 은수네, 마을 사람들이 길어먹었던 샘이 있던 태용이네 집이 있었다.
엣 모습과 현재의 시설물들이 겹쳐지고 있었다. 장마가 지면 마을 사람들을 두렵게 하던 커다란 냇물은 복개되어 넓은 도로가 되었고, 가을이면 벼들이 일렁이던 논들은 주택들이 들어섰고 개울 건너 산이던 곳엔 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어릴 적 공간에 세월이 쌓이고 길이 나고 현재의 풍경들이 하나씩 덧칠이 되어 마을의 모습이 되었다.
이곳이 내 고향일 수 있는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다. 어려서 이사와 십오 년여의 세월을 살았던 곳일 뿐, 그 시절 풍광은 찾아볼 수 없다. 친척도 살지 않고 그 시절의 어른들이나 어린 시절 동무들도 찾을 수 없다. 선조들 묘소가 모셔져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명절에 찾는 곳이 고향이라면 그것도 아니다.
고향의 의미가 무언가. 유년의 추억이 서려있어 삶에 지치고 어려움을 만날 때 돌아갈 수 있는 곳, 철없던 시절, 이해관계에 물들기 전, 걱정 없이 산과 들을 쏘다니던, 눈뜨면 매일같이 만나던 동무들이 있던 곳, 항상 내 편이고 나를 믿어주던 부모님이 계시던 곳이라면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운 이곳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추억 속에 내 고향이 있다.
어둠침침했지만 해 넘어 갈 때가 되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그을음으로 까매진 낮은 천장과 양은솥 걸린 부뚜막이 있는 부엌이 있고, 이불 펴진 아랫목 따듯한 곳에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어머니는 눕게 하곤 하셨다. 밤이 되면 등잔불 아래 떨어진 양말을 깁고, 아침이면 추운 부엌에서 달각달각 아침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추억 속에 계신다. 내 놀던 공터와 늘 오가던 골목을 눈만 감으면 순식간에 불러올 수 있다.
명절이 아니어도 차를 타고 시간 들여 찾지 않아도 옛집 앞 고갯마루에 올라 신작로를 바라보며 장에서 돌아오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친구들 집을 찾아내기도 하다 땅에 금을 긋고 혼자 놀고 심심하면 집안으로 돌아와 스피커를 듣고 낮잠을 자고 기다리다 지쳐 울기도 하는 나를 추억 속에서 만난다. 그 곳에서 마을 어른들도 만날 수 있고 동네 친구들도 볼 수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에 가는 고향은 더 이상 내게 없지만 힘들어 낙심될 때, 조용한 방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으면 오십여 년 전, 그곳,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고 골목길을 걸어 아버지가 오시고 매운 연기 후후 불며 저녁밥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계시는 그곳이 보인다. 그 어머니가 나를 부르고 보리밥에 나물국을 차려주는 상상을 하며 아릿한 냄새가 나는 행주치마를 입고 있는 주름진 어머니 얼굴을 회상하면 가슴속에 조용히 힘이 고인다. 그곳이 내 유년을 불러오고, 내게 활력을 되찾게 하는 고향이다.
⦁새벽녘의 꿈
새벽녘에 어린 시절 추억이 고여 있는 곳의 꿈을 꾸었다. 왜 갑자기 그곳이 꿈에 보이는 것일까.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산 아래 꼭대기 집이었다. 없는 길을 낸 듯, 외돌아 앉은 집으로 마당 가운데 장독대가 있고 그 너머로 평소에는 흐르지 않다가 장마 때에나 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 있었다.
꿈속에는 그 도랑이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정비되어 있었고 옛길은 넓은 포장도로가 되어 있었다. 집은 흔적도 없어지고 도로 높은 곳에 올라보니 군데군데 과수원과 밭이 있고 사이사이 현대식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의 현재 모습을 알고 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삼십분이면 찾아가 볼 수 있으며 꿈에 본 그 모습이 아니다. 그곳을 떠나 온지 사십여 년이 흘러 동네는 변하고 어렴풋한 흔적이 남았다.
내 유년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내가 대여섯 살에 그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것이며 저녁이면 거의 매일 여러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주로 화투를 하다가 헤어지곤 했는데 그 사이사이 동네이야기를 했었다는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 집에 모인 것은 한적하고 으슥한 지형적 요소가 가장 컸을 것이다. 이제 생각해 보면 그들 중 번듯한 직장이 있거나 잘 사는 이는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힘겨운 이들이 그날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데 없어 동병상련으로 함께 모여서 시름을 달랬을 게다.
그 덕에 우리는 짧은 기간에 사람들과 녹아들 수 있었다. 당시에 마을이 크지 않기도 했지만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과 서로의 사정을 더 잘 알았고 더 많은 이들의 면면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기억나지 않으니 자연스레 가명일 수밖에 없지만 아랫집 은수네, 그 옆집 운용이네, 절집 기태네, 돌아 오르는 명숙이네, 인구네. 그 밑에 순구네, 우리 아래아래 집 무희네, 태용이네, 담배 집 주현이네….
그 집들을 부르는 명칭도 재미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꼭대기 집이라고 했고 어떤 집은 바위백이 집, 공동 샘 집, 쌀 집, 목수네 집이라고 불렀다. 이제 그들은 다 어디로 갔나. 길은 넓혀지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마을은 몇 배나 커져 있어 찾아가 보아도 아는 이 만나길 기대하기 어렵다.
아마도 이웃들이 조금씩 멀어져 간 것이 유행처럼 번졌던 지붕개량과 펌프 놓기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마을 공동 샘에서 물을 길어다 사용하는 것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집마다 펌프가 생기니 마주하는 일이 줄어들고 해마다 새로 하던 지붕도 반영구적 기와나 슬레트 지붕으로 바뀌니 더욱 함께 할 일이 없어졌다.
아이들은 학교가 파하면 으레 동네의 큰 마당이나 신작로에 하나 둘 모여들어 자치기, 제기차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주먹야구 등을 하다가 만화방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집집이 T.V가 생겨서 일찍 집에 돌아가 자기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편리함을 얻은 대가로 혹 이웃을 잃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이십여 분 산길과 오솔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혼자 오고 가는 날도 있었지만 대개는 집이 먼 친한 친구가 들러서 함께 가곤 했다. 학교 오가는 길에 탈도 많고 사건도 더러 있었다. 갑자기 친구네 집에 같이 가기도 하고 중간에서 놀다가 늦게 오기도 했으며 서로 싸우기도 했다. 때로는 선동하는 아이가 있고 죽이 맞으면 학교를 빼먹고 놀다 와 야단을 맞기도 했다.
힘에 의한 서로의 역학관계가 은연중에 형성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기기도 했었지만 그 때는 그래도 끈끈한 친구의 세계가 있었다. 한 반에 칠팔십 명 학생들이 고물고물하고 고무신 신고, 선진국 원조로 옥수수 빵 급식 먹고, 이부제 수업을 해도 빈부격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학원도 없었고 과외도 드물었고 심지어 유치원도 별로 없었다. 영어를 처음 배운 것이 중학교에 입학해서였다.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던 등하굣길과 함께 나누던 이야기, 시험 전날이면 친구 집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밤새워 이야기하고 놀았던 그 때가 그립다.
꿈에 나타난 유년의 추억이 고여 있던 곳에서 아물아물 살아난 기억들이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해 주면서 잊었던 것들 가운데 의미가 있는 것은 없느냐고 내게 묻는 듯하다. 잃어버린 이웃들, 헐렁해진 인간관계, 내 가정 중심으로 너무 멀리 떠나온 건 아닌지를 사십여 년 세월을 더듬어 돌아본다.
마을에서 알고 있는 이들, 관계가 형성된 가정들을 꼽아보니 내가 현대판 산골마을이나 외딴 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내심 좋아했는데 그것이 커다란 착각일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꿈은 내게 무엇을 알려 주려했을까.
⦁봄날의 아릿한 찬바람
설날 처가에 갔다. 세배를 하고 다른 이들이 윷놀이를 하는 틈에 내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냈던 공간들을 돌아보았다. 15여 년간의 세월을 보낸 잊을 수 없는 공간들. 요즘 꿈에도 자주 나타나는데 그 장면은 옛날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다. 감정의 정리를 위해 한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마음 한 구석에 늘 살아 있는데 그 주변을 들르면서도 정작 찾아보지 못한 곳이다. 현재의 상황도 대충알고 예전의 모습은 더욱 익숙한데 그 두 모습이 제각각이어서 같이 만나 서로 확인을 하고 하나로 새겨 넣고 싶었다.
바람은 조금 찼지만 화창한 날씨다. 운동화가 아니라 염려는 되지만 그리 높거나 험하지 않으니 어려울 것 없는 걸음이다. 15년여 산 곳이라 눈을 감으면 큰 길과 도랑과 골목까지도 쉽게 되살아나고 몇 걸음쯤 걸으면 어디라는 것도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도 눈을 뜨니 현실은 많이 다르다.
살던 집을 가보았다. 크게 변하지 않은 곳은 주민 센터, 절, 집 앞의 산이 다. 물이 흐르던 도랑은 복개(覆蓋)되어 있어서 생경하다. 골목을 보니 옛 감각이 살아났다. 40여 년 전 골목. 그런데도 당시만큼의 깔끔함이 없다. 몸의 감각을 더듬어 따라가 보니 왠지 길들이 기억속보다 조금씩 짧아져 있다. 갈래 길을 지나 열다섯 발자국쯤 가면 있었던 동네 샘, 태용이네 집, 분명했다. 거기서 열서너 걸음 가면 층계와 대문이 있던 무희네 집, 담만 남아있고 집은 형체도 없다. 다시 니은자(ㄴ) 형태로 돌면서 자리 잡은 바위백이 집, 빌라였던 모양인데 비운 지 오래된 듯 인기척이 없다.
길이 허물어지고 형편없이 좁아져 있다. 눈감고 몸의 기억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잡목과 풀들이 우거져 그럴 수도 없다. 우리 집 밑의 은수네 집, 바로 윗집이 우리 집이었는데 현실은 기억과 달리 어설프다. 다리도 없고 고개도 없고 길이 없어져 너무도 낯설다. 절집이 폐허인 채로 남아있다. 한쪽 외벽의 독특한 동자승 그림만이 절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 옆으로 말 무덤이 있고 밭이 있고 우리 집인데, 너무도 간격이 좁다. 구조가 분명히 우리 집이다. 15년 가까이 살았던 어린 날의 공간이다. 패찰에는 그 시절과 지번이 약간 달라져 있다. 내가 거닐고 뛰놀던 밭 사이의 길들과 산도 그 모습을 잃고 있다. 추억 속에는 너무도 선명한데 현실이 오히려 흐릿하다.
도시가 확장되며 살던 곳 길이 넓혀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섰으려니 했더니 산을 보호해 도시를 푸르게 하려는지 산 밑 마을 일부가 없어지는 꼴이 되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어렵지만 꿈을 키우는 한 가족이 내 살던 곳에 살고 있겠지. 그 과수원 너머로 넓은 길이 뚫리고 차들이 심심찮게 다니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뻔 했다.
오랜 세월 초등학교를 다니던 지름길은 아예 없어져 가볼 수 없다. 한동안 다니던 아랫길을 걸어본다. 마음이 스산하다. 이제는 꿈에도 그 고운 길, 밭과 도랑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학교에서 돌아와 뛰어 놀던 곳들을 돌아본다. 덮여진 도랑 뒤에 자리했던 추억의 건물들이 옛날의 모습대로 마음속에 살아난다. 큰 다리와 이발소, 주현네 담배가게와 만화가게, 강씨네 술집, 쌀가게와 동장 아저씨댁, 과자집 국수집 그 옆으로 제기차기 딱지치기 하던 공터. 다 사라지고 새 건물들이 즐비하다. 둑 따라 거닐며 메뚜기 잡던 냇가는 간데없고 포장된 도로만 눈에 들어온다. 한 여름 놀이터가 돼 주던 밤나무산과 도랑가에는 교회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한여름 아카시아 향기를 풍기던 양관 길은 긴 세월 자리를 지키는 건물로 확인한 위치는 그대로나 구름다리가 없어지고 나무들도 그곳에 없었다. 40여 년 전 친구들과 오가던 길을 홀로 걸으니 그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광선, 기붕, 장현…. 그들과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이다. 함께 다니던 골목길, 걸음걸이들, 보냈던 적지 않은 시간들. 하지만 이제는 한 친구를 빼고는 안부도 모르고 연락도 없이 산다. 초등학교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중학교는 옮겨가고 그 자리에 대단위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다. 평탄하고 바르게 넓게 포장된 새로 난 길에 밀려난 좁다란 옛길을 천천히 걸으며, 넓은 길은 차를 위한 길이요 좁고 오래된 길이 사람을 위한 길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 난 큰 길에서 한두 집을 건너면 옛집들이 보이고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골목들이 나온다. 듬성듬성 눈에 띄는 단층집과 기와집들을 유심히 살피며 그 옛날 기억을 불러내려 애를 써 본다. 돌연 길가에 음식점 간판을 달고 있는 일층기와집과 골목의 기억이 살아나면서 까만 교복에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걸어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긴 개울을 따라 눈 녹은 물들이 졸졸졸 흐르고 따듯해진 날씨에 동네 아줌마들은 방망이 두드리며 빨래를 하고 학교 갈 나이가 안 된 아이들은 개울을 따라 징검다리를 뛰어다니며 자기들끼리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경로당 노인들은 낮술 한잔씩을 하셨는지 붉어진 얼굴로 개울둑을 산책하고 계신다. 다리 위로는 리어카를 끌고 고물장수가 가고 고개를 들면 산 밑에 절이 있고 옆으로 우리 집이 보인다.
서둘러 가도 아무도 없는 곳, 대문도 없고 방문도 잠겨있지 않고 먹을 것도 읽을 것도 없는 우리 집, 그래도 나 혼자 몇 시간이고 묻고 답하며 구슬치기 딱지치기하며 놀던 곳. 그곳이 이제는 이 땅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내 마음에 아릿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간다. 봄은 오고 있는데 나는 춥다.
2. 나를 만든 가족들
⦁부모님 생각
높은 곳에 있어 우리 집은‘꼭대기 집’이었다. 더 높이 있는 건 절[寺]뿐이었다. 산 아래 무덤을 지나 폭 들어간 곳에 외돌아 앉은 조그마한 집, 어릴 때 내 살던 집이다. 비가 오면 마당 옆으로 경사를 따라 물이 흐르고, 비스듬한 언덕은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호젓한 길엔 키 낮은 풀들이 듬성듬성 나고 길가엔 오리나무, 찔레나무들이 자랐다. 동쪽과 남쪽엔 조그만 채소밭이 자리했었다.
형편이 어려워 친척의 도움으로 마련한 집, 내게는 자연과 함께 하는 놀이터였다. 때를 따라 나팔꽃, 호박꽃, 장다리가 피고 벌, 나비와 온갖 벌레들이 찾아왔다. 한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면 개구리가 뛰어들고, 학교 가는 길에는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났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우리 집이 대단한 줄 알았고, 친척들 왕래가 적어 몰락한 양반이려니 했다. 서너 대만 위로 올라가면 유력한 벼슬을 한 조상이 있을 줄 알았다. 나이 들어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다고, 유력한 가문이면 한말과 일제 강점기, 해방 전후의 혼란기와 한국동란 또 민주화시기를 거치는 동안 눈에 띄는 일이나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조차 없었다.
청주시에 살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전기가 들어오고, 내 책상을 처음으로 가져 본 게 중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였다.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많은 애를 쓰셨지만 무능했다. 농사철에는 남의 집 일도 하고, 구슬 만들기, 자리 짜기, 냉차장수, 장돌뱅이를 하셨지만 그다지 잘 된 일은 없었다. 한 해가 다르게 자녀들이 자라나고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으니 아버지도 많이 답답하셨을 게다.
아버지는 어린 막내인 내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모심는 일을 하면 논우렁이를 잡아다 주기도 하고, 나들이를 할 때면 데리고 가고 한여름 냉차장사를 할 때는 아침부터 온종일 막내와 함께 하곤 하셨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하고 치밀하셨다. 장에서 팔다 가져온 강아지나 닭이 집을 나가면 온 동네를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냈다. 한동안 가게를 크게 하던 동생 집에서 잔일을 하면서 가족 생계를 해결하기도 하셨다. 방이 두 칸일 때는 나이가 든 큰형과 작은 형이 윗방을 쓰고 부모님과 누나와 내가 안방을 썼다. 불편이 많았을 테지만 내게는 더없이 좋은 기억이었다. 다른 가정도 모두 그렇게 지내는 줄만 알았다.
형들과 누나는 높은 언덕 아래 외돌아진 작은 집이 초라하고 부끄러웠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오히려 아늑하고 포근했다. 장독대와 밭과 경사진 언덕에는 철따라 푸나무와 그 꽃들이 피어나고 울안의 뽕나무와 야생 보리수는 온통 내 눈과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학교에서 늦게 돌아올 때에는 깜깜하고 호젓한 골목길을 두려움 속에 막내혼자 타박타박 걸어올 게 걱정되셨는지 어머니는 큰길가까지 나와 있다가 내 모습이 보이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곤 하셨다.
어머니에 대해 잊지 못하는 건, 늘 가난하게 사셔서 어떤 일이든 하지 않으면 불안해 하셨다. 노년에는 중앙공원근처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떼기 장사를 하셨다. 형들이 몇 번 말려 보았지만 어머니의 고집과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게 나였다. 어머니는 젊어서부터 속병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병을 가라앉히려 담배를 배우고 가끔 술을 드셨다. 자주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며 그것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하셨다. 말년에는 나와 함께 두 해 가까이 사셨는데 자주 의견충돌이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철이 들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이제와 마음이 아프다.
먹고 입을 것들이 풍성하고 삶이 편해진 시절을 살면서 춥고 배고픈 시대를 살다 가신 부모님이 더욱 그립다. 하루하루 자식들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길러주신 그 은혜를 어찌 잊으랴.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때가 생각난다. 한적한 산 아래 집에 살면서도 ‘바위백이 집, 내수네 집, 운전하는 집, 영선이네 집, 은수네 집’하며 살던, 다 같이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이웃이 있던 지난날로 며칠쯤 돌아가 살고 싶다.
벌써 어머니 돌아가신지 30년이 되어간다. 그 때 내 나이가 지금의 큰 애 나이와 별 차이가 없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생각하니 새삼 부모님이 존경스럽다. 자녀들이 나와 아내에게 하는 것을 돌아보면 더욱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하다. 두어 시간이면 다녀올 운동동 마을 조금 빗겨난 곳에 함께 누워 계신 분들을 자주 찾아뵙지도 못함이 더욱 죄스럽고 송구할 뿐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해
아버지는 마흔다섯에 날 낳으셨다. 네 살 이전의 기억은 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오십 이전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삼십 여년이 넘는다. 이제야 아버지에 대해 조금 이해가 된다. ‘왜 그렇게 사셨을까, 그땐 어떤 마음이셨을까’가 긴 세월 지나 내가 그 나이쯤 되니 갑자기 이해가 되고 아버지 생각이 언뜻언뜻 내 의식 속에 끼어든다. 내 기억 이전의 아버지의 삶을, 형은 가끔 내게 이야기해 주지만 어떤 느낌으로도 다가오지 않고 내 판단을 더할 수도 없다.
내가 학교에 다니기 전 아버지는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셨다. 구슬을 만들기도 하시고 자리를 짜기도 하시고, 며칠씩 농사일을 하시기도 하고 여름이면 냉차장사도 하셨다. 이제 생각하면 분명한 직업이 없으셨던 것이다. 어떤 일들은 그만 두려면 적지 않은 손해를 보기도 하셨으리라. 나를 데리고 갈수 있는 유일한 일이 냉차장사였는데 그때는 자주 나를 데리고 가셨다. 오전에 나가서 하루 종일 한곳에서 장사하고, 저녁이면 돌아오는 일이었는데 왜 나를 데려 가셨나 모르겠다. 오갈 때 리어카에 나를 태워 주셨다. 우리 옆에는 구두를 고치는 아저씨가 있었고, 가까이 사는 어떤 아줌마는 불쌍해 보였는지 날 데려다 밥을 주시기도 했다. 당시에 아버지는 점심을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나는 기억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아버지는 주로 오일장을 돌며 닭이나 개를 사고팔고 하셨다. 그래서 샀던 닭이나 개가 팔리지 않으면 집으로 가지고 오셨는데, 개는 며칠 동안의 내 친구가 되곤 했다. 그 개가 정들만 하면 내다 팔곤 하셔서 늘 아쉬웠다. 청주 장은 이일과 칠일이었는데 그날은 학교를 마치면 장 구경을 갔다. 장에 가서 한 바퀴를 돌면 대개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고, 가끔은 내가 닭이나 개를 지키기도 했다. 서너 시가 되면 아버지는 나를 떡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얼마간의 떡을 사주셨다. 나는 싫증이 나면 이곳저곳을 돌아보기도 했는데, 특별히 약장수가 있으면 그곳에서 오래 있었다. 그때는 원숭이와 뱀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이 호기심을 끄는 주요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머리 둘 달린 뱀을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한 번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중학교 이후부터는 아버지께서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하신 기억이 별로 없다. 우리 집이 마을에서 가장 외딴 집이었는지, 마을 분들이 밤이 되면 주로 우리 집에 오셔서 놀이도하고 얘기도 하곤 하셨다. 몇 년 후에는 마을에 경로당이 생겨서 아버지도 그리로 가셨다. 거의 매일 아침 드시고 가셔서 밤늦게 오시곤 했는데 어쩌다 며칠 일하는 것 외에는 그 생활이 반복되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시장에 다니며 장사를 하기에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집에만 계시기도 따분하셨을 것이다. 더구나 농번기에 며칠이라도 일하려면 정보가 나누어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유리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과장하는 버릇이 있으셨다. 가진 것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얼마나 힘 드셨을까를 생각하면, 그것도 하나의 탈출구일 수 있었겠다고 이해가 된다.
무언가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해보고 싶으셨지만 딱히 할 게 없었던 아버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마음속으로 늘 미안해 하셨을 아버지의 한평생이 너무도 안쓰럽다. 좋은 시절 한번 누려보지 못하고 몸과 마음, 고생만 하시다 아버지는 몇 달 병으로 어려움 겪으시고 예순일곱에 돌아 가셨다.
그 후로 오랫동안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마음 한편에만 자리 잡고 있을 뿐 마음가득 전면으로 차오르지는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일들을 처리하기에도 쉽지 않은, 그러면서도 성과는 미미한 세월을 살아왔다. 어느 순간 내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려 할 그때에 내 모습에 아버지 모습이 겹쳐 보이고 아버지가 했음직한 고민이 내 현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져 왔다.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고 될 것 같은데, 결과는 없고 세월은 덧없이 흐르는 현실 속에서 답답함과 무능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공자는 현재의 내 시기를 지천명(知天命)을 지나 이순(耳順)으로 향해 한참을 가야 할 시기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나는 아직 불혹(不惑)도 넘어 서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지능이나 학식이 아니라 인생의 어느 지점이 되어야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인생의 선배들이 아무리 조언해 주어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다가 삶의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있는가 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 있어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닌 것 같다. 요즘은 웬만하면 아흔은 기본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때까지 지금의 체력과 지적 능력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제 십여 년, 지나온 세월 미루어 앞날도 짐작할 수 있다.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이제까지 살아온 느슨함을 버리고, 서너 배의 열정으로 남은 세월을 살아 갈 다짐을 스스로 한다.
⦁불쌍한 어머니
어머니는 자주 신세 한탄을 하셨다. 열한명의 자녀를 낳아서 네 명을 기르셨다. 젊어서 화병이 걸려서 그 병을 다스리느라 담배와 술을 배우셨다고 했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아버지와 가끔 다투시고 혼자 소리 내어 우셨다. 어린 마음에도 슬펐다. 많은 일들이 가난 때문이었을 것 같다. 자식들은 커가고 있고 돈 들어 갈 곳은 많은데 집안 형편은 뻔하고 미래조차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얼마나 무력하고 답답하셨을까 지금에서야 이해가 된다.
어느 날인가는 자다가 깨어 보니 가족들이 아무도 없어서 엄마를 부르며 오래도록 울었다. 그 날 어머니는 취로사업을 하시고 밀가루 한포를 받아 오셨다. 어떤 때는 나물죽을 쑤어서 자식들에게는 나물을 주고 부모님들은 뜨거운 국물만 드시곤 하셨다. 날이 밝아도 별로 할 일도 없고 일어나면 추우니 늦게까지 가족들이 이불속에 누워 있곤 했다. 다른 계절도 어려웠겠지만 한겨울에 어머니가 겪었을 난처함과 애처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불기 없는 새벽, 물도 얼어붙는 추위에 양식 없는 부엌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머니는 언제부턴지 동생네 집에 허드렛일을 하러 다녔다. 내게 이모가 되는 그 집은 동네에서 큰 가게를 했다. 전에는 다른 사람을 품삯을 주고 썼던 것을 이모가 우리 형편을 잘 알기 때문에 굶지는 말아야지 하는 배려에서 언니에게 부탁을 했으리라. 어머니도 전혀 거절할 형편이 못되었고 자식들을 먹여야 했으니 고마움으로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그곳에 가셔서 종일 단순한 일 하시다가 밤늦게 음식을 가지고 집에 오셨다. 세월이 흐르면서 요령을 익히셔서 어머니는 저녁을 여유 있게 하고 이모도 알고 인정했던 듯하다. 어렸던 나도 엄마가 계시니 빈번히 가고 그럴 때면 엄마는 맛있는 것을 주곤 했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더 자주 오기를 바라셨을 지도 모른다. 이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니의 월급을 예전 사람들과 비슷하게 주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라고 자식들의 성장에 따른 고통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내 위로 형들과 누이는 원하는 만큼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른 본인들의 갈등과 부모님들의 아픈 마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같이 야간학교에 진학하여 주경야독을 꿈꾸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 두 아들은 재입대한 군 생활과 잦은 가출과 방황으로 딸은 결혼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어찌 보면 모두가 스스로 살길을 찾기 위한 힘겨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너무 어려서 그 일들의 심각성을 모르고 지나왔으니 그것을 다행이라 할 수도 있다.
어머니는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주전부리를 파는 일도 한동안 하셨다. 평생을 가난하게 사셔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일이 힘에 겹더라도 주위의 눈총을 의식하지 않고 하셨다. 어머니라고 왜 편하고 당당하게 인정받으며 살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런 삶의 일차적 조건이 경제적 안정이라고 생각하셨으리라. 어머니는 자주 몸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 험한 세월에 자식을 열 하나를 낳으시고 험한 일들을 치루고 어떻게 온전하실 수 있을까. 그래도 병원에 가보시라 하면 의사들은 다 허가 난 도둑들이라 하셨다. 이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고 약을 드셔도 하루 이틀에 완치될 병들이 아니었고 병원의 일정대로 치료받기가 부담스러워 그때마다 참고 넘기다 보니 아픈 곳이 많아 지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몇 년간을 막내인 나와 같이 사셨다. 그때가 어머니 생전에 가장 한가하셨던 시기였다. 어머니는 그 시기에도 틈만 나면 나물이라도 뜯으러 가셨다. 한가한 것이 불안하셨을지 모른다. 겨울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항상 쌀과 연탄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것이 월동대비였던 것이다.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전화만 하면 금방 가져다주는 것을 왜 그토록 채근하시나 했다. 어머니께는 그것이 긴 세월 두려움이자 압박이었고 절실한 필요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의 가정에 아들이 있기를 바라셨다. 건강이 악화되시면서 못내 그 일을 아쉬워하셨지만 그것은 누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병이 깊어 지셔서 형님 댁으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임종을 하셨다.
어머니는 한과 집착과 설움이 많으셨다. 자녀들을 향한 미안함과 아쉬움도 많으셨을 것이고 자식들도 어머니를 향한 죄송함과 고마움이 너무도 많다. 가족에게 마음을 다 쏟으시고 좋은 것 한번 누려보지 못하신 어머니, 세월이 험했다는 말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부모님 두 분 다 춥고 배고프고 힘들고 어려운 삶만을 사셨고 풍요롭고 편안한 시절은 한 번도 누리지 못하셨으니 너무도 마음 아프다. 오늘의 나는 어머니께 칠 할은 영향을 받았고 빚지고 있다. 미덥지 못한 막내, 서운했던 생각들에 눈감기도 아쉬우셨을 어머니. 끝까지 효도 한 번 해드리지 못하고 맘 편히 해드리지 못 한 것이 마음에 늘 남아 있다. 그래도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 가족을 굽어보시고 잘되기를 바라실 것만 같다. 어머니를 회상하면 늘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 같은 형
큰 형은 대단하다. 일흔이 넘었는데도 직업이 있다. 삶에 고비가 무척 많았지만 꿋꿋하다. 맏이라는 것 때문에 서너 배는 더 힘든 삶을 사는 것 같다. 둘째이기만 해도 고민이나 부담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단지 맏이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한편 고맙고 한편 한없이 미안하다. 그런 일로 가정의 갈등도 수없이 겪었을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 가문에 큰 일이 있으면 상의할 사람도 없고 도움 될 만한 곳도 없다. 내성적이라 평소에 서로 말이 없다. 시대적 상황에 더해진 가정의 가난 때문에 힘들고 고단한 세월을 견뎌 내야만 했다.
형은 중학교 마지막 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생활현장으로 나서야 했다. 돈도 배경도 전문지식도 없이 열다섯 전후의 소년이 할 수 있는 돈벌이가 무엇이 있었을까. 오직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신산한 삶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 초등학교 시절에 형은 군 생활을 했다. 그 기간에도 집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상급자들의 묵인 하에 경제활동을 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군에 재입대하여 길고도 힘든 군 생활을 해야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순간순간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군 생활 후에도 형 특유의 적응력과 판단력 그리고 실행력으로 여러 번의 부를 이룰만한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의 순간마다 동생들을 배려하고 가능성이 적음을 알고도 다시 일어날 디딤돌을 준비해 주고 동생과 조카의 학업을 온 힘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내적 또는 외적인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상의해서는 안 될게 확연하니 그냥 저질러 놓고 불화를 겪고 지나가기를 수없이 반복해 왔다.
형은 동생들에게 여러 면에서 도움을 주고 바람막이 역할을 해 왔다. 그래도 동생들을 향해 미안해한다. 자주 되풀이 하는 말이 그때 워낙 없으니 마음은 해주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왜 모르랴. 알면서도 다른 곳은 손조차 내밀 때가 없으니 아쉬운 소리라도 하는 것이지. 형인들 무슨 잘못이 있나. 태어나 보니 첫째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주어진 것이지. 그렇다고 부모와 시대를 탓할 수도 없고 운명이라고 하기도 마땅치 않다. 큰 형을 생각하면 그저 마음이 답답하고 아프다. 사람이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이렇게 불공평하고 개인의 영향력이 제한적인 것인지, 왜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 하지 않은지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어려서부터 당해온 설움과 무시는 형에게 많은 상처를 주어서 내면적으로 많은 아픔을 쌓아 놓았다. 그것은 경제력과 권력을 향한 갈증으로 표출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룰 수는 없었다. 그 마음에 쌓인 한을 이제는 조금씩 가능한 방법으로 풀어가야 하는데 인생관이 너무도 확고해서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한 가지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권유하고 있는데 받아들이기를 완곡히 거절하고 있다.
큰 형은 나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다. 결혼할 때까지 내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항상 함께 하고 어려운 순간마다 결정적인 힘이 되어 주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기대를 가져주고 늘 믿어 주었다. 자신의 자식들 보다 나에게 더 많은 마음을 두고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중고교 교사가 되어 자신과 가정의 앞가림이라도 분명하게 하기를 바랐으리라. 지금까지도 내가 큰 형에게 인간적으로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면이 그것이다. 그 가치관의 차이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 분의 소명 앞에서 신앙과 사명으로 결단한 길이니 괜찮은데 형은 나를 이해 못하고 늘 안타까워한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형도 나도 살아온 날이 남은 날보다 많은 나이가 되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형에게 많은 도움을 받기만 하고 그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하고 산다. 형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을 날이 올 수나 있을까. 그것이 어렵다면 내 삶의 가치관을 이야기해서 형이 내 선택과 삶을 이해하게 될 순간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그때에는 형도 나를 향한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허사가 아니요 이제까지 생각했던 것 보다 보람과 의미가 충분히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둘 다 적극적이지 못하고 말수가 적은 탓에 터놓지 못하고 마음에만 담고 있었던 많은 이야기를 더 늦기 전에 쏟아 놓고 형을 향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말로써 표현하고 싶다.
⦁작은형과의 이별
늦은 밤에 작은형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무런 느낌이나 감정의 동요가 없다. 스스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놀란다. 작은형이 스무 살 전반까지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생 시절까지 함께 살았는데, 삼남 일녀, 이 땅에 몇 안 되는 동기간인데 이렇게 밋밋할 수가 있나. 밤이 늦어 내일 형님 내외와 함께 올라가기로 했다.
최근 수년 동안 작은형과 그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 어쩌다 명절에 보곤 했는데, 근래에는 자녀들이 가정을 이뤄 처가에도 가야하니 내려오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했다. 한해가 넘었나, 작은형 가족들이 큰집에 들렀었다고 했다. 그때 많이 늙고 심신이 약해 보였단다. 그래도 언제나 가득한 허세가 있어 당당했던 모양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입관을 진행하고 있었다. 작은형이 칠성판위에 누워있다. 한순간, 자녀들의 흐느낌이 일어나고 작은형의 지난날들이 스쳐지나간다. 어느 한 가지 일에 두세 해를 집중하지 못해 나이만큼 많은 직업을 가졌을 게다. 하드 장수, 엿장수를 비롯해 가장 번듯한 직업이었던 택시기사와 이발사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들을 해왔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전문가연 했다. 항상 자신있어했고 못할 일이 없었다. 시작할 때도 돈이 많이 들지만 그만 두려면 뒤처리가 더 어려웠을 게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평생을 당당하게 손 벌리며 살았을 인생이 가여웠다. 어려서는 부모께, 청년시절에는 형에게, 그 뒤로는 아내와 자녀에게 허풍떨며 요청을 할 때도 초라하고 힘겨운 마음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게다. 긴 세월 도박을 향한 병적인 집착을 안고 살았다. 근년에 이르러도 하루걸러 경마장을 찾았단다. 몸을 돌보지 않고 그렇게 살았으니 본인이 힘든 건 말할 게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 어려움도 많이 주었을 게다.
형수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았을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내가 어려 잘 판단하지 못했었다. 형과는 네 살 터울이었으니 큰 차이가 없는 셈이었고, 여러 번 무리한 경제적 부탁을 하는 시동생이 형수 눈에 곱게 보였을 리 없다. 서로 제 살기 어려웠을 시절에 부탁하는 동생과 무리해서라도 들어주려는 형 사이에서 현실을 고려하면 싫은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을 형수, 형수 외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안으로 팔이 굽는 한 가족이었으니 그 관계가 얼마나 뒤틀렸을까. 서로 불신하며 경계의 세월을 살아 각자의 가족들에게 상대에 대한 불평과 비난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 말들은 진실을 떠나 서로를 향한 담이 되고 심리적인 거리를 멀어지게 했으리라.
상갓집의 시간은 조금씩 천천히 흘러갔다. 묘지공원에 이르니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대기실에 가득하다. 지치고 덤덤한 표정들, 고인이 되어도 줄서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듯 알림판에는 진행 중과 완료가 쉼 없이 흐르고 있다. 시간이 멈춰 있는 곳, 주된 일이 기다리는 것인 곳에서 한 시간 반이 지루하게 흐르고 확성기는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작은형의 흔적들, 몇몇의 하얀 뼈들이 마치 쓰레받기에 쓸어 담기듯 일상적인 손길에 한곳으로 모이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따듯한 피가 흐르고 흉하지 않게 살이 붙었을 육신이 오소소한 뼈들로 남고 잠시 후면 작은 항아리에 고운 유골로 담길 게다. 지상을 다녀갔다는 흔적들, 납골당에 안치된 항아리와 그리움을 보여주는 한 장 사진과 꽃들, 상처와 그리움을 품고 이 땅을 이어 살아갈 소수의 혈육과 친지들….
장례의 한 과정이 지났다. 내 삶의 터전으로 돌아오면서 ‘둥지를 떠난 가금류’처럼 살다간, 미운 오리 같았을, 작은형을 생각한다. 육신의 흔적은 작은 항아리에 갇혀 있지만 자유의 혼이 되어 가고픈 곳들을 기웃거리고 있을 게다. 소원했던 자녀들의 집을 돌아보려나, 미안한 마음으로 친인척들을 지켜보려나, 곰곰 생각하다 불현 듯 형과 내가 열 살 터울임이 떠올라 내게도 앞으로 십년쯤이 더 남아있는 게 아닐까하는 짐작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십년이지만 작은형과는 다른 세상에 살아온 것 같다. 형이 거친 들판에서 사냥꾼들과 맹수에게 쫒기는 들짐승처럼 살아왔다면 나는 집안의 가축처럼 편안한 삶을 살아왔다. 자신과 가족의 양식을 위해 늘 불안한 삶을 살았던 형과 달리 나는 때마다 주어지는 먹이를 먹으며 오늘에 이른 것 아닌가 싶다. 작은형만큼 남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고 살았을까. 세월이 흐르면 어떤 기억으로 나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남으려나.
두 시간 반여를 달려오니 내 삶의 터전이다. 다 잘 했느냐는 아내의 말에 모든 게 좋았다고 대답한다. 기대하지 못했는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지 두 분 목사님과 교우들이 위로 차 찾아와 예배를 드려주었고, 교회의 예식에 따라 내가 집전해서 모든 게 은혜롭게 진행되었다고 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차안에서 하던 큰형의 한마디가 귓가에 쟁쟁하다.
“넷 중에 하나가 갔구나.” 외로움과 서글픔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오직 믿음으로
내 누이는 대단한 신앙인이다. 어느 때에 신앙에 입문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평생을 믿음으로 산다. 초창기 신앙생활을 할 때 가정의 반대가 많았지만 꿋꿋하게 극복을 하고 결혼도 서로 믿음 하나만 보고 가정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결정을 했다.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신앙의 신대륙을 찾는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수원에 정착을 해서 시모와 남편과 함께 교회중심으로 신앙을 삶의 축으로 해서 살아 왔다. 남편과 시모가 차례로 하늘나라로 가고 이제는 환갑을 넘기고 두 아들과 함께 여전히 믿음의 힘으로 산다. 누이를 보면서 삶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삶을 관통하는 한 가지 원칙을 가지고 평생을 사는 것은 충분히 존경할 만하다.
누이는 외곬수다.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하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으로 또는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고 흔들리지 않는다. 때로는 그 판단이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고 상식에 어긋나는 억지일 때도 있다. 그렇지만 결정과 실행 그리고 결과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으니 주변에서는 권고에 그치고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다.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음에 그 일로 인해 더 잘해 주실 것으로 믿고, 좋은 일이 생기면 그렇게 인과관계를 맞추어 말하니 나름대로 생활방식에 논리가 있다.
누이의 큰 아들 이름이 축복이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짓기도 쉽지 않고 성(姓)도 박(朴)이라 부르기도 어렵다. 이름만 가지고 보아도 그 누구에게 부탁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만 반영한 신앙의 특색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첫 아이를 낳을 때의 형편과 물질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읽을 수도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이름대로 그 아이를 통해 복 빌어 주시고 번창케 해 주시면 정말 좋겠다.
내게는 매부가 되는 누이의 남편은 삼십대 초반에 중동에서 노동자로 몇 년을 일했는데 당시에도 신학적 지식은 없었지만 열정하나로 평신도 선교사 같은 역할을 감당했다고 한다. 학문적 지식이 일천하고 성경적 지식이 완전 하지 못했지만 확고한 신앙과 삶으로 보여주는 설득력으로 함께 하는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은 힘 있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들보다는 내가 성경이나 신학에 대한 지식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지극히 적은데도 온 힘을 다해 행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충분히 행할 수 있는데도 자신을 합리화하고 이해타산을 따져서 행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매부는 삼십대 후반의 아까운 때에 뜻하지 않은 안전사고로 어머니와 가족은 남기고 하늘로 갔다. 그 뒤처리를 하는데도 믿음으로만 사는 모습이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대기업의 일용직이었을 텐데 상식에 따라 처리를 했으면 주변 사람들이 서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 측에서 회사의 경험 많은 교인들을 내세워 신앙으로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그때에도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설득해 보았지만 혈육조차 믿지 못하고 오히려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것으로 오해하는 듯 보였다. 사회적 지식과 경험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누나는 너무도 쉽게 상식이하의 선에서 합의하고 말았다. 그런대도 정작 본인은 그것을 잘한 일로 알고 있으니 무엇이 옳은 일인지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직접계시를 받는지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씩 한다. 본인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크게 받고 있고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신다고 믿으니 어떻게 반박할 수도 없다. 세월이 흐르고 결과를 보면 응답받았다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 것도 많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강한 자기 확신이나 바람이 응답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이의 근본적인 의도를 알기 때문에 책임추궁을 하거나 크게 상처받지는 않는다. 나대로의 신앙기준을 가지고 선의로 받고 온전히 의지하지는 않는다.
그런 누이도 신앙에 의해 상처받을 때도 있었던 모양이다. 최근 몇 해 동안 다니던 교회를 수차례 옮겼다. 삼십 여년 한 교회만 출석하며 섬겼는데 목회지도력의 교체가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예전 교회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너무 커서 다른 곳에 바로 적응하기가 어려웠던가 보다. 건전하고 가까운 교회를 속히 정해서 마음을 붙이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고를 했다. 이제는 적응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교회규모가 너무 작다고 아쉬워한다. 동생도 계속 작은 교회를 섬기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누구든 잘하고 싶고 보란 듯이 번듯하게 이끌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어쩌랴. 성도들은 작은 교회에서 섬기는 목회자를 귀히 여기고 목회자들은 그러한 교회에서 신앙을 지켜가는 성도들을 한층 귀히 여기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신앙생활에 모범답안은 없는 듯하다. 상식에 비추어 이해되지 않는 것도 개인의 신앙과 판단에 따라 행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한다고 하면 일반적 기준으로 비난하기 어렵다. 그로인해 발생하는 많은 것들을 자신을 성숙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연단이요 훈련이라고 받아들이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자기 확신을 따라 모든 일을 분명히 처리하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것이 신앙일 경우에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믿음으로 사는 누이와 그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항상 넘치기를 기원한다.
3. 군대의 추억
⦁막막한 나날들
어설픈 표정으로 몸에 붙지 않는 군복을 입고 긴장한 열댓 명이 내무반 침상에 한 줄로 서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도 안 되고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되어가는 대로 겪을 수밖에 없다는 체념에 포기상태다. 두 달여, 어떤 이들은 수 년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현실이 되니 막막하다. 스피커에서는 쉴 새 없이 전달사항이 쏟아진다. 자유롭게 살던 이들이 전과는 환경이 판이한 곳에 함께 모여 있다.
전투병과학교. 광주 상무대라 불리는 곳에 장교훈련을 받기위해 소집된 첫날이다. 나누어 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 많은지 간수하기도 힘들다. 편안히 쉬고 있을 토요일 밤 아홉시가 넘어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삼 년여의 군생활을 불안해하며 처음으로 맞이하는 점호시간이다. 외울 것도 많고 할 일도 태산이다. 물건도 내 마음대로 둘 수 없고 규정대로 정돈해야 한다. 함께 있는 이들도 이런 일에는 본성적으로 익숙하지 못한 타고난 자유인들이다. 삼 년여의 세월이 길다기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불편하다. 하루사이에 삶의 형편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너무도 놀랍다.
어머니께 큰절하고 집 나서던 이침부터의 하루가 새삼스럽다. 어차피 다가올 순간이지만 점점 더 불안해졌다. 국가가 부르니 응하지 않을 수 없고 숨을 곳도 없다. 남들은 그렇게 못가서 안달인 장교과정도 본인에겐 전혀 기쁘거나 즐겁지 않은 것이 군댄가 보다. 형에게는 어제 들러 인사를 했다. 누가 막을 수 있는가. 본인만 초조하고 불안할 뿐. 어머니도 나처럼 복잡한 심정이셨을 것이다. 막내를 보내기 싫고 마음이 놓이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과 내 마음이 원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삶의 현실이다. 광주행 버스 안에서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부대 밖을 돌다가 집결지로 향했다. 혼자 왔으니 애달픈 이별의 장면도 없다.
30여 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긴장감으로 시작한 군생활을 오 년 반 동안이나 했다. 요즘도 때로 군(軍)에 있거나 다시 군대 가는 꿈을 꾼다. 용렬한 내가 평생에 벼슬해 본 것이 군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겁이 많고 길들여지기 싫어하며 게으르니 군대와 어찌 어울릴 수 있었으랴.
군인들이 가끔 눈에 띈다. 정이 가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군이 아무리 현대화되었다고 해도 젊고도 자유로운 청년들이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군대의 일처리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이 목적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도구처럼 다루어진다. 국가 수호가 지상과제라 해도 서로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방식이 왜 실현될 수 없는가.
우리사회의 많은 일들이 군대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학교 기업체 행정부 정치권에서도 군대식 문화가 횡행하고 있다. 그 밑바닥에는 결과물을 빠르게 보여주려는 마음과 효율성 그리고 끝없이 부추겨지는 경쟁 문화가 있다.
인간 본연의 자세를 되찾을 수는 없을까. 길게 보며 살고 싶다. 남에게 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이 무언가. 조금 손해보고 양보하고 늦게 하고 덜 좋은 것을 갖는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모두가 천천히 가면 달려가던 이들이 움찔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이 초(秒)단위로 승부가 정해지는 동물의 세계는 아니다. 적어도 한 평생 6~70년은 지나고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리는 것이 훨씬 인간답지 않은가. 혀를 수없이 깨무는 이[齒]는 망가져도 죽음의 순간까지 혀는 멀쩡하게 그 모습을 간직한다.
여유 있는 사회가 문화가 앞선 사회요 사람이 살만한 사회가 아닐까.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공간이 크면 클수록 큰 힘이 가해져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 역동적이지 못하고 속도가 떨어져도 여러 면으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다. 군대가 힘을 갖는 나라가 아니라 소시민이 인정받는 사회, 사십대가 주도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칠십대의 의견도 존중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힘없는 이들이 대우받는 곳이 내가 사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군대이야기에서 곁길로 빠진 느낌이다. 우리사회가 아직도 막막하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아련한 밤 소풍
늦은 밤 관성처럼 저벅저벅 걷고 있었다. 백 한 오십 명이 어딘지도 모를 밤길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말없이 몇 시간을 가고 또 갔다. 가물었는가, 산길을 가다 계곡으로 접어들었나 보다. “십 분간 휴식”꿈결처럼 들리는 소리에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진다. 자리에 철퍼덕 앉아 군장을 맨 채로 드러누우니 하늘이 온통 내게로 온다. 그때 안경을 뚫고 내 눈 속으로 들어온 하늘에는 별들이 빼곡히 박혀있었다. 우수수 별똥별처럼 쏟아져 내 위에 쌓여 별 무덤을 만들 것 같았다.
1984년 6월의 어느 날 밤이었을 게다. 유격훈련을 받고 야간행군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가기 싫었던 군대, 하지만 내겐 반전이었다. 그곳에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이 되도록 학교 집 교회에서만 살았었는데 그곳 삶의 환경은 달랐다. 건물자체에 강의실이 없었다. 연병장 한쪽, 계단모양 스탠드에 지붕을 덮은 강의장은 야외수업과 다름이 없고 웬만하면 구보나 차량으로 이삼십 분 이동하는 훈련장의 연속이었다. 넘쳐나는 햇살과 푸나무에서 뿜어내는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했다. 밤나들이라도 가면, 잊고 살았던 별들과 달, 들풀 가득한 산길을 걸으며 적막을 누릴 수 있었다.
늘 달라붙던 가난과도 무관했다.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온 몸으로 사는 하루하루가 싫지 않았다. 며칠이 남았는가, 훈련소 밥을 몇 끼 더 먹어야 하는가를 한 동기생이 정기적으로 전체 앞에 보고했지만 난 즐겁고 자유로웠다. 훈련받는 기간, 분위기를 다잡으려 겁을 주던 과정이 유격이고, 그 마지막이 야간행군이었다. 산속에 묻힌 훈련 장소들은 더할 나위없는 절경이었고 훈련과정도 다함께 겪으니 문제될 것이 없었다. 남들이 다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는가, 게다가 한두 가지 못해도 괜찮았다. 한 나절이 지나면 어차피 지나가는 통과의례였다.
소풍(逍風)은 소(⼩+⽉+⻍) 풍(⼃+⾍+⼏)일 것만 같다. 자신에 관한 걸 작게 하고(일신에 대한 염려 걱정을 덜고) 천천히 걷는 게다. 바람에 날리는 날벌레와 새들을 보며 바람을 쐬고 혹은 풍경을 감상하며 도시의 경계까지(⼌) 다녀오는 심심풀이 활동이다. 한 끼의 밥 때를 포함해 한 나절쯤 약간의 여흥을 포함해 걸어서 다녀오는 여정이 소풍이 아닌가. 물론 혼자도 무난하지만 가까운 이들과 함께 하면 더욱 좋다.
뭇별을 본, 그 밤은 잘 알지 못했다. 내 이십대의 어느 날 밤 바라본 그 하늘과 뭇별이 평생토록 그리움으로 남을 줄을…. 그 전에도 후에도 가보지 않은 곳, 아마도 전라도 장성이라고 했던 듯하다. 그 밤 나를 위해 하나하나 그 멀고도 높은 하늘에 만들어 박아놓았다고 여겼던 그 별들을 그 후론 자주 바라보지 못하고 산다. 세월이 지나 인터넷을 보다가 우주에 은하가 천억 개 쯤 있고 하나의 은하에 별이 천억 개 가량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 은하에 태양 같은 크기의 별이 이천 억 개가 있고, 보통 별을 포함하면 사천 억 개 가량 된단다. 우리 은하의 태양 같은 별들을 현재 지구별의 사람 수로 나누면 한 사람당 57개 이상이니 놀라울 뿐이다. 은하를 나누어 가져도 14개씩이다.
천상병 시인은‘귀천’에서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노래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어떻게 이 세상 삶을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다가도 그래 결국 아름다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60여 년의 삶이 소풍이라면 내 삶의 소풍은 얼마나 될까. 젊은 시절 군에서의 삶이 소풍이었다면 오 년 반이고 단 하루를 꼽으라면 유월의 어느 하루 그 많은 별들을 보았던 날이고 시간으로는 10여 분 남짓이다.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얼마간 더 걷다가 차를 타고 부대 가까이서 내려 군악대의 축하를 받으며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귀대했지 않았을까 싶다. 그 계곡에서, 몽롱하게 감겨오던 눈꺼풀, 나른하게 힘이 빠지던 두 다리, 발바닥에 전해지던 시냇가 자갈들의 감촉, 군장을 맨 채로 드러누웠을 때의 어깨와 등을 타고 전해지던 혼곤한 피로와 편안한 느낌이 문득 그립다.
수 십 년의 삶 속에 그 때는 큰 의미조차 두지 않았던 그 짧은 순간이 왜 소풍이란 말과 함께 되살아난 것일까. 극적인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는가 보다. 이십 대의 예민한 감수성, 군 유격훈련의 특수성, 야간행군의 고달픔, 십 분이라는 짧은 순간, 생각지 못한 뭇별들을 만난 신선함이 내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삶의 전환점을 돈 느긋함과 약간의 둔감함, 일상의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타성, 독촉 받지 않는 여유로움, 스스로 길을 찾아 자박자박 걸어가는 현실성과 아주 조금씩 누적되는 성취감과 후회가 내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 휘황한 밤 소풍을 아련히 기억하면서, 수억 년 밤하늘을 지켰을 별들이 쏟아져 내려 나를 별 무덤에 가둘, 인생의 후반부 소풍(小風)이라는 이름으로 찾아 올 대풍(大風) 또는 태풍(颱風)을 기다린다. 어느 날 갑작스레 거대한 의미와 기쁨으로 들이닥쳐 내 생애에 힘이 될 또 한 번의 소풍을….
⦁미안했던 이별의식
최근에 내 주변에 이 땅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그들과 이별을 하고 남은 이들을 위로하기위해 장례식장을 찾다보니 오래 전에 빈번히 행했던 아쉬웠던 일들이 생각난다. 이십오 년여 전의 일이지만 며칠 지나지 않은 듯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나는 군종목사로서 군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군병원에는 관할지역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한 이들의 영결예식을 행하는 일들이 이따금씩 있었다. 나는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영결예식은 떠나는 이와 남는 이들과의 마지막 의식으로 떠나는 분의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를 기리고 남는 가족들을 위로하는 자리로 여기고 있다.
자연히 의식보다는 메시지가 중심이 되고 나 자신이 그 분의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그 병원에서 삼 년 가량 있었는데 아쉬움과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대개 그런 의식이 있는 날은 인사처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그들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시간과 이 땅을 떠나는 이의 간단한 인적 사항 곧 이름과 나이와 계급 정도를 넘지 못했다. 안타까운 사정은 인사처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해도 이야기하기를 꺼렸고 내가 안다고 해도 너무 민감할 수도 있고 전체 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한 번도 메시지화하지 않았다.
슬픔을 당한 가족들에게도 자극적인 대화는 도움이 되지 않아서 무난한 이야기로 관심을 표하고 위로를 했는데 주로 고인(故人)의 신앙생활을 간단히 물어 보았다. 본인은 신앙이 없고 어머니나 가족 중 누군가 교회생활을 해서 부탁을 하는 일이 많았고 어떤 때는 천주교를 다니고 있는데 신부님들이 원체 바빠서 내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더러는 종교와는 무관하게 마지막 가는 길인데 어떻게라도 하고 싶어서 부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반적인 사회 같다면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어려움을 당한 이가 군인이었고 의식자체가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는 의미가 커서 거절해본 적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을 겪고 있는데 그 마음에 한 번 더 아픔을 안겨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 양심을 거슬러서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위로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 확신하지 못하는 내세를 그 분야의 전문가인 나를 통해서 듣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내 존재의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며 남겨진 이들을 향한 권면과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빌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나 자신을 위로하기는 그들에게 삶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고 그 때에 듣는 신앙적인 권면인데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을 것이니 그 계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삶의 의미를 찾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나 자신도 그 순간들이 쉽지는 않았다. 때로는 정해진 설교나 선언구절이 있다면 좋겠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더러는 거쳐야 하는 절차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너무 큰 슬픔으로 어떤 위로나 이야기도 그들의 마음에 담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 어떤 계기로 경로가 바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내가 영향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의 삶이 바뀔 수도 있다.
장례식장을 들며나며 부딪치는 이들의 표정이 무겁다. 많은 이들이 장례식장에서 자주 대하는 검은 색 옷차림으로, 밖에서 담배를 물고 연기를 후후 뿜으며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지만 정면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죽음을 주변 사람의 사건을 통해 간접경험하면서 언젠가는 내 일이 될 그 때를 가끔은 기억하며 살아야 긴장하면서 더 의미 있는 삶을 살듯하다.
누구를 향해서인지 모르나 “미안했습니다. 그 때 제대로 이별의식을 치러드리지 못해서.” 라고 사죄하고 싶다. 이후로는 되도록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고 희망이 되는 참 의미가 있는 이별의식을 치르고 싶다. 할 수 있다면 가능한 적게….
Ⅱ. 내 삶의 모습 : 소시민
4. 내 취미와 놀이
⦁고흐를 만나다
⦁내 삶의 창문
⦁숙제 같은 독서
⦁정지용 문학관을 가다
⦁요르단의 하늘
5. 아내와 함께
⦁솔숲에서
⦁우리들의 서울 나들이
⦁연녹색 댓잎들
⦁바다와 함께 산 하루
6. 자녀들은 다 자라고
⦁끈
⦁찬찬이
⦁축하하네, 진짜 어른들
⦁막내와 안경
⦁승진
7. 우리도 소풍가요
⦁때늦은 나들이
⦁순천만의 갈대
⦁성 베드로 대성당
⦁파리에서 보낸 사흘
⦁하산 길
8. 외손녀가 태어나고
⦁정말 반갑다
⦁무덤덤하기
⦁엄마, 아빠를 안다는 것
⦁돌을 맞은 너에게
9. 소심한 내 모습
⦁내 일상의 삶
⦁귀뚜라미의 당부
⦁20년 동행의 끝
⦁전화에 대한 변명
⦁조심 또 조심
⦁유야무야
4. 내 취미와 놀이
⦁고흐를 만나다
언제나 나만의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이며, 나만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릴 것이다.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짧은 생애를 미친 듯 살다가 자살로 삶을 끝마친 이, 10여년의 기간에 2000여 작품을 남기고 생전에 딱 한 점의 작품을 판매한 이 사람이 빈센트 반 고흐다. 미디어 아트전시회, 문명이 빠르게 발전하니 원작을 옮겨오지 않아도 문화의 향기가 나고 감동을 느낄 수가 있나보다. 전시의 마지막 날에야 그를 만났다.
종잡기 어렵다. 성실하고 희생적인 사람 같은가 하면 무능력한 듯도 하고 사생활이 복잡한 것 같기도 하고 우울증세의 영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버지에 이어 할아버지까지 목회자였는데 신학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가 탄광촌에서 전도사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일에 너무 몰입해 적당하지 못하다는 평가로 그 일도 계속하지 못한다.
고흐를 말할 때 그의 동생을 빼놓을 수 없다. 고흐가 의지한 동생에게 18년 동안 보낸 편지가 650여 통이라고 한다. 화상(畫商)으로 형의 작품을 얼마나 팔고 싶었을까. 하지만 동생은 형의 작품을 하나도 팔지 못한다. 잘 팔리는 작품의 경향을 알려줬겠지만 고흐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게다. 자신의 경제적인 문제를 대부분 담당한 동생이 결혼한 걸 알고는 세 번이나 졸도했다고 한다. 형이 자살한 여섯 달 후에 그 충격으로 동생도 죽었다하니 그 사이를 충분히 알겠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보면 그의 형편이 보인다. 크게 돈 들어갈 일 없는 모사가 많다. 밀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래선지 밀레의 그림을 흉내 낸 작품이 적지 않다. 모델을 쓰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그리거나 자화상이 많다. 풍경화와 해바라기를 많이 그린 것도 같은 이유이지 싶다. 동생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그의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을 게다. 이런저런 마음의 괴로움이 그림에 더욱 몰두하게 했을 듯하다. 10년 간 그린 작품이 2000여 점이라니 한 해에 200여 점, 줄잡아 이틀에 한 작품이 넘는다.
고흐가 생존해 있던 당시에는 관심이 없던 그의 그림이 이제 한 점에 수백 억 원을 넘어 거래된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작품의 무엇이 현대인을 그토록 잡아당기는 것인가. 그의 그림에 보이는 안정감 속의 불안일까. 흐르듯 흔들리는 무늬인가. 인기의 한 부분에 동생에게 보낸 650여 통의 편지가 있는 건 아닐까. 작품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알려지니, 친숙해지고 그 그림들을 더욱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천재성과 불운한 삶, 짧은 일생과 남겨진 많은 작품들,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화풍이 그를 기억하게 한다. 그가 뇌넨에 있을 때 그렸다고 하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한 쪽 구석에서 그들을 그리고 있는 고흐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다. 자신도 가진 것이 없어 한 몸 살아가기도 여의치 못하면서 노동으로 살아가는 밑바닥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과 애환을 그려내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어두운 조명과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밝지 않은 표정, 고흐는 그들의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힘든 삶을 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그림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낸 이들은 없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미치광이 그림이라고 했고, 유일한 후원자인 동생마저도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술품을 구매하는 이들은 상류층이었을 게다. 그들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잘 나가는 미술가들의 처신이고 유능한 화상의 觸(촉)이었을 게다. 고흐는 그걸 천성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고흐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창작자들이 겪는 고민과 갈등일 게다.
고흐의 일생에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 때가 있었다면 고갱과 함께 한 두 달여 남짓이 아니었을까. 같은 삶을 사는 화가들이 모여서 그림도 그리고 그림에 관한 대화도 나누며 자연 속에서 함께 하는 삶을 꿈꾸었을 그에게 고갱이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반갑고 그가 기다려졌을까. 찾아오는 친구를 위해 방을 꾸미고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면서 설레고 신났을 그 기분을 헤아린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한 두 달여 기간은 전혀 행복하거나 즐겁지 않았다. 달라도 너무 달랐고 어울리기 어려운 물과 기름 같았다. 고흐는 깨어진 꿈에 난동을 피웠고 놀란 고갱은 파리로 돌아가 다시는 고흐에게 가지 않았다.
고갱에게는 고흐와 함께 지낸 두 달이 지우고 싶은 악몽이었을 게다. 기대와 현실이 항상 같은 건 아니다. 현실화되지 않은 과거를 아름답게 채색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고갱과 헤어진 고흐는 얼마가지 않아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고흐를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37년의 짧은 삶을 고통 속에 그림에 미쳐 살다간 그가 이제는 세상을 홀리고 있다.
전 세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고흐를 좀 더 알고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모여 든다. 그의 작품 한 점을 소유하기 위한 세계인의 열정을 고흐가 볼 수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게 필요한 것도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스스로의 개성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흐, 남을 흉내 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다 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내 삶의 창문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를 보았다. 청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오페라단으로 보이는 “라 포르짜”의 공연이다.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생활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음악회나 전람회, 오페라 같은 것을 향유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베르디가 19세기를 살다간 이탈리아 작곡가이고 리골레토가 1851년에 처음 공연되었다고 하니 대략 우리 역사로는 헌종을 이어 철종이 왕이 되고 세도정치로 나라가 어지러워 대원군이 등장하고 동학이 생겨나는 때쯤이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의 어떤 나라도 오페라 같은 수준의 문화를 일차적인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힘겨운 서민들이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도시나 마을이든 지역의 힘 있는 상류층의 생활의 일부분이며 관심사였을 게다. 이런 문화행사가 열리면 그 지역의 유력한 인사들이 모여 교류하고 정보를 교환했으리라. 남들이 다 아는 것을 모르면 민망하고 그것을 안다고 해서 인정받기는 어려웠을 게다. 서로 뒤지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명예와 자녀들의 혼사와 앞날을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참여하지 않았을까.
오페라의 내용은 만토바라는 바람기 많은 공작과 그 수하의 어릿광대 리골레토, 그리고 리골레토의 예쁜 딸 질다가 중심이다. 공작 만토바는 백작의 부인에게 수작을 걸고 수치를 느낀 백작을 리골레토가 조롱한다. 백작은 당신도 아버지의 노여움을 알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예언 혹은 저주처럼 리골레토에게 실현된다. 만토바공작은 질다에게 눈독을 들이고 학생으로 위장한 공작을 질다도 좋아한다. 공작은 질다를 납치하고 공작의 음모를 알게 된 리골레토는 살인청부업자에게 공작을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청부업자의 여동생이 공작을 사랑하게 되어 죽이지 말 것을 간청하고 그들은 자기 집에 처음으로 찾아오는 이를 죽이기로 한다. 그 집을 방문한 질다가 죽임을 당하고 리골레토는 희생자가 공작이라 생각하고 뜻을 이루었다 여기나 그 순간 공작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의혹에 차서 시신을 확인하니 사랑하는 딸이었다는 비극적 이야기다.
오페라에 있어서 내용의 비중은 얼마나 되었을까. 무대에 오르는 이들의 노래솜씨를 들어내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을까 싶다. 내용이 심오하다든가 새롭거나 감동적이기는 어려웠을 게다. 배우 중 누가 연기가 좋았다느니 노래가 훌륭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을 게다.
오늘의 사람들은 왜 오페라를 즐길까. 극의 내용에 큰 관심이 있거나 감동을 받기를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자주 대하지도 않는 배우들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대단한지를 보고자함도 아닐 게다. 자신의 일에 쫓기고 세류에 휩쓸리듯 흘러가는 삶에서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한숨을 돌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틈을 얻기를 원하리라. 마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즐기는 휴가나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막간에 휴식시간이 있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어의 노래를 들으며 동시에 눈으로는 자막을 보며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우리 것인 마당놀이나 판소리 공연은 한 번도 관람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그런 것들은 노래가사를 이해하기 위해 애쓸 것도 없고 자막을 볼 필요가 없고 정서가 익숙하니 감정변화를 얼마나 쉽게 따라가고 공감할까하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자기 것이 더 좋아진다는데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들의 문화수준이 높아야 선진국이라는데 우리 것, 내 것을 깊고 넓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오늘의 세계가 더욱 좁아져가고 있으니 네 것 내 것을 구별하는 게 쉽지 않고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 것이 아니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없고 자랑스레 내놓기도 어렵다. 남의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 내 것이 힘이 있고 감정이 살아있고 강한 설득력이 생긴다.
우리가 남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 끝이 보인다. 여러 분야에서 앞선 이들을 웬만큼 따라잡았다. 더 이상 다른 이들의 뒷모습만 보고 갈 수는 없다. 단순했던 때는 지나갔다.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방향을 고르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우리의 할 일이다. 창의적인 사고를 위해 머리를 비우고 틈을 내 주변을 돌아보고 지난날들과 앞날을 살펴야 한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유를 만들기 위해 내 갈 길을 정하기 위해 멈춰 서는 일이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는 것이고 전시회와 영화를 보는 것일 게다.
내 생각에 몰입해 있다 보니 등장인물들이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한다. 힘찬 박수들이 이어지고 무대와 객석에 안도감과 만족감이 감돈다. 자리를 메웠던 이들이 분주히 일어나 밖으로 향한다. 내 생활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 저녁이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더듬어본다. 내 삶이 지금 어디쯤 도달해 있는 것일까. 가려는 궁극적 목적지는 어디인가. 방향도 모르고 세류에 휩쓸려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닌가. 목적지와도 세류와도 무관하게 현재의 장소에 머물러 나태함에 길들어 있지는 않는가. 바로 답이 찾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한동안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몸에 힘을 빼고 머리를 비우고 생각을 모아 보아야겠다. 한줄기 찬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숙제처럼 하는 독서
‘파편’,‘붉은 방’,‘중국인 거리’다음 주까지 읽어야 할 세 편의 소설이다. 독서토론을 위해 ‘감정수업’도 읽어야 한다. 서평으로 ‘주목의 심리학’을 읽을 것이고, 내가 좋아서 ‘레져 신학’을 읽고 있다. 장편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최명희의 ‘혼불’ 다섯 권을 빌려왔다. 이런 책들을 숙제하듯 읽고 있다. 독촉을 받아가며 숙제할 나이는 아니다. 그래도 “사흘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는 구절을 생각한다. 낡고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면 지속적으로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독서만한 것이 없다.
지속적으로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것이 습관들이기다. 모든 것이 그렇듯 습관으로 일을 하면 쉽게 할 수 있다. 몸에 배면 탄력이 붙고 어렵게 보이던 것들도 도전하면 이루어진다. 무의식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하는 일들은 대체로 습관의 덕이다. 밤늦게 운전을 하고 들어오면 차문을 잠갔나, 보조제동기를 채웠나, 전조등을 껐는가를 걱정하곤 한다. 확인해보면 매번 제대로 되어 있다. 그러한 것이 습관의 힘이다.
내게 책읽기는 그런 일보다 더욱 힘들다. 습관을 들이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 유익함을 알기에 포기할 수 없다. 경제적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평생의 과제처럼 여기는 ‘세상과 사물들을 바로보기’위한 것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는 것도 가하다”고 했다. 나에게 세상과 사물을 바로 본다는 것은 평생을 통해 이루고 싶은 일종의 도(道)다. 쇠로 만든 물건이 땅 속에 오래 묻혀 있으면 녹이 슬고 불순물이 엉겨 붙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듯이 내 주변의 사물과 상황도 많은 것들이 엉겨 붙어 참모습을 보기 어렵다. 여러 외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그 본질과 참모습을 보고 싶다. 내 평생에 이루어지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꿈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어 질 수나 있는 일인지 모른다. 선 ․ 악과 유 ․ 불리를 떠나서 그 사실 자체를 알고 싶다. 여 ․ 야의 정객들은 같은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도 정반대의 해석을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양편이 다 맞는 것 같다. 몇 사람이 부추기면 쉽게 믿고 인정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쉽게 만난다. 자신의 체험과 관심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 사물을 보는 관점과 색깔이 달라진다. 그런 요소들을 배제하면 순수한 모습이 보일 것 같아 순수하게 보려고 배제할 요소들을 익힌다. 사물을 맨눈으로 보듯이 보려고 색안경을 이것저것 써보는 것과 같다. 내가 다른 이의 눈이 될 수 없으니 그들이 본 결과에서 영향을 끼쳤을 색들을 빼보려는 것이다.
그 일을 하려면 많은 것을 익혀야 하는데 내 자신에 대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냥 내가 좋아 하는 일이니 되는데 까지 해보자는 것이고 꼭 대단한 결과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걸로 학문적 인정을 받자거나 책을 쓰자는 것도 아니다. 내 자신의 삶의 태도가 진지해 지고 가까운 이들 중 한둘이라도 영향을 받아 삶을 조금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충분할 것이다.
그 독서의 습관화가 어렵고 내 의지만으로 만만치 않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책읽기를 즐겨하는 이들과 약속을 하고 같은 책을 읽고 생각과 감정을 나눈다. 함께 의견을 나누다보면 내가 얼마나 주관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또 그렇게 책을 읽어 왔었나를 알게 된다. 같은 책을 읽고도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도 실감한다. 평생 한 가지만 하려해도 고민 가운데 흔들리다 삶을 마치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그렇지만 우리 삶은 흔들림에 묘미가 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고 긴장감이 있을까. 마냥 지루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할 것이다.
갈등하고 흔들리면서 결정하고 선택한 것들을 역으로 추적하여 살들을 발라내고 골격만을 보고 싶은 것도 그것이 너무도 다양한 무늬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무늬를 가만히 오래 보고 있으면 주인공들의 마음결이 흔들리는 폭과 세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퍼즐을 맞추듯, 십자 말을 풀 듯 우리 삶의 모습을 재구성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 그 일을 즐거움으로 더 사실에 가깝게 하고 싶어서 오늘도 숙제하듯 이런저런 책을 읽는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많은 책을 읽었던 옛사람들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는 내 모습이 안타까움을 넘어 애처로움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내 능력대로 읽는 것이다. 자신이 낸 숙제를 푸는 것은 힘들어도 할 만한 일이다. 스스로 하는 일이니까.
⦁정지용 문학관을 가다
서두른다고 했어도 마음만 급했지 도서관에 도착하니 아홉시가 조금 넘었다. 집결장소에는 벌써 참가자들이 많이 와 있다. 간단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듣고 버스에 오르니 그제야 날씨가 눈에 들어온다. 며칠 비가 오고 구름이 끼어 걱정했는데 햇볕이 났다.
약간은 들뜬 새털구름 같은 마음으로 차안에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아마도 함께 온 이들이 끼리끼리 앉아 일상사들을 나누고 있으리라. 대부분 낯선 이들인데도 왠지 친숙하게 느껴진다.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라서 그런가 보다. 우리를 맞이하는 정지용선생의 그림을 보니 옥천에 왔음을 실감한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정지용생가에 도착했다.
몇몇은 나지막이 어떤 이들은 높은 음으로 “향수”를 부른다. 우리에게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들려줄 현직교사요 시인이며 서예가인 김성장님이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다. 옥천과 정지용시인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로 오늘 같은 안내와 설명을 수없이 해왔음을 느낄 수 있다.
정지용이 태어나 자라며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에서, 백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우리가 그를 돌아보고 고향과 문학과 삶을 생각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정지용은 열두 살 초등학생으로 동갑의 신부와 결혼을 한다. 열일곱 살에 휘문고보에 입학했으니 아마도 그 때까지는 고향집을 중심으로 옥천에서 생활을 했지 싶다.
그는 백여 년 전에 이 공간에 머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도 드러내놓고 알려주지 않는 조국의 현실과 시대의 진실을 서서히 깨우치며 괴로워하며 살았으리라. 가까이 건립되어 있는 정지용문학관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많은 작품과 유물들과 문학상 수상작들이 전시되어 있는 그의 공간에 시인이 밀랍으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이 시인과 사진을 찍는다. 평생에 추억거리가 되리라.
전시관 강당에서 김성장 시인의 강의가 있었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시인들과 문필가들이 한문 투의 글들을 쓰고 순 우리말은 토씨 정도였는데 정지용의 시에서는 오히려 한자 어휘를 찾기가 어려울 만큼 순 우리말로 아름다운 시들을 썼다고 한다. 의식적으로 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임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시인은 대단한 애국자다.
정지용 시인이 다녔던 죽향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김성장 시인이 짓고 신영복체로 쓴 원형기념판이 있다. 어린 정지용이 운동장과 복도를 거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세상을 배워갔을 공간에 우리가 와 있지만 백여 년의 간격이 우리로 그를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그가 고향을 떠난 후 육 년여가 지나서 고향생각이 사무칠 때쯤 우리 모두의 시가 된 “향수”를 썼을 것이라 한다. 그의 시 향수 속에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 있고 산업화 이전의 엄마 품 같은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마음에 새겨진 돌아가고픈 한 민족 마을 공동체의 원형이 있다.
정지용은 납북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분명하지 않아 1988년에야 해금되어 그의 시가 우리에게 돌아온다. 현재 한국시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 수에서 정지용은 압도적 수위를 차지하고 있고 정지용문학상은 올해로 26회에 이르며 수상자의 면면을 보아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임을 알 수 있고 매년 열리는 “정지용문학제”는 그의 영향력과 위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생가 가까운 곳에서 취향을 따라 새싹비빔밥과 묵밥으로 점심을 먹고 예상하지 않았던 전근대 생활용품들을 둘러보았다. 식당이 옥천여중의 교무실 자리였고 식당주인의 선조가 원체 거부여서 조금씩 사 모은 것이 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할 수 있을 만큼 되고 진귀한 물건도 많다고 한다. 그는 또한 명망 있는 서예가라고도 했는데 시간이 넉넉지 못해 여유 있게 볼 수는 없었다. 육영수여사의 생가를 방문하자는 요청도 있었지만 계획대로 장계국민관광지인 조각시비공원을 둘러봤다.
그곳은 넓은 공간에 정지용문학상 수상작들을 자유롭게 배치 전시해 놓았는데 강사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우리 문인들에게 세한도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던지 25회에 이르는 문학상수상작 중에도 두 작품이 있고 관계된 시만 모아도 시집을 한권 낼 정도이며 수필도 적지 않다. 시류를 넘어서는 사제의 정과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우리의 국보로 한겨울 눈 속에도 꺾이지 않는 선비의 지조를 보여주고 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청주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은 한층 익숙해져서 심리적으로 훨씬 가까웠다. 도착하여 해산을 할 때까지도 햇빛은 엷어지지 않았고 좋은 곳을 보고 좋은 추억을 쌓은 귀한 하루였음을 되 뇌이며 도서관은 항상 최선의 강좌만을 준비한다는 담당자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감사함으로 재확인하게 되었다.
길 위의 인문학 강좌와 그 일환으로 행복한 문학읽기 정지용 문학관 탐방을 기획하고 세심하게 실행해준(그것도 무료로) 흥덕도서관과 모든 관계자 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깊은 감사를 표한다.
⦁요르단의 하늘
파란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지고 목화솜 같은 구름이 동동거리며 하늘을 수놓고 있다. 구름이 하늘에 떠간다고도 하고 하늘에 구름이 끼었다고도 하지만 이런 하늘과 구름을 보기는 내 삶에 처음이지 싶다. 남한의 면적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육분의 일쯤 되는 나라라는데 차로 수십 분을 족히 달려도 여전히 일망무제(一望無際),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다.
요르단, 처음 와 보는 나라다. 한 순간 하늘을 올려보다 구름에 눈이 닿으니 뗄 수가 없다. 걸리는 것 없이 시야가 탁 트여 하늘이 그렇게 높아 보일 수 없다. 한없이 높은 하늘에 야트막하게 구름이 모여 흘러간다. 하늘과 구름의 거리를 느끼기 어렵고 도화지 위의 그림 같던 건물과 산으로 둘러싸인 늘 보던 풍경과 달리 제대로 거리감을 보여준다.
점점 구름이 늘어난다. 구름이 여럿 모이면 산 호수 토끼 코끼리가 된다. 적으면 적은대로 정겹고 평화롭다. 없는 곳은 짙푸른 하늘로 커다란 수정 같다. 하늘을 배경으로 수놓는 구름 잔치. 누가 보든 말든 펼쳐 보이는 자연의 선물이다. 드넓은 하늘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둥 둥 둥 걷다가 또 다른 동료를 만나면 몸을 부딪고 때로는 함께 섞여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무늬를 이룬다.
평화로운 하늘모습에 취하다 차량의 덜컹거림에 순간 시선이 땅으로 향한다. 푸르른 것 하나 없이 붉은 흙빛으로 넓게 퍼져있는 땅, 구름의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가끔씩 보이는 가옥 몇 채로 이루어진 마을들. 이런 곳에 살면 땅 몇 천 평이 대수롭지 않을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은 공동운명으로 묶여 살아갈 듯하다.
지나온 땅 예루살렘을 생각한다. 도시 이름은 ‘온전한 평화’지만 지구 제일의 화약고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곳. 유대교 카톨릭 정교회 이슬람 개신교 모두에게 성지인 곳이다. 한 공간이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고 견고한 장벽과 울타리가 있어도 언제 오해와 다툼으로 피를 흘릴지 모르는 땅이다. 안내하는 이는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서 누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없다고 했다.
하늘과 구름, 그들이 이루는 자연은 저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데,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온전한 평화를 이루지 못할까. 서로 사랑하자는 종교를 내세워 불신과 다툼을 일으키나. 한 가운데 황금사원을 두고 서로 뺏고 뺏기면서 반드시 자신들이 차지하겠다고 하는가. 통곡의 벽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에 다시 자신들의 성전이 세워지고 제사가 행해지기를 염원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주님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걸어야할 거룩한 곳들이 기념품과 먹을 것들을 파는 가게들로 좌우가 메워지고 음식냄새와 호객 소리로 소란스러우니 그분이 다시 오시면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던 말씀을 노기(怒氣) 띤 음성으로 다시 외치실 것만 같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우리만의 커다란 착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인간처럼 자연계에 커다란 재해를 끼친 종(種)이 있을까. 우주의 역사에 마지막으로 나타나 온갖 행패를 부리며 전체를 망가뜨리려 하는 아주 못된 존재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지구의 리듬과 흐름을 흔들고 개발과 성장을 내세우며 수만 년 이어온 무수한 곳들을 파헤치고 있다. 우스갯소리처럼 인간만 없어지면 이 세상이 편안할 거라고 한다. 내게는 그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고 적지 않은 진실을 담고 있는 듯 여겨진다.
차는 멈추지 않고 달려 요르단의 주요한 탐방지(探訪地) 페트라로 향한다. 일 킬로미터가 넘는다는 웅장하고 기묘한 협곡과 그 자연에 기대어 이루어낸 인간들의 더부살이가 어우러져 있다. 널리 알려진 영화 때문인지 찾는 이들이 많았는데 수시로 협곡의 좁은 길을 내달리는 마차들이 거슬렸다. 관광객들의 작은 편안함과 이색적인 추억 그리고 현지인들의 돈벌이 욕망이 함께 만들어낸 못된 풍경일 게다. 그 모습에서 수시로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마차들이 지구를 위협하는 인간들처럼 느껴졌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색다른 공간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것은 아닐까. 갈수록 많은 이들이 여행을 즐긴다. 그만큼 우리에게 각박한 경쟁의 현장을 떠나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걸게다. 땅에서 눈을 떼어 하늘과 구름과 자연을 바라보며 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무언의 말들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은 것들을 보았지만 요르단의 하늘과 흰 구름이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폭넓은 시야를 가지라하고 어울려 평화를 이루라 한다. 내가 주님의 발자취와 흔적을 따르며 묵상하고자 했던 것과 그 분이 그 땅에서 내게 들려주기를 원하신 것도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게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푸른 하늘과 하늘 멀리, 땅 가까이서 평화로이 떠돌던 솜사탕같이 하얀 그 구름들을 다시 보고 싶다.
5. 아내와 함께
⦁솔숲에서
좁은 개울을 따라 눈에 익은 풀꽃들이 모여 산다. 약한 햇살이 황톳길에 정감을 더하고 한옥을 본떠 지은 길가의 작은 건물이 고즈넉하다. 군데군데 맨살을 드러낸 채 거북등 같은 흑갈색 껍질이 나무들의 연륜을 보여준다. 싱싱하고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몸통 가는 젊은 나무들이 하늘 향해 곧게 치솟아 있다. 그들이 함께 어울려 하늘을 가리니 한낮에도 숲속은 어둑어둑하다. 호젓한 산길을 두 사람이 걷는다. 보랏빛 상의에 검은 바지를 입은 남자와 진한 회색 바지에 빨간 스웨터의 여인. 둘 다 큰 키가 아닌데다 남자는 뒷머리가 조금은 성긴듯하고 여인은 살짝 어깨가 쳐지고 등이 굽었다. 서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걷는 모습이 평화롭고 편안하다.
보은 근처의 고택을 찾아 숲속을 걸어가는 우리부부가 담긴 사진 속 풍경이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굵기나 기운 방향 자라난 모양이 자유롭다. 그 숲을 걷는 우리부부의 모습도 걸어가는 방향은 같지만 어딘가 다르다. 고개를 내편으로 기울이고 아내가 나를 따라오는 형태다.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보폭을 작게 해서 걷는 내 모습은 자신만의 생각이 있는 것 같고 밖의 일을 잊고 숲속의 상념에 깊이 잠기고 싶어 하는 듯하다. 아내는 작은 가방을 비끄러맨 채 개의치 않는 듯 반걸음쯤 뒤에서 걸으면서도 내 마음속 세계가 궁금한 듯 들여다보고 싶은가 보다. 몇 발짝 떨어진 앞쪽으로 젊은 나무들이 이루어 놓은 개선문 모양이 이채롭다. 많은 이들이 거닐어 닳아진 길은 그것은 당신들의 몫이 아니라는 듯 못 본 체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거진 솔숲이 신선한 산소와 은은한 솔향기를 물씬 뿜어내 혼탁해진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줄 것만 같다.
솔잎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희부옇다. 내 삶의 색깔 같다. 별스레 먹구름이 가득 낀 컴컴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일같이 보람 있고 신나는 푸른 하늘도 아니다. 이 땅의 누군들 크게 다르랴. 담아두고 드러내지 않아 그렇지 소나기 퍼붓다 맑게 개고 때로 장맛비 쏟아지다 한동안 푸른 하늘 보이는 것이 자연이고 사람 사는 이치 아닌가. 산다는 것이 그때그때의 대동소이한 과업을 해결하는 것이고 죽음의 순간까지 그런 일들이 이어지는 두더지 게임 같은 것일 게다. 더 이상 두더지가 튀어 오르지 않으면 그때는 이미 끝이 난 거다. 하나의 과업을 만날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에 삶의 묘미가 있다. 흔들림이 삶의 멋이다. 한번 사는 삶이니 어설프고 어설프니 흔들리고 흔들리니 구경할 만하며 살아볼만하다. 강한 바람이 불면 갈색 솔잎들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푸른 잎들도 땅에 뒹군다. 지나는 바람에 솔잎들 흔들리고 종소리처럼 향기가 날아오른다.
발밑 황톳길에 정감이 가고 그 길을 걸으면 온몸에 땅의 힘이 전해 올 듯하다. 하지만 이 황톳길을 오기 위해 아스팔트길을 달려야 했다. 평탄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는 안락함은 있지만 생명력이 없다. 이제까지 우리 부부는 어떤 길을 걸어 왔을까. 내가 걸어온 길은 포장도로가 많았다. 더러 황톳길이 있었다 해도 기복이 심하지 않았다. 사진 속 황톳길을 걷는 아내와 나의 폭이 넓어 보인다. 이제는 좁혀가며 살고 싶다. 지금까지 시간이 흐르면 안다는 식으로 충분한 설명 없이 내가 확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이후로는 아내와 이해가 되도록 대화를 하리라. 앞으로 내가 걸어야 할 길들은 어떤 길들일까. 숲길은 숲길대로, 산길도 그 나름 아기자기함과 좋은 점들이 있으니 피하기만 할 일은 아니다. 우리 부부의 인생 후반부에 심하게 요동치는 길들을 자주 만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사진 속 소나무아래 푸른 풀들이 카펫을 깔아놓은 듯 아름답고 정감이 간다. 어쩌면 하늘의 푸른색보다 이 땅을 더 살아있게 하고 생을 마치면 거름으로 이 땅에 힘을 보태줄 고마운 존재들이다. 인간들이 오히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며 주변의 존재들을 가볍게 여기고 살아온 것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 땅을 위해 들풀만큼 기여를 하고 살아왔나 아니면 피해를 주면서 그 사실도 모르고 지내 온 것은 아닌지. 또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왔는지….
조용히 자신을 지키고 서로 편안하게 어울려 주변을 맑히는 신선한 공기와 은은한 향기를 주는 풀과 나무들처럼 살순 없을까. 드러나지 않으면서 유익함을 주는 그런 존재가 많아지면 좋겠다. 사진에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한 장의 추억을 찍어주는 그런 따듯한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삽상한 바람 속에 기분 좋은 향기가 솔숲에서 번져오는 듯하다. 보이지 않게 이 땅을 조금 더 신선하고 으은한 곳으로 만드는 솔숲 같은 부부가 되고 싶다.
⦁우리들의 서울 나들이
수 년 동안 서울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 막내 졸업식 이후에 사흘 만에 또 간다. 지난번에는 아이들과 함께 여서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물 흐르듯 다녀올 수 있었다. 드러내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도 헤매지 않고 목적지까지 넉넉히 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전날 저녁에 낮 열시 정도의 차표를 예매해 달라고 했더니 카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냥 가도 차들이 많아서 5-10 분 기다리면 탈 수 있다고 했다. 대여섯 해 다녀 본 아이의 말이니 어련하랴 싶었다.
그래도 조금 여유를 두고 터미널에 도착했다. 매표소에 가서 물어보니 예상과 달리 11시 10분 출발하는 차가 제일 빠르단다. 예식이 12시인데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매표원에게 하소연을 해도 소용이 없어 출발하는 차 앞에서 기다리다가 빈 좌석이 있으면 타고 가기로 했다. 계획성 없이 사는 것 같고 칠칠맞아 보이기도 해 차 앞에 서있기가 민망하다. 연이어 두 대가 빈자리 없이 출발을 하니 쓸데없는 일 같기도 하다.
아는 이가 없었으면 하는데 익숙한 분이 다가온다.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 하니 그 분이 아내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신과 일행은 5분 후 출발하는 차라면서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고 한다.‘그러면 그렇지’매표소로 가보니 그분들이 운이 좋아 취소된 표를 받은 것이란다. 대기한 차 승객들의 검표가 끝나고 자리는 남는데 단말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기다리는 이들을 태울 수 없단다. 몇 사람이 강하게 항의를 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자리가 비고 기다리는 이들이 있는데 안 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검표원도 이해가 되는지 빈자리에 기다리던 이들을 태웠다. 차표의 시간보다 20분 일찍 떠나서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하나님께 감사했다. 까딱했으면 예식시간에 늦고 인사도 하지 못할 뻔 했으니까.
차는 생각보다 느리게 갔다. 그나마 버스전용차선으로 줄기차게 달렸지만 토요일이어서인지 정해진 시간을 다 채우고야 도착을 했다. 버스내린 곳에 서 지하철까지가 멀게만 느껴졌다. 문제는 환승역에서 불거졌다. 생각보다 복잡하니 미노스의 미궁이 따로 없다. 급하다고 바늘 허리매어 쓸 수는 없는 법. 우리부부는 급해도 기계는 하나도 급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어떻게 우리가 촌에서 온 것을 아는지 우리를 통과시켜주지 않아서 방법을 거듭하다 결국은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어디가나 텃세가 만만치 않다고 하더니 기계까지 우리를 무시하며 위세를 부린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혼주 얼굴보고 식장을 잠깐 기웃거리다 식당으로 간다. 여러 번을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결혼식 참석에 하루가 다 가는데 정작 그곳에 가서는 혼주의 얼굴보고 허겁지겁 밥 먹고 오기 바쁘다.
돌아올 때도 지하철의 환승역에 있는 기계는 우리를 또 골탕 먹였다. 왜 자기를 자주 찾아오지 않느냐는,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 보이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부부를 서울 사람들의 평균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불쌍하고 무식한 이들, 완전 촌사람으로 취급하는 듯하다. 사실은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다. 나도 직장이든 친척집이든 같은 곳을 연이어 사흘만 다니면 조금도 헤매지 않고 왕래할 자신이 있다.
서울을 벗어나니 거대한 혼잡의 소용돌이에서 해방된 것 같다. 늦가을 찬바람에 한곳으로 쓸려 가는 가랑잎들처럼 땅속으로 몰려 들어갔다가 장마철 열린 수문으로 물 쏟아지듯 쫓기며 살아가는 그들. 일상의 삶에서 조차 빠르게 걷다 못해 뛰면서 사는 사람들. 그들이 더 많은 일을 할까. 사람답게 살까. 여유 있게 살까. 나는 서울과 서울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산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우리의 터전으로 돌아오니 숨이 트이고 마음이 푸근하다. 번잡하지 않은 도로와 사람들의 느린 걸음걸이가 나를 편안하게 한다. 이곳은 기계가 많지 않고 나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서울 사람들은 속도를 가졌음을 은근히 내세우지만 나는 속도를 갖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우리부부가 지금 살고 있는 곳도 한가한데 아내는 야트막한 산이 자리하고 그 안에 골짜기가 있어 물이 졸졸 흐르는 자연으로 가자고 한다. 그것이 바람이긴 하지만 우리처지에 언제나 그런 곳에 들어가 살 수 있을까.
하루가 다르게 산과 들을 파헤쳐 길을 내고 공장들을 세우니 가까이에 그런 곳이 남아 있어는 주려나. 변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산사람[山人 → 仙]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내 성(姓)이 최(崔)씨다. 그것을 파자(破字)하면 산속에 사는 새[山 + 隹]니, 그렇게 유유자적(悠悠自適) 노래하며 살날이 와 줄지도 모를 일이다.
서울 한 번 갔다 오고 산타령을 하니 외국을 다녀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들어갈 것만 같다.
⦁연녹색 댓잎들
오랜 가뭄이 끝나고 자주 비가 내린다. 빗소리가 타닥, 타닥 내 마음을 때린다. 그들은 땅의 열기를 식히고 더러운 것들을 쓸어가 산하를 말갛게 씻어 주리라. 찬물에 세수한 아이들처럼 싱싱한 풀과 나무들이 이 빗속에 온 몸을 흔들며 춤추는 모습이 떠오른다. 모처럼 내린 비다운 비를 실감하고 싶어 가경천과 무심천을 가 보았더니 물은 기대만큼 불어나 있지 않다. 천변 도로를 집어삼키고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을 예상했지만 평소의 유량을 조금 넘어설 뿐이다.
며칠 전 일이 떠오른다. 모처럼 아침 산책을 하고 집으로 들어서려니 아내가 대문 아래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수돗가에 있는 화단용 물뿌리개를 보다가 평소에 닦고 싶었던 대문의 쇠막대에 물을 뿌리고 먼지 쓸린 물을 밀어내느라 또 물을 쏘아대고 있었나 보다. 유리창을 닫고 그 위에도 뿌려보라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는 듯 신나게 물을 뿌렸다. 유리창도 문제지만 더욱 청소가 필요한 것은 방충망이었다. 이사할 때 새로 했으니 5년이 넘었다.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했지만 이거다 하는 것이 없었는데 우연히 찾아낸 셈이다. 유리창에 물을 주욱 죽 부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방충망은 아예 떼어내 바닥에 놓고 물을 뿌리니 묵은 때가 시원스레 씻겨나간다.
둘이 신이 나 힘든 줄도 모르고 닦아냈다. 오늘 어떤 일을 더 할지 모르지만 가장 의미 있는 일은 5년 묵은 방충망을 청소한 걸 거라며 서로 즐거워했다. 들어와 밖을 내다보니 후련하고 시원했다. 우리처럼 속 시원한 청소를 한 이들이 누가 있을까. 한 장면이 떠올랐다. 3000마리의 돼지를 치면서 30년 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악취가 지독하고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그걸 헤라클레스가 강물을 끌어들여 하루가 못되는 짧은 시간에 깨끗이 치웠다. 앓던 이 빠진 것 이상으로 얼마나 상쾌했을까. 외양간 주인과 청소한 이 모두 시원함과 후련함을 맛보았을 것이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기까지 고민이 적지 않았다. 간단한 물건도 직접 보고 사는 세상에 팔려는 집을 보여 주려하지 않았다. 집주인은 세를 주고 다른 곳에 살았고, 세든 이들은 집이 팔리기를 원치 않았다. 계약을 하는 날 겨우 보고 나니 심란했다. 구입을 결정하고 나서도 즐거움이나 기대감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잔금을 치르고 집을 양도받았다. 내부수리를 크게 해 예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 공사 중간 중간에 설명을 들을 때마다 그냥 넘어가거나 질 낮은 재료를 쓰기가 어려웠다. 계속 늘어난 공사비는 최초금액의 두 배를 넘었다. 수리를 맡은 이가 친척이어서 서로 편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다. 공사를 끝내고 정산을 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혔다. 나는 아무리 해도 그렇지 형편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예상액을 두 배나 넘길 수 있느냐고 했고, 그는 매번 상의를 하고 하라는 대로 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몇 차례의 밀고 당기기를 거쳐 계산을 마쳤다.
살아 보니 마음을 다해 수리해준 것을 알 수 있었다. 살면서 조금씩 계속 손을 보았더니 점차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이제는 별 불편 없이 지낸다. 좁은 자투리 공간에 꽃과 나무를 심고 마음을 기울이니 그런대로 정이 들었다. 그다지 소음도 없고 맑고 쾌적하다. 아침이면 새들이 날아와 잠을 깨우고 밤에는 별들을 볼 수 있다. 앞면의 아파트 정원은 우리 것인 양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청소가 지저분하고 불편한 것들을 깨끗이 치워 상쾌하게 하는 거라면 5년여 세월이 흘렀어도 서로 시원하게 털어내지 못한 앙금을 해소해야 하는 그와의 청소가 내게 남아 있는 셈이다.
아이들이 다 자라 성인이 되었다. 나나 아내가 머리 손질을 하면 금방 알아보고 “머리 했네요, 십년은 더 젊어졌어요.”한다. 그들이 하나씩 우리 앞에 나타날 때마다 유리창을 보면 뭐 달라진 게 없느냐고 물었다. 5년여 동안이나 못 보던 일이니 예상하기 어려운지 아무도 알아맞히지 못한다. 창문을 자세히 보라고 해도 눈치를 못 채고 유리창이 깨끗해진 것 같다고만 한다. 답답한 내가 방충망을 자세히 보라고 하니 그제야 우리 의도를 헤아려 방충망이 깨끗해진 것 같단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는 오늘 일을 신나게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그래요?”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깨끗해진 방충망 뒤로 작년에 옮겨 심은 조릿대와 올해 나무시장에서 구입한 오죽의 연녹색 잎이 전보다 더 선명하다. 생기 띤 댓잎들이 내 눈 앞으로 다가선다. 오래 별러 왔던 방충망 청소로 오늘 내가 얻은 것은 댓잎들의 생기 나는 연녹색이다.
그 연녹색 댓잎들이, 묵은 때가 잔뜩 낀 방충망을 후련하게 청소하듯 그와의 관계에 막힌 것들을 속히 해결하라고 내게 재촉하는 듯하다.
⦁바다와 함께 한 하루
여행도 자주 다녀야 감흥을 느낄 수 있나보다. 아내와 함께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선유도(仙遊島)를 보면서 애매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감탄이 나와야 하는데 덤덤하다. 여러 번 보아야 좋은 걸 알지, 처음 본 선유도는 그냥 바다위에 떠있는 섬이다. 여러 섬들이 다리로 연결이 되어 관광이 편리해졌단다. 차라리 떨어져 있어 배를 타고 보았으면 더 절경이었을까.
사전지식 없이 돌아보니 꼭 보아야 할 걸 못 본다. 하긴 꼭 보아야할 게 뭐가 있나. 안내하는 대로 보면서 눈과 마음이 즐거우면 더 바랄게 무언가. 선유도 산책길을 거닌다. 좀처럼 못 보던 바다를 부부가 맘껏 볼 수 있으니 후련하다. 바다를 낀 산책로를 따라 군데군데 찔레꽃이 피어있다. 어릴 적 내 집을 둘러 학교 가는 길에 피어있던 그 모습과 향기가 떠오른다. 작은 배를 타고 섬들 사이를 지나는 이들이 바닷바람에 신이 나는지 두 손을 크게 흔든다. 아무 생각 없이 우리도 손을 흔든다. 모처럼의 휴일에 작은 섬이 차들로 몸살을 앓는다.
장자교(壯子橋)를 걸어서 건넌다. 꽤 긴 거리지만 편안하다. 타박타박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여행이, 과정을 생략하고 눈으로만 여러 곳을 보는 걸로 변했다. 편리와 효율을 위해 마련한 시설들이 여행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건 아닐까. 눈 닿는 곳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손 한번 담그지 않고 고군산군도를 떠난다.
차는 어딘지 모르는 길을 달려간다. 길안내 내비의 도움을 받으며 달리는 차에서 창문을 통해 보는 풍경이 별다르지 않다. 좌우를 둘러봐도 물 뿐이다. 둑이 얼마나 긴지 수십 분을 달려간다. 새만금 방조제, 중간에 차를 멈추고 둘러보니 여느 강가처럼 평범하다. 몇몇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고 있다. 둑을 사이에 두고 물높이가 다르다. 수수만년 그들만의 이치를 따라 강을 이루고 낮은 곳 찾아 아래로 흘러 바다로 가고,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서로 섞이던 것을 갈라놓았다. 이 땅의 지도를 바꾼 대역사, 인간의 위대함을 본다. 그 넓어진 땅에 무엇을 하려나. 어느 곳에나 인간이 하는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 정말 잘한 건지 모르겠다.
인간이라는 게 감격스럽다가 때론 부끄러워진다. 지구의 역사이래로 인간 같은 유능한 파괴자가 있었는가. 잘 해보려 한 것들이 세월이 흐르면 커다란 재앙으로 돌아온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열심히 길을 닦았지만 그 길들로 인해 자연은 망가지지 않았을까. 차가 다니는 도로는 자연의 생태를 변화시킨다. 우리 부부가 이제까지 해 온 일들을 돌아본다.
부지런히 달리는 차는 우리를 채석강에 내려놓는다. 이상도 하지, 자연의 신비랄까. 어쩌면 해변이 이리도 기이할까. 마치 책을 포개어 쌓아놓은 듯하다. 속을 드러낸 절벽은 더욱 놀랍다. 기이한 경관만큼이나 이곳의 이름이 묘하다. 채석강(採石江)이라니, 누가 여기서 돌을 캔단 말인가. 더구나 강(江)이란 말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당황케 하는가. 중국의 시성(詩聖) 태백이 술을 마시고 달을 건지려다 빠져죽은 아름다운 곳이 채석강이며 그곳처럼 경관이 빼어나다 해서 채석강이란다. 더할 수 없는 사대(事大)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지형의 모양을 본떠 책석가(冊石泇)라 부르면 더 좋을 듯하다. ‘책모양의 돌로 이루어진 물가’더없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한없이 긴 세월이 보인다. 오랜 시간이 쌓여 돌의 켜를 이루고, 해지고 달뜨는 일들이 유구히 거듭돼 숱한 층을 보여주고 있다. 장구한 세월의 흔적을 보면서도, 백여 년의 수명을 살다 떠나야 하는 인간들이다. 유한한 시간을 사는 우리가 무한한 세월을 견딘 터를 찾아온 셈이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짧은 인생을 아쉬워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으면 좋을 것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끼리끼리 사진 찍기에 분주하다.
고군산군도에서 새만금 방조제를 거쳐 채석강에 이르도록 바다를 실컷 보았다. 구름이 해를 가려 그리 뜨겁지 않고, 하늘빛을 바다가 되비추니 하늘도 바다 같고 바다도 하늘같다. 돌아가자. 정해진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하루를 살았으니 몸과 마음에 새 기운이 돈다. 힘겹던 숨결에 여유가 생겼으니 한동안 힘을 내서 또 얼마간을 살아갈 수 있을 게다.
지칠 줄 모르는 현대판 천리마는 밝은 눈을 크게 뜨고 가르릉거리며 어둠속을 달려 익숙한 도시 속에 우릴 부려놓는다. 열두 시간여, 일상의 영역을 벗어났다 돌아오니, 안도감과 함께 편안함이 밀려온다. 기억 속에 담아온 바다 풍경이 여전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본 하루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하루의 기억 속에 왜 바다냄새가 없을까. 바다를 제대로 모르니 넉넉히 즐기지 못했나 보다.
자리에 누워 하루를 생각하니 머릿속에 파란 바다가 넘실거린다.
6. 자녀들은 다 자라고
⦁끈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다. 끌어당겨 열어본다. 지금 일어났는데 차를 태워줄 수 없느냐고 묻는다. 이 말은 적어도 내게는 요청이라기보다 명령이다. 앞뒤 사정을 알고 다른 대책이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자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아버지는 이 땅에 별로 없으리라. 십 분 후에 가자고 한다.
그제야 시간을 본다. 6시 11분. 몇 시면 어떤가. 자리에 한 시간 더 누워서 빈둥거린들 무슨 유익이 있나. 작은 노력으로 서로 섬길 수 있으면 그것이 서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지.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일어나서 오늘 한 시간을 더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마울 뿐이다.
어느 동화책에는 아버지가 신문만 보는 존재로 그려져 있던데, 낡은 차라도 태워줄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런 때는 세면(洗面)도 필수사항은 아니다. 누가 보는 이도 없고 신경 쓸 일도 아니다. 한 바퀴 돌아오는데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의견이 분명하면 좋겠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한 일이다. 나도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고 주변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서툴다. 그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무능한 나에게 있다.
구차한 자기변명이지만 어릴 적 우리 집은 남자들의 생활력이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그러했고 작은 형도 그랬다. 큰 형만 예외였는데 맏이 의식이 작용했음직하고 숱한 고생을 했다. 나도 마음으로는 온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싶은데 몸도 약하고, 전문적인 기술도 없다. 그러면 여기저기 눈치라도 잘 살펴서 남들 심기라도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열등감에서 비롯된 자존심으로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려서는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살아보니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해가 갈수록 어른들의 말이 오랜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 분명히 달라야 한다. 그것이 노년의 경험과 지혜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성숙한 이들의 지혜와 충고를 무시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데 그것은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고 사서 고생하는 것이며 더 멀리 돌아가는 길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소망을 품고 그들을 향해 무한 책임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 해주려 한다. 그들에게 거는 큰 기대가 때로는 저들을 더욱 힘들게 하기도 한다.
이 본능에 가까운 서로의 부담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지나친 집착을 버리면 한결 홀가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은 시기가 사춘기(思春期)다. 자녀도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하지만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존재로 인정하고 풀어주어야 부모도 자녀로부터 놓여나고 서로가 행복하다. 자녀를 심리적으로 홀로 세울 때 부모도 자유를 얻는다.
천륜(天倫)을 거스르는 것은 잘못이지만 자연의 때를 따르지 않는 것도 바르지 않다. 어차피 자녀의 평생을 책임져 줄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자녀 때문에 부모가 과도한 어려움을 감당하거나 부모로 인해 자녀가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하다.
첫 번째 출생으로 탯줄을 끊고 신체적 독립을 누리듯이, 사춘기에 두 번째 심리적 홀로서기를 감행해야 한다.
기회가 될 때마다 자녀들을 놓아주라고 말한다. 목회자로서 대화하는 이들에게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다. 부모들의 눈에는 자녀들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성숙한 어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적당한 시기가 지나면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최선의 결과를 내지 못해도 자녀들 스스로 모든 일을 해나가야 조금이라도 빨리 어른다운 삶을 산다.
갇혀있는 동물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든다. 닭, 소, 토끼, 새들이 그렇고 끈에 묶여있는 강아지들과 염소들이 그러하다. 넓은 산과 들과 벌판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원하는 것들을 먹고 뛰노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가축들만 아니라 그들과는 비할 수 없이 소중한 이 땅의 청소년들도 자유를 누리며 때로는 가정과 공부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친구와 인생과 벗하며 즐겨보게 할 수는 없을까.
이른 아침, 덤으로 얻은 시간에, 좁은 땅 많은 인구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이 땅의,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저런 생각을 두서없이 해 본다.
⦁‘찬찬이’
큰 아이가 십년도 더 된 중고차를 사서 운전하고 다닌 지가, 한 달 하고도 보름여가 지났다. 학원에서 외국어를 강의하고 있다가 다른 회사를 알아본다고 하더니 차가 없으면 너무 불편할 것 같다고 했다. 직장을 옮기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운전을 배워서 면허를 취득하고 차를 구입해 다니겠다고 하더니 자신의 계획대로 짧은 기간에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성격이 운전에 맞지 않을 것 같고 자기도 운전은 맞지 않을 것 같다고 하더니 필요를 느끼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학원에 등록하고 운전면허를 얻고 차를 구입하는 때에 아버지로서 많은 짜증이 났다.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도와줄 수 없는 혼자 책임져야 하는 영역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면허도 나오기 전에 집 앞에 도착해 있는 중고차. 나는 운전해야 할 차를 보면서 걱정이 한 가득이었는데, 큰 애는 기뻐하는 것도 같고, 어쩔 수 없어 하는 것도 같았다. 20년을 넘게 운전을 하지만 나는 내 차 외에는 거의 운전을 하지 못한다. 예전에 주차된 채로 다른 차에게 긁혀, 수리하는 동안 차를 임대받은 적이 있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한 번도 운행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시 끌어간 적이 있을 정도다. 아이가 중고차를 사는 것도 안쓰럽고 그것도 보태주지 못하는 내 무력함이 더욱 나를 화나게 했다.
면허를 받고 잠간의 연습을 하더니 차를 운전하고 다닌다. 대개가 그렇듯이 조심하는 기간이긴 해도 접촉사고가 많이 나는 기간이니 그런 일이 없을 수야 있을까. 이미 주차해 놓은 차에 흠집을 내기도 하고 주차하다가 다른 차를 받기도 했으며 벌써 신호위반으로 과징금을 물기도 했다. 차 뒷부분에 개 그림을 붙이고 초보라고 해놓았으니 금방 표시가 난다. 회사에 처음 가면서 운전을 하되 서투르니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겨나나 보다. 주차가 힘들게 되어있으면 선배가 빼주어야 하고 차 몇 대가 이동을 하면 속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은 가족 모두가 그 차를 타본 적은 없다. 나도 딸애가 운전하는 그 차를 타보지 않았는데 그 일은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회사에서 몇 몇이 이동할 일이 있을 때, 가끔 그 차를 타는데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손잡이를 꽉 잡는다고 한다. 그들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내 딸의 불안해 할 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가족들이 그 차에 이름을 붙였으면 해서 내가‘찬찬이’를 제안했더니 별 반대 없이 정해졌다. 조심하면서 항상 천천히 운전하라는 부탁과 염려가 들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개가 그려진 초보를 붙이고 한 쪽 구석에 얌전히 주차되어있는 그 차를 보면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그 차가 어딘가를 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이미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갔으니 염려하는 많은 부분은 좋아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동차도 인류가 발명해 낸 몇 안 되는 골칫거리 중에 하나 일 지도 모른다. 시간을 절약해주고 편리함을 선사했다고 할지 모르나 많은 연료를 소모하고 운동부족을 초래한 장본인인 것만 같다.
차가 가져다 준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차가 없던 시절보다 사람들은 더욱 분주해졌지만 더 많은 일들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중요한 일들이 더 많이 행해지는 것 같지도 않다. 아까운 많은 인명이 죽고 다치는 사고만 연일 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제 그 편리한 생활에 길들여졌으니 다시 불편함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족을 향한 내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여러 일들을 찬찬이’가 나누어 하고 있다. 일부러 구분하지 않아도 내가 분주하거나 가지 않아도 되는 일은 딸들이 알아서 그 차를 이용하고 있다. 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역할이 줄어들고 밀려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머지않아 세 아이들이 모두 자기 차를 운전하고 다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태의 흐름이니 거스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에 따른 나의 충격도 갈수록 약해질 것이다. 도리어 운전을 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편하게 여길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근본적인 속도, 건강한 두 다리로 걸었던 시속 5km 안팎을 늘 기억하고 삶에 여유를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유난히 빨리 온 더위에 차 냉방기를 손보고는 차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투정이다. 편안한 것은 또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는 법이다. 이 땅의 삶을 원만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차를 운전하면서도 배우게 될 것이다.
가끔은 남의 차를 타게 된다. 그 때마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는 기분이다. 온갖 최신 장비로 무장된 차의 비품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런 것들이 별반 없을 아이의 차가 떠오른다. 무시나 당하지 안 을까 걱정하다가 아예 그런 것들과 거리가 먼 내 차를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위안한다. ‘그 모든 것이 허상이고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에너지 소모를 부추기고 우리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야성을 빼앗아가는 것이다.’이런 근거 없는 합리화로 스스로를 위로하고는 편안해 한다.
오늘도 ‘찬찬이’가 하루 일을 끝내고 무사히 문밖에 돌아온 모양이다.
⦁축하하네, 진짜 어른들
두 사람 다 축하하네. 이제 어른으로 거듭났으니 축하받아 마땅하지. 예전에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결혼을 하지 않으면 어른이라 하지 않고 얘라고 했다더군.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질 줄 안다는 게지. 두 사람이 결혼한 지 한 해가 넘었으니 가정을 이뤄간다는 게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알리라 믿네. 어쩌다 물어보면 싸우지 않는다니 그것 참 신기한 일이야. 나는 결혼한 지 삼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 지금도 가끔 티격태격한다네. 어쩌면 예전보다 요즘이 더 자주 다투는 것 같기도 해.
결혼 초기야 서로 좋은 것만 보이고 탐색하는 시기니 그렇게 싸울 일도 많지 않을 테지. 차차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임의로워지면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참아야 하나,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지’하고 생각하게 되는 건지도 몰라.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상하관계가 나름 분명했지만 지금은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는 과도기니 시행착오가 생기는 거겠지.
여하튼 결혼으로 두 사람이 일단 어른의 반열에 들어섰지. 서로 ‘어룬’사람이 되었다고 온전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어른의 상대 말이 아이잖아, 제자 없이 스승이라 하는 거나 병사 없이 장수라 하는 게 이상하듯, 아이가 있어야 또 다른 의미의 어른이라 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여러 사정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 분들을 어른이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니야. 어른으로 가는 두 단계의 길을 보여주는 것뿐이지. 말 그대로 이제 두 사람이 엄마, 아빠가 되었지. 아무래도 지금은 엄마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더 많이 느꼈을 거야. 몸의 변화도 적지 않은데다 출산을 하느라고 고생이 많았고, 생활이 아이 중심으로 급격히 바뀌었을 테니까. 내려오는 말로는 이 시기가 가장 몸조심해야 하는 때라고 하더라고…. 이제 아빠의 할 일들이 몰려오겠지. 벌써 와 있을 거야. 예상은 했겠지만 겪어내기가 쉽지 않은 일도 많을 거라네. 아이 하나가 어쩜 이렇게 할 일들을 많이 더해 주는지 알게 될 거고, 자신들이 그냥 어른으로 성장한 게 아니구나 하는 감탄을 쏟아내게 될 지도 모르지….
아이를 키우며 부모님들을 더 생각하게 될 거야. 한 사람이 혼자 걸음을 떼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건지 새삼 느낄 거야. 한동안은 아이용품만 보이겠지. 애지중지 키우던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초등학생이 되면 슬슬 또 다른 일들이 시작이 돼. 말썽을 부리고 고집도 꺾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조금씩 비교되기 시작하니 더욱 쉬운 일이 아니지. 지금 이해는 안 되겠지만 그냥 들어 둬. 서로 지나치게 소유하려 하지 말게나. 누가 누구에게 소유되기도 어렵거니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굉장히 불행한 일이지. 내 자주 하는 말은 아니네만 다 자기 인생이 있는 거야. 때로 생각처럼 잘 되지 않을 때는 너는 네 인생이 있고 나는 내 인생이 있다고 생각하게.
최근에 어려운 책 한 부분을 전해 들었어. 많이 들어본 루소라는 이가 쓴 책이더라고. 그 분이 세상을 떠난 지 240년이 됐어. 《에밀》이란 책인데, 정확히는 생각이 안 나지만 유아기 아이에게 자연을 통한 교육, 감각을 길러주는 걸 강조했다나 봐. 부모가 자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후원과 지지를 보내며 기다리는 거겠지. 처음에는 모든 걸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고 아이가 조금 잘 하는 걸 보면 영잰가, 천잰가 하겠지만 세월과 함께 현실로 돌아오게 돼. 어려서 많은 체험을 해보는 게 좋을 거야. 여러 분야의 재능도 확인하고 다양한 취미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좋은 취미를 가지고 평생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을까.
온갖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을 두 사람에게 서른이 넘은 자녀를 둔 부모 심정을 털어놓은 것 같네. 나이들은 우리 삶도 아직 예측하기 어려운데 이제 태어난 아이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서로 포기할 수 없는 게 행복이 아닐까 해. 알 수 없는 미래에 저당 잡히고 하루하루 고생하며 살지 말고 오늘을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 서로 상대에게 모든 것을 걸거나 희생하지 말고 자신의 행복은 스스로 알아서 챙기자고 하면 지나친 이기주의라고 하려나. 난 그래도 그게 좋은 거 같아.
정신이 하나도 없어 이 글을 읽을 여유라도 가질 수 있을까 모르겠네. 때론 이게 뭔가 울컥 해지는 순간을 맞을 수도 있을 거야. 그때마다 어른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생각해.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겠지만 한 번 더 두 번째 어른이 되어볼 생각은 없는지…. 둘이 결혼을 했으니 아이도 둘은 낳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어려운 일을 어떻게 또 하라고 싶기도 하겠지만 세월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게 삶이거든. 가끔은 서로 쉬기도 해야 할 텐데, 하기는 예비교육을 많이 받았으니 잘 하리라고 믿어.
축하한다고 해놓고 조금 더 살았다고 잔소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네. 나도 언젠가 가까운 이들에게 해주려고 벼르던 건데, 주변에서 제일 먼저 엄마, 아빠가 되어서 듣는 거라고 여겨줘. 가끔 내 말이 생각날 때가 올 거야. 벌써 아이가 보고 싶고, 돌봐 줄 때가 되었겠네.
아직은 얼떨떨하겠지만 다들 그렇게 어른이 되고, 아빠 엄마가 되곤 해. 어른이 되는 두 단계를 모두 거친 걸,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해. 주사를 맞았더라도 감기 걸리면 안 되니 추운 날씨에 더욱 조심하도록….
⦁막내와 안경
생각보다 번거롭네. 왜 갈수록 복잡해지는 거야. 안경을 한 번에 맞추지 못했어. 내 잘못인가, 아닐 거야 아니지. 따로 마련된 방에서 육중한 기계 앞에 턱 올리고 오른편 왼편 눈에 여러 렌즈를 대 보았어. 눈은 나빠졌는데 도수 낮은 안경이 더 또렷이 보인다네. 비싼 테로 하라는 걸, 그 허영 덜어내느라 한 보름 늦췄지. 짐작엔 안경테로 장사하는 것 같더라고, 근거? 없지, 그냥 내 생각이야. 두 번째 가서 싼 테로 했지, 가능하면 조악하기 살기로 작정했거든.
한 스무날 전이었나 봐. 이른 아침에 성경을 읽고 있었어. 막내가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왜 안경을 벗고 책을 보냐고 묻더라고.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고, 이제 가까운 건 맨 눈이 더 잘 보인다고 했지. 안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냐고 재차 묻는 거야. 안경에도 약간 문제가 있었어. 안경을 오래 사용하니 가끔 안경닦이 천으로 닦는데도 잔금이 가는 거야. 삼사 년 된 것 같은데 꽤 많은 실금이 생겨, 써도 흐릿하니 자주 벗게 된 거지. 그걸 말했더니 그럼 시간 날 때 안경을 맞추러 가자네. 다초점이라 비싸대도 가자는 거야. 아내 것도 해야 된다 했더니 그러자고 하더라고.
언젠가 신문에 안경점 전단지가 들어온 적이 있었어. 그걸 보관해 두었지. 작년 추석 지내고선가 아내가 안경을 바꿔야겠다고 해 그걸 보여줬더니 연말쯤 가자는 걸, 대답만 찰떡같이 하고 못 갔지. 해가 바뀌고 오월이 왔어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네. 그러고 보니 지금 쓰고 있는 안경도 작은 애가 해준 거더라고. 그 때도 어버이 날인가 내 생일인가에 선물로 받았었는데….
몇 년 됐어. 애들한테 이런저런 신세지기 시작한 게. 두 해 전인가는 여행을 한 번 갔는데, 계획하는 과정부터 현지에서의 모든 것을 아이들이 하고, 나와 아내는 따라 다니기만 했지. 그래도 되나 몰라, 되겠지? 그렇게 했어. 편하긴 한데 기분이 조금 묘하데, 이렇게 밀려나는 거구나 싶더라고. 돌이켜보니 내가 자녀들에게 해준 건 별로 없어. 중학교, 고등학교 갈 때, 교복이나 맞춰 주었나, 아마 그것도 난 무심했고 친척 분들이 그 때마다 세뱃돈은 나우 주고 아내가 고생을 했을 거야. 교복 하는 데 따라간 기억이 없으니 말이지. 딸들이니 아내와 함께 가는 게 당연하다 핑계 대고 책임 회피한 것 같기도 해.
아이들은 커나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자연히 방임하게 되더라고. 그걸 또 아이들은 고마워했어. 일일이 간여하지 않고 잘 하리라 믿어주었던 게 고마웠다고…. 작은 교회 목회자 자녀로서 늘 따라다니는 결핍과 부족이 얼마나 컸을까. 어쩌다 물어보았더니 그런 생각 못하고 셋이서 외롭지 않게 지냈다고 말해줘 고마웠지. 부모를 향한 위로였을까, 사실로 믿고 싶어,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해야지.
아, 그럼 나는 부모님께 어떻게 했던가. 아버지는 내가 학생일 때, 어머니는 내 나이 삼십대 초반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이렇다 할 해드린 게 없네. 더구나 내가 막내여서 받는데 익숙하고 주는 게 서투르니 더 못한 것 같아. 말씀은 안하셔도 어머니는 아들 월급봉투 받아보고 싶어 하셨을 텐데, 언제부터였는지 통장으로만 들어오니 그것도 못해드렸지.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며 사신 어머니께 선물 한 번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게, 마음이 아리네.
막내를 끔찍이 아끼셨던 아버지, 나 철없던 시절 한 순간 말 잃으시더니 두어 달 앓다, 그 먼 길을 말없이 떠나셨지. 짧은 세월 막내와 함께 사실 때, 어머닌 딸만 낳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셨어. 속병으로 젊어서 술을 배웠다던 어머니, 부대에서 퇴근하며 구멍가게 들러 소주 한 병 어쩌다 사다 드리는 게, 무척 효도하는 일이라 여겼지. 교인들이 아주 가끔 집에 들러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던 어머니가 곤혹스러웠어. 남에게는 전도하라 하면서 어머니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는 무능한, 말도 안 되는 목사라고 스스로 생각했지.
그 당시 내 나이와 지금 아이들 나이가 별 차이가 안 나. 부모님께 한 일을 생각하면 내가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지. 자격 있어서가 아니라 효도하며 자녀들 마음이라도 편하도록, 더해 내 형편이 그러니 사랑으로 고맙게 받는 게지. 내 삶은 어째 남의 도움만 받고 사는 것 같아. 집에서 큰 소리 한 번 치기 민망해. 그러니 웬만하면 내 주장 없이 하자는 대로 따라 살아. 안 돼 보여? 아녀, 살만해.
막내가 자기 카드로 결제했지. 망설임 없는 당당한 모습이더라고. 맏이 차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다음 번 안경은 자신이 맡을 차례라고 예약을 하데. 그 때는 내가 수입이 좋아서 내 돈으로 했으면 좋겠다했더니 그래도 안 된다고 못을 박지 뭐야. 안 되나, 안 되나 보네. 마음 있으면 내 할 일이야 주변에 항상 있는 것 아녀?
그나저나 두 아이 혼사가 걱정이야. 둘째는 딸을 낳아 백일하고도 달포가 지나가는데, 이 일도 알아서 스스로들 해주면 좀 좋아…. 막내가 해 준 안경 쓰고 주변을 세세히 둘러보면 아내와 내가 사위들을 찾아낼 수 있으려나. 시원찮은 막내였던 아빠가 이제 기특한 막내에게 효도를 받고 있네.
⦁승진(昇進)
두 아이가 올해 승진을 했다. 막내는 연초에 발표가 있었던 것 같고, 맏이는 최근에 났다. 계급 체계에 익숙지 못하니 위치가 어디쯤인지 애매하다. 신입사원으로 들어가서 두 번 승진했으니 내가 경험한 군대계급으로 비교해 볼 수밖에 없다. 병으로 치면 이병 일병 상병 병장이니, 상병이 된 걸 게고, 장교라면 소위 중위 대위이니 대위일 것 같다.
승진은 어쨌든 좋은 것이다.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 기뻐하고 축하해준다. 대상자가 승진자보다 많았을 테고, 승진 못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니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 연공서열이 중시되던 풍토가 능력으로 기우는 것 같으니 더 힘들었을 게고 축하받을 일이다.
앞에서 예로든 군 체계에서 상병과 대위라면 나름대로 인정받고 자기 일에 책임지고 임해야 할 위치다. 경기를 하는 선수라면 정규선발선수가 된 게다. 이제는 실수를 하고 잘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자신의 위뿐 아니라 아래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빨리빨리’를 추구하는 문화였다. 성과를 내고 업적을 쌓아야 하는 급박성이 있었다. 그때는 최초와 최대가 어느 일에나 접미어처럼 붙어 다녔다. 느린 것은 무능한 것이었고 패배를 뜻했다. 그 그림자가 우리의 삶에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 눈앞에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달려야 했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군대에 가서 장교들을 다소 만나다 보니 연령정년이란 말과 계급정년이란 용어가 함께 쓰이고 있었다. 군 생활을 오래 하는 이들은 연금을 받으려고 20년쯤 군에 복무하기를 원했는데 일찍 진급하면 조금 못 미쳐 제대를 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선착순이 대세인 사회에서 그럴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서구에 비해 우리 정치와 경제가 단기간에 압축성장을 했다.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도 이 지점에 와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대단한 일이다. 세계가 경탄하고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안주해서 된다는 건 아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모범생 과정을 걸어온 이들이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타고난 부족한 적성과 환경적 요인으로 숱한 노력을 통해 겨우겨우 빠듯하게 진급의 과정을 거치거나 탈락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그들이 결코 노력하지 않은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외모지상주의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외적인 것들을 일정한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정당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개개인이 자신의 외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노력에 의하기보다 체질로, 유전으로 물려받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키가 작고 예체능에 젬병이다. 지금도 노래 부르는 자리는 의식적으로 가지 않고 어쩌다 그런 자리에 있으면 심하게 불안하고 긴장이 된다. 웬만큼 놀 줄 아는 이들은 나 같은 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뭐 잘 낫다고 빼고 분위기를 망치나’ 생각할 게다. 왜 안 되냐고 입만 있으면 노래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핀잔하리라.
승진을 했다는 건 자신의 뒤에 남은 이가 있다는 게다. 이제 전력으로 질주하던 자세를 주변을 돌아보는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 위도 보고 아래도 보고, 앞과 뒤를 동시에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혼자 멀리 가기보다 함께 갈 생각을 품기를 권한다.
가끔은 동료들과 함께 식사할 일이 있다. 내 분야에서 긴 세월동안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지내다보니 그런 자리에서 아무 악의 없이 던지는 말들이 내게 상처로 다가오는 일이 종종 있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걸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나. 스스로 삭이고 말아야지.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그래, 너 네들 잘 낫다, 나와는 격이 다르다는 말이지’하는 말이 불쑥불쑥 목에까지 차오른다. 그렇게 말해봐야 나만 초라해진다. 그런 의도가 아님을 나 자신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앞선 사회들은 ‘천천히’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문화로 가고 있다. 여유가 있으면 나를 앞서 달려가는 이들을 덤덤히 바라보고 용납할 수 있다. 그만한 사정이 있나보다. 나보다 이런 면에서 유능하니 그럴 수 있다. 나도 저 사람보다 더 유능한 면이 있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한 분야에서 앞서고 뒤서는 것으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설령 모든 면에 어떤 이보다 못하다고 해도 주눅들 일이 아니다. 그냥 ‘당신 잘 낫다, 이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군’ 인정하고 그와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면 된다.
가능하면 격이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나와 비슷한, 함께 어울려 주눅 들지 않을 이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한다. 세상에는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더 많은가. 신문을 볼 때마다 열 받게 하는 잘나고 높은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열 받는 것보다 훨씬 심한 압박과 불안을 느끼고 하루하루를 살아갈게다.
승진은 좋은 것이지만 사회적 책임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을 함께 기억하면 좋겠다. 승진이 꼭 자신이 잘하고 다른 이들은 못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두길 바란다. 세상 모든 일이 좋고 나쁨으로 명확하게 나뉘지는 않는다. 빛이 강렬해 밝게 보이는 곳에는 그림자도 짙다. 주변을 돌아보고 함께 가는 것이 지혜로운 이의 몫이다. 여하튼 기쁜 마음으로 진심으로 승진을 축하한다.
7. 우리도 소풍가요
⦁ 늦은 나들이
말로만 듣던 ‘진천 농다리’를 온 가족이 찾았다. 어느 곳이든 가족이 함께 가본 일이 너무 적었다는 불만에 당분간(當分間)은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함께 추억을 쌓고 사진도 찍자는 아내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내가 무심하고 분주해서 우선순위에서 가정이 밀려났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도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자기들 생활이 바빠 어떤 일을 가족들과 함께 하기가 어려웠던 듯하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온 가족이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아내도 그렇지만 아이들이야말로 선택의 여지도 없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주의 종이면서 가장이기도 한 내가 유능하면 그런대로 세상 속에서 경제활동을 했을 텐데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고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성도들과 가족들 심지어 나 자신도 불만이었다. 나 스스로도 답답했다. 어쩌란 말인가. 잘 하지 못하고 잘 되지 않는 것을….
그래도 늘 희망을 갖고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었다. 성경을 읽을 때는 힘이 나고 뭔가 될 것 같은데, 설교할 때는 확실하고 잘 될 것 같은데, 성경을 덮고 강단을 내려오면 어느 것도 되지 않고 가능한 것이 없어 보였다. 두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신학을 마친 지도 30여 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이제야 어렴풋이 그분의 뜻을 느끼는 듯하다. 세상의 평가는 한 줄로 세우듯 단순하지만 그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부른 사람들마다 독특한 평가기준이 있으리라. 축구 선수들 중에도 공격수가 있고 수비수가 있고 골키퍼가 있어서 모두가 승리를 위해 뛰지만 하는 일이 다른 것과 같으리라. 내 독특한 몫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찾아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직 아내는 내 역할을 잘 모른다. 내게도 확신만 있을 뿐 확인이나 검증을 거치지 못한 흐릿한 밑그림이다. 누군들 흔들림이 없을까. 조금의 요동도 없이 한평생을 산다면 어떻게 그것이 사람의 삶일까. 흔들림이 예술이고 문학이고 인간 삶의 흥미 요소가 아닐까. 본능과 도덕, 충동과 의지 사이에서 갈등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밖에 어떤 류(類)가 있을까. 갈등을 겪으며 고민하고, 생각할 줄 알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것, 그 자체가 인간만이 갖는 특권 아닐까.
한 세월을 지나 이제 아이들이 훌쩍 커 버렸다. 두 아이가 직장을 가지고 있고 막내가 열심히 자신의 일을 찾고 있다. 산책로를 걸으며 이제는 아내와 내가 아이들을 챙기는 게 아니라 저들이 우리를 배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지런히 앞뒤를 오가며 사진을 찍고 쉴 수 있는 자리를 찾아내고 함께 즐길 놀이를 준비하고 진행했다.
성인이 된 아이들을 대하며 다시 올 수 없는 세월을 기묘하게 살아온 나 자신을 보았다. 내가 좋아 가는 길이면 나 혼자로 족한 것을, 가족들에게 너무 힘든 일들을 요구한 것만 같다. 세상사람 같지 않은 가치관(價値觀)을 가지고 확연히 다른 사고(思考)를 하면서 세상 속에 함께 살아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내 모습을 본다. 때로는 자신의 삶을 강하게 긍정하다가 한순간 열패감에 빠져 허우적대고, 자랑스러워 하다가 숨고 싶어 하는 서로 다른 스스로의 두 모습을 본다. 현실과 무관하게 하늘까지 닿을 무수한 목표들을 꿈꾸며 미리 이룬 듯 즐거워하기도 했고 자신은 하지 못하면서도 혼신을 기울여 일생동안 남들이 이룬 일들을 쉽게 평가하고 비판하기도 했었다.
무식하기도 하지, 농다리라고 해서 개천을 가로질러 돌 몇 개 놓인 다리 하나 덜렁 있는 줄 알았다. 얼마 전에 누군가 정자와 둘레길이 있다고 했지만 규모가 그 정도 일 줄은 몰랐다. 현장에 가서도 놓여 진 돌다리를 건너가는 이들과 건너오는 이들, 건너편에 쏟아져 내리는 인공폭포와 공사 중인 정자를 보면서도 그것이 전부려니 여겼다. 가벼운 마음으로 3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겠다 싶어 구두를 신고 돌다리를 건넜다. 건너고보니 초평저수지도 있고 그럴듯한 하늘다리, 호수와 농다리길을 따라 조성한, 등산에 가까운 순환로가 있어 전시관까지 들르면 족히 하루길이 될 것 같았다.
길지 않은 하루해에 모두가 할 일들이 있어 아쉬움을 안고 일찍 집으로 왔다. 어느 일에도 만족하기가 어렵다. ‘조금 더 노력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다. 아이들과 가정에, 내 자신 하고 있는 일에,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친절해야지 하는 다짐을 한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우니 밀린 숙제를 성의 없이 해치운 느낌이다. 제때 못한 숙제는 다시하기 어려운 법인데 그나마 늦게라도 했다는 것으로 오늘의 나들이에 대해 내 자신 위안을 삼을 수밖에….
⦁순천만의 갈대
시린 찬바람을 밀치고 눈앞에 늘어선 큰 키에 마른 갈색의 무리들이 나를 압도한다. 일월 말 영하 십 몇 도를 오르내리고 칼바람마저 불어온다. 무슨 생각으로 이 을씨년스런 순천만에 왔던가.‘철새들의 천국’이라는 매력적인 소문에 살아있는 자연을 보려는 욕망이 더해졌다. 펼쳐진 광활한 규모와 옷 속을 파고드는 추위는 갈대밭을 한 바퀴 돌고 싶은 욕망을 주저앉힌다.
외투를 입고 털 깃으로 목을 감싸고 핫팩을 주머니에 넣었다. 춥지 않다고 마음에 최면을 걸며 걸음을 재촉했다. 교차하는 이들의 얼굴이 시퍼렇다. 간혹 동료들의 비행에 자극을 받는지 철새들이 날아오른다. 얼마가지 않아 도달한 무진교에서 바라보니 철새들이 수면위에 무리지어 떠있다. 날마다 대하는 인파에 무심한 듯 그들끼리 소란하다.
나무로 조성해 놓은 길을 따라 좌우에 자라난 갈대가 내 키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칼바람에 추워 ‘스스스’ 떨면서도 옆 친구들 의식하는지 움츠리지 않는다. 그 키에 비쩍 말라 얼마나 추울까. 추위에 언 사람들이 물결처럼 움직여도 무리의 위세인 듯 갈대들은 덤덤히 제 자리를 지킨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갈대와 같다 한다. 순천만 갈대밭에 와보니 대나무 나 벼처럼 속 비고 큰 키에 많은 씨앗들을 이고 있다. 그 심한 불균형에 쉴 새 없이 바람 불어도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고 굳세게 버티고 있다. 그들만큼 환경에 굴하지 않고 버티기도 힘들 것 같다. 갈대는 한 두 포기보다는 군집으로 모여 살아야 멋이 있다. 한 곳에 많이 모여 살수록 보러 오는 이들이 많고 신이 난다. 자기들끼리 주절주절 이야기도 하고 바람 따라 ‘사사삭 사사삭’ 장단도 맞춘다.
갈대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을 게다. 파릇하고 귀여운 어린 시절이 있고 점점 굳세어 지는 유년의 때도 지났으리라. 꽃이 피어 바람에 날리고 씨앗이 열리는 장년의 시기를 지나 몸에서 물기 빠져나가고 유연성을 잃어버린 노년의 시기를 겪고 있다. 연두에서 녹색을 지나 붉음과 갈색을 거쳐 흐린 백색에 이르는 긴 세월을 견뎌왔다. 이제는 생명의 물이 마르고 빈속에 겉까지 뻣뻣해도 땅으로 눕지 않는다. 동료이며 경쟁자인 옆자리 친구보다 앞서 누울 순 없다. 남들은 눈치와 자존심이라 하지만, 삶이 빠져나가고 남겨진 적은 힘으로 버티고 서있는 게다.
갈대는 여러 해살이 풀이다. 여기저기 따로 살면 죽고 살고 거듭하며 몇 배를 살겠지만 순천만 갈대들은 이곳에서 한 해를 수년처럼 산다. 바람도 많이 불고 새들도 실컷 보고 사람들도 질릴 만큼 맞고 보낸다. 그러니 어디서 여러 해 사는 풀과 나무들이 부럽지 않을게다. 순천만 갈대들은 온갖 게들과 짱뚱어와 철새들에게 놀이터가 되어준다. 발밑으로 펼쳐지는 세상이 있고 온 몸으론 바람이 지나고 머리 위론 새들이 난다. 일 년 열두 달 순천만 갈대를 보러 관광객이 밀려드니 그들은 심심할 여절이 없으리라.
갈대밭 위로 해가 기운다. 지나는 이들은 갈대무리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다. 바람이 흐르고 인파가 지나고 미지근하고 약한 햇살이 스친다. ‘끄르끄르’ 철새들은 소리 지르며 날아오르고 방문객들이 종종걸음으로 돌아가면 갈대들만 남아 하루를 마무리하며 어둠속에 밤을 보낸다.
자신들이 사라지고 텅 빈 갯벌이 될 순간이 다가오는 걸 갈대들은 모를 게다. 며칠 지나 2월이 오면 질겼던 그들의 한 살이, 부질없이 버티던 물기 빠진 가벼운 몸통도 인부들에게 잘려 나가리라. 3월이 남들에겐 새 출발이요 희망의 달이지만 갈대밭엔 고요와 휴식만이 깃든다. 겨울 끝에 봄이 묻어 있고 깊은 밤이 새벽으로 이어진다. 순천의 갈대밭도 4월과 함께 휴식이 출발로, 고요는 수런거림으로 바뀌어 새 생명의 잔치가 벌어진다.
떠나는 순간까지 하늘은 맑고 싸늘했다. 갈대들은 변함없이 가볍게 몸을 흔들며 부드러운 목례로 사람들을 배웅한다. 벌써 다음 행선지에 마음이 가있는 이들은 움츠린 자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떠난다. 갈대들도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인 양 자기들끼리 몸 비비며 수런댄다. 물위를 지키던 철새들이 무엇엔가 놀란 듯 하늘로 차오르며 여러 가지 모양들을 만든다.
순천만 갈대들은 자부심이 있다. 서로 하늘 향해 키 재지하며 자라나고 힘겨워도 땅에 먼저 눕지 않는다. 봄부터 겨울까지 한 세월 다 살고도 젊은 날 시원히 비 내리고 따사로운 햇빛 쏟아지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어쭙잖은 비바람에 꺾이지 않고 사람들의 환호와 감탄에 흔들리지 않는다. 비바람 햇빛에 영근 씨앗들을 주변에 퍼뜨리고 묵묵히 세월을 견디며 그들에게 기대는 이웃들과 함께 살 뿐이다.
담양의 대나무, 보성의 녹차나무처럼 한 곳에 함께 살아가는 게 순천만 갈대의 커다란 자부심이다. 나는 오늘 순천만의 갈대들을 보고 왔다.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박물관을 관람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보러갔다. 박물관의 담을 따라 조금 걸으니 규모가 만만치 않은 기둥이 줄지어 서있고 그 사이로 널따란 광장과 우뚝 솟은 오벨리스크, 길게 이어진 관광객들의 줄이 그곳이 베드로 대성당임을 확인시켜 준다. 로마를 비롯한 유럽국들은 조각을 무척 좋아하는가 보다. 웬만한 건물에는 으레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다. 세계를 품는 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열주회랑(列柱回廊) 위로 많은 조각들이 있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소지품검사,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다.
이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기금 마련을 빌미로 해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를 판매했다. 종교계뿐 아니라 세계사의 격랑을 일으키면서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건축된 거대한 성당. 초대교회의 지도자이자 초대교회라고 추앙되는 베드로의 시신이 안치된 곳에 세워진 가톨릭의 총본산.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곳으로 세계의 천주교신자들의 마음의 고향. 바티칸 박물관과 베드로 성당을 둘러보는 내 마음은 그러나 편하지가 않다.
이 넉넉함과 화려함, 그것들이 상징하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한다. 초대교황이라고 받드는 베드로의 삶이 어떠했나, 그의 최후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제자라고 하면 스승인 그리스도, 온 교회의 머리이신 그분의 삶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었나. 인류가 다 아는 대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었지만 삶은 소박함을 너머 초라했다. 이 땅에 단 한 쪽의 글도 남기지 않고 그분의 뼈 한 조각 찾을 수 없다. 비천한 곳 말구유에 오셔서 머리 둘 곳 없이 살다가 무덤마저 남의 것 잠깐 쓰신 후 하늘로 가셨다. 대제사장 바리새인들보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 편드시고 사람들에게 이 땅이 아닌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라 하셨다.
그분의 삶과 비교해보면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웅장하고 견고하게, 넓고도 높이 그리고 많이 쌓아올린다. 자꾸만 힘을 비축하니 추종자들 모이고 경쟁자들이 나타나고 세속의 힘이 이용하거나 누르려 한다. 세계의 역사와 교회사가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권력과 재산이 많아지면 다툼과 부패로 혼탁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먹이가 풍부한 곳에는 온갖 힘 있는 존재가 모여들어 피를 부르는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그분은 오히려 가난하게 소수로 약함을 가지고 섬기며 살라고 하셨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세상의 잣대가 그러한 삶을 언제나 힘겹게 만든다.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 평정과 고요를 유지하다가도 세상과 부딪히면 감정이 출렁이고 균형을 잃기 쉽다.
성당내부에 들어가 느끼는 것은 무언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그림 조각 성물들이 차고 넘친다. 관람객까지 많아서 분요(紛擾)함을 면할 수 없다.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안됐다는 마음이 든다.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과 고요함 가운데 이루고 싶은 일들도 적지 않을 텐데, 그런 일들이 가능할지 안쓰럽다.
피에타상이 보인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분이 겪어야 했을 고통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내가 부딪히는 어떤 일이, 오늘을 사는 이들이 겪는 그 무엇이 그 여인의 고통을 넘는다고 할 수 있으랴.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고통이 피해갈 리는 없다. 사실은 깊은 신앙과 예민한 양심으로 더 많은 고통을 당한다. 그 고통을 자신이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승화시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삶이다.
성당의 돔에 설치된 전망대에 올라 베드로광장과 로마의 전경을 보자고 한다. 오늘 돌아본 일정과 내일의 여정을 감안하면 올라가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평생에 한 번의 기회라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꼭 해야 하는 일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다. 마음을 바꾸어서 안 본다한들 무슨 큰일이 일어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높은 곳에 올라가 보는 것 자체가 내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낮아지겠다고 생각하면서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보려 한다. 눈높이를 낮출 일이다. 그분은 보리떡과 물고기가 전부였던 한 아이의 도시락을 귀히 쓰시고 과부의 동전 두 닢을 칭찬하셨다. 크고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작고 적은 것에 늘 마음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넓고 많고 커다란 것에도 좋은 점이 수없이 많다. 힘이 한 곳에 모아져 이룰 수 있는 일들도 적지 않다. 역사에서 위대한 일들이 행해지는 방식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도 그분의 방법은 그것이 아닌 듯하다. 당시의 로마를 하늘군사들을 동원하여 총칼로 정복하고 유대나라를 회복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십자가에 달려 수치스럽게 죽임을 당하므로 부활에 이르셨다. 중세에 여러 번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인들과 세상의 방식이 같지 않음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환하게 불이 들어온 베드로 대성당을 떠나면서 오늘의 신자들이 이곳을 돌아보며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회화와 조각의 빼어남과 화려함, 건물의 웅장함과 견고함, 그것들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는 자부심이 아닌, 작고 낮은 곳으로 향하려는 그분을 닮는 마음이 아닐까.
⦁파리에서 보낸 사흘
내 생에 처음으로 나가본 외국여행에서 사흘을 파리에 머물렀다. 그곳에 다시 가볼 기회가 있으려나. 해외에 나갈 기회야 생길 수 있겠지만 파리를 다시 가기는 쉽지 않을 게다. 미술이나 패션과 무관하게 살지만 워낙 유명한 곳이어서 전혀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알만하고 들어봤을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 내가 받은 파리의 느낌은 사람들은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고 내적인 탐구에 몰두하는 듯하고 도시가 오래된 탓인지 길이 좁고 서점이 꽤 많은 것 같았다.
세느강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고 오르세 미술관과 노틀담 성당이 가까운 곳에 숙소가 있었다. 식료품 가게를 찾아가 고추장을 사려했더니 없었다. 쌀도 마땅치 않아 차라리 한인마트를 찾아갔다. 그곳에 들어서니 숨통이 트였다.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려했더니 열리지 않았다. 열쇠를 넣고 돌려도 열리지 않아 당황하면서 긴 시간을 기다렸다. 알고 보니 열쇠를 강하게 돌려야 했다. 주인이 야속했다. 우리와 비슷한 일들을 당한 이들로부터 불만을 들었을 텐데 알려주지 않다니….
집에서처럼 익숙한 식단으로 저녁을 먹었다. 여행을 가서까지 한식을 먹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현지 음식이 불편하기도 하고 뭔가 아쉽고 허전하고 힘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식당에서 자연스럽지도 않고 여러모로 신경이 쓰인다. 평소대로 우리음식을 먹고 나니 새 힘이 나는 것 같다. 한국시간이 자주 떠오르고 생체리듬이 빗나간다. 다른 숙소보다 집이 좁아 조금은 답답하다.
오르세 미술관을 걸어갔다. 기차역이었던 곳이 미술관으로 변모시켰다. 조각과 그림 가구들을 모아 놓았다. 너무 많으니 대충 보게 된다. 알려진 밀레그림을 유심히 보았다.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어느 작가의 작품은 굉장히 많다. 작품수로 기울인 노력을 평가할 순 없지만 대단하게 느껴진다. 오후에는 노틀담 성당을 보았다. 나는 큰 특징은 찾을 수 없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돌아와 집 주변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아도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나나 아내나 나이도 많지 않은데 저녁에는 쉬고 싶어 집에만 머문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밤에도 그 나름의 일정을 보내는 듯하다. 가족이니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서로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밤이 늦었지만 루브르 박물관에 대한 기록물이 있다고 같이 보잔다. 몇 가지 흥미로운 것을 소개해준다.
에펠탑을 그 다음 역에서 내려 바라본다. 바로 앞에서 보면 까마득히 올려보아야 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단다.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전체를 볼 수 있고 사진을 찍어도 에펠탑과 균형이 맞는다. 어디에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때에 따라 그 거리가 가까워지고 멀어지겠지만 그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아 탈출하던 이카루스가 태양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해 추락해 죽음을 맞이하듯 거리유지가 중요하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갔다. 어디가나 이어지는 소지품검사. 편하게 보고 입구에서 만나자며 헤어졌다. 관람동선이 없다. 발길 가는대로 걸었더니 밖이다. 짐 검사를 다시하고 재 입장을 했다. 관람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듯하다. 방이 여러 개에 전시물이 엄청나니 차례대로 보기가 어렵다. 벽과 진열대뿐 아니라 천장에도 많은 그림들이 있다. 루브르의 3대 소장품이라고 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상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친숙하고 유명한 것에 더욱 끌리는가 보다.
수많은 유명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 놓으니 한 번에 보기가 힘겹다. 그 대단한 것들을 건성건성 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민망하다. 3대 소장품 중 어느 것도 프랑스작품이 아닌데 왜 이곳에서 전시하고 있을까. 가끔씩 쉬며 보아도 다리가 아프다. 폐관시간이 다가오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전 세계 사람들을 이렇게 한 곳에 모으기도 어려울 게다. 작품들이 모이니 사람들도 모이나보다. 폐관 후에도 기념품 가게는 영업을 하니 그것도 신기하다. 가게에 인파가 적지 않다. 자본주의의 속성이 여기서도 보인다. 오르세 미술관의 조각과 그림들, 그리고 루브르의 작품들이 한데 엉겨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굳이 그것을 분류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분류할 능력도 없다.
아이들은 세느강 유람선을 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기념품들을 파는 좌판들과 연이어 있는 비슷한 건물들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세느강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파리의 일부분을 보았지만 좁고 답답해 보인다. 좁은 길과 손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붙여지은 건물들이 여유를 느낄 수 없게 한다. 바르비종 지역에서 전원 풍경을 대하며 그림을 그렸다는 이들이 그립다. 내 생애에 다시 보기 어려울 파리를 주마간산처럼 그것도 몇 곳만 보았다. 그것만 해도 뜻 깊은 파리에서의 3일이다.
⦁하산 길
문장대에 올랐다. ‘글이 감춰진 높은 곳’, 무슨 글이 감춰져 있을까. 타고 오르는 마지막 쇠사다리 계단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머리칼을 흔들어 제키는 강풍에 탁 트인 사방을 바라보기 쉽지 않다. 속리산 등반은 문장대를 오르는 게 절정이며, 반일 수밖에 없다. 반환점인 셈이다. 등산 경험이 없는 온 가족이 함께 오르려니 짧은 경로의 쉬운 길을 택했다. 성취감을 누리며 정상에서 내려와 잠시 휴식 후 시간을 보니 세 시 조금 넘었다.
햇살이 가득하다. 조금 더 머물다 가고 싶지만 아쉬움을 안고 가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고 뻐근한 다리로 내려간다. 문장대에서 화북 주차장까지 3.3km 길, 평지라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길이요 차로 간다면 5분이면 넉넉할 게다. 문제는 오를 때에도 여러 번 쉬었을 만큼 허약한 체력이다.
쉬며 보아도 신기하다. 산꼭대기에 거대한 바위덩이가 올라앉아 있다니, 정상은 모두가 바위덩어리다. 계곡에 자리한 어떤 바위는 커다란 틈이 생겼고 금이 가고 있다. 쪼개지는 과정을 겪는 중이다. 자세히 보니 갈라진 곳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다. 못할 노릇이다. 비와 바람에 날아와 쌓였을 한줌 흙에 씨앗이 떨어지고 끈질긴 생명력은 바위틈 열악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을 게다. 아주 조금씩 뿌리가 자라고 계절이 여러 번 지나 얼며 녹기를 거듭하면서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으리라. 시작이 어렵지, 강인한 생명력을 뉘라서 막으랴. 고요한 숲 속에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곳으로 눈을 옮기니 작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나무를 쪼고 있다. 딱따구린가 보다. 보는 내가 머리가 아프다. 거센 나무줄기를 수시로 그 작은 부리로 쪼고 있으니 머리는 온전할까, 부리는 망가지지 않으려나. 그렇게 살아가도록 태어났겠지만 안쓰럽다.
다리가 풀려 내려오는 길이 만만치 않다. 다 한 번씩 넘어져도 나는 괜찮으려니 했더니 미끄러운 흙을 잘못 디뎌 주르르 미끄러진다. 가족들 눈치 채지 못하게 빠르게 수습하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더 늦게 하산하는 이들이 우리를 추월해 간다. 1km는 내려왔다고 생각하고 이정표를 대하지만 0.2km 하산했다는 현실에 야속할 뿐이다.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여, 숲은 어둑해지고 날씨는 쌀쌀해간다. 두고 온 높은 산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고 가을 산이 고적하다. 어느덧 다들 내려갔는지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한 고비만 넘고 산길이 끝나고 넓은 길이 나오길 바라지만 이정표는 내 기대를 무너뜨린다. 산속의 백 미터는 왜 이리 먼 것인가.
가족이 함께 하는데도 돌길로 이어지는 하산 길은 멀미가 날 지경이다. 이런 내 상태를 이야기하면 서로 힘든 게 배가될 것만 같다. 산속의 고요가 긴장감을 더한다. 오래 전 청년 때에 백리가 조금 넘는 길을 몇 번인가 타박타박 걸어본 일이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날 때는 1km가 별 것 아니더니 걸어보니 멀다는 걸 절감했는데 오늘은 산 속 백 미터가 결코 짧지 않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햇살이 사라지고 빠르게 어둠이 밀려온다. 한 고비를 넘어 넓은 길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건만 다시 나무가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이 땅을 살아가는 게 이러할까. 내 바람과는 무관하게 어려움이 잇따르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힘겨운 일들이 덮쳐오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야 희미한 출구가 보이는 것인가. 도로를 보고 다 왔다고 먼저 소리쳐 격려하고 싶어 조금 앞서 걸었다. 마침내 앞쪽에 등이 하나 보인다. 평지에 도달했다는 징표리라. 곧 넓은 길이 보이고 시멘트 다리가 나타난다. 긴장이 풀리고 편안함이 밀려온다. 시간이 걸릴 뿐, 평지가 나올 게 분명한데도 꽤 긴장을 했나보다. 채 여섯 시가 못 되었는데 사위가 캄캄하다.
마음이 놓여선지 걸음이 가볍다. 우리 뒤로도 몇 사람이 더 내려오고 있었다. 이삼십 분만 더 늦었어도 정말 무서울 뻔 했다고 모두가 한 마디씩 한다. 집으로 오는 길도 하산 길 못지않게 긴장해야 했다. 해 진 뒤의 시골풍경은 흑암이었다. 가로등이 없는 도로는 한적하고 어두웠고 잘 알지 못하는 길을 안내하는 음성을 따라 돌아오는 건 편하지 않았다. 길가에 들어오는 빨간 신호등이 반갑다. 도로 위 환한 가로등에 마음이 편안해 진다.
아무런 부담 없이 가족끼리 편하게 가다가 힘들면 어디서든 돌아서 오자던 등반이, 언제부턴가 쉬면서도 꾸역꾸역 올라가 정상을 오른 것까지는 좋기만 했었다. 정상부근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출발할 때도 그렇게 긴장하며 등반을 마칠 줄 몰랐다. 가을 산에서의 날씨를 몰랐고 오랜만에 하는 등반에 과욕이 앞섰나 보다.
언제나 그곳에 자리해 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아무 말 없이 깨달음을 주건만 얼마 못 가 그 절절한 깨달음을 잊고 산다. 삶의 현장 곳곳에서 과욕을 부리지 말라고 경고해도 그곳만 벗어나면 이내 마음에서 멀어진다.
내 삶이 하산길이다. 아니라 우겨 될 일이 아니다. 남들은 과욕이라는 걸, 나는 의욕이요 도전적 삶의 자세라고 한다. 산이야 정해진 길 따라 내려오면 조금 늦더라도 평지에 닿아 출발지를 만나지만 삶의 길은 미지의 초행길이다. 문장대에 감춰진 글이 혹시 과욕을 경계하라는 건 아니었을까.
8. 외손녀가 태어나고
⦁정말 반갑구나
성격이 엄마를 닮은 것 같구나, 그렇게 느긋한 걸 보니. 하긴 거친 세상보다 엄마 뱃속이 더 좋을지 모르지. 아기만을 위한 궁전[子宮]이니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니. 그래도 그렇지, 예정일을 일주일이나 넘기고도 아무런 기별이 없어 유도분만을 하기로 했는데 그러고도 또 하루를 넘겨 수술을 했다하니 그 여유를 누가 당할 수 있을까. 네 엄마가 몇 달 전에 너의 초음파 모습이라고 보여 주는데 세상에 나오면 보겠다고 안 봤다. 물론 그 후에 내 전화기 화면으로 몇 번 봤는데 정확히는 모르겠고 그저 아빠 닮은 듯하더라.
내 소개가 늦었구나, 난 네 외할아버지야. 병원이나, 몇 일후면 가게 될 너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교회 일을 받들며 살아가고 있어. 물론 너보다 엄청 나이가 많지. 엄마, 아빠가 주일마다 교회에 오니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난 지금도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게 달갑지만은 않아. 갑자기 나이가 많이 들고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 들 것 같아. 네 외할머니는 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서 나를 힐책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듣기 좋은 말은 없겠냐고 해서 같이 찾아보고 있는 중이야.
신생아실에는 너 혼자만 있더라. 세상에 처음 나와서도 큰 방을 혼자 쓰는 걸 보니 넉넉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하구나. 네 모습을 대하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예쁘고 귀엽게 생긴데다 순하기까지 하다니 고마울 뿐이다. 아빠는 손발 다 있고 잘못된데 없다고 기뻐하더라. 외할머니, 아빠와 나는 네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건강하고 예쁜 모습으로 우리에게 와준 것이 고맙고 대견했지.
내가 다른 이들 이름을 여럿 지어 줬어. 가게 이름도 많이 지어주고…. 하지만 네 이름은 쉽지가 않구나. 지구촌 시대니 외국에 가서도 사용하기 좋게 부르기 쉽고 적기 편한 이름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마땅한 게 떠오르지가 않아. 좋은 이름을 추천하지 못했더니 엄마, 아빠가 상의해서 “하율”이라 하기로 했다더라. 이름은 본인이 지을 권리가 없으니 이제부터 하율이가 되는 거야. 내가 농담 삼아 하나님의 율법이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의 선율이라 하더라. 네 성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정하율” 품격도 있는 듯하고 세련된 듯도 하잖아. 이름처럼 하나님을 노래하며 살아라. 새로 지은 이름이 익숙지 않아 아직은 모두들 “깜짝이”라고 부르고 있어. 병원에서 네가 새 생명으로 찾아온 걸 알고는 엄마, 아빠가 깜짝 놀랐다는 거야. 네가 그렇게 빨리 오리라고 예상을 하지 못했나봐.
이 세상에 오는 게 힘들었는지 머리가 조금 길쭉하더라. 한 이삼 일만 지나도 정상으로 돌아온다니 다행이지. 작은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고 우는 모습도 예쁘더구나.
너를 맞이하기 위해 엄마 아빠가 무던히 애쓴 것을 나는 안다. 태중에 너를 안고부터 엄마는 부지런히 병원을 다니고 마음을 편케 하고 네게 해롭다는 건 하지도 먹지도 않으려고 노력하는 걸 자주 보았어. 아빠도 수시로 너를 안고 씻기고 돌보는 법을 알려주는 강좌들을 들으러 다니는 것 같았지. 출생하기 몇 달 전부터 너를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눈치더라. 언젠가는 네게 필요하다고 무언가를 사러 한밤중에 먼 곳까지 나도 따라 가본적도 있단다.
인생을 조금 더 살아본 관점에서 엄마 아빠가 하율이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자녀에게 부모가 잘 되기를 원하는 건 당연하고, 자신의 자녀가 대단하다는 착각을 갖는 게 흉이 될 수는 없지. 그렇지만 지나친 기대는 서로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해. 난 그냥 개개인의 인생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 부모는 자녀를 지지하고 지켜보는 게 바람직한 것 같아. 모든 사람이 잘나고 대단하다고 인정할 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단다. 오히려 수시로 혼란과 좌절을 안겨주는 곳이 세상인지 몰라….
엄마 뱃속에서, 신생아실에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동생이 생길 때가지는 온전히 너만을 위한 세상이겠지. 하지만 유치원, 학교, 직장으로 이어지는 이 땅의 삶에서 세상이 함께 살아가는 곳임을 알게 될 거야. 함께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내 생각대로만 할 수는 없다는 거지. 서로 한 발씩 물러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거야. 양보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건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 지금 얘기해도 알기 어려우니 살아가면서 익히고 깨달아가는 게 살아가는 방법이야.
너를 위해 동화를 배우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 내 생각보다 훨씬 어렵더라고. 무엇보다 사건에 따른 오르내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더 많은 시간을 들이면 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은 명확히 모르겠어. 네 동생들과 이종사촌들이 생길 테니 그들에게 외할아버지가 직접 동화를 써주는 것도 큰 의미가 있긴 한데 너무 어려워. 멀지 않은 때에 다시 도전해 봐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반갑고 고마워, 우리에게 와 주어서…. 얼마나 긴 세월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잘 지내보자. 날마다 휴대폰 화면에 올라오는 네 모습을 보는 게 요즘 나의 큰 즐거움이야. 수일 내에 만나러 갈 테니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렴. 외할머니도 잘 지내고 너를 몹시 보고 싶어 한단다. 기쁘게 만날 날을 기다리며. 외할아버지가.
⦁무덤덤하기
며칠 전이다. 결혼한 둘째가 병원에선지 전화를 했다.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아기의 성별이 나왔단다. 전화를 “응, 응” 하고 받았더니 너무 사무적이란다. 손주의 성별이 궁금하지 않느냐고 해서 그냥 그렇다고 하니 뭔 반응이 그러냐며 딸이라고 한다. ‘그래’하고 심드렁히 대꾸했더니 조금 서운한 눈치다. 이 시대에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또 어떤가.
꼭 아들이어야 할 일도 없고, 딸을 더 선호하는 세상이 되어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주시는 대로 받는 거지. 그러고 보니 우리는 딸들이 많지만 사돈네는 아들만 있으니 더 좋아할 듯도 하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마음이 아팠을 게다. 이십여 년 공들여 키워 시집을 보내면, 출가외인이라 하고, 근친(覲親)때에 보고는 친정에 거의 갈 수 없었으니, 서로 그리워하는 정이 얼마나 컸을까. 친가 사람들도 걱정이 많았을 테고 시집간 딸도 시집살이를 하소연할 곳도 없이 서러움과 외로움에 많이도 울었으리라. 이제는 교통의 발달로 어느 곳이나 잠깐이면 갈 수 있고, 아예 살림집을 친정 가까이 마련하기도 한다. 또 굳이 가지 않더라도 수시로 연락을 할 수 있다. 오히려 결혼한 딸이 육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일들을 부탁하는 걸 염려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여성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날로 두드러지고, 진출하지 못하는 영역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예전의 어떤 시대보다 여성들이 살아갈만한 때가 도래한 셈이다. 웬만하면 어딜 가나 여성들이 많고, 남자들이 위축을 느낀다.
서너 달 전인가, 그때도 딸아이가 내게 전화를 했었다. 의사가 임신인 것 같다 한다고 해서 그러냐고 했더니 반응이 왜 시원치 않느냐고 했다. 조금 늦게 아이를 갖겠다고 하더니 빨리 생겨 그렇다고 하니, 할아버지 되는 게 기쁘지 않으냐기에 별로라고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면, 퍼뜩 내 나이가 떠오를 게고,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늙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자연계를 보아도 열매가 달리면 꽃은 시들고 열매가 굵어지고 커가면서 앞선 세대는 사그라진다. 앞 세대의 역할이 끝나 퇴장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는 게다. 딸이 임신하고 출산을 한다는 건 두 세대 째 열매가 열린다는 게니 내가 시들고 물러나야 하는 때라는 징표일 수밖에….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도리가 없다. 내가 더 이상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니라는 걸 문득 문득 느낀다. 신문과 방송을 대하면서 모르는 용어들이 점차 많아지고 딸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쉽게 처리하는 것들을 나는 하지 못할 때 내가 밀려나고 있음을 절감한다.
딸아이가 태아가 성별을 알려줄 때, 딸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돌이 갓 지나 아장거리며 걸을 때, 유모차에 두 딸을 태우고 아내가 근무하던 학교 정문까지 데려갔다가 퇴근에 맞추어 함께 오던 장면들이 살아난다. 조금 더 커서는 널따란 교회공간이 자기들 세상이라는 듯, 세발자전거를 타며 신나하기도 했다. 항상 어릴 것만 같던 아이들이 어느새 서른을 모두 넘어 이제는 사위들을 맞는 게 남은 일이다.
딸아이가 임신을 했다고 입덧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내 보기에는 아직도 어린 소녀일 뿐인데, 벌써 그만한 세월이 흘렀구나 싶다.
아내나 내 자신을 돌아보아도 삼십대의 마음 그대로인데 주변 동년배 친척과 친구들이 나이가 들었다. 친척들 모임에 가보면 앞선 세대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가고 뒤 세대가 맹렬히 따라와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어린 줄만 알았던 그들이 직장인 초년생의 때를 벗고 있다. 정보를 얻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능률적인 걸 본다.
어쩌면 올 해가 가기 전에 할아버지가 될지 모른다. 주위 사람들은 외손주가 생기면 그들에게 빠져 헤어나기 어렵다고 한다. 자녀들 때와는 전혀 다른 애착을 느낀다며 그들이 보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을 본다. 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 난 그러지 말아야지. 애써 무심해야지. 그 녀석들에게 홀려서 내게 유익할 게 무어란 말인가. 내 걸어갈 길을 터벅터벅 가야지.
마음속으로는 자녀들은 부모들의 문제지, 내가 관여할 것도 적고 내 삶을 그들이 흔들 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기대가 되고 두렵다.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하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건 축복이고 기적이다. 한 생명이 이 땅에 오므로 많은 것들이 달라지리라. 그 녀석을 중심으로 생활의 축이 이동하고 새롭게 짜이는 게다. 인간이 손대기 어려운 그 분의 신묘한 일하심을 지켜보는 수개월이 시작되었다.
아들, 딸은 의미가 없다. 그로인해 가정이 더 견고해지고, 세대가 이어질 게다. 삶의 신비를 날마다 알아가는 하나님의 선물로 아이는 이 땅에, 부모들에게 보내지는 게다. 생명의 시작이 사랑이듯, 그 과정도 맺는 열매도 사랑이다. 이 땅에 온 어린 생명들도 사랑으로 크고 주변에 사랑을 선물하여 기쁨을 준다.
감정을 진정시키며 언제까지 무덤덤할 수 있을지 내 스스로 시험해 보련다. 앞으로도 한동안 애써 무덤덤한 척해야지….
⦁엄마, 아빠를 안다는 것은
막내가 돌 지나고 다섯 달이 차가는 조카를 안고 몇 해 전에 찍은 우리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엄마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 무엇을 아는지 정확하게 가리킨다. 내가 다시 아빠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반응이 없다. 그 사진에는 외손녀의 아빠가 없다. 다시 자리를 옮겨 사위가 함께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 어디 있느냐 물으니 정확히 가려낸다. 신기하다.
생명을 받고 이 땅에 온지 오백여 일에 사람다운 기능을 갖추어 간다는 게 경이롭다. 다른 이의 말을 이해하고 요구에 합당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건 청각기능이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걸 해석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적절한 반응을 보임은 요구사항을 바르게 파악하고 어떻게 대응할까를 내부에서 판단했다는 것이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데 어떤 장애도 없음을 보인 게다.
서로의 소통에 사용된 언어가 한국어이니 우리말을 듣고 반응할 기본 구조가 갖춰진 한국인이라는 게다.
거의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 오백여 일만에 이룬 성과로는 놀라울 뿐이다. 아이들이 다 그런 걸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할 수 있다. 그런 아이들 모두가 놀랍고 기적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온 몸의 모든 기능들이 고장 없이 제대로 작동하고 생체시계에 맞춰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작지 않은 기적이고 생명체의 신비로움이다.
엄마, 아빠를 알아보고 낯선 이를 보면 운다는 건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세계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낯익음과 생소함을 구분하는 건 마음을 놓아도 되는 때와 긴장할 때를 구분한다는 게다. 찾는 대상이 없는 사진에서 아빠를 찾아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추측성의 부정확한 반응을 보이는 것과의 진전과 선후관계는 모른다. 시험 치는 학생들처럼 모르지만 하나를 골라보자는 기능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일 게다.
이제는 식사자리에서 자신의 것을 알아 스스로 골라 먹고 주변 사람들에게 주기도 한다. 내 것을 구분하고 그것의 일부를 떼어내 자신이 아닌 누구에게 주면 그만큼 자기 것에서 줄어든다는 것을 알까. 아직은 그렇게까지 모를 수 있다. 자신 주변에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아는 듯하다.
아직 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한다. 한두 단어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한다. 귀에 반복해서 들리는 것을 애써 흉내 내고 어른들이 상황에 따라 해석할 뿐이다. 언어 대신 사용하는 것이 표정이며 몸짓이다. 얼굴 표정으로 감정을 숨김없이 나타낸다. 부모에게 안겨 들어온 후에 찾아가는 순서와 빈도에 따라 자신의 친밀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지속해서 두 사람 사이를 오갈뿐 다른 이들에게는 가지 않는다. 벙긋거리며 소리치고 뛰어다니면 몸 상태와 기분이 좋은 것이고 칭얼대고 고개를 내저으며 짜증을 부리면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있고 편안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한꺼번에 발음할 수 있는 것들을 한 마디씩 해서 의사를 표현한다. 풀과 나무를 보면 그것이 무엇이든 “꽃”이라고 한다. 이파리와 줄기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냥 꽃이다. 이모들이 풀, 나무, 이파리를 여러 번 알려주어도 여전이 꽃이다.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들은 모두 “짹짹”이다. 단순하게 입력이 되었다가 지능이 발달하고 경험치가 쌓이면서 분화되어 가는가 보다.
홀로 살아가기 위한 성장과 발달이 늦는 게 인간이라지만 아이 내부에서는 수많은 신체와 심리 그리고 지적 기능들이 하루가 다르게 생성 분화 발전하고 있을 게다. 하루하루가 별다를 바 없이 그날그날인 내 삶에 비하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의 연속인가. 한 평생 살아가기에 토대가 되는 기초공사를 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게다.
집으로 돌아가는 헤어짐의 순간이 애틋하다. 차에 타기까지는 헤어진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 같다. 밝은 표정으로 차로 가서 안에 태워지는 순간에야 이모들과 헤어진다는 것을 눈치 채는지 고개를 흔들며 격렬한 몸짓과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때면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산다는 게 다 만나고 헤어짐의 연속이다. 보고픈 이들과 잠깐 만나고 오래 헤어져 있는 게다’ 아직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경험을 통해 몸으로 익히게 되리라.
요즘은 아이의 엄마가 직장에 가고 아빠가 육아를 위해 휴직중이다. 엄마와 아빠가 늘 옆에 있어주겠거니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세상이 항상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는 것을 유치원만 가도 알게 될 게다.
왕자 혹은 공주로, 세상의 중심처럼 대우받을 날도 이제 멀지 않다. 운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도 않는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일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순진무구한 때인지 모른다. 성장한 후에는 그 기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부모들에게는 땅을 칠 일이지만 본인에게는 더없이 다행스런 일이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기억들이 잊히지 않고 남아있다면 어떻게 그들을 떠나 독립적인 삶을 살고 가끔 가슴에 못을 박는 말들을 할 수 있겠나.
한편으로는 내부에서 숱한 진전들이 이루어지는 시기요, 외적으로는 네 중심으로 친인척들이 움직여주는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한 때를 마음껏 즐기려무나. 지금 받는 사랑과 배려가 평생을 사는 바탕 힘이 될 테니….
엄마, 아빠를 바로 구분해내는 건,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편파적으로 너를 응원할 게다. 날마다 달라지는 네게 무한히 고맙고 고맙다.
⦁돌을 맞은 너에게
한 해가 되었네, 네가 이 세상에 온 지가. 조그맣고 붉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더니 이제는 이빨도 아래 위 열 개 정도 났다지. 한 곳에 자리한 점처럼 이동할 줄 모르더니, 언젠가부터 부지런히 엎치는 걸 연습했지. 그러곤 얼마안가 기었을 거야. 이동을 배운 거지, 이차원의 삶을 살기 시작한 거야. 앉기를 연습하고 다리에 힘을 길러 일어섰지. 높이를 갖게 된 거지, 삼차원으로 올라간 거야. 몸을 가누더니 연습을 거듭해서 이제는 얼추 걷더라고, 삼차원을 넘어 한 단계 도약했으니 사차원이라 해야 하나.
걸을 뿐 아니라 도리질을 하더라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한 거지. 싫은 걸 싫다하는 거야. 스스로 분명한 의견을 가지고 그럴까 했더니 진짜더라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소리 지르고 울기도 하잖아. 아직 네가 엄마, 아빠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데, 네 부모는 할 줄 안다고 하더라고. 내 생각엔 엄마 아빠가 착각을 하는 건지도 몰라, 모든 엄마 아빠는 자녀가 어느 정도는 천재라고 여긴다고 하더라고….
네 돌날에 친가와 외가 식구들이 모여서 축하를 해주었잖아. 왜 그날따라 유난히 울고 신경질을 부린 거야? 모두가 너를 위해 시간을 내고 마음을 모은 건데, 사진첩엔 의젓하게 나왔더니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언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어두었는지, 네게 많은 사랑을 쏟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그날 평소와 다른 장소에서 많은 이들을 대하니 당황했을 만도 해. 몸 상태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어. 그렇긴 해도 몇 달 만에 뵈는 친가 어른들 앞에서 심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지.
이런 말을 벌써 해야 할지 모르지만 세상은 쉬운 곳이 아니야,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하는 게 맞을 거야. 모든 이들이 너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푸는 게 아니야. 좀 충격적이지. 오히려 남이 잘 안되길 바라고 이유 없이 미워하는 이들도 있어. 서로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기보다 극심한 경쟁이 펼쳐지는 전쟁터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아. 한두 해가 지나면 너도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달콤함과 살벌함이 공존한다는 걸 알아갈 거야. 그렇다고 세상이 다 무섭기만 한 건 아니지. 착하고 정이 많아서 남들을 도우려는 이들도 많아.
돌인데 돌잡이를 못했네. 그건 재미삼아 해보는 건데 평생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것 같기도 하고 주변 분들이 그런 걸 탐탁히 여기지 않아서 하지 않은 거야. 그걸 했으면 아마 네가 더 힘들었을 거야. 하긴 벌써부터 책을 엄청 좋아한다며. 삶에 책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모든 것은 또 아니야. 간접경험을 넓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앞선 이들의 지혜를 물려받을 수 있는 소중한 길이기도 하지. 다른 어떤 것보다 유용하다고 해야겠지.
진지한 얘기를 좀 해볼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바탕이 되는 건 무얼까. 사람마다 다 다르게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볼게. 난 믿음과 정직이라고 여기고 있어. 믿음은 사람들에 대한 선한 신뢰도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더욱 근본적인 것 같아. 굳건히 서려면 흔들리지 않는 토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신앙이야. 이 땅에 속하는 것들은 절대적인 것이 없어. 최신의 사조를 상대주의라 하는데 그건 간단히 말하면 모든 게 변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다는 거야. 신앙을 기반으로 정직하게 사는 게 중요해. 무엇보다 자신에게 정직해야지.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 자신을 속이며 산다면 무척 서글픈 거지.
네가 돌이 되기 전, 어느 순간 일어섰지. 그걸 어려운 말로 의미를 부여해 말하면 독립이야. 남에게 의지해 사는 건 독립이 아니지. 한 사람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경제, 신체, 관계에 있어서 홀로 설 수 있어야 해. 너는 이제 홀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면서 홀로서기를 하는 거야. 미운 일곱 살, 사춘기, 고등학교 또는 대학을 마쳤을 때, 결혼으로 공간적 독립을 할 때라고 하겠지. 그때그때 독립할 부분들이 있고 완전한 독립을 연습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부모도 모두 힘들고 불행해. 그러니 돌도 되기 전부터 연습하는 거 아닐까.
일어서면 다음 단계는 혼자 걷는 거야. 자율성 혹은 자발성이라고 하겠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서 행동하고 스스로 그 결과를 책임지는 거야. 멋있게 들리지, 쉽지 않지만 꼭 이루어야 하는 거야. 어떤 경우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기도 해. 인생에 중요한 것들, 예를 들면 직업과 배우자의 선택 같은 것은 자신의 결정이 가장 중요해. 중요한 만큼 다른 이들 조언도 가볍게 여길 순 없지만 마지막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거야. 남이 시켜서 마음에도 없는 걸 억지로 하는 건 자신의 삶을 남에게 맡기고 사는 거야.
너무 어렵고 무거운 얘기를 했네. 이런 말들은 어느 날 한 번에 몰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글로 남겨놓을 테니까 나중에라도 차분히 읽어보고 충분히 사색할 수 있을 거야. 돌을 치르느라 피곤하겠지. 엄마 아빠도 힘들 테니 네가 일찍 자면 좋겠네. 지금까지는 주변 사람들이 너를 중심으로 살았을 텐데, 이제 조금씩 너도 다른 이들 눈치를 보고 그들을 배려해야 할지도 몰라. 지금까지 잘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해가기를 바래. 나도 한 일도 없는데 피곤하네. 다음에 만날 때는 더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고운 꿈꾸면서 푹 자.
9. 소심한 내 모습
⦁내 일상의 삶
내 본업, 근본적인 정체성은 하나님께 부름 받아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다. 그러니 주(週)단위로 요일에 따라 하는 일이 정해지고 만나는 이들과 행동에 제약이 있다. 다행히 큰 교회의 목회자가 아니어서 어느 만큼의 시간여유가 있다. 지역사회를 향한 사역으로 청소년 학습을 도와주는 사역을 하고 있어 평일 오후에는 그들을 만난다. 그 일을 하게 된 것은 우리 교회 구성원이 감당할 수 있는 최적의 일이고 효율성이 크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며 아내가 교육대학을, 내가 사범대학을 나왔다는 게 주요 이유이기도 했다.
한 해가 못되어 그 사역을 포기하자고 했을 때,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역민들에게 했던 약속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와 아내가 그 일을 떠맡게 되었다. 이제 20년이 넘었다. 이 사역으로 지역 청소년들을 많이 만났고 알게 된 주민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교회의 성도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것에 만족한다. 믿음의 환경에서 수년을 매일같이 부대끼며 보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대학시절 내가 출석하던 교회가 예배는 열심인데 교육은 약해서 하나님께 교회교육은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네가 해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것을 부름으로 알고 신학교에 갔는데 그 곳에서 교회교육의 길을 잃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런 사역을 내게 맡기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전과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그때그때 생각을 적어 놓는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읽은 것이 기억나지 않아 회상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로서 적어 둔다. 또한 일상에서 감동이 있거나 어떤 깨달음을 느끼면 수필처럼 편하게 기록해 둔다. 내 본래의 정체성을 좇아 성경을 읽고 생생한 상상의 순간을 글속에 잡아두기도 한다.
이런저런 글들을 대할 때 모르는 어휘를 스마트 폰으로 확인하는데 그들을 표현하는 한자와 영어에 눈이 간다. 그것들을 붙들고 한참씩 공상의 세계를 드나든다. 영어와 한자를 긴 세월 붙들고 있어도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그저 내 삶의 여유 공간으로 수시로 드나들며 별세계를 누릴 뿐이다.
목요일 오전에는 수년째 수필교실에 참여하여 강의를 듣고 선배 문우들의 작품을 감상한다. 그분들에게 배울 점이 많기도 하고 약간의 창작을 향한 자극을 받을 수 있어서다. 그곳에는 열정이 대단한 분들도 있고 습작이 마음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신선함과 배울 것들이 가득하니 즐겁다.
일주일에 하루는 연세 많으신 목사님을 만난다. 오랜 세월 목회를 하고 성경을 읽으셔서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품고 계신다. 때로는 세상을 향한 울분과 개인적 취향이 드러나지만 그만한 스승을 어디서 찾으랴. 반복되는 얘기도 많아 뒷말이 짐작되는 때에는 간단히 내 할 일을 하기도 한다. 둘이 일대일로 마주보고 하는 일인데도 서로 쉽게 용납한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이 시대는 스승은 많고 제자가 드무니 내게 주도권이 있다는 것이다.
한 달에 두 번쯤은 교단을 달리하는 목회자 몇몇을 만나는 편안한 모임도 있다. 벌써 십여 년이 되어 서로가 익숙해 할 말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얼굴 붉히는 일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 외에도 중간 중간에 목회자로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새로울 것이 없는 신문을 보는 일도 만만치 않다. 목회자로서 세상에 얼마만큼 녹아들어 살아야 하는 지는 정해진 답이 없다. 하늘과 인간을 잇는 중재자로서 세상을 알아야 하기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신문은 일반 전국지 하나와 신앙의 눈으로 세상의 사건을 해석하는 신앙 일간지와 지역 신문을 구독하고 교단에서 발간하는 주간지가 있다. 서로 특징이 달라 큰 제목을 보다가 흥미를 끄는 기사들을 보게 된다. 가능하면 사설을 보려 하지만 내용이 딱딱하고 건조해 건너뛰기가 보통이다.
이렇게 늘어놓으면 무척 바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틈틈이 동네를 도는 산책을 하고 생각을 비우고 멍한 채로 한참을 보내기도 한다.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매사에 한 걸음씩 늦다. 특히 기계류에 적응하는 것에는 통 재주가 없다. 이른바 잡기에 관심과 소질이 없어 다른 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해 전에는 원망스러웠지만 이제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
방송대에 적을 둔지가 오래다. 방송대인인 셈이다. 그곳에서 한자공부에 자극을 받아 높은 자격을 얻었고, 수필을 만나 삶의 친구가 되었다. 방송대에서영문학을 공부했는데 7년 만에 과정을 마쳤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과목들이 만만할 리 없고 생업이 있으니 시간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초반에 열기가 약했는데 중반을 넘으니 졸업에 욕심이 생겨 약간 무리를 했다. 오랜 기간 해온 영어였지만 일정 과정을 이수했다는 것에 의미와 보람이 있었다.
내 스스로 평균 이하의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어느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마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도 내 일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 중에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대단한 이들보다 평범한 이들이 훨씬 더 많다. 내 일상의 고백이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들이 모여서 한 평생을 이루고 아쉬움 속에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내게 향한 귀뚜리의 당부
낮에는 매미가 밤에는 귀뚜리가 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가 보다. 예년보다 조금 빨리 온 귀뚜리 울음소리가 마음을 심란케 한다. 한해살이풀들과 대나무가 있어선지 떼를 지어 운다. 잠을 이루지 못하니 그들의 합창을 듣는다. ‘귀뚤 귀뚤 귀뚤엇’, ‘처리 처리 처리잇…’.늦은 밤 어떤 간곡한 사연을 내게 들려주려는 것인가.
듣는 내게 귀를 뚫으라고 하는 말인가 보다. 처리도 철이(徹耳)가 연음되어 들리는 소리 같다. 귀를 뚫고 들으라는 얘기가 무얼까. 무슨 전할 말이 많아 온 몸을 쥐어짜는 소리로 내 잠을 못 이루게 하는가. 저들과 내 삶을 살피면 내게 주려는 사연을 알아낼 수 있으려나.
밤낮 울어대는 매미나 귀뚜리는 수컷이란다. 지상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사랑을 해 후손을 통한 종족보존을 하는 게 생애 제일의 임무다. 온 힘을 다해 소리 높여 암컷을 불러 대를 이어 간다. 그들의 삶을 볼 때 온 몸으로 외치는 전언은 ‘사랑하라’이지 싶다. 인류에게는 사랑이 꼭 종족보존에 제한되지는 않는다. 이성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동성 간의 우정과 모성애, 부성애 그리고 인류 보편적 사랑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추진력이요 삶의 원천이 사랑이다. 많은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모를 때에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여기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내게 가장 필요한 전언은 무엇인가. 내 창 앞에 찾아와 그토록 소리치는 건 내가 꼭 들어야 할 얘기라는 게 아닌가. 요즘 들어 비슷한 꿈을 자주 꾼다. 꼭 요즘이라 할 수도 없다. 주일 낮 예배시간이 된다. 신자들은 모여드는데 나는 예배에 어울리는 옷을 채 입고 있지 않다. 옷을 찾으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다 술렁거리던 교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뜬다. 어떤 때는 성경을 찾으려 하는데 눈에 띄지 않기도 하고 성경 찬송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곳이 쉽게 찾지 못한다. 나는 시간이 지나며 당황스럽고 성도들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흩어져 간다. 꿈을 깨면 준비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해몽을 한다. 잠 못 이루게 내 귀에 쏟아 붓는 사연이 ‘준비하라’는 것만 같다.
미리 준비하면 당황도 덜하고 사전에 준비한대로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어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를 해두면 여유가 생기고 차분해진다. 마감시한을 넘기는 것은 최악이요 시한에 쫓겨 허둥지둥 처리하는 건 미련한 것이요 미리 대비하고 점검해서 처리함이 최선이다.
귀뚜리와 나 모두에게 의미 있는 전언은 무엇일까.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가니 ‘시간을 아끼라’는 말이 아닐까. 매미는 십 년 안팎의 기간을 땅속에서 보내고 온전한 매미의 모습으로는 보름 정도를 사는 것 같다. 준비해 온 기간에 비해 수백분의 일 밖에 누리지 못하니 순간순간이 얼마나 아쉬울까. 귀뚜리도 아홉 달 가량 자라나 세 달 안팎을 살다 죽는다. 더욱이 모든 알들이 성충으로 자라는 것도 아니다. 천적과 주변 생물들의 위험을 극복한 극히 일부만 성충이 된다. 인간도 준비하는데 많은 기간이 소모되고 자신의 자리를 찾고 쓰라린 경험을 거쳐 시간이 정말로 소중하다는 걸 느끼는 때쯤에는 남아있는 세월이 그다지 많지 않다.
남은 세월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현명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자신이 해야 할 일들과 우선순위를 가려 관계없는 일들을 하지 않음으로 세월을 아끼고, 우선순위의 앞부분에 있는 일들에 집중하는 게다. 하루에 꼭 해야 할 일 한두 개를 하면 잘 산 날이지 싶다. 과도한 욕심을 버리면 삶이 가벼워진다.
매미와 귀뚜리들이 마음을 잡으라하고 귀를 뚫으라면서 내 귀에 들려준 이야기들이 ‘사랑하라’. ‘준비하라’, ‘시간을 아끼라’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그들은 내게 어떤 사연도 들려주기를 원치 않고 본능에 따라 자신들의 짝을 찾으려, 그들의 영역을 알리고 침입자를 몰아내려 그악스레 울어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의 울음에 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교훈을 얻는 게 누구에게 피해가 될 수 있으랴. 내 삶의 후반부에 그들의 울음을 들으며 한층 분발해 산다면, 내 자신뿐 아니라 나로 인해 해를 입을 이들이 유익을 얻는다면, 그 아니 좋은 일인가. 해마다 가을의 초입에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찾아와 온 힘 다해 울어주는 그들로 내 삶이 풍성해 진다면 마음 열어 크게 반길 일이다.
중요한 전언이 더 남았음인지 내가 충분히 알아듣지 못했음인지 잠시 그쳤던 합창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다 밤을 샐지도 모르겠다.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이제 나는 됐으니 다른 이에게 가서, 그들에게 귀를 뚫으라고 울어대기를 부탁하고 싶다. 잠은 멀리 달아나고 그들의 떼창은 그칠 기미가 없다. ‘사랑해- ’, ‘준비해- ’, ‘시간을 아껴- ’….
‘귀뚤 귀뚤 귀뚤엇’, ‘처리 처리 처리잇’…, ….
⦁20년 동행의 끝
함께 한 오랜 세월, 너무 짧은 청산이다. 아직 정정하지만 나이가 많고 그보다 사회적 눈초리가 따가웠다.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는 때에 벌금을 물린다고도 했다. 스무 살이 꽉 찼지만 15만km도 달리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기름이 조금씩 새서 도로에 흔적이 남아 정비소에 갔더니 그냥 타라했다. 최근에는 핸들이 버겁고 문도 말썽을 부리긴 했다. 차량오일을 교체할 때가 지나가기도 했다. 몇 달 전에는 점심을 먹고 차로 갔더니 모르는 이가 차 앞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려했다. 자신이 회전하다 긁어 내 차가 조금 들어갔다고 해서 20년 된 차니 그냥 가라고 하니 여러 번 감사하다고 한 일도 있었다.
조기 폐차랄 수 있을까. 선정은 되었지만 너무 적은 액수여서 다음 검사기간까지 한동안 소유하려고 했다. 폐차하라는 기간이 지났다. 누가 대놓고 워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담스러웠다. 가족들은 다른 중고차를 사자고 한다. 차를 없애고 차 없이 지낼 수 있는지 얼마간 지내보고도 싶다. 폐차를 결심하고 아내와 마지막 운행을 했다. 20년, 돌아보니 긴 세월이었다. 최근에 주로 다녔던 곳을 한 바퀴 돌았다. 기능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 그동안 큰 고장 없이 말썽부리지 않고 함께 해준 것이 고맙다. 아쉬움과 게으름에 이틀을 미적거렸다. 오전을 보내고 오랜 친구 아니 내 몸의 한 부분 같았던 차를 폐차하러 나섰다. 그동안 내 삶의 자세를 보여주듯 돌아올 차비도 챙기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다시 한 번 더 집에 들렀다.
가는 길은 함께 하지만 같이 돌아올 순 없을 게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잘도 가고 있다. 20여분 걸릴 마지막 운행 길을 미끄러지듯 간다. 대기소에 세우고 등록증을 가지고 사무실에서 서류처리를 한다. 밀린 환경개선부담금을 정산하고 정산금을 받아들고 몸의 일부 같았던 차를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온다. 거리에는 내가 탈 수 있는 차가 없다. 버스 정류장을 보아도 주요도로가 아니어서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 터덜거리며 걷는 내 앞에 택시도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카카오택신가 뭔가 하는 바람에 그냥 가는 빈차 같아도 잡기가 쉽지 않다. 한 시간도 더 걸릴 것 같은 길을 아무 계획 없이 타박타박 걷는다. 20년의 첫 부분이 떠오른다. 찻값을 한꺼번에 치르지 못하고 할부로 했더니 한 달만 밀려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었다. 무슨 캐피탈인가는 연체가 계속되면 차를 회수한다고 연락을 해오고 돈 들어갈 곳은 많고 나올 곳은 적었다.
2004년인가, 3월이 되었는데도 청주에 많은 눈이 내린 때가 있었다. 임신 중에 있던 한 성도가 불안하다고 자주 심방해주기를 원했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성도가 와달라고 하면 어떤 일을 하다가도 달려가는 게 근본이다. 그 때도 눈길 운행을 무척 싫어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몇 번 눈길에 고생을 해서 아예 삽을 차에 가지고 다녔다. 그 날은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차가 도로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아예 도로 한편에 두고 왔다가 그 다음에 가져왔던 기억도 있다. 클러치가 고장 나 대로에서 쩔쩔맬 때도 있었고 감속기가 말을 듣지 않아 앞차를 받을 뻔했던 아찔한 상황도 있었다. 자녀들이 중고생이었을 때는 등교시간이 촉박하거나 귀가가 걱정되면 태우러 가곤 했다. 나뿐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추억이 가득한 차였다.
둘째는 근처 공업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칠 때 그 차로 가고 시험을 위해 머물며 기도하기도 했고, 첫 직장을 위해 제천으로 함께 가고 이삿짐을 나르기도 했다. 거리에 나서면 크기로 주눅 들지 않게 해주었다. 맏이가 차를 소유해 내 차의 효능과 위세가 줄긴 했지만 기여한 공로로 가족들의 신뢰를 받았었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던 차가 이제 사라졌다. 울적한 순간에 내 발을 넘어 날개 역할을 해주었던 존재를 없애버린 것이다.
살아있다는 게 무얼까. 차는 그동안 살아있었던 것일까. 정말로 차는 아무 감정도 없었을까. 내 마음에 따라 혹은 자신의 상태대로 감정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 배에 가득 먹을 것을 채워주면 신나하고 더 잘 달리던 것 같던 것은 그냥 내 기분이었을까. 20년 세월을 한 번도 내 뜻을 거스르지 않고 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한 자신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리고 가는 내게 원망은 하지 않으려나. 늘 함께 하던 차 없이 혼자 돌아오는 길에 찬바람이 분다.
내 앞에 서리라는 기대 없이 손을 들었더니 택시가 선다. 걸었던 길보다 훨씬 먼 길을 짧은 순간에 데려다 준다.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온 내게 아내는 간 일이 잘 되었느냐고 묻고 나는 다 잘되었다고 대답한다. 차가 늘 서있던 자리가 텅 빈 것이 눈에 들어온다. 허전하다. 오늘 오후의 한 때가 원활하지 못했다. 제대로 기능하던 한 부분이 고장 난 것만 같다. 우릉우릉 소리가 유난히 커서 내가 도착했음을 알게 했고 많은 동료들이 승용차로 바꾼 후에도 내 곤고함의 한 단면을 나타냈던 봉고의 사라짐이 못내 아쉽다.
그 차와 함께 나의 한 시대도 저물었는지 모른다. 거듭 생각해도 20년은 긴 세월이다. 이제 다시 여러 성분으로 돌아가 또 다른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 내게 그렇게 했듯이, 새로운 주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를…. 질긴 인연이 있다면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서로 모르고 다시 같이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동안의 오랜 충성스런 수고에 고맙고 또 감사하다. 우선은 어디서든 일단 편히 쉬기를 바란다. 거듭 고마움을 담아 안녕….
⦁전화에 대한 변명
저에게 전화를 주신 분 중에 제때에 통화하신 분이 거의 없을 겁니다.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 변명을 좀 할까 합니다. 사실은 제가 애들 몇 명의 공부를 도와줍니다. 그들에게 전화사용 자제를 당부하면서 제가 사용하기 민망해 전화소리를 죽이고 지냅니다. 그 시간만 그렇게 하면 되지만 일이 번거로워 평소에도 꺼놓고 살다보니 본의(本意)아니게 오는 전화를 그때그때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제때에 전화를 받지 못해 좋은 게 여럿 있습니다. 아직 겪어보진 않았지만 “보이스휘싱(voice fishing)" 에서 자유로울 듯합니다. 모르는 번호에 한참 지난 후에 ”실례지만 누구시죠?“ 하면 다급함을 무기로 대들지는 못할 테니 말입니다. 또한 제가 거절을 잘 못하는데, 긴급하지 않은 여러 전화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어 마음 쓸 일이 많이 줄어듭니다. 전화 중 일부는 점심을 같이 하자는 건데, 한두 시간만 지나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연락을 하면 김이 빠졌다는 듯이 같이 식사를 하려 했는데 아쉽다고 하곤 합니다.
휴대전화의 문자사용으로 편리한 면도 있습니다. 목소리를 나누고 싶지 않을 때, 감정의 동요를 막기에 적합합니다. 때로는 목소리로 통화하면 서로를 배려해 의례적으로 주고받을 이야기들을 생략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짤막하게 용건을 전할 수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좋은 점입니다.
일반전화 대신 휴대전화를 사용해서 곤란한 일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집에 없어서 다른 일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하면 대충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휴대전화에 누가로부터 몇 시에 전화가 왔었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히 기록으로 남아 원하지 않는 전화에도 반응을 보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능이 화려하고 다양해서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내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저는 아직도 이모티콘을 쓰지 못하는데 앞서가는 이들은 오래전부터 움직임이 많은 실감나는 몸동작 그림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게 전화를 거는 이들을 만나면 자기들이 갑갑하니 전화 좀 받으라고 닦달을 합니다.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곧바로 호출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전화가 되지 않는 이가 있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년전에는 사정이 있어 전화번호를 바꾸고 지인들에게 알리지 않았더니 제가 하던 일 정리하고 모습을 감춘 걸로 소문이 났습니다. 같은 건물에서 사용하는 층을 옮긴 걸 예전의 층만 방문하니 없고, 전화도 받지 않으니 오해가 생겼던 겁니다.
휴대전화의 기능이 확대되어 갑니다. 휴대용 컴퓨터를 손안에 들고 다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식을 주고받는 양이 무척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이런저런 모임을 같이 하는 이들이 밴드를 만듭니다. 처음 며칠은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들락거리고 시끌벅적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조용하고 한적해집니다. 얼마가 더 지나면 소수의 사람들만 반응을 보이고 운영자들은 의기소침해지고 지쳐 밴드폐쇄를 고민합니다.
문명의 이기가 쏟아지고 기술이 진보해도 친한 이들과만 자주 소식을 주고받을 뿐, 많은 이들은 더 외로워져 갑니다. 휴대전화로 들어오는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보면서 왜 나 자신도 쓰지 않는 손 편지와 직접 그리고 쓴 카드가 그리워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기다림의 여유와 상상의 힘을 잃은 것 같습니다. 약속시간이 남았는데도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짧은 만남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서로의 전화소리를 수차례씩 듣곤 합니다. 이전 시절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저녁 때 쯤 만나세.”혹은 “설 전후해서 보자고….”하는 약속이 귓가에 맴돕니다.
제때에 전화통화를 못하는 친지들이여, 용렬한 이를 너그러이 보아주어서 ‘그래, 우리가 참고 불편을 견뎌야지’하고 넘어가 주면 좋겠습니다. 거듭 미안하고 죄송스러움을 전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제 고집도 있고 하니, 앞으로도 한동안은 제때에 통화하기 어려울 겁니다.
⦁조심 또 조심
유럽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할 도시 열 곳을 보니 그중에 바르셀로나가 1위, 로마가 2위 그리고 파리가 5위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와 순위가 비슷할 것 같다. 관광객들은 웬만한 것을 분실해도 정해진 일정이 있어서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잃어버린 것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뚜렷한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게 이만큼 매력적인 유혹도 드물 것이다. 각 도시들도 행정력을 쏟아 붓고 싶어도 민원이 많이 밀리는 곳을 우선하다보면 조금은 소홀히 다루어질 듯도 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염려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소매치기였다. 빈번하다고는 하고 내 눈 앞에서 벌어지면 가만있을 수 없으니 무슨 운동이나 호신술이라도 익혀두어야 하나, 민첩한 행동을 위해 운동화라도 신어볼까 여러 생각을 했었다. 조심하는 것 이상의 대책이 없을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아내가 표적이 되었었나 보다. 바다를 보고 싶어 해서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가방이 열리고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져 있더란다. 소매치기의 목표물이 되었나 보다. 그 소매치기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가방에는 돈 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전화기도 그냥 전화기일 뿐이었다. 어쩌면 소매치기가 불쌍히 여기고 뭔가 넣어주고 싶었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말로만 듣던 것을 겪어본 셈이라 경각심을 갖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니 쉬운 일이 아니다.
로마에서의 숙소는 테르미니에 있었는데, 그곳까지 오는 어디에선가 이번에는 둘째가 그들의 눈에 띈 것 같다. 여권을 예쁜 지갑에 넣었는데 지갑 째 분실했다. 그 사람도 당황하기는 매 한 가지였으리라. 현금을 노리고 지갑을 손댔을 텐데 여권만 덜렁 있으니 아마 그것을 어딘가로 던져버렸을지 모른다. 숙소를 빌려주는 주인이 우리들의 여권을 사진 찍어 만약의 사고를 방지하려 한 모양인데 그 덕에 분실사실을 일찍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해외여행에서 가장 큰 문제가 여권을 잃어버리는 거라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 사고가 우리에게 일어난 게다. 당황스러움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최첨단을 사는 아이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필요한 조치를 신속히 취하더니 세 시간이 채 못 되어 일회용 여권을 발급받아 왔다. 금전적 손해는 없었어도 자칫했으면 여행일정에 차질을 빚을 뻔 했다.
다른 이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겠지만 나는 나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가족들과 주변을 살피며 여행을 했다. 교차하는 이들과 겹치는 이들에게 마음을 쓰고 가족의 소지품이 어디에 놓이는지에 유의했다.
마지막 일은 파리에서 인천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면서 일어났다. 아내의 여권을 내가 맡아 가지고 있곤 했는데 탑승확인을 하고 내게 주었다고 한다. 그 여권 속에 탑승권이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행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행히 모든 수속을 마친 후여서 돌아오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마일리지를 적립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 같다. 그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손해가 아닐지 모르겠다.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으니 내 부주의로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하는 것도 어려움이지만 자신의 부주의로 손해를 입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것은 조심하기만 하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행의 끝에 긴장이 풀려 주의력이 약해졌던 것 같다.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하는 10대 도시에 선정된 도시들도 적지 않은 우려가 될 게다. 행정과 치안을 집중한다면 개선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것도 그들이 살아가는 한 방법이라 여기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하긴 인간들이 자연의 소매치기인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벌들이 열심히 모아놓은 꿀들을 어느 순간에 날름 빼앗아 먹어치운다. 많은 채소와 열매들도 사람들이 먹으라고 그들이 탄소동화작용을 하며 튼실하게 익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그 수확을 위해 인간의 노력이 더해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전혀 노력을 하지 않고 결과물을 가로채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연계의 먹이 사슬이 먹고 먹히는 순환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크게 보면 서로 기여하는 것이지만 단면적으로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한다. 자연계에서 가장 무섭고 잔인한 소매치기가 우리들 인간일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해 그렇지 어쩌면 모든 분야에서 뺏고 뺏기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당연하고 공정하다고 여기는 일들을 파고 들어가면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마치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잔디밭도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잡풀도 섞여 있고 여러 곤충들이 자리 잡고 사는 아름답지 않은 험한 현장일 수 있다. 우주에서 지구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아름다운 초록별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때로 불공평하고 끔찍한 일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다. 이래저래 손해를 막는 가장 쉬운 방법은 스스로 조심,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다.
⦁유야무야(有耶無耶)
내가 그 분을 만난 것은 30년이 훨씬 넘은 듯하다. 그동안에 개인적으로 만난 것이 수십 번도 넘을 것이고 여럿 가운데 만난 것은 헤아릴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세히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아는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같다. 여럿이 모여서 별생각 없이 서로 의견을 나누다보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분이 맞는가 싶을 때가 자주 있다. 그런 때는 알다가도 모를 게 사람 마음이요 사람 일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 분은 웬만해서는 말이 별로 없다. 남들은 신중하고 과묵하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은 타고난 재주란다. 다른 이들이 십분 할 말을 자신은 일분에 한단다. 긴 세월 지켜본 바로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 분을 특별이 싫어하는 사람은 거반 없다. 한 번은 본인에게 그 비결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잘하는 게 없는 덕을 보는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덧붙이기를 노래 운동 일 기술 어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고 키 작고 힘도 없으니 누구도 자신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 몇 사람이 모이면 이런 저런 잡기도 하게 마련인데 그 분이 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그저 밥이나 같이 먹고 목욕을 하면 끝이다. 예전에 집짓는 곳에 함께 있었던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측은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 분이 변명삼아 하던 얘기는 부모님이 삼남 일녀를 두셨는데 자신이 막내였단다. 위로 형님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일을 시키면 하는 일이 시답지 않고 진전이 없어 형들과 누나가 다 하고 자신에게 맡기지 않아 일하는 방법을 못 배웠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성장하면서 손재주가 있고 일머리를 아는 이들은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어떤 자리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낱말을 하나씩 찾아보자고 했더니 그 분이 얘기한 것이 ‘유야무야’였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어떻게 자신을 상징하는 말로 그런 허망하고 부정적인 것을 내세울 수 있을까. 하도 어이가 없어 하니까 스스로 설명을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되지 않으니 ‘있는지 없는지’드러나지 않고 그런대로 세상을 살아왔지만 이룬 일이 없고 작은 악기 하나 붙들고 이 년여 세월 보내 봐도 열심이나 재주가 없어 한곡도 연주 못하고 어릴 때 한 가지 운동을 일 년 넘게 했어도 파란 띠 한 번 못 매 봤단다. 그러니 어디 있으나 존재감이 없고 대단한 결심으로 시작을 해도 흐지부지 끝맺게 되니 ‘유야무야’보다 자신을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럴 것도 같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아릿하다. 같이 한 세월이 적지 않으니 별걸 다 함께 해 보았는데 태극권을 그 분과 여섯 달 가량 한 스승아래서 배웠다. 어쩌면 그렇게 몸동작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남들은 얼추 동작을 익혀갈 때에도 그 분은 처음 한 가지도 순서를 맞추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즐거워했다. 잘못하는 이들도 농담 삼아 그 분을 보면 용기가 난다고 했다.
그런 분들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못하는 노래를 들으면 본인은 진땀이 나고 힘이 들어도 다른 이들은 우습고 무척 재미있다. 어떤 일을 해도 그 분과 같이 하면 제일 끝자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선지 어디서든 그 분을 보면 그 분을 아는 이들은 반가움에 즐거워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눈치다. 또 많은 이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같이 하고 싶어 한다. 가끔은 그 분이 그런 자리를 모면해 보려고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럴 때면 한가해도 바쁘고 없던 약속도 생겨나는 것 같다. 나는 알면서도 웃어넘길 수밖에 없다. 가끔은 민망해서인지 농담인지 자신의 나이를 감추기도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기상천외하다. 어떤 때는 유관순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도 하고 거북선의 노를 저었다고도 하고 세종대왕의 가마를 메기도 했다고 한다. 누가 들어도 속지 않을 얘기를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되풀이하니 안됐다고 생각하고 그러려니 한다.
그 분이 요즘 들어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동화를 배워보고 싶다고 한다. 자신이 키도 아담하고 얼굴도 동안이니 동화에 잘 맞을 것 같단다. 동화를 무슨 아동복쯤으로 생각하는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어느 것이고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말은 하지 않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갈는지 궁금하다. 큰맘 먹고 시작해도 얼마 못가 실망을 하고 또 흐지부지 되지는 않을는지, 말은 그렇게 해도 어렵사리 결정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그 분야에도 기라성 같은 분들과 탄탄한 전문가들이 많겠지만 그 분이 늦게나마 꽃피울 자리를 얻고 잘하는 한 가지를 얻는다면 내 보기에도 참 좋겠다. 어느 분들과 함께 할지 모르지만 경계심을 품지 마시고 잘 돕고 챙겨 주셔서 그분도 ‘유야유야’하게 해주시길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린다.
(내 이야기를 3인칭 시점으로 써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납니다.)
Ⅲ. 내 삶의 생각들 : 사색의 편린들
10. 부르신 그 분을 생각하며
⦁내 인생의 중간점검
⦁시원찮아도 괜찮아
⦁힘을 꼭 가져야 하나
⦁고난을 묵상하며
⦁맨송맨송한 성탄절
11. 세상을 보는 눈
⦁고통을 거쳐 얻는 힘
⦁미안하고 부끄럽다
⦁대나무 가는 줄기
⦁우리 사는 세상
12. 삶의 빛나는 조각들
⦁영원을 꿈꾸다
⦁흔적 속의 기억
⦁금장시계
⦁화해
⦁안을 보는 거울
⦁여신 아프로디테
13. 사색의 둥지를 틀고
⦁공림사
⦁구름둥지
⦁살구꽃 벚꽃은 피었다 지고
⦁서가에 놓인 문진
⦁아름다움에 대하여
10. 부르신 그 분을 생각하며
⦁내 인생의 중간점검
살아온 날들이 적지 않다. 한두 세대만 앞서 살았어도 노인으로 여겨질 나이다.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될지 몰라도 반 이상을 산 것은 분명하다. 예전 사람들은 채 사십을 못 산 이들도 자기 분야에 일가를 이루고 빼어난 작품과 책들을 남기곤 했다. 오늘날보다도 훨씬 열악한 시대에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그들의 삶의 바탕과 생활문화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선인들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이들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다.
남들과 비교해 이로울 것이 없으니 내 스스로 돌아보고 앞날을 위한 자극으로 삼을 일이다. 가난한 가정에 막내로 태어나 청년 때까지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의 사랑과 인정 속에 학교교육을 오랫동안 받으며 자랐다. 결혼하여 세 딸을 낳고 여러모로 그들은 독립할 나이가 되었다. 이 험한 세상에 이 정도라도 가정을 유지하고 있으니 내 비록 경제적으로는 무능하지만 비난받을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정이 오늘까지 지탱되어 온 바탕에는 아내의 수고와 노력이 컸다.
이 나이가 되도록 큰 수술 한번 없이 건강하게 살아온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몸에 속한 여러 부분의 기능을 부실하게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을 늘어놓자면 한참 걸릴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것을 어쩌랴. 그 나마라도 잘 간수하고 조심하며 살아갈 밖에. 수십 년 해오던 탁구를 최근 들어 쉬고 있다. 우선순위를 조정해서 규칙적으로 지속해야 하는데 여전히 숙제다.
예 ․ 체능 면에서의 재능이 거의 없어서 민망할 때가 적지 않다. 가능하면 그런 자리에 가지 않으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정말 난감하다.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은 남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고 하지만 전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고역이다.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데 아직은 그것이 쉽지 않다. 할 줄 아는 운동도 없었고 노래 한 곡 춤 한번 제대로 부르고 추어본 적이 없다. 이것이 단체생활과 인간관계를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르리라.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해 나간다. 내 일이 목회니 그 일을 전문가답게 해나가야 하는데 쉽지 않다. 내 삶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다. 직업은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의미가 있는 부분이다. 이 일을 한 것이 벌써 30년을 넘었다. 일의 열매는 미미하고 자신 있게 내 놓을 것은 없으니 답답하다. 돌아보면 나와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많으니 그들의 어려움을 알리고 서로 돕는데 내 할일이 있겠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품게 되었다. 다른 모든 것을 잘하고 자기의 본업을 제대로 못한다고 해도 변명이 되거나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으니 나 스스로 대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내가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잘하든 못하든 목회의 일을 30년이 넘도록 해 오고 있다. 내 자리를 지키자는 신념이 있어서다. 건강을 위해서 한 가지 운동을 또 그만큼의 세월동안 해왔다. 한자(漢字)와 영어도 짧지 않은 기간을 지속해 왔다. 최근 들어서는 오카리나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런 일들의 밑바탕에 본업으로부터 뒷받침이 되지 않으니 매사에 자신감이 붙지 않는다. 내가 믿고 오늘의 나를 만들어 오신 그분이 내 삶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계실 것을 믿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자타(自他)가 나를 “주의 종”이라 부르니 종이 걱정할 것이 무언가. 모든 일의 결정권은 주인에게 있고 종은 그때그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이다. 주인의 모든 일을 혼자 하려고 나서도 안 되고 남의 일에 지나치게 끼어들어도 안 된다. 뒷문 관리를 하든지 볏섬을 지키든지 주인이 맡긴 일을 하면 족하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을 알았으니 가장 중요한 일을 한 것이고 그분의 종이 되었으니 더욱 귀한 일을 하는 것이다. 더하여 부르신 이가 준비하게 하시는 것으로 알고 몇 가지를 꾸준히 준비하고 있으니 주눅들 일이 아니다. 남들과 견주어 못하는 일들이 많지만 그분은 비교하여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를 만드셔서 꼭 맞는 일에 쓰시는 분임을 믿기에 지나온 날들이 백 점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팔십 점은 넘지 않을까 스스로 평가한다.
내가 팔십 점 가량의 삶을 살아왔다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자신들이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열등감과 죄의식에 잠겨 있을 일이 아니다. 그분이 만드시고 재능에 따라 일을 맡기신 것이니 능력 이상의 일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괴로워하지 마라. 전반기를 보면 후반기를 얼마간 예측할 수 있다. 후반기를 대비하기 위해 사용할 도구들을 잘 벼리어 놓을 일이다.
⦁시원찮아도 괜찮아
시력이 시원찮으면 어떨까. 아주 오래 전 생각이 난다. 군대에서 훈련받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낮에 각개전툰가 하는 힘든 훈련을 받다가 안경이 깨졌던 것 같다. 야간에 공포체험쯤 되는 담력훈련을 받는데 그렇지 않아도 시원찮은 시력에 안경이 없는데다 밤이니 크기만 대충 구분될 뿐이었다. 시간 간격을 두고 두 사람씩 출발해서 정해진 구간을 돌고 오는 것이었다.
묘지와 상여 집, 공중화장실 같은 곳이 만들어져 있었다. 앞서 출발한 이들의 비명이 간간이 들리고 같이 간 동료는 많이도 놀랐다. 그렇지만 나는 맨송맨송했다. 친구를 따라 가기에 바쁘고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처지였다. 보이는 게 없는데 두려울 것이 무언가. 화장실에서는 갑자기 문이 열리며 귀신차림의 인형이 나왔는데 그냥 자루 같았고, 상여 집에는 죽은 뱀을 묶어 늘여놓았지만 내겐 좁고 허연 천이 펄럭일 뿐이었다.
아마도 친구들은 그 밤에 나를 겁 없는 동료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단지 안경이 깨어져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 뿐 인데…. 선명하게 보는 것에서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고 두려움을 느끼는가를 생각한다.
나는 운동신경이 민첩하지 못하다. 학창시절에 견디기 힘든 게 예체능 그중에도 체육시간이었다. 대개는 운동장에 모여 체조를 한 후 공을 나눠주고 편을 나눠 경기를 하다 종이 울리면 교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내가 속할 편이 마땅치 않다는 거였다. 서로 실력을 뻔히 아니 난감했다. 더욱이 경기에 박진감을 더하려 내기를 하니 못할 일이었다. 처음에는 인원이 많은 축구를 했는데 잘못하니 수비를 맡겼다. 잘하는 공격수에게 못하는 내가 밀리는 게 당연하지만 무척 눈치가 보였다. 나 때문에 실점을 하고 경기에 지는 꼴이었다. 배구나 농구도 별 다를 게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하지만 어설픔은 여전했다. 목회자들이 술이나 사행성 오락을 하지 않으니 함께 모이면 운동을 자주 한다. 또 다시 어려움이 되풀이 되었다. 경기에 긴장감을 주려고 대개는 목욕비와 밥값 내기를 하는데 승부에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잘 못하는 내게 공격이 들어온다. 민망한 일이었다. 함께 한 자리에 있으면서 심판만 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렇다고 나 때문에 졌다고 비용을 혼자 낼 수도 없다. 서로 불편한 일이니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런 자리를 피하고 다른 이들도 이해를 해 준다.
그런데 이게 삶에 괜찮은 쪽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한두 번은 내가 속한 교단에서도 도(道)와 전국 단위의 경기를 벌인다. 행사에 운동경기를 해야 많은 인원이 모이고 열기가 고조되니 정례화가 된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한 달여 연습을 한다. 아침에 모이면 오후까지 어울리는 게 다반사다. 자타가 인정하는 선수들은 연습에 빠지기 어렵다. 하지만 나 같은 이는 너무도 자유롭다. 경기가 열리는 날만 참여해 그것도 구경을 겸해 응원만 하면 되니 얼마나 괜찮은 일인가.
물론 기회비용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일들을 거치며 허물없이 친해지는데, 어쩌다 한두 달 만에 한 번씩 만나니 데면데면하다. 그런 관계를 바꾸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져보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작심하고 공과 네트를 가지고 다니며 동료들을 불러 모아 거의 날마다 몇 년간 운동을 했더니 동료들이 나를 ‘원조’라고 불러주었다. 그 일로 본업은 조금 소홀해졌지만 지역의 타 교단 목회자들을 여럿 알게 되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밑바닥을 면할 정도지 제대로 된 경기에 나설 정도의 실력은 되지 않았다.
내 처지를 분명히 알게 되니 이제는 홀가분하다. 동료들이 운동하는 곳에 서, 함께 하자고 해도 여간해서 참여하지 않는다. 일상이 아닌, 어쩌다 한 번 할 때 부상을 당한다는 걸 안다. 몸은 훈련되지 않았는데 마음이 앞서가면 일이 생긴다. 함께 어울리지 않으니 내 시간이 많다. 내 처지가 훨씬 시간활용에 낫다고 스스로 위로하는데, 실제로 몸과 마음에 썩 괜찮다.
누군가 남자 키가 180cm가 안되면 루저(loser)라고 한 말이 회자되었던 적이 있었다. 키 크고 힘도 세고 보기 좋은 근육이 있으면 멋있고 남들 눈에 잘 띌 게다. 그런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일에 내 잘못은 별로 없다. 유전자 조합과 체질이 그러하니 어찌하랴. 난 누구의 말대로 실패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실패자도 아니다. 내게는 그들이 갖지 못한 괜찮은 게 있다. 누구도 나를 보고 위압감이나 경계심을 갖지 않는다. 다른 이들에게 긴장감을 주지 않고 편안하게 해준다는 게 장점이 아니고 무엇이랴.
오늘도 TV에는 각 분야의 빼어난 실력자들이 나와 멋진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손 실력이 아닌 눈만 높아진 나는 ‘이렇게 하면 더 잘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마치 내가 그들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많은 방송사마다 노래 프로그램은 어찌 그리 많은지, 출연자들은 가수가 아니면서 하나같이 잘 부르는지,
그런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 위안을 얻는다. 나는 저들을 보며 즐겁게 산다고…. TV속에 나오는 이들은 결코 나더러 해보라 하지 않을 테니, 주눅 들 일이 전혀 없다. 시원찮음에 적지 않은 유익이 있고 나는 그것들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 아마도 내 삶의 후반으로 갈수록 나는 그 유익 점들을 바탕으로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 게다.
⦁힘을 꼭 가져야 하나
연세 지긋한 목회자 한분이 교회가 힘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하나가 되어야 한단다. 나는 교회가 힘을 가져서 무얼 하려 하냐고 반대했다. 의견이 하나로 고정되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전체주의 사회나 군대가 아닌데 어떻게 일사분란하게 하나가 될 수 있나. 그 분은 한국교회초기에는 기독교인이 1.5펴센트 밖에 안 되었지만 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감당하고 3⦁1운동을 이끌어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지도적 역할 못지않게 중요한 게 단단한 바닥이 되어주고 따라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주 모여 서로 생각을 나누고 위안을 얻는 모임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교회가 원성의 중심에 선듯하고 지역에서 눈총을 받는 것 같다. 국가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지역을 섬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것이 깡그리 무시당하는 듯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3⦁1운동 덕에 해방이 되었다는 말에 29년간의 간격을 무시하고 어떻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냐고 하니 답이 궁한 모양이다. 3월 초에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임시정부를 만들어 임시정부 주도로 해방을 이뤘다고 했다. 그게 우리 논리지 객관성을 지닐 수야 있나. 연합국이 동맹국에 승리해 해방을 맞은 게지….
교회가 힘을 갖는 것을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 집단이 힘을 가지면 그 힘을 이용하려는 이들이 나타나고 힘이 있으면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 일사분란하게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고 행동하는 대표적인 무리가 군대와 조직폭력집단이다. 그들을 상징하는 말이 상명하복이다. 복종하지 않으면 하극상이 되고 배신이다. 그렇다면 정신적 지도자라 자부하는 이들이 모인 교회의 목회자 집단이 어떻게 다른 의견이 없이 힘을 한 곳으로 모으려 하는가. 한 곳으로 의견이 모이는 것은 위험성이 크다. 만장일치는 바람직하기 않다. 개인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현저한 힘의 격차로 있는 곳에서 나올 수 있는 결과다.
만장일치 사안에는 여럿이 의견을 나눌 필요가 없다. 그렇게 자명한 것은 한둘이 결정하면 족하다. 하나의 의견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폭력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군대가 그 국민들에게 얼마나 어려움과 아픔을 주었는가를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다. 그분이야 말로 힘을 가지려하면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었다. 열두 영 더되는 천군을 동원해 상대를 무찌르고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도 있었고 로마군을 무찌르고 보란 듯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부당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힘을 가진 이에게 사람들이 모여든다. 잘 사는 나라로 이민을 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득을 볼 수 있는 유리한 곳으로 가서 조금이라도 나은 위치에 서려는 게다. 힘의 정점에 서면 많은 이들에게 떠받들려 제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우리 현대사에서 한 사람, 대통령에게 힘이 집중되어 임기를 마치면 감옥으로 가는 것이 정해진 과정처럼 서글픈 현실을 보아야 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쏟았던 희생과 노고도 부인할 수 없고 탁월한 판단역과 지도력을 소유한 분들이었지만 거대한 힘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힘을 갖지 못한 이들은 낮은 자세로 조심하며 살아간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처리하기에 온 힘을 다한다. 힘을 가진 이들이 처음부터 잘못되는 것은 아니다. 힘에 취하면 초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마음이 어느 순간 풀어지고 도움을 받은 이들이 아쉬운 소리를 하면 거절하기도 어려울 게다. 힘이 한 곳에 집중되는 집단일수록 본인이 나서지 않아도 그 힘이 잘못 사용될 수 있다. 그 힘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이들이 과잉충성을 하고 힘 있는 이에게 잘 보이려 서로 무한 경쟁할 것이다.
힘 가진 이의 지연 혈연 학연 등 모든 연줄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용되고 관계자들은 그 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잘 보이려 거절하지 못한다. 그런 일이 관행이 되고 그 분을 사칭하는 이들이 생겨난다. 필연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억울함이 쌓인다. 힘이 집중돼 생기는 일이다. 힘이 마력을 부린다. 권세와 인정을 허락하고 편리함을 선사한다.
힘 있는 이들, 뜻을 이루고 성공했다고 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위기가 찾아온다. 도전을 제일 많이 받는 이가 챔피언이 아닌가. 높은 곳에 오른 이가 더 바람을 타게 되고 떨어질 위험이 클 것은 당연하다. 힘이 있는 이들은 다스리려 하고 무언가를 이루어 보여주려 한다. 힘은 그 자체가 움직이려 하고 성취하려는 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나도 육체적인 강한 힘이 있었더라면 몇 번 사고를 쳤을 게다. 그것도 작은 일이 아니라 큰일을 저질렀을 게다. 억울함과 분함을 심하게 느꼈던 순간에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했다면 오늘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힘이 없어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잘못을 막아준 게다.
개인적으로는 교회들이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의견이 모아지고 힘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양한 의견과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그 길이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더 적합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고난을 묵상하며
고난주간이다. 한 주간을 경건하게 고난을 묵상하며 살라고 한다. 그 의미가 무얼까.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기도하다 잡히시어 밤새 심문을 받고 금요일 슬픔의 길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셔 오전 아홉시에 처형되시고 오후 세시에 운명하신다. 당시의 많은 이들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그분이 메시야가 아닐까하는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분은 여느 죄수와 다름없이 죽임을 당하심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까지 군중들의 기대는 전복이요 반전이었다. 메시야가 지고 죽임을 당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구원자는 강해서 이겨야 하고 정복하고 다스려야 했다. 로마를 무릎 꿇리고 민족의 자존심을 살려내는 용감무쌍한 장수요 그 다음에 왕이 되는 게 순서다. 옛날의 다윗 같은 이가 메시야의 전형이었다.
영웅적인 주인공이 도중에 죽임을 당할 수 있는가. 초반에 버림받고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을 겪지만 그것들을 모두 이겨내고 민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버림받은 땅으로 돌아오는 게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믿음의 이야기는 관계가 중요하고 그 알맹이는 떳떳함이다. 기계는 고장 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서로의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거리낌이 생기고 당당할 수 없다. 구약의 사람들은 그걸 죄라고 했고 드러내 처리한 후에야 서로 떳떳하고 당당했다. 미해결인 채로 세월이 흐르면 정상적 관계회복은 더욱 어려워진다. 드러냄과 해결이었다. 그 과정을 치르고 나면 서로 떳떳할 수 있어 고쳐진 명품처럼 빛날 수 있었다. 해결의 방법은 넘겨줌이다. 내 잘못을 제물에 넘겨 그 제물을 죽임으로 문제를 소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할 만큼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그 분이라는 표현과 설득이 가득하다. 인류와의 화해를 위해, 사람들을 떳떳하게 하려고, 모든 문제를 넘겨주어 해결하기 위해, 죽으러 온 이가 예수님이라는 게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믿어지지 않았다. 열두 제자들도 마지막 순간에야 겨우 눈치 채서 “너희가 이제야 믿는구나”하고 예수께서 감격과 탄식을 동시에 쏟아냈다. 관계를 회복하려 보냄 받은 이가 예수님이라는 걸 알았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십자가에 죽임 당하실 줄은 그때에도 분명히 알지는 못했다. 이야기 중에 죽음에 대한 언급이 부쩍 늘어나고 달려야 한다, 들려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지만 불안하고 두려울 뿐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수백 년 동안 노예로 살다가 벗어나는데 그 절기 유월절과 고난주간이 겹친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이집트인들의 맏아들과 동물들의 맏배가 죽임을 당할 때, 저들은 양을 잡아 피를 흘림으로 자신들의 죽음을 대신했다. 그 양이 ‘희생당한 어린 양’인데, 예수가 그 희생양이라는 게다. 역사와 생활 속에 선명히 남아있었지만 알아볼 수 없었다. 눈이 가려져 못 본 게다. 가장 무거운 형벌이 사형이다. 그보다 더 무거운 형량은 없다. 인류를 위해 그분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냥꾼이 샘에서 물을 마시는데 뱀이 입속으로 들어가 아무 약을 써도 효험이 없어 다시 그 샘에 가서 물을 마시게 하고 그 순간 머리에 있던 꿩의 깃털을 뽑아주니 뱀이 빠져나갔다고 하여 병이 씻은 듯 나았다는 우리 옛이야기가 있다. 사실이 아니라도 관계의 확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꿩의 깃털이 사냥꾼을 낫게 했다면 예수의 죽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하고 정상적인 관계로 살아가게 한다. 병이 낫듯, 고장 난 기계가 고쳐지듯 제 기능을 회복해 이 땅에서부터 본래의 형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며 산다는 건 정복하고 빼앗고 통치하려는 세상의 흐름에서 거꾸로 살아보려는 노력이 아닐까. 여태까지 영성의 사람들이 보여주던 한적한 곳에 들어가 금식하고 자신을 괴롭히며 그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는 자세가 꼭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을 내주고 비워 서로의 평화를 이루며 복음을 확실히 아는 게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제자들처럼, 복음을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눈에 가려진 비늘을 벗겨 진실을 보게 하는 거다. 조용히 이 땅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는 명품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일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했다. 이 땅에서 증언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인정과 확인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만큼 중요한 것이 고난이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죽음을 거치지 않으면 부활에 이를 수 없다. 하루하루 진지한 성찰 속에 그분의 죽음을 생각하며 조금씩 닮아가는 삶이 고난을 묵상하며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맨송맨송한 성탄절
2019년의 성탄절이 지나갔다.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다. 눈도 내리지 않고 날씨도 포근한 채로 들뜬 분위기 없이 차분하게 지나간 성탄절이 서운하다. 늘 차분하고 경건한 성탄절을 보내자고 주변에 말해왔으니 잘된 것 같은데 서운한 것은 왜일까. 한마디로 성탄절 같지 않은 우리사회가 기독교계에 어떤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2000년대가 되기 전에는 성탄절이 되면 교회는 조용한데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이 기분을 낸다고 생각했었다. 마치 교회의 명절이 아니라 백화점과 시장사람들의 대목 같았다. 12월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성탄장식을 하고 캐럴을 울렸다. 성탄카드를 파는 이들도 여기저기에 등장했었다. 성탄절에 주인공인 예수님은 어디로 가고 산타크로스와 루돌프만 판을 치고 있었다. 그 북새통에도 교회에서는 어린이들을 필두로 발표회를 준비하고 각 기관들은 밤을 새우며 추억을 쌓고 선물을 준비하여 교환하곤 했다. 성탄전날 밤에는 통금이 해제되고 각 교회들은 새벽 찬양을 하며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음을 알렸다.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에게 성탄의 계절은 언제나 바쁘고 피곤했었다. 성탄전날 밤을 새우고 정작 성탄예배에서는 꾸벅꾸벅 졸거나 아예 잠들어 예배를 드리지 못하기도 했다.
이러한 풍속도가 주거형태의 변화와 개인주의의 확산을 타고 급격히 바뀌더니 이제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전에는 예수님은 없고 캐럴만 넘치더니 이제는 캐럴도 듣기가 어렵다. 12월이 되면 곧바로 쏟아지던 캐럴이 올해는 20일이 넘어서야 그것도 간간히 들릴 뿐이다. 교회에서 아이들이 사라져 간 것이 언제였던가. 그 빼곡하게 모여들던 성탄절에도 아이들은 교회로 오지 않는다. 교회학교가 줄어들고 그 자체가 없는 교회도 늘어난다. 성탄절에 교회가 소란스럽지 않고 새벽이 되었는데 찬양이 울려 퍼지지 않는다. 이런 이상 징후가 성탄절에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알게 모르게 어떤 시대적 질병처럼 우리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예민한 이들은 그 증상을 자각하고 소리도 지르고 호소도 했다. 그러나 시대의 격랑에 밀리고 먹고 사는 문제에 치여서 ‘그래서 어떡하라고’식의 반응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느낄 만큼 상황이 심화되었다.
교회는 저녁시간을 스스로 세상에 내 주었다. 그 많던 교회의 저녁모임들이 사라졌다. 수요예배와 구역모임, 금요철야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주일모임의 형태가 하루 종일 교회서 지내던 것에서 오전예배 마치고 함께 점심 먹고 성경공부하고는 주일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자리 잡아간다. 처음의 의도야 집이 먼 분들에 대한 배려도 있고 다시 모이는 것보다 참여율이 높기도 하여 애찬을 나누며 더 친밀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려는데 있었을 것이다. 이런 모임을 몇 차례 가져보니 오후시간이 홀가분하고 여유롭게 느껴졌으리라. 그들은 주변에 이야기하고 이런 형태는 시대에 앞서가는 것인 듯 유행처럼 빠른 속도로 번져갔다. 마치 오랫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던 시간들이 다시 돌아와 준 기분이었다. 성도들도 목회자도 모두 좋아했고 교회생활이 좀 더 여유로워진 것 같았다. 주일날 오후에 모이는 그리스도인 모임도 여럿 생겨나기도 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예상치 않았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교회 일에 쏟던 열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었다. 홀가분한 주일저녁 탓인지 바빠진 세상 때문인지 세상이 저녁 시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성도들을 향한 교회의 힘이 약해진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생활을 함께 하던 교회가 이제는 일주일의 지극히 적은 부분을 공유할 뿐이다. 성도들을 유혹하는 것들은 너무도 빠르게 늘어났고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교회와 함께 하던 삶의 중요한 매듭을 이제는 세상과 함께 한다. 결혼식은 웨딩홀에서 장례식은 장례식장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몸이 아프면 머뭇거림 없이 병원이나 약국으로 향한다.
거의 모든 이들이 많은 시간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산다. 교회는 핸드폰과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이제 성도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를 제공하면서 여유를 부리며 게임이 끝났음을 즐기고 있다.
교회와 교회문화를 추월하여 저만치 앞서가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세상은 앞서가는 것들을 따라간다. 성도들도 세상과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뒤처져 있지만 교회니까 따라오라고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다. 현실을 분석하고 정확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문제는 영향력이 있는 이들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들에게는 이 상황이 조금 늦게 나타난다. 시간은 많지 않고 문제는 심각하다. 마치 응급실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환자를 보는 느낌이다. 맨송맨송한 성탄절에 교회의 커다란 위기를 본다.
11. 세상을 보는 눈
⦁고통을 거쳐 얻는 힘
고난 주간에 잘 아는 후배의 교회가 전기누전으로 불에 탔다. 그것도 조금 탄 것이 아니라 일층 교회 오십 평 이층 사택 이십오 평이 완전히 전소되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 가보니 생각보다 처참했다. 교회 터에 서 있는 기둥 하나 없이 까맣게 탄 잔해들만 바닥에 가득했다. 후배목사는 마당에 있다가 교회에서 연기가 나서 달려가 보았더니 내부에 불길이 맹렬해 소리쳐 사모를 불러냈다고 했다. 노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마침 복지회관에 가셔서 어려움을 면하셨다. 불이 얼마나 세었던지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이십여 분만에 전소했다. 불을 꺼보려다 후배는 왼손과 머리를 약간 다쳤고 사모는 눈썹과 모발이 조금 탔다. 얼마나 놀랐을까. 사모는 불이 난지 나흘 만에야 음식을 조금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뭇잎과 채소도 불에 탔고 기르던 강아지도 털이 많이 불에 그슬려졌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던지 기본적인 살림살이뿐 아니라 옷가지 하나 챙기지 못하고 핸드폰도 불에 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당장 기거할 곳도 만만치 않았는데 다행히 마을 경로당에서 머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힘든 일은 왜 몰려서 오는 것일까. 지난해에는 아버님이 오토바이를 타시다 사고를 당해 병원생활 끝에 하늘로 가셔서 슬픔을 겪었는데 다시 화재라는 큰 사고를 당하다니….
그는 자녀로 딸과 아들을 하나씩 두었는데 대학 일 학년과 고이(高二)다. 그들은 주말에 집에 돌아오면 또 얼마나 놀랄까. 연로하신 어머니도 마음이 편치 않으시리라. 그들 부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큰 위로는 되지 못했으리라.
어느 글에선가 감당하기 어려운 빚이 오히려 큰 자극과 넘어야 할 벽이 되어서 온 가족이 분발해 가족 모두가 큰 꿈을 이루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고 했으니 참고 견디어 잘 극복하면 오히려 삶의 큰 힘과 자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민족도 숱한 고난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 고난에서 생긴 힘으로 웬만한 어려움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근세사만 해도 일제의 침탈과 한국전쟁, 가난과 독재의 시절을 견뎌냈다. 그만큼 맷집이 강해지고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셈이다. 화원에서 어려움 모르고 자라난 화초가 아니라 바람 눈 비 이슬 서리 다 맞아 견디고 살아온 들풀이요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진 셈이다. 우리민족은 근본적으로 어떤 일을 당해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 보다 훨씬 크고 고통스러운 일도 숱하게 겪어냈다는 자신감이 있다. 우리가 1997년의 금융위기를 극복해 내는 것을 세계인들은 경이로운 눈길로 보았다. 그것이 평소에 드러나지 않다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우리민족의 놀라운 저력(底力)이다. 어느 민족도 고통을 즐거워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다른 민족의 저력을 부러워하고 자신들도 소유하기를 원한다.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강한 힘을 원한다면 여러 번의 고난을 통과할 일이다.
운동선수들도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웨이트 트레이닝(Weight trainning)을 하는데 처음부터 최종목표에 해당하는 것을 무리하게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서 조금씩 훈련량을 늘려간다. 그런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서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가 된다. 관중들은 경기장에서 승리하는 선수들을 보는 것이 짜릿하고 신나는 일이지만 선수들은 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숱한 땀과 눈물을 쏟는 과정을 거친다.
후배목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저력을 얻고 놀라운 승리를 거둘 일이 생기려나 보다. 그 일을 감당하게 하려고 고난을 통해 거듭 훈련을 받게 하는 듯하다. 당장 당하는 어려움은 고통이지만 잘 참고 견디어 극복하면 우리의 기대에 부응(副應)하는 좋은 인격을 갖춘 유능한 인물이 되리라 믿는다.
예수님도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의 영광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일상어에도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불에 탄 잔해(殘骸)들을 보는 일과 막막한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모두에게 고통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저력과 자신감 그로인해 얻게 될 강인(强靭)한 힘과 영광의 날들을 미리 보고, 힘겨워도 현재를 잘 버텨내기를 응원하며 앞으로 꼭 필요한 일들을 더욱 강해진 힘으로 넉넉히 이루길 격려한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수학여행을 가는 꿈 많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주로 탔던 여객선이 진도에서 침몰하여 300 명이 넘는 이들이 생명을 잃거나 실종되었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이 찾아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능성은 약해져만 가고 있다. 매스컴은 밤낮으로 생방송을 하고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온통 그곳에 모아져 있다. 생생했던 학생들이 눈앞에서 물에 잠기고 생명이 스러져 가는데도 어쩔 수가 없다. 비행기 선박 잠수부들이 떼로 모여들고 높은 분들이 줄이어 와도 방법이 없다. 그동안 수많은 참사들을 겪었어도 얻은 것이 이토록 철저히 없는 것인가. 매번 처음 당하는 일처럼 우왕좌왕하고 허둥대다가 시간을 허비하고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너무도 허망하다.
이제 아이들에게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라고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학생들은 그들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그래도 용감하고 멋있었다. 동료 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 애쓴 이도 있고 어린 유아를 살려낸 미담(美談)도 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승무원의 지시를 따르며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혼란의 순간은 곧 수습이 되고 잠간 후면 평온과 즐거움으로 추억을 만드는 시간이 찾아올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전기가 나가서 캄캄해지고 바닷물이 밀려와 두려움에 싸여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냉정을 찾으려 했으리라. 숨이 멎어 가면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누구를 원망할 여유라도 있었을까. 고통과 슬픔은 이 땅과 바다에 남겨두고 정 깊은 친구들과 함께 아픔도 눈물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어린 그들에 비해 승객들을 위험에 팽개치고 자신만 살겠다고 서둘러 탈출한 선장에게는 할 말이 없다. 그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귀여운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경험도 있고 위급상황의 지침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리라. 위험을 감지했을 때 바다에 낯설고 배도 모르는 승객들을 뒤로하고 어떻게 발걸음이 떨어질 수 있었을까.
그 험하고 물결이 센 바닷길을 일천(日淺)한 경험으로 헤쳐 나가던 삼등항해사는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 했을까. 누구도 처음부터 노련할 수는 없는 것인데 배의 키가 마음과 달리 큰 폭으로 돌아가고 어딘가에서 무엇인가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화물들이 바다로 우르르 쏟아지며 기우뚱 배가 기울어 통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정신이 아득하고 도망가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바다사람들이여 어찌해 자신들의 임무를 잊었나. 한 달에도 몇 번씩 평생에 한 번도 없기를 바라지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그 순간을 위해 실전처럼 위험의 순간을 예상하고 훈련해야만 하지 않는가. 당신들이 취한 행동은 훈련이 아예 없었거나 엉터리였음을 보여주었다. 평소에 그대들이 쏟지 않은 땀과 눈물 때문에 수많은 선량한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개미구멍으로도 둑이 터진다는데 작은 안일과 부실들이 쌓여서 엄청난 재난을 불러들였다. 배에 실린 차량의 수도 화물의 양도 모두 축소되어 신고 되고 아무런 확인 없이 통과가 되었다. 차량과 화물은 대충대충 적재되어도 “별 문제가 있으랴 좋은 게 좋은 거지”, 여기저기 너 나할 것 없는 “기본 없음”과 “적당히”와 “대충대충”이 꽃 같은 아이들의 생명을 빼앗아갔다.
사고도 마음이 아프고 서글픈데다 사고대처도 우리의 수준을 보여주는 듯해 너무도 슬프다. 사고가 나면 그 분야의 구호와 처치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짧은 시간 내에 사건을 해결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모두의 기대요 바람인데 현실은 거리감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2008년에는 설날의 기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숭례문 화재사건이 있었다. 초저녁에 난 불은 수많은 소방차와 소방관들이 집결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고도 국보 1호의 바닥까지 소실(燒失)되고 말았다. 숭례문의 온전한 형체가 있을 때 출동한 소방차와 소방관들을 보면서 별 피해가 없겠거니 했었다. 전문가들이 현장에 있으니 최선의 결과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방송들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숭례문이 완전히 허물어졌을 때,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고 한들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국가에게 속은 것 같고 조롱당한 듯한 분노와 박탈감과 허전함이 있었다. 그것은 천안함 사건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도 생중계되는 방송을 통하여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해내지 못하는 무력함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사고를 통해서도 희망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었다. 온 국민이 상실감과 절망감을 갖는 고문(拷問)을 당하는 듯한 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언제쯤이면 벗어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국가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구조현장을 보면서 참담함과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이 다시 터져서 온 국민을 놀라게 할 지 모르는 지뢰밭을 걷는 듯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어른들의 지시를 따랐다가 죽어간 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대나무 가는 줄기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넓이, 보도블록 일부를 들어내고 대나무 서너 그루를 심었다. 그곳을 나는 뒤뜰이라 부르고 있다. 뒤뜰로 향한 창으로 댓잎이 보인다. 바람이라도 선뜻 불면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 들린다. 선비의 서늘한 결기, 마치 눈 쌓인 겨울의 싸한 바람을 연상케 한다. 살갗을 베일 듯 날선 선비의 결이 느껴진다.
대나무는 선비 나무다. 서재에서 홀로 글을 읽고 쓰다가 눈을 들어 대나무를 향하는 옛 선비의 마음을 따라가 본다. 한때는 스스로의 실력을 자신했을 게다. 과거가 열리고 글제만 맞으면 급제할 수도 있겠다는 심사였으리라. 주변에서도 그만하면 따 논 당상이라고 부추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게다. 꼭 겪어야 하는 일처럼, 겨울에 감기 앓듯, 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이제는 주위에서 별반 기대하지 않고, 본인도 자신감이 사라져 동네 아이들이나 몇 가르쳐볼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 선비인양 창밖의 대나무를 바라본다. 흔들리는 가는 줄기 끝이, 푸른빛을 띤 날카로운 바늘처럼 바람 따라 하늘을 긋고 찌른다. 날카로운 끝, 그래, 첨단(尖端)이다. ‘날카로운 끝’이 ‘첨(尖)’인데 왜 큰 것 위에 작은 것을 올려 그 뜻을 나타냈을까? 큰 것을 쪼개고 갈아 날카롭게 한다는 것일까, 끝은 작지만 그 근본은 거대하다는 것인가.
첨단을 대하니, 첨단 과학, 첨단 학문, 첨단 기술, 첨단 유행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가장 앞서 있는 것들은 뾰족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영역을 뚫고 들어가는 것들은 뾰족하다. 주사바늘, 침, 송곳, 못들이 그렇지 않은가. 뭉툭해서는 뚫고 들어가기 어렵다. 다른 것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맞닿아야 한다. 곧 경계에 서야 한다. 경계에 서는 이들은 긴장을 풀 수 없는 최 일선에 있는 이들이다. 그들은 위험하다. 선택과 결과가 정해지지 않아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분명히 하라고 강요해 왔다. 어느 편인지,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라고 한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회색분자요 위험인물이다. 조류와 포유류사이를 오가는 박쥐취급을 당한다. 분명하면 고민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 같은 편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되고 먼저 나설 일이 없다. 그 대가로 발전과 성장이 없는 정체와 다툼만 남는다.
안전한 곳을 떠나 경계에 서고, 오감이 날카롭듯, 내 끝을 날카롭게 유지하려 한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다 하늘을 긋고 찌르는 대 끝처럼 살려한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내 몸과 재주가 뭉툭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식년시에 문과 선발인원이 전국에서 33명이었다니 다수의 선비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해가 바뀌면 새롭게 마음을 다지고 과거시행 공고가 나면 책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았을 게다. 효과는 떨어질지 모르나 자극을 받을 때마다 마음을 다졌으리라.
방에 들어앉아 뭉툭한 감정과 사상을 바늘처럼 갈고자 책을 꺼내고 사색에 잠긴다. 결심과 실행,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며 갈등을 겪는다.
창문을 여니,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올 듯하다. 꽃이 눈에 어리고 내 자신 한 송이 꽃이 되고 싶다. 온전한 준비도 갖추지 못하고 꽃 먼저 피우고 싶은 자신이 밉다. 다시 대나무 가는 줄기 끝에 눈이 간다.
⦁우리 사는 세상
토요일이었다. 마트를 운영하는 은행에 들러 물건을 사고 현금도 인출하려 했다. 카트를 끌고 단말기에서 필요한 금액을 찾으려니 생각보다 잔고가 많았다. 영수증과 카드를 한 손으로 함께 받기가 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 그 돈을 찾으니 없다. 이런 일이 잘 없는데 원인을 모르겠다.
다른 곳을 들른 일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으니 분실했을 리 없다. 가능성은 한 가지. 단말기에 두고 챙기지 않은 게다.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어찌할 것인가? 그냥 포기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액수다. 몇 년 전, 마을금고 단말기 에서 잃어버린 맏이의 핸드폰을 찾았던 일이 생각났다.
내 실수를 가족들에게 털어놓았더니 누가 집어가지 않으면 다시 인출계좌로 입금되니 확인해 보란다. 거래내역을 살폈지만 없었다. 다시 생각이 복잡해진다. 현금인출기에서 남의 돈을 가져가는 것은 “6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란다. 누군가를 상상했다. 자신 앞에 펼쳐진 많지도 적지도 않은 현금, 잠깐 동안이라도 고민과 갈등을 준 것은 아닌가. 그 사람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예전 경험으로 여러 대 카메라에 많은 장면이 기록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순간의 혼란을 겪고는 매장 직원에게 가져다주고 상황을 설명했을 게다. 감시 카메라가 없을 것 같은 길거리에서 소액의 현금을 만나면…? 몇 달 전,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걷고 있었고 여인은 자전거를 탔는데 페달을 구르면서 만원 지폐 하나가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여인은 신호를 보고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너 멀어져갔고 소리쳐 부를 거리가 아니었다. 지나는 이도 없어 주어들고 고민하다 파출소에 만 원을 건네기도 애매하고 그 여인이 그 만 원을 찾으려 시도할 것 같지 않아 내가 갖고 말았다.
월요일이 되었다. 갈등이다. 그 마트에 전화를 걸었다. 분실물 센터를 운영하느냐 물었더니 어물어물한다. 토요일에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니 그런 것은 은행에 문의해보란다. 책임을 떠넘기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한 번 더, 그 때는 은행 영업시간이 아니었고 마트는 운영 중이었으니 알아봐 달라 하니 현금입출금기는 은행에서 관리한단다.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단말기 감시 장비를 보아야 하니 직접 와서 경찰에 신고하고 함께 찾아보자’고 할 줄 알았다. 요즘 코로나로 마스크를 착용하니 제대로 확인될까도 의문이었다. 직원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담당자를 바꿔준단다. 담당자와 연결되기까지 전전하다 스스로 탈진하던 경험이 있었다. 또 그런 수렁에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고 그때라도 중단하고 싶기도 했다. 전화 속 바뀐 담당자가 내게 물었다. “금액이 얼마나 되나요?” 내가 인출 못한 액수를 말하니 돌아오는 대답이 놀라웠다. “최한식 고객님이신가요?” 그렇다고 하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내 계좌로 입금해 주겠단다.
놀랍다. 현장에 가지 않고도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되다니…. 그 돈을 발견한 이를 비롯해 몇 사람들이 성실하게 처리해주었고, 우리사회 시스템이 이토록 견고하다는 증거다. 어디를 가든 감시 장비가 많다는 얘기를 자주 듣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 결코 낮지 않다는 것도 확인한 심정이다. 놀라움과 함께 삶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는다.
12. 삶의 빛나는 조각들
⦁영원을 꿈꾸다
십일월이 되어도 강아지풀 몇 포기가 푸른색을 버리고 밝은 미색으로 바뀐 채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학교 담벼락 앞에 굳건히 서있다. 어쩌자는 것인가. 잘 나가던 시절의 푸릇함 다 버리고 물기와 색깔 없이 버티고 있는 모습도 가련한데 비마저 맞고 있다. 나무도 아닌 풀이 그것도 우람하지도 않은 것이, 바람만 세게 불어도 부러지고 쓰러질 것 같은데 비에도 의젓함을 잃지 않고 견뎌내고 있다. 여름 한 철 무섭게 퍼부었을 장맛비도 저를 쓰러뜨리지 못했을 테니 이런 것은 시련이라 여기지도 않으리라.
바랭이와 강아지풀이 그런 모습으로 자주 눈에 띈다. 그들을 보고 있자면 무슨 한(恨)을 품은 듯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는데 왜 자신의 때가 지나도 바닥에 깨끗하게 쓰러져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마치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로 친구들이 제출했던 곤충채집 표본이 된 잠자리처럼 혹은 책 중간에서 수분이 증발된 단풍잎처럼 스스로의 모습을 허물지 못하고 있을까. 인공적 처리라면 불쌍하긴 해도 이해는 되리라. 지난 삼월에는 더 기막힌 광경을 보았다. 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수분이 날아가고 색이 바래버린 것들을 근교 휴양림에서 볼 수 있었다. 그 영하의 추위 속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허리를 꺾지 않은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이파리에 눈이 쌓이면 그 무게를 버티기 어려울 텐데 어떤 힘으로 견디는 걸까. 끝내 선채로 겨울을 난 기막힌 사정은 무얼까.
창밖으로 보이는 지붕들이 본래의 색을 잃고 있다. 나무들도 청청함을 지나 조금씩 금빛으로 색을 바꾸고 있다. 변화와 소멸이 생명의 이치다. 생에 대한 애착으로 몸부림을 쳐도 자신의 시간이 지나면 다음 존재에게 무대를 비워주어야 한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약해진 잎들은 치열했던 삶을 마감하고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는다. 오뉴월 정염을 불태웠던 장미, 그들을 지탱했던 잎사귀들 중에 아직도 줄기에 붙어있는 이들이 있다. 거무스레해서 비틀린 모습이 고집과 노욕인 듯 가련하다. 가라. 떨어져라. 미련을 버려라.
마르고 닳도록 살아보려는 그들의 바람이 얼마나 부질없고 가여운가. 자신의 모습을 허물지 않고 한 철을 버티는 그들의 집념은 가상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잊히기 못내 아쉬워 동상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들 대단한 것은 없다. 그들을 수백 년을 기린들 본인들에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 세우고 기리는 필요와 욕망에 그들이 합치한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진 그분들과 함께 한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정의 교류가 한 순간도 없다. 그분들로서는 더 말해 무엇 하랴.
세계인들이 기리는 경이적인 건축물들이 정말 찬사를 받을만한 것인가. 그 건축물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슬픔의 사연들이 만들어졌을까. 몇 사람의 분에 넘치는 욕망 때문에 개인과 가정의 온갖 사정들이 무시된 채 긴 세월 노역에 시달린 이들은 그 건축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할지 모른다. 경이로운 건축물일수록 고통과 수고가 컸을 것이다. 뒤집어보면 대단한 건축물 뒤에는 그에 비례하는 고통과 눈물이 있었다는 반증일 수 있다. 영원을 꿈꾸는 자체가 인간답지 못하다. 인간이 이룩해 놓은 것들은 영원에 닿기 어렵다. 처음부터 그렇게 있던 것들이 영원까지 가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가 스스로 변화해가며 긴 영원을 살고 있다.
집 주변에서 올 초에 겨울을 살아남은 대단한 풀을 눈여겨 본적이 있다. 아파트 담을 의지하고 모진 겨울을 이긴 그것은 의지의 표상처럼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더니 어느 날 돌연 사라졌다. 나는 그 곁을 지날 때마다 눈길을 주고 한없이 그곳에 있어주기를 바랐건만 허무하게 종적을 감추었다. 의지가 약한 이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주변에 보호망이라도 둘러주고 싶었던 그들은 주민센터에서 실시하는 공공 근로하는 어르신들이 지나고 나서는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아마 잡초를 제거하고 쓰레기를 줍는 과정에서 어느 성실한 노인에 의해 간단히 제거되었으리라. 영원을 욕심낼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을 열심히 살고 깨끗이 떠날 일이다.
학교 담벼락 앞을 지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연민의 마음으로 바랭이와 강아지풀들을 하루하루 눈여겨보아야겠다.
⦁흔적 속의 기억
계단으로 이층을 올라가다 보면 바닥에 명도가 다른 곳이 눈에 띈다. 주변보다 한결 밝은 열 개 남짓한 동그라미들. 수년 동안 일정한 곳에 화분을 두다보니 생긴 흔적이다. 일 년 중 서너 달을 빼고 그곳에 꽃 담긴 화분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그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희고 노란 국화가 있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향기를 맡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지난달 중순쯤 날씨가 추워지자 추레한 것들은 버리고 몇 개는 실내로 옮겼다. 한동안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 꽃들이 아른거리더니 이제는 살아있는 것 밖에는 제대로 기억도 못하겠다. 실내에서 햇볕도 실컷 못 받는 화분의 꽃들이 불쌍하다.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니 더욱 기막힌 건 그들의 이름을 하나도 모른다는 게다. 내내 무심하게 살다 반짝 관심을 둔다고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닌가보다. 긴급한 날씨변화나 있으면 실내로 들어 옮기기나 했을 뿐 정을 주지 못한 것이 민망하다.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글쓴이의 따듯한 마음과 행동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출간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으니 널리 알려지거나 이름 있는 책은 아니겠지만 읽는 즐거움을 주고 삶을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가끔씩 등장하는 익숙한 지명들도 독서의욕을 돋운다. 그의 사물에 대한 근원적 이해와 흐름을 꿰뚫는 안목 그리고 급소를 지르는 유연한 민첩성은 나로 탄성을 지르게 한다. 한 문장, 한 구절에서 주변을 향한 살뜰함과 정을 느끼게 할뿐 아니라 내 기대를 뒤집는 숱한 반전을 보여준다.
내 삶의 자세는 그와 판이하다. 지난날의 경험과 내 성격이 어울려 그리 되었겠지만 정에 인색하고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하고 함께 행동하기보다는 한걸음 떨어져 분석을 하다 기회를 잃는다. 서로 장단점이 있겠지만 내 스스로 삶의 자세가 못마땅하고 후회를 남길 때가 많았었다. 그 글들을 읽으며 화분 속의 꽃들과 화단의 풀들에게 내가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정서적 이익만을 얻은 것이 미안하다.
오래 한 자리를 지킨 화분들이 바닥에 흔적을 남기듯이 내가 살아온 삶도 여러 곳에 흔적들을 남겼을 것이다. 어쩌면 나만 알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모른 채 확대재생산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서로의 관계에 민감한 영향을 줄까봐 피해를 당하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속을 썩이고 지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거꾸로 양해를 구하고 진지하게 다른 이의 단점을 지적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라도 주변의 일들에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게다.
우리 집의 꽃과 나무들의 상태를 보면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안다. 다른 곳의 꽃과 나무들은 성장이 빠르고 일찍 꽃도 피고 색깔이 선명한데, 우리 울안에 있는 것들은 그렇지 못하다. 입지 여건과 토양의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 그들에 대한 사랑과 돌봄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아내가 마음을 쓰지 않으면 꽃을 피울 수나 있었을까 싶다. 꽃들을 보는 것만 즐겼지 가꾸는 노력을 소홀히 한 게다. 그걸 모르고 만나는 이들에게 이상하다는 듯이 떠벌렸으니 듣는 이들은 얼마나 헛웃음을 삼켜야 했을까. 울안의 한 송이 풀꽃에서도 준엄한 경계를 듣고 보았어야 하는데, 어쩌랴, 아는 만큼 볼 수밖에 없는 것을….
내 자신을 볼 줄 모르고 천방지축 겅중겅중 뛰기만 하는 것은 글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글 한편에 다 드러나는 것을, 그래서 글이 곧 사람이라고 한 것을, 분수도 모르고 이말 저말 쏟아내기 바빴던 걸 이제야 알겠다. 다른 이들이 얼마나 조심해서 사려 깊게 글을 쓰는 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설고 떫은 글들을 오물처럼 토해내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는 않았는지 염려스럽다. 위안으로 여기기는 지나가는 과정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면이다. 우물을 파고 고인 물을 한번 다 퍼내듯이 내 속에 고여 있던 것들을 퍼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의 글을 대할 때 내 자신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게다. 내 글의 흔적들이 눈에 잘 띄는 몸에 난 상흔처럼 수시로 스스로를 깨닫게 해 주리라.
가끔 신문에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담배꽁초나 음료수 병에 남았던 흔적 때문에 검거되었다는 기사를 읽는다. 흔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제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폐쇄회로 촬영기들이 있는가. 흔적을 혐오하거나 피할 일만은 아니다. 정겨움으로 미소 짓게 하고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흔적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을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감동적인 글들도 수고와 애씀의 흔적이다. 수시로 듣고 위로받고 힘을 얻는 칭찬과 격려도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배려한 사랑의 흔적들이다. 세상모르고 코골고 침 흘리며 자는 건 어떤 일에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몰입했다는 흔적이다. 수고와 사랑의 흔적들은 따듯하고 감미로운 기억들을 불러온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살피면 기분 좋은 흔적들을 많이 찾을 수 있으리라.
이층 바닥에 하얀 동그라미로 남은 흔적에서 꽃향기가 나는 듯하다.
⦁금장시계
서랍 속 모퉁이에 육각 모양의 금빛 시계가 억울하다는 듯 자리하고 있다. 여덟 시 십칠 분 이십사 초, 연월일은 알 수 없어도 성능을 발휘한 마지막 순간이었나 보다. 이 시계로 고민을 적잖이 했다. 초창기와 달리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지를 제 때에 갈아주는 거였는데, 작동은 하지만 제 시간을 보여주지 않아 어느 순간 서랍에 넣어두었다. 단순하면서 품위 있는 모습에 쉽게 폐기하지 못했다.
삼십 년이 넘은 귀중품이다. 처가로부터 결혼예물로 받은 것이라 각별한 의미가 있다. 어림잡아 25년 가까이 내 손목에 붙어 함께 살았다. 내 가는 곳에 함께 가고 머무는 곳에 같이 있었다. 크게 마음 써 주지 않아도 제 할 일에 소홀하지 않아 필요할 때면 늘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었다. 그 근면 정확함은 내가 흉내 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초침은 가늘고 큰 키로 좁은 공간에서 하루에도 1440바퀴를 돌았을 걸 상상하면 숨이 막혔을 듯하다. 내 손목 위 좁다란 공간에서 초침이 돌았을 천삼백만여 바퀴, 끝내는 지쳐 쓰러져 더 이상 달리지 못할 때 나는 시계를 은퇴시켰다.
손목에서 풀어낸 지 족히 예닐곱 해는 되었을 이 시계의 처리를 망설이는 이유는 무얼까. 예물에 귀중품이라는 의식이 강해서다. 왜 그렇게 믿고 있을까. 금빛 나는 줄에 모서리가 탈색되긴 했지만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단아해 보여서 일까. 실제로 팔려고 하면 사려는 이가 없을 게다. 값나갈 만한 요소가 없어 보인다. 내 금장시계는 이제 귀중품일 수 없다. 그러면 왜 못 버릴까. 내 개인사에 그 시계가 함께 한 오랜 추억 때문인가.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어 개인 기념관을 세우면 전시라도 하려고….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전혀 아니다. 딱히 뭐라 잘라 말할 수 없는 미련에, 내 우유부단함이 더해져 처리하지 못하는 거다.
금장시계는 그간 내게 무엇을 주었을까. 그 이름과 겉모습이 내 품위를 한껏 높여 주었던가. 그런 것 같지 않다. 정장차림보다는 늘 수수한 걸 선호했으니 주변 사람들이 내가 좋은 시계를 차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게다. 정확한 시간을 성실하게 알려주어 내 생활이 변했나. 그것도 아닌 듯하다. 모임에 자주 조금씩 늦었던 것 같고, 오히려 그 시계를 벗은 어느 시점에 모임에 늦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 결심도 오래 못 가 지금도 조금씩 늦곤 한다. 영양이 풍부한 음식은 나를 건강하게 하고 좋은 책들은 사고의 지평을 넓혀 주었을 게다. 내 눈에 맞는 안경은 생활의 불편을 덜어주고 활자를 통한 정보의 습득을 도왔고, 아령이나 줄넘기라면 내 체력증진에 한 몫을 했을 게다. 금장시계는 내게 그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제 조금은 알겠다. 귀중품은 본래 쓸모가 별로 없는 것이고 예물은 그 중에서 값이 꽤 나가는 건가보다. 쓸모가 분명한 생활필수품이라면 그리 오래 간직할 수 없을 게다. 진주, 금, 다이아몬드로 된 반지나 목걸이를 예물이라 하니 더욱 그렇다. 귀중품은 어렵지 않게 현금으로 바꿀 수 있으니, 자녀의 앞날을 불안해하는 부모로서 염려와 사랑을 담아 마련해 주기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작 귀중품은 왜 비싼 것일까. 쓸모가 없으면 천하고 값이 싸야 함에도 그 아름다움과 변하지 않음 그리고 희소성 때문에 귀함을 인정받고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그런 조건이라면 나도 얼마간은 갖춘 듯하다. 할 줄 아는 게 별반 없으니 실제적 용도가 적고, 잘 변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신체적으로 또 기능면에서 온갖 불리한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굳이 따진다면 희소성에도 웬만해선 밀리지 않는다. 그러니 잘 다듬기만 하면 나도 귀중품이요 보석이지 싶다. 자신이 값비싼 존재임을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싶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위협받는 순간에는 보석이 큰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사람들이 보석을 탐내는 건, 언젠가는 전쟁이 그치고 평화로운 때가 오리라는 걸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귀중품은 재난의 때에도 인정을 받는 셈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부속품을 새 것으로 교체해 금장시계를 차고 다니라고 권유한다. 그럴 마음이 없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터미널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게 시계다. 그 의미는 별도의 시계가 필요치 않은 시대가 되었다는 거다. 이런 때에 왜 금장시계로 편함에 길든 손목을 또 다시 수고롭게 하겠는가. 명품 금장시계를 차고 무슨 대단한 품위를 인정받아야 할 일도 없고 그런 걸 원치도 않는다.
그 시계를 보면 한 생애동안 온 힘을 다해 맡은 일을 하다가 생명이 진했음에도, 물러나 편히 제 쉴 곳에 자리하거나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지 못함이 애처로워 보인다. 적절한 시기를 놓치는 게 내 삶에 다반사이긴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한다.
짐작하기론 금장시계가 8시 17분 24초를 가리키면서 내 우유부단함 때문이라는 이유도 모른 채 이후로도 적지 않은 세월을 내 서랍 속에 더 머물지 않을까 싶다. 아릿한 미련에 이별이 쉽지 않을 듯하다.
어쩔까나. 이제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도 못하고 귀중품이라 하기도 민망하지만 으슥하면서도 눈에 띄는 곳에, 처가로부터 받은 귀하고 비쌌던 결혼예물들의 상징으로 잘 모셔두고 틈틈이 들여다볼까나….
⦁화 해
잘 해 놓고 더 조심해야 한다네. 마치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 올 때가 더 위험한 거와 같지. 어렵고 힘들 땐 다 조심하고 무얼 하든 잘 해보려고 신경 쓰잖아. 왜 예전 사람들이 항상 얘기했지. “그 사람 살만해 지니까 그리 됐어”라고. 부부간에도 어려울 땐 별 문제가 없어. 아등바등해서 집칸이라도 마련하고 밥술깨나 먹게 되면 일이 생기지.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내치는 일이 얼마나 많았으면 그러면 안 된다는 말까지 전해져 내려올까.
봄부터 밭 갈아 씨 뿌리고 김매주고 벌레 잡고 순한 바람에 비와 햇볕 알맞아야 한 해 농사에 풍년이 들지. 부지깽이도 뛴다는 가을걷이까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힘은 들어도 문제 생길 일은 적어. 일은 늘 농사 다 져놓고 지붕까지 새로 싹 해이고 나서 생기는 거여. 그 부부 고생해서 추수해 곡간에 들이고 겨울날 준비 다 해놓고 근심걱정 없다고 생각할 때 사달이 났지 아마.
남부끄러운 지 세세한 얘기를 안 하니 뭔 일인지는 아무도 몰라. 그냥 둘이 하는 모양만 보고 그렇거니 짐작이나 하고 다시 전처럼 잘 되기를 바라는 거뿐이지. 작년 동지 되기 전 쯤 이었는가 싶네. 조짐이 안 좋더라고. 어쩌다 더러 그런 일이 있기도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 남의 일에 미주알고주알 참견할 수도 없는 거니께. 알아도 모르는 체, 몰라도 아는 체 지내다 보면 저절로 잘 풀리기도 하잖아. 그런데 그게 아닌 거 같더라고. 한참 막 큰 소리 나고 살림도 집어던지는 거 같았어. 들어가 말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지. 그 땐 꼭 뭔 일이라도 낼 것만 같았어. 나중에 생각하니 그냥 둔 게 잘 한 거더라고.
이웃들 보기에 둘 다 데면데면했어. 같이 다니는 일이 없고 애들은 활기가 없어지고 함께 사는 어른들도 기가 죽어 보이더라고. 바깥양반이나 안주인이나 한 성격하는 건 비슷했어. 서로 화를 안 풀고 자존심 세우고 길게 갔나봐. 남자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여인은 표정으로 할 말을 대신하는 것 같았지. 얼마나 살벌한지 찬바람은 휘잉 불고 사람들이 그 집에 드나들기가 부담스러웠어. 날씨로 치면 바깥양반은 눈 내리고 바람 불고 땅은 얼어붙고 길은 미끄러운 꼴이었지. 그에 질세라 안주인은 푸르뎅뎅한 얼굴에 몸에서는 냉기가 벋치고 말 한마디 없었고….
옛말 하나 그르지 않아, 세월이 약이라더니 한 두어 달 지나니 서로가 아쉬운 모양이더라고. 그 중에도 바깥양반이 더 몸이 다는지 하는 짓이 나날이 달라지는 게 이웃 눈에도 보이데. 부드러운 소리로 조심조심 한 마디씩 시작하더라고. 안주인도 전에는 버럭 역정을 내더니 못들은 척, 관심이 없는 척 어물쩍 넘어 가곤 했어. 초반에는 가끔씩 선물 사다가 눈에 뜨일 만한 곳에 둔다더니 언제부턴가 직접 주고받기도 한다더라고. 조금씩 웃음소리 들리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 같았어. 누구더라, 며칠 전에는 둘이 손잡고 나란히 어디 가는 걸 봤대. 그래 그런지 요새는 애들도 입성이 깨끗하고 꺼칠하던 얼굴에 물이 오르는 거 같더라고.
눈치 빠른 이들이 그 집에 가보니 일 치렀던 살림살이는 깔끔이 치우고 새 걸로 개비했다더라고. 없어서 불편하다던 식기세척기하고 청소기도 보이더라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인제 웬만큼 풀린 거 같아. 얼음 녹고 찬바람 가시니 촉촉이 물기 흐르고 훈기가 돌아 마치 아지랑이 오르고 꽃핀 데 나비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형국이지.
며칠 있으면 만나는 이마다 멋쩍게 웃으며 걱정하게 해드려서 미안하다고 언제 떡이라도 한 번 대접하겠다고 할 거 같지. 어제는 둘이 밭에 흙 갈이 하면서 농사 준비하더라고. 하기는 티격태격 싸움도 할 때가 있고 화해하고 풀 때가 있는 거지. 농한기 지나고 힘 안 합치면 한 해 농사 망치고 집안 형편 말이 아닐 테니 얼른 풀고 힘을 합쳐야지.
해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이집 저집 돌아가며 그러는 듯도 하데. 사람들 뿐 아니라 하늘하고 땅도 그런 일에 별 차이 없는 거 아닌가 싶어. 초겨울부터 서로 멀어졌다 섣달에 정점을 찍잖아. 우수 경칩 지나며 조금씩 풀려 제비 날아오면 화색 돌고 훈풍 부는 게 그 이치지. 그 기운에 달래 냉이 나고, 고운 햇살 세상에 가득해 풀과 나무 온통 불난 듯 꽃피고 가지 뻗고 잎들 푸르게 나는 게지.
그게 생장쇠멸(生長衰滅)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우주의 기운이고 흐름이지. 싸우고 화해하고 밀쳐내고 끌어안고 웃다 울다 등 돌렸다 마주보고….
땅과 하늘 사이에 화색 돌고 훈풍 일고 꽃피는 좋은 시절, 봄이 빠른 듯 조금 늦은 듯 우릴 찾아 왔네. 얼었던 개울물 졸졸거리며 다시 흐르데, 따듯한 햇살에 들풀 벌레 얼굴 내밀고 수군거리며 깨어나듯, 소원(疎遠), 적조(積阻)했던 이들, 마을을 거닐다 덕담 하며 화해하는 계절이 바로 이 봄이여.
⦁안을 보는 거울
겉은 멀쩡해도 안이 잘못되는 일이 적지 않단다. 나도 안이 걱정이다. 겉이야 괜찮아 보이지만 안이야 누가 알랴. 소화력이 약한데다 가끔 아프지, 지난번엔 꼭 받아보라는 검사도 안했으니, 말은 안 해도 긴 터널의 입구로 들어가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함께 하자는 가족들 성화에 마지못해 대답을 했더니 검사 전에 먹을 약을 한가득 받아왔다.
사흘 전부터 먹지 말라는 것들이 많았다. 어제 저녁부터 장을 비우는 약을 먹었는데 간단치 않았다. 강한 복숭아 향이 나는 약을 물에 타서 500ml를 30분 안에 마시고 또 물 1리터를 한 시간에 나눠 마시란다. 잘 안 먹던 물을 그렇게 많이 마시기도 어려웠지만 그 후가 더 힘겨웠다. 분주하게 들락거리며 쏟아내기를 수차례, 잠들기가 수월치 않다. 아침에 한 번 더 똑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못할 일이다. 전에는 채혈과 위 사진 촬영이 힘들었는데 이번은 이 일에 온 신경이 쏠려 다른 것들은 여벌이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내시경할 순서다. 베개에 뺨을 대고 상체를 기울인 채 엉덩이를 뺀 자세로 비스듬히 누우란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옷의 앞뒤가 잘못됐다고 지청구다. 뚫린 부분이 당연히 앞인 줄 알았지, 그게 뒤로 갈 줄을 어찌 알랴. 뭔가 이물질이 입을 통과해 식도와 위로 들어간다는 게 생각만 해도 어렵다. 그뿐이랴, 뒤로해서 들어간 것이 내 대장을 통과한다니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리 잠을 재우고 한다지만 잠이 안 오면 어떡하고 예정보다 일찍 혹은 늦게 깨면 또 어쩌나. 코에도 뭘 꽂고 팔에 주사를 놓았다. 이로 딱딱한 걸 물라 하더니 그 후론 기억이 없다.
잠깐 지난 것 같은데 끝났단다. 위뿐 아니라 장까지 내 안을 다 들여다 본 모양이다. 정작 나는 내 안을 못 보았다. 몸을 일으키니 휘청한다. 약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걸음이 어설프고 몸이 잘 가눠지지 않아 침대에서 뛰어내린 모양새가 되었다. 담당 직원들이 깜짝 놀라며 이런 일은 처음이란다. 그러면서도 위와 장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용종도 없어 떼 낼 것도 없었단다. 밖에서 한 번 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해 들었다.
내 안을 나는 못보고 나와 별 상관없는 이들은 본 셈이다. 내 겉과 속이 크게 병들지 않았음을 확인한 게다. 한동안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던 짐이 풀려 내리는 듯하다. ‘이것만 가지고는 확실히 알 수 없으니 꼭 빠른 시일 내에 큰 병원에 가보라’는 얘기를 들을 마음 준비를 했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며칠간 고생한 게 수년의 근심을 일거에 덜어내 주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막내는 자기 내시경 사진을 담아 가지고 온다. 이상이 없다지만 보고 싶단다. 나는 그런 것을 담아 올 수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정겹지도 친숙하지도 않은 장마 진 뒤 무너져 내린 비탈이나, 잡아 내장을 제거한 닭 내부 같을 모습이 영 달갑지 않을 게다. 내 안의 색이나 형태를 해석할 아무 능력이 없으니 보아야 걱정만 늘어날 게 뻔하다.
옛 사람들은 자신의 결백을 밝힐 수 없을 때, “버선목 같아야 뒤집어 보여나 주지”라고 했다. 이제 마음을 보여주기야 어려워도 신체의 내부는 보여주고 볼 수 있는 시대다. 사람의 겉이 아닌 마음을 나타내는,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으려나. 안을 들여다보기는 어렵지만 마음속 깊은 생각의 일부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있는가 보다. 심리학자들은 부지중에 튀어나오는 실언들과 말더듬, 신체의 변화들이나 꿈이 그런 것들일 수 있다고 한다. 이제 무의식중에 하는 실언과 행동들, 궁금함에 털어놓는 꿈 이야기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같다.
자신을 다 드러내고 살 수는 없다. 말하지 않아도 사람이 동물에 속하니 크게 다를 리 없는 본능과 충동을 갖고 있고, 오십 보 백 보라 해도 서로 덮고 말하지 않는 게 덕스러울 때가 한두 번 일까. 본심을 다 드러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삐걱대고 살벌해질까. 자신의 마음이야 짐작할 수 있으니 흉악하고 저질스럽다 여겨도 다른 이들은 잘 닦여진 인격으로 선하고 고상하다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 재난을 만난 이웃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고 주머니를 여는 이들을 보면 짐작만 하던 것들을 확인하는 것 같아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진다.
가족들이 평소의 내 염려를 눈치 챘던지 내게 축하의 말들을 건넨다. 모두 아무 문제가 없어 좋고 특별히 내가 별 이상이 없어 더욱 기쁘단다. 약하게 태어난 걸게다. 작은 몸에 약한 부분이 많다. 그래선지 더 병원에 가기 싫다. 하늘로 가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고 병이 들더라도 그 증상이 드러나는 날까지 모르고 지내고 싶다. 큰 병을 예방하고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므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하는 게 건강검진이라지만 모르던 병을 알게 해 환자로 만들어 길고 힘겨운 투병의 길로 들게 할 것만 같다.
안을 보는 게 필요하다지만 가능하면 보고 싶지 않다. 오늘 내 안을 남은 보았지만 나는 보지 못하고 이상 없음만 들었다. 마음속 안을 들여다보는 거울은 영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내 마음이 꽤 검은가 보다.
⦁여신 아프로디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거품으로부터’라는 의미란다. 미(美)라는 것이 거품처럼 헛되다는 것일까. ‘수포(水泡)로 돌아갔다’, ‘물거품이 되었다’는 말에서 보듯이 헛것이라는 말 아닌가.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라 바다에 던졌더니 바다거품에서 생겨나 조개껍질 위에 떠올랐다는 아름다운 여신이다. 그녀가 나타나니 신의 세계에서 서로 아내로 삼으려고 눈독을 들이자 제우스는 가장 못생긴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아내가 되게 한다.
아름다운 이를 아내로 맞아 살아가는 이들은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한다. 헤파이스토스도 그랬다. 미모를 유혹하는 이들도 많고 자신의 바람기를 자제하기 어려워 아프로디테는 여러 신들과 숱한 염문을 뿌린다. 그 중에 남성다운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있다. 아프로디테의 아들이 분명한 에로스는 그 아버지가 헤르메스라는 설도 있고 아레스라는 말도 있다. 어쩌면 아레스의 아들이어서 사랑이 그렇게 격정적이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 에로스도 어머니 아프로디테처럼 남의 마음에 충동을 일으킨다. 태양신 아폴론에게 금빛 화살을 쏘아 다프네를 스토킹하게 하고 다프네에게는 납 화살을 쏘아 아폴론의 구애를 거절하게 한다. 그 일로 다프네는 월계수가 되고 아폴론은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시샘이 난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프시케에게 고통을 주려던 에로스는 실수로 금 화살에 자신이 찔려 프시케를 사랑하게 되고 언니들의 부추김을 받은 프시케의 의심으로 그들의 사랑은 종말을 맞는다. 갖은 고생을 통과하고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며느리가 된다. 의심이 있어서야 서로의 사랑이 지속될 수 있나. 그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몇 배 더 고통스런 노력이 필요하다. 이 에로스도 신이니 죽지 않아 지금도 돌아다니며 금빛 납빛 화살을 쏘아대고 있을 게다. 그 화살에 맞지 않으려고 조심을 해야 하나, 조심한다고 에로스의 장난기를 피할 수 있을까.
아프로디테는 신이니 늙지 않는다. 그러니 큰일이고 무척이나 심각하다.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나타나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가지라며 황금 사과 하나를 놓고 간다. 예쁘다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세 여신이 자기 것이라 우기다 제우스에게 갔다. 누구 편을 들기도 난처해져 제우스는 목동 파리스에게 떠넘긴다. 순진한 청년 파리스는 그들의 미모뿐 아니라 자신에게 베푸는 선물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권세를, 전쟁의 신 아테나는 전쟁의 승리를 약속하고, 아프로디테는 그녀답게 가장 예쁜 여인을 아내로 주겠다고 내건다. 삶의 경험과 지혜가 부족했나, 아니면 너무도 맑고 순수했나.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었고 그 약속은 유효해서 그리스 제일의 미녀 헬레네를 아내로 맞는다. 그 과정이 밋밋하고 순탄해서야 무슨 흥미가 있나.
당대 제일의 미녀 헬레네는 스파르타의 공주로 구혼자가 구름같이 몰려들고 결국 메넬라오스가 선택을 받는다. 아버지인 왕의 아들들이 모두 죽어 사위 메넬라오스는 왕, 헬레네는 왕비가 되었다. 그 때,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죄를 짓고 스파르타로 도피해온다.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둘 사이에 사랑의 불길을 일으켜 트로이로 도피시킨다. 헬레네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그리스 전체의 수치라 하며 그리스 전역의 군사들을 모아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트로이와 전쟁을 벌인다. 고대의 유명한 트로이전쟁이다. 10년을 끈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지략으로 목마작전에 의해 트로이가 승리한다. 아프로디테와 헬레네가 원인이 되어 10년 동안 수많은 영웅들이 죽어간 싸움, 아름다움과 애욕의 결과가 너무 엄청나다.
아프로디테가 늘 심술궂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녀 자신도 실수로 에로스의 화살에 찔려 아도니스를 사랑했으나 자신의 또 다른 연인 아레스에 의해 아도니스가 멧돼지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러니 그녀 자신도 마음에 아픈 상처를 갖게 되었다. 아레스와 애정행각을 펼치는 도중에 남편 헤파이스토스가 짜놓은 그물에 걸려 현장이 신들에게 공개되는 수치를 겪기도 했다. 이런 요란하고 복잡한 행태에도 남신들은 그녀를 미워하지 않고 연모했다.
아프로디테가 사랑에 굶주린 청년을 도와준 일도 있다. 키프로스에 살던 피그말리온이라는 청년 조각가는 여성들을 혐오했다. 오직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여인을 상아로 조각해 연인처럼 대하며 사랑을 쏟아 붓고 살았다. 조각 여인을 향한 사랑이 지극하여 아프로디테 신전에 찾아가 조각여인을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 기도를 들어주어 그들로 부부가 되게 하고 자녀도 낳게 했다.
조각을 인간이 되게 한 여신 아프로디테를 조각한 이들도 많았나 보다. 그 조각 중 하나를 밀로라는 섬에서 어느 농부가 발견해 〈루브르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그녀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1820년에 땅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15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니 근 2000년을 땅속에서 지낸 셈이다. 이제는 상반신을 벌거벗고 양팔은 잘린 채로 쉬지도 못하고 손님들을 맞고 있다. 어쩌면 평소의 그녀처럼 많은 이들 속에서 관심을 끄는 걸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그 조각상은 아프로디테의 겉모습을 조각했을 뿐이다. 지금도 그녀는 여신의 신분으로 세계화 물결을 타고 지구 곳곳을 누비며 사랑을 만들고, 즐거움을 뿌리며 다니고 있을 게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13. 사색의 둥지를 틀고
⦁공림사(公林寺)
푸른 하늘 아래 바람도 없이 고즈넉하다. 시간이 멈춘 듯, 산은 드문드문 흰 뼈를 드러내고 자락에 자리 한 몇 채 절집이 고요하다. 신앙이 닿아 있는 세계는 저 너머여서 시간과 무관하다. 가을 햇살과 바람, 풀과 나무들이 한가롭다. 포장된 도로와 회색건물을 벗어나 트인 하늘에 비스듬히 높은 산, 붉은 흙과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들이 상쾌하다.
시간 밖에 있는 신이 시간 안으로 들어와 인간들과 함께 거하며 진리를 설파하고 다시 시간 밖으로 돌아간다. 영원히 계시니 시간을 떠나 있음이다. 신이 머물던 곳, 신을 섬기는 곳은 이 땅, 시간 속에 남아 있어 낡아가고 전쟁에 불타기도 한다. 임진란엔지 한국동란 때인지 피해를 입었지만 오랜 세월 지난 후 한 스님의 헌신적인 수고로 다시 필요한 여러 건물들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 땅에 있어도 영원과 이어진 곳이니 사유(私有) 아니니 공(公)이겠지…. 절 마당을 돌아가니 오래된 비석 하나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고 서있다. 문장마다 깊은 뜻 담았겠지만 세월 흐르고 무지한 후손은 읽어내기 어렵다.
경내에 오래된 나무들이 여럿이다. 절 이름에 수풀 림(林)이 들어 있는 걸 헤아리면 초기에는 더 많은 나무들이 있었음직하다. 둘이 붙어 하나 된 나무도 있고 어떤 나무는 구백아흔 살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게 삼십 여년 전이니 이제는 넉넉히 천 년이 넘은 나무임에 분명하다. 천 년을 넘은 존재 앞에서 인간은 왜소하고 겸손해진다. 살아온 세월을 열 배 해도 이르지 못하는 고려 때부터 이 땅을 지켜온 나무다. 개나리 진달래 어우러지고 천둥치며 비 쏟아내고, 온 산 붉게 물들고 하얗게 눈 쌓이는 광경들을 천 번도 넘게 겪어온 게다. 긴 세월 세속의 물결이 이 곳 마당까지 넘실거리던 때도 있었을 게고, 국난에 모든 이들 근심에 싸인 풍경도 보았을 게다. 볼 것, 못 볼 것, 즐거운 일 궂은 일 거치며 한결같은 자세로 버텨왔을 터다.
비석 옆, 지방자치단체가 해놓았을 설명엔 공림사(公林寺)가 공림사(空林寺)로 되어있다. 아차, 하고 한눈파는 순간에 실수했나 보다. 텅 빈 듯 느껴지는 이 시절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곳곳에 자리한 은행나무 아래 계절을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내려와 수북이 싸인 금 잎들이 찬란하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때 묻지 않고 수려하다. 누가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을 한다한들 저렇게 순수하고 고울 수 있으랴. 고운 그들도 세월과 함께 추레해지고 흙으로 돌아가 마침내 또 다른 후손의 밑거름이 되리라.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했으니 서로 다른 게 아닐 게다. 찬란한 금빛이나 텅 빈 허공이나 한 가지리라.
너른 산에 나무가 있으면 바위도 있어야지. 절 배경이 되어준 낙영산(落影山) 자체가 바위산이다. 맹금류 등[背]에 드문드문 난 흰 깃털처럼 나무 하나 허락하지 않는 꼿꼿한 자세로 가파른 암벽을 보여주고 있다. 그 산 기운이 자락까지 온 것인지 경내 곳곳에 커다란 바위가 터 잡았고 사이좋게 나무들과 언덕이며 마당가를 나누고 있다.
경내를 벗어나 거대한 바위 하나 압도하고 서있어 다가가 바라보니 개구리 형상이다. 절 사람들도 비슷하게 보았는지 둘레를 파놓아 못처럼 물이 고였다. 개구리를 아무리 미물(微物)이라 해도 사람 수십 명 합친 덩치니 거물(巨物)이다. 많은 이들이 찾아보는 명물이 되고 조금 더 나아가면 다급한 이들이 석대와(石大蛙)에게 소원을 빌지도 모르겠다.
절이 얼마나 너른지는 모른다. 절을 사(寺)라 하니 땅[土]이 조금[寸] 있으면 족할 듯하나 꼭 그렇지는 않다. 여러 집[殿]을 지어야 하고 수도할 곳이 필요하고 기거할 곳도 있어야 하니 점점 커져간다. 여러 면으로 은덕을 입은 이들이 희사도 해서 세월과 함께 늘어나기도 하리라. 종교마다 빠뜨리지 않고 강조하는 게 청빈이다. 구도자들이 청빈하고 시설도 간략한 것이 좋지 않을까. 지난날 종교가 강성했던 곳에 대규모 시설물들이 전해져 온다. 그 웅장 거대함과 어느 정도 비례해서 그곳에 속한 구도자들이 힘을 가지면 지역민의 원성도 커져간다. 기독교와 불교의 구도자들이 탁발(托鉢)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재물의 유혹에 대한 강한 경고였으리라.
나무들이 잎들을 떨구고 가벼워지듯이, 얽매이지 않음이 자유로움이듯이, 그런 의미의 공(公) 혹은 비석 옆 설명처럼 공(空)의 정신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나 자신이 부름 받은 길을 가는 구도적 신앙인으로 개인의 무능에 기댄바 크지만 청빈을 지키며 초심(初心)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산다.
피안(彼岸)의 향기가 머무는 땅에만 머물 순 없다. 개구리바위를 지나니 잎이 시든 연(蓮)못이 있다. 진흙탕 속에서 핀다는 연꽃, 물을 받아들이지 않아 구슬처럼 토해내는 연잎…,
고요와 적막 속에 자신을 돌아본 이들이 이제 흙먼지 가득한 세상으로 돌아간다. 이슬처럼 영롱한 언행을 보여줄 각오로, 스스로는 가난해지고 타인들을 살찌울 결심으로 살아가리라. 은행나무의 금빛보다 진한 단풍나무 붉은 잎들의 단단(丹丹)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배웅을 받으며 총총히 공림사(公林寺)를 떠난다.
⦁구름둥지
‘구름으로 된 새들의 둥지’를 보러 간다. 큰 길이 끝나고 차 두 대가 겨우 비켜 갈만한 길을 조금 따라가니 일(一)자로 펼쳐진 긴 행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 향해 솟은 나무 위 둥지를 늘여 눕혀 놓았을까. 구름이 무심히 산봉우리 돌아 나오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쉴 곳을 아네. 공중곡예를 하는 이들을 위한 발아래 그물, 산을 오르는 이들의 목마름을 배려하는 약수터처럼 그곳에 운조루(雲鳥樓)가 있었다.
솟을 대문 지나니 저만치에 당당한 사랑채가 있다. 집 떠나 먼 길 가는 선비는 긴장과 불안으로 하인들을 불렀을 게다. 또 주인은 넉넉한 마음으로 먹이고 재우고 함께 한 잔 술 기울였으리니 어찌 피곤한 과객에게 구름둥지 아니었으랴. 사랑채끝 봉당에는‘타인능해(他人能解)’라 쓰인 두 가마 반들이 쌀뒤주가 놓여있다. 마을주민 가운데 어려워 끼니를 잇지 못할 형편이면 남의 눈에 안 띄게 접근해 뒤주 마개를 열고 두 되쯤 받아갈 수 있었단다. 그때에는 어려운 이들이 쉽게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봉당이 아닌 곳에 있었다고 한다. 내 삶이 바닥에 닿았을 때, 잠시나마 기댈 곳이 있다는 게, 힘겨운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을까. 운조루의 주인 유이주 가문은 동학난과 일제치하, 여순반란과 한국동란을 거치며 많은 사대부가문이 겪었던 모진 풍파를 피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은혜를 입은 이들이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 것이리라.
경상도에서 삼백여 년 부를 이어온 가문의 가훈 중 하나가“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였다고 한다. 이들과 운조루 사람들은 부자면서 지역의 어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직장을 얻지 못해 어려워하고 미래를 불안해한다. 힘겨워하는 이들의 고통을 적게나마 함께 나누어 질 이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춥고 배고픈 삶의 바닥에서 잠시 기댈 구름둥지를 찾기 어렵다. 땅을 기반으로 한 마을에서 살아가던 이들은 모두가 커다란 한 가족이었다. 많이는 혈족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아도 함께 사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정 형편을 웬만큼은 알고 있어서 어려운 집 굴뚝에 밥 짓는 연기가 제 때 오르는가를 살필 수 있었다. 어느 집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듯싶으면 동병상련이라고 형편이 조금 나은 동료가 챙기거나 마음이 넉넉한 부자가 있다면 사정을 알려 도왔을 게다.
어려운 사람은 운조루의 쌀뒤주 같이 고마운 곳에서 도움을 얻을 수도 있었고 ‘마당 쓸기’라는 풍습에 기댈 수도 있었다. 날이 밝기 전 형편이 넉넉한 양반집을 찾아가 마당을 깨끗이 쓸면, 형편이 다급하니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사정을 안 주인은 다급한 이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마당 쓴 값으로 푼푼하게 양식을 주곤 했던 것이다. 어느 소설에서 본 듯하다. 끼니를 잇지 못하는 마을 주민이 양반집 곳간에 들어가 쌀을 훔치다 현장에서 발각 되었다. 바깥주인은 죽고 안주인이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했는데 그 여인은 모든 이들을 내보내고 그 사람과 마주 섰다.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지고갈 수 있을 만큼 쌀을 가져가게 하고는 그 일을 재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은혜를 입은 이는 평생 잊지 못하고 그 안주인께 잘 했음은 물론이다.
운조루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펼침막 두어 장을 보았다. 서기관 승진을 축하하는 것과 지역 기관장으로 취임하는 이를 경축하는 내용이다. 그걸 내건 이들은 그 지역 주민 일동이었다. 대도시인들이 보면 그리 자랑스레 내걸 일이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다. 내가 뜻 깊게 생각하는 건 삶의 감정이 출렁일 때에 함께 할 이들이 있다는 게다. 자랑스러워 축하받고 싶을 때 그걸 알아주고 같이 기뻐하고, 슬프고 힘겨울 때 함께 아파해 줄 이들이 곁에 있다는 게 커다란 복이다. 위기의 순간에 아무도 주변에 없고 기댈 곳이 전혀 없으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 때가 지친 새에게 구름 둥지가 필요한 순간이다. 경제적 도움이 아니라도 이야기를 들어주고 응원해 주고 함께 감정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따스한 구름둥지가 될 게다.
상류층 사람들은 하는 일이 잘못되어도 다시 일어날 기회가 있고 위험을 분담할 이들이 있다. 학교 동창들과 직업과 취미로 연결된 이들, 친인척이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 정작 이런 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건 하층부를 이루는 어려운 사람들인데 이들을 돕고 응원 해줄 이들이 적다. 충격을 완화하고 흡수할 장치가 없으니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 삶은 그대로 위기에 노출되어 커다란 좌절을 겪는다. 삶의 바닥에서 만나는 매서운 추위는 홀로 감당하기에 너무 버겁다. 이 때는 누군가 손만 잡아주어도 가슴이 훈훈해지고 힘이 날 텐데….
옛적에 누군가 “태어남은 조각구름 하나 일어남이요, 죽음은 그 구름이 사라짐이라”했다. 삶이 하나의 조각구름이라면 같은 시대와 장소를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모여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는 뭉게구름을 이루자. 머지않아 사라질 구름이라면 잠간이라도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지친 새들이 쉬어가는 구름둥지가 될 일이다. 누군들 눈비오고 바람 부는 이 땅에 긴 세월 살면서 지치는 순간이 오지 않으랴. 모진 바람 불고 지친 날개 힘겨울 때에 한 순간 쉬어갈 구름둥지를 만나면 어찌 반갑고 기쁘지 않으랴. 붉은 석양에 둥지 모양 구름들이 한결 따사롭게 빛난다.
⦁살구꽃 벚꽃은 피었다지고
흐드러지게 피었던 무심천 벚꽃이 졌다. 가경천에는 살구꽃이 지고 나무마다 윤기 나는 녹색 잎들을 한 가득씩 품고 있다. 희끗희끗한 잔설과 흐린 하늘 아래 찬바람이 쏘다니던 길가에 거뭇거뭇 서있던 앙상한 나무들이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계절은 벌써 늦봄은 지나는 듯하다. 올해는 감기를 앓느라 살구꽃도 벚꽃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지난 달 말일쯤, 목소리에 비음이 섞이고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오랜 경험으로 감기가 내 몸의 경계선을 막 통과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뚜렷한 이유 없이 병원을 크게 신뢰하지 않고 여간해선 가지 않는다. 가족들의 예로 보아 일상적인 것으로는 비용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 치료를 받으면 고생을 덜 한다는 것을 알면서 몸이 쉽게 따라 주지 않는다. ‘감기는 병원가면 일주일, 안 가면 칠일’이라고 누군가 하던 말이 늘 뇌리에 남아 웬만하면 참고 견딘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으면 약국에 가 약이나 지어 먹고 버틴다. 내가 생각해도 현명하지 못하고 미련한 방법이다. 오래 전에는 감기가 쉬 낫지 않고 중이염으로 진행되어 한동안 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의 병원에 가보라는 조언에 쉽게 짜증이 난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나도 감기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딱히 그 말 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래도 그 말을 들으면 조금은 무성의한 것 같고 깊은 애정이 담기지 않은 조언인 듯하다.
내가 앓은 감기는 만만치 않았다. 처음 사나흘은 전형적인 몸살감기 환자로 자리에 누워 끙끙거리며 앓았다. 대개는 그것으로 털고 일어날 수 있었는데, 이번 감기는 독하고 끈질겼다. 다 나은 줄 알고 약을 먹지 않으면 다시 코가 맹맹하고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서둘러 콧물감기 약을 먹으니 다시 증세가 없어졌다. 이렇게 하기를 서너 번 되풀이 하면서 보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사이에 가경천 살구꽃, 무심천 벚꽃이 내 사정을 봐주지 않고 피고 또 졌다.
몇 군데 가야할 곳이 있었지만 기침이 나고 어지러우니 쉬기만 했다. 내 딴에는 기침도 거슬리고, 다른 이들에게 전염의 불안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내 삶의 방식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병원에도 잘만 다니는데 나는 왜 잘 되지 않는 것일까. 안일함과 막연한 낙관의식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그냥 잘 되겠지’하는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보름가까이 환절기 감기로 힘겨워하는 나를 챙기느라 고생하는 아내를 보면서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 감기로 열이 높을 때에는 어머니가 찬 물수건으로 깊은 밤까지 이마를 식혀 주었다. 그 때는 부모님도 병원으로 아들을 데려가기가 두려웠을지 모른다. 고생하는 막내가 가여웠든지 무엇을 먹고 싶은가를 묻고는 마른 오징어나 생선 혹은 떡을 사다 주시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먹고 나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힘을 얻어 털고 일어나곤 했다.
상태가 위중하고 심각하면 대처가 다를 텐데, 아무래도 견디고 참을 만하니 병원에 안가고 버티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사는 것이 버릇이 들어 병원에 가려면 긴장되고 어색한데다 무슨 긴 치료의 터널로 끌려들어 가는 입구를 내 발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몇 달 전부터 한쪽 어깨가 불편하다. 주변 사람들이 여러 번 병원 가보라고 하는 것을 듣지 않아서 더 이상 아픈 티도 못 내고 혼자서 고생을 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니 덜한 것도 같고, 어느 면은 더 심해진 듯도 하다. 특정한 자세를 취하려 하면 은근하게 당기기도 하고, 참기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오기도 한다. 전에 겪은 오십견과 비슷하다. 언제 한번 병원에 가야지 하면서도 이런 때는 무슨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몸에 불편함을 느끼면서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알았다. 감기를 길게 앓아보니 다른 일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다. 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하루에 스물네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건강할 때, 할 수 있을 때, 미루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어른들이 편치 않다고 하실 때 말 한 마디라도 따듯하게 해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누군들 다른 이의 아픔을 대신할 수 있을까. 누군들 자신이 겪어보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연세 드신 분들이 감기를 두려워하고 환절기를 걱정하는 것이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된다.
감기를 앓는 사이, 꽃피는 계절의 한 부분이 지나가니 아쉬움이 적지 않다.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고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많은 것의 근본이 건강에 있었다. 살구꽃과 벚꽃이 피고 지는 시절은 놓쳤지만 앞으로 다가올 많은 계절들이 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그 순간들을 맞이하고 싶다. 아직도 가끔 기침이 난다.
⦁서가에 놓인 문진(文鎭)
전화기를 열어보니‘카톡방’에,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로부터 초대되었습니다. 이 사용자를 신고하시려면 이 링크를 눌러주세요.”하는 문자 화면이 눈에 띈다. 내 이름과 함께 초대한다는 문구가 있다. 신학교 1기 단체 카톡방이다. 이런 기능을 쓰기는 하는데 묻는 것에 답만 하다 보니 어떻게 여는 건지 잘 모른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물어보자 생각하고 지내다 열흘이 넘어갔다. 자세히 보니 화면 맨 아래 문자 쓰는 곳이 열려 있다.
“반갑습니다. 전 조용히 숨만 쉬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적어두었다. 분명치 않은 한자 어휘를 찾으려 손전화를 열었더니 몇 개의 토막글들이 동기들의 안부를 나에게 전하고 있다. 글들을 읽으며 내 서가에 오도카니 자리하고 있는 문진(文鎭)을 바라본다. 서진(書鎭)이라고도 한다는데 한 해 후배들이 졸업선물로 해 준 거다. 스물네 명의 이름이 정답게 모여 있다. 그 중에 한두 해 먼저 학사 편입해 공부하다 졸업을 같이 한 이들이 있어 순수하게 입학부터 졸업까지를 함께 한 이들은 열다섯이다. 세 명은 벌써 하늘로 가고 세 명은 연락이 안 되고, 둘은 외국에 나가 있어 일곱이 이 땅에 남아 있다. 함께 졸업한 이들과 열 사람 남짓이 소식을 주고받는 듯하다. 문진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은 내 생각과 달리 서둘러 그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아담한 학교와 몇 채의 건물, 많지 않은 학생들, 소수의 교수진들과 잘 가꿔진 이곳저곳의 모습들이 내 이십대 중반을 어루만지기에 적당했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나이어린 학생들과는 다른 기대를 가지고 대했다. 이른바 산전수전 다 겪은 다양한 경력을 지닌 우리가, 침체된 공동체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동기들은 대학의 신문 편집장과 교련 교관, 예비군 대대장을 하면서 그런대로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챙기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닷새를 공부하려면 생업을 포기해야 했다. 대부분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한창 경제활동에 전념할 시기에 다시 학생이 되었으니 쉬울 리 없었다. 수년간의 갈등과 번민을 거쳐 늦은 나이에 특별한 일을 위해 모인 사람들, 모두 생각과 행동이 다르고 독특했다. 많은 이들은 나를 비롯한 어린 동기들을 젊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워했다. 그분께 구석으로 몰리고, 깨닫기까지 어려움을 당하다 김장배추처럼 절여져 항복하고 온 사람들, 그 효력이 한 학기는 지속되었다.
두 번째 학기가 되자 환경에 그런대로 적응이 되어, 개인의 성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몇 되지 않는 이들도 공감대를 따라 자연스레 노장과 소장으로 나뉘어졌다. 젊은이들은 좀 더 단순했고 열정이 있었다. 대부분이 기숙사생활을 해, 함께 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젊음과 가난과 고민을 찬양과 기도로 넘겼다. 군대를 마치고 온 이들은 사명을 따라 진로문제로 직접 뛰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또 한 친구는 군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미래와 연결된 실제적인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젊은이들은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준비된 것은 없고 현재가 불안한 이들이 동지의식을 갖기는 쉬웠다. 현실문제에 부딪혀 흔들리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외부에서 후원이 있으면 한 사람이 받아도 자발적으로 나누어 사용했다. 서로가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의무감도 없었지만 자연스레 그렇게 했다. 함께 같은 곳을 방문하고 서로의 생활을 챙기고 상대를 배려했다. 미래에의 꿈은 푸르고 이상도 높았다. 신학교의 삼 년, 여섯 학기는 빠르게 흘렀다. 서로의 일터를 찾아 흩어지니 만나기가 쉽지 않다. 현장에서 살아가기 위해 바쁘게 살다보니 어느덧 자녀들이 자라나 그때의 내 나이를 훨씬 넘고 있다.
삼십여 년의 세월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후배들이 여기저기서 맹렬히 활약하고 있다. 그동안에 이 땅의 사역을 모두 마치고 하늘에 가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남은 이들은 맡겨진 곳에서 자신의 일들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동기들에게 내 근황을 알리면서 불비불명(不飛不鳴)하며 지내고 있다고 하고 싶었다.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는 것은 맞지만 그 뒷일을 감당할 수 없어 쓰지 못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나. 이제는 내가 가진 능력을 과신(過信)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애달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내 시간과 노력을 쏟고 싶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 주눅 들고 싶지 않고, 내 눈과 귀를 그들에게가 아니라 내 스스로 정한 일에 고정시키기를 원한다.
“백세시대”라 하니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내게 남아 있다. 이제까지가 준비였다 한들 문제될 게 무언가. 눈치 볼 일, 부담스런 일이 많이 줄었다. 한눈팔지 않으면 적잖은 거리를 갈 수 있을 게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에 현재의 상황이 최적화되어 있다고 믿고 싶다. 내 자신에게 목표를 정해 주고 스스로 상과 벌로 채찍질하며 오랫동안 조금씩 가고 싶다. 문진 맨 끝자리에 새겨진 내 이름을 가만히 바라본다. 문진도 나를 바라보고 “잘할 수 있어요 주인님”하고 미소 지으며 격려하는 듯하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알고 지내는 이의 아들이, 얼굴의 여드름 흉터를 지우기 위해 수술을 한단다. 취직을 하려면 면접도 적지 않고, 어떤 일이든 대인관계를 무시할 수 없으니 그 고민을 모를 바도 아니다. 남성화장품도 호황을 누린다고 하고 화장의 연령이 초등학생까지 낮아졌다니 판단이 쉽지 않다. 우리사회의 날씬해지기 열풍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예뻐지려는 것이 다수의 욕망을 넘어 시대적 열망이 되었다.
왜 아름다워지려는 것인가. 다른 이들의 시각을 장악해 어쩌려는 것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것에 끌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예술의 목적이 진선미(眞善美)의 추구에 있다면 아름다움은 권장해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지나쳐 한 방향으로 현격히 기울어져 있다는 게다. 우리사회가 하나가 되어 외모지상주의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비극이다. 육체적 아름다움이 모든 것인 양 평가하고 그 밖의 의미 있는 많은 요소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외적인 아름다움이 경쟁력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불공평하다.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부모에 의해,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면이 많다. 20대 후반까지의 신장 피부 미모 몸매는, 물려받고 타고 난 것이라 하겠다. 큰 키에 희고 투명한 피부, 부러워할만한 몸매와 외모가 정말로 좋기만 한 축복인가를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간의 시각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산과 강, 나무로 상징되는 자연뿐 아니라 동식물 모두에게서 예쁜 모습을 찾기 원한다. 시장에 가보면 채소와 과일이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고 탐스러우며 먹음직스러운지 감탄하게 된다. 집에서 재배해보면 그렇게 수확하기가 쉽지 않다. 상품가치를 높이려고 특별한 처리를 했음직하다.
온 세상이 지나치게 인간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인간이 숱한 생명체 중 하나지만 스스로 깨닫고 겸허해지기 전에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망상(妄想)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아름다움을 향한 욕구는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리스ㆍ로마 신화에도 불화의 여신이 초대받지 못한 결혼식에 찾아와 “제일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기록한 사과 하나를 던지고 간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서로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다가 양치기 파리스에게 판결을 부탁하고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다. 여신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 왕비 헬레네와 파리스는 사랑에 빠지고, 그 사건으로 무려 10년 동안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트로이 전쟁이 벌어진다. 철저히 아름다움으로 시작해서 아름다움으로 망가진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끈질기게 되풀이 되는 사건들이다.
동화와 신화, 심지어 만화까지 아름다움의 추구는 맹목(盲目)에 가깝다. 그들의 마지막이 모두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시기와 다툼의 원인이 되고 혼란에 빠져 모두가 파국으로 치달아,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역사에 빼어난 미인들은 흔히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그들에게 평온한 삶이 허락되기는 어려운가 보다. 타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된다면 차라리 아름다움과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할 순 없을까.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워 자신이 세운 목표를 긴 세월 묵묵히 좇아가 그 분야에서 우뚝 설 수 있다면, 오히려 남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하면 억지이려나?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의 아내 황씨는 학식이 대단하나 박색(薄色)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고대소설인 박씨전에 등장하는 주인공 박씨 부인도 재주는 비상하나 무척 박색이었다. 우리 민족의 착한 성품은 박씨 부인의 외모를 끝까지 끌고 가지 못하고 허물을 벗겨 천하일색으로 변신시킨다.
우리 사회가 지나친 신체적 아름다움의 추구로 기울어져 있다.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결국 우리 모두의 책임이지 싶다. 이 시대의 사상의 깊이가 얕다는 반증은 아닐까. 현시대 문화의 찰나적이고 표피적인 특성들을 여러 면에서 언뜻언뜻 본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전통을 가졌다는 우리다. 긴 역사에서 어느 순간 휘청거렸던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힘을 모아 지혜롭게 극복해왔다.
일대 대오각성(大悟覺醒)이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는 느낌이다. 남들의 칭송에 마음 뺏기지 말고 내실을 단단히 다지는 기풍이 일었으면 좋겠다. 육체적 아름다움보다 자신의 분야에서의 실력을 더 인정하자는 거다. 정말 아름다운 이들은 자신의 일에 혼신을 다해 몰입하는 이들이 아닐까.
나 스스로 주변 사람들을 신체적 감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려는 잣대를 내려놓고 그들을 대하는 깊이 있는 안목을 길러야겠다.
⦁책을 덮으며
자서전을 끝낸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 삶은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다. 인생을 제대로 달리기 위해 긴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군대를 제대하니 내 나이 서른셋이었다. 백세시대라 하는데 삶에서 내 하고 싶은 일을 육십여 년 한다고 치면 이제 삼십년 했으니 정확히 반을 한 셈이다.
내 글과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얼마나 소시민으로 변두리에서 유야무야하게 살아왔는지가 보인다. 그것이 내 삶의 자리니 참 편했고 좋았다. 후회는 없다. 동기들이 현직에서 은퇴를 하고 있다. 인생 일 막이 끝난 겻이다. 지금까지는 가정과 사회를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는 즐거움과 은총의 시기이다.
벌써 버킷리스트를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펼쳐진 앞길이 창창하고 하고자 하는 일에 장애물은 많지 않다. 체력이 달린다할 처지도 아니고 시간이 부족하지도 않다. 원하는 일 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없으니 한 없이 몰입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들은 꼽아온 것만 해도 서너 가지는 되니 싫증날 일이 없다.
나이 들어 내가 더욱 감사한 일을 찾았으니 전혀 내게 맞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몸을 써서 하는 일, 춤 노래 여행 운전 운동 같은 잡기에 아주 재주가 없다는 게다. 전에는 그것 때문에 열등감도 느끼고 어려움도 겪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내 것이 아닌 곳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내게 특별 배려를 해 주신 셈이다. 어떤 일을 함께 하자고 불러내는 이가 없으니 관리만 잘 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이 적지 않다.
앞으로의 삶도 현재하는 일의 범위를 크게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마음 가는 분야의 책들을 읽고 짧은 느낌들을 적어갈 것이다. 한자와 영어에 애정을 쏟아 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정을 돈독히 하여 그들을 통한 내 세계의 확대를 이루고 싶다. 내가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매여 있어야 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할 공간이 성경이니 그 행간을 읽고 함께 나누는 일도 얼마나 내 삶을 즐겁게 할지 큰 기대가 된다.
삶에서 얻는 희로애락과 감동과 깨달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반짝이는 삶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수필쓰기를 멈춘다는 것은 고통이다. 이것들 외에도 가끔 몸과 마음을 식히기 위해 산책도 하고 함께 늙어가는 목회자들과 더러는 담소도 해야 하니 한가할 수는 없겠다. 그래도 대부분 내 혼자 하는 일들이니 어떻게 지내느냐는 말에는 항상 한가히 지낸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런 기회를 마련하고 세심히 돌보아 주신 김혜경 교수님께 고마움과 함께 존경을 표합니다. 내겐 아직도 할 일이 무척 많다. 참 행복하다.
2020년 12월
변두리 최한식